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보다는 타협…말 위에선 천하를 얻어도 다스릴 순 없다"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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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1-02  |  수정 2025-02-25 07:36  |  발행일 2025-01-02 제4면
정치 부재의 시대, 한국형 정치철학을 묻다 〈1〉 표광민 경북대 교수

폭력보다는 타협…말 위에선 천하를 얻어도 다스릴 순 없다


2017년 6월. 기자는 취재차 독일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다. 그 해 대한민국엔 대통령 탄핵이 있었다. 절망과 희망,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며 모든 것이 뒤엉켰다. 점점 심화된 진영논리는 작은 희망마저 뒤덮어 버렸다. 


당시 베를린에서 동독의 마지막 총리이자 독일 통일의 산증인인 한스 모드로 전 총리를 만났다. 인터뷰 후 한국에서 사 온 작은 전통 탈을 선물하자 모드로 전 총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탈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며, 때론 격렬하게 논쟁할 수 있지만 인간에겐 '공동 과제' 같은 게 있을지 모른다. '모두가 더 많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2024년 우리는 다시 한번 정치·사회적 대혼란을 마주했다. 정치가 준 환멸과 상처가 너무 크고, 곳곳이 폐허가 된 듯하다. 대한민국 정치는 다시 품격을 찾을 수 있을까. 희망도 말할 수 있을까. 표광민 경북대 교수(일반사회교육과)에게 그 해법을 물어봤다.

대립·논쟁 당연한 정치현상이지만
상대 진영 비하하며 상처주기 우려
적-동지 '이분법적 시각' 팽배하면
정치적 공간은 전쟁터가 되고 말아



폭력보다는 타협…말 위에선 천하를 얻어도 다스릴 순 없다
지난해 12월24일 경북대 대구캠퍼스 사범관에서 표광민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가 '한국형 정치 철학'을 주제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

▶2024년 연말은 비상계엄 선포, 대통령 탄핵안 가결 등 정치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번 사태로 정치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됐다. 흔히 정치나 정치권력은 폭력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폭력만으로 정치가 성립될 순 없다. 옛날 한고조 유방에게 신하였던 육가가 이렇게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 군주가 다스리던 시대에도, 폭력으로 나라를 차지할 순 있어도, 폭력만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는 없다는 게 진리였던 셈이다. 하물며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더더욱 폭력이 아닌 대화와 소통, 타협과 양보가 정치의 중심이 되고 있다.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폭력이 지배하면 대화가 사라지게 되고, 정치가 소멸한다고 했다. 이번 비상계엄에선 여러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요소들이 많아 보인다. 이번 계엄 선포는 우리가 정해놓은 헌법과 법률 테두리를 넘어서서, 국가의 폭력이 대화와 논쟁의 정치공간에 침투하려 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여야 불소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논쟁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다만 정당들 사이에 또 그 지지자들 사이에 서로를 적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는 건 우려할 만하다. 요즘은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상대 진영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많다. 이런 용어 사용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간 적대감을 키울 뿐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칼 슈미트는 히틀러에게 부역하던 '이데올로그(이론적 지도자나 공론가)'라는 평가도 있다. 당대에 헤르만 헬러라는 법학자는 슈미트를 비판하면서 정치를 적과 동지로 구분하게 되면, 정치는 전쟁터가 되고 만다고 경고한 바 있다. 정치는 전쟁터가 아니고, 다른 정당과 그 지지자들도 적이 아니다. 그냥 의견이 다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역사 혹은 철학을 통해 정치적 인사이트(통찰력)를 얻을 수 는 없는가.

"정치적 대립과 논쟁은 정치의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 논쟁들이 답답하고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논쟁과 대립을 수반한다는 점이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이자 한계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어렵고 귀찮기 때문에, 이 정치의 과정을 폭력을 통해서 단숨에 해결하려는 일들도 벌어지게 된다. 폭력을 사용하면 정치는 파괴된다. 상대를 대화와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적으로 바라볼 때 정치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수립한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은 '공포정치'로 귀결됐다는 한계를 지닌다. 혁명을 성공시킨 혁명가들이 대화를 통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혁명의 적을 찾아다니며 서로를 죽고 죽이는 공포정치가 등장하고 말았다. 그 결과 혁명으로 자유를 쟁취했던 프랑스 시민들은 다시 나폴레옹의 황제 통치를 선택한 점에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보지 말고, 한 공동체의 같은 구성원으로 존중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정치 불신 현상'에 대한 원인과 해법은.

"정치불신은 우리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정치불신에 따른 포퓰리즘이 인종차별이나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을 탄생시키면서 이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즉 사회 발전에 발맞추지 못하고 좌절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은 정치불신으로 이어진다. 정치불신 극복 여부는 이렇게 좌절한 개인들의 삶을 어떻게 우리가 복구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결국 정치의 본질적인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이 역할을 수행하려면 '정치가 개인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그 결과로 국민이 삶의 안정을 찾을 때에만, 정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날 것 같다."

▶한국형 정치철학이 자리잡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정치 구조적, 정치 문화적 장애물이 있다면.

"한국은 굉장히 빠르게 성장했다. 100년 전에는 식민지 상태였고, 이후에는 대규모 전쟁까지 겪었다. 지금은 세계 10위권 선진국이 됐다. 제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하며 생활을 했었지만, 생활의 편리함 등을 보면 한국이 더 선진국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그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하다 보니 지금 우리 사회에는 세대 갈등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한국엔 후진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진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선진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가치관·세계관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함께 살기 위해선 세대별로 다른 입장들, 가치관들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 세대갈등을 극복하고 상호존중의 자세를 갖는 게 큰 과제일 것 같다."

삶 개선에 도움된다는 믿음을 줘야
국민의 정치불신 해소할 수 있을 것
세대별로 가치관 다를 수밖에 없어
젊은층 민주주의 존중 자세 긍정적


▶세대론에 입각해 정치적 현상을 보려는 시각에 대한 생각은.

"새로운 세대를 MZ로 부르고, 이들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보면서 어떤 특성을 부여하려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옛날에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차이와 갈등이 있었다. 또 새로운 세대 가운데에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과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번 계엄 사태에서도 나타났지만 젊은 세대에게 기본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이 상당히 강한 규범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 전체가 '민주적 정치운영은 대화를 통해서 이뤄져야 하고, 폭력이 정치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합의에 도달한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짜뉴스나 음모론처럼 대화와 소통의 장을 오염시키는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이 민주적인 규범과 가치에 대한 존중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우리 정치발전에 긍정적인 요소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 표광민 교수는?

△현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석사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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