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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19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경북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된 이종암 의사의 재판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출처: 동아디지털아카이브〉 |
대한민국이 광복 80주년을 맞았다. 광복 시점부터 지역과 함께해 온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로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 12명을 월별로 1명씩 조명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독립운동가는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이종암(1896~1930) 의사다. 대구은행(1913년 설립된 민족계 지방은행으로, iM뱅크 전신인 대구은행과는 다름) 직원에서 '투사'가 된 인물이다. 그의 후손과 함께 그가 지역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봤다.
◆은행원 출신 독립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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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 이종암은 18세(1914년)에 대구은행에 취직했다. 학비가 없어 1년 만에 중퇴한 부산상고 재학 이력이 전부였다. 당시 은행장이었던 고모부 도움으로 은행원이 됐다. 입사 1년 만에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했다.
1917년 12월 토요일. 그는 큰일을 냈다. 마감 시간이 5분 지나 한 상인이 1만여원(현 시세 10억여원)을 입금하려고 은행을 찾았다. 이종암은 황급히 돈을 보자기에 싼 뒤 이를 들고 잠적했다. 미국 유학도 생각했지만, 중국 만주로 향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1918년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10일엔 의열단이 구성됐다. 이종암 등 신흥무관학교 생도 10여 명이 중심이 됐다.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사서 거사를 준비했다. 대구은행에서 갖고 간 돈이 의열단 창단 및 활동자금으로 쓰인 셈.
이후 이종암은 수많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창단 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3곳을 겨냥한 1차 거사는 실패했다. 그는 이때 귀국해 '밀양 경찰서 폭파' 계획을 세웠다. 비록 사상자를 내진 못했지만, 경찰서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의열단은 1922년 3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중국 상해에 다나카 기이치 일본 육군대장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 의열단은 즉시 암살 계획을 세웠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이종암은 폭탄을 던져 다나카가 타고가던 자동차 앞바퀴를 맞추는 데 성공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수많은 동료가 투옥되자 혼자 거사를 치르기로 한 이종암은 일본 도쿄 폭파를 결심했다. 각기병을 앓고 있던 그의 몸은 온전치 않았다. 그래도 그는 고향 대구로 돌아와 군자금을 마련, '마지막 투쟁'을 준비했다. 이 계획은 실행되기도 전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5년 11월5일 경북경찰부의 급습으로 체포됐다.
당시 언론은 재판장에 선 이종암의 모습을 '침착하고 늠름했다'고 묘사했다. 그간 벌인 모든 독립운동을 인정한 그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이 일제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을 불가불 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며 따졌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징역 13년으로 감형받는다. 고문 후유증에다 위장·폐·인후병이 겹치며 병세가 악화했다. 1930년 5월19일 이종암은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대구에 있는 친형 집에서 10일가량 머물다 35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대구은행 다니다 거금 챙겨 만주로
의열단 창단 참여하고 거사 이끌어
대구서 마지막 투쟁 준비하다 체포
재판에선 독립운동 당위성 역설도
고문·옥고·병세 여파 35세에 순국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안장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는 어록비
◆후손 "비석이라도 남기고 싶어"
이종암의 손자 이정근(80)씨는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학창시절 어머니와 대구에 있던 친척들이 제공한 물품을 부산에 팔아 생계를 겨우 유지했다. 당시 아버지는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이씨는 "다른 사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가정 형편과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이 별개의 일인 것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엔 시기적 사명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할아버지 노력은 정치적 목적 또는 독립 운동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이씨는 본인이 생을 마감하기 전 대구에 자그마한 비석 하나를 설치하고픈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묘소와 충남 천안 독립운동기념관에 있는 어록비로도 나라가 충분히 배려를 해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할아버지 본적이자, 어린 시절과 마지막 시절을 보내신 대구에는 작게나마 비석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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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남산동 일대 이종암 의사의 친형 이종윤이 살았던 집에 '이종암 생가터'라는 표식이 적혀있다. 이 의사가 순국하기 전 잠깐 머물렀던 곳이다. 박영민기자 |
◆대구에 있는 이종암의 흔적
26일 오후 1시쯤 방문한 대구 중구 남산동 일대. 낡은 고택이 늘어서 있다. 이 중 한 집 앞에 '이종암 생가터'라는 표식이 있었다. 문틈 사이 보인 집 내부엔 폐지가 쌓여있었다. 문짝은 뜯겨 있었다. 주인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표식에는 이종암을 '1920년대 많은 항일 투쟁을 벌인 대구 대표 독립운동가'라고 적혀 있었다.
사실 이 곳은 실제 이종암이 태어난 생가터는 아니다. 복수의 기록과 손자 이정근씨에 따르면 이종암은 팔공산 인근인 동구 공산동에서 태어났다. 남산동은 이종암이 순국하기 전 잠깐 머물던 친형 이종윤의 집이다.
그러나 이곳을 제외하면 대구에서 이종암 선생을 기릴 만한 장소는 딱히 없는 실정이다. 기념시설은 물론, 동상·비석·묘도 없다. 이종암이 근무한 중구 옛 대구은행 터도 이젠 아파트 재개발로 사라진지 오래다.
'소설 의열단'의 저자 정만진씨는 자신의 소설에 이종암을 가장 먼저 등장시킬 정도로 이종암에 대한 애착이 많다. 또 책 표지에 의열단원 4명 흉상을 배치했고 그 중앙엔 이종암의 동생 이종범이 쓴 책 '이종암 전기' 사진을 실었다. 정만진은 "다른 밀양 출신 의열단원은 의열기념관에 흉상이 있는데, 대구엔 이종암 선생을 알릴만한 게 단 하나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책 표지를 그렇게 제작했다"고 했다.
박영민기자 ympark@yeongnam.com
▨ 독립운동가 12인 선정 자문위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
△김일수 경운대 교수
△강윤정 안동대 교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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