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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상인동에 마련된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 희생자 위령탑' 일대를 청소하고 있는 유족들.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 희생자 유족회 제공〉 |
사고당시 소식을 들었을때의 상황부터 물어봤다. 그는 우선 "연락을 따로 받진 못했다. 참사 현장과 집이 가까웠는데, '펑' 하는 소리가 나길래 처음엔 지진인 줄 알았다"고 했다. 급하게 나가보니 현장엔 이미 여러 겹의 펜스가 쳐져 있었다. 곧장 학교로 찾아갔다. 담임교사로부터 아들이 등교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정신없이 아들을 찾다가 달서구청 상황실에 적혀 있던 희생자 명단을 보게 됐다. 이후 황급히 이송된 병원으로 향했다고 했다.
당시엔 서운함이 많았다고 했다. "우리는 바로 장례를 치렀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고는 이미 발생했는데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당시 미흡했던 부분이 많았다. 유가족들에게 따로 연락이 온 경우도 거의 없고, 대부분 참사를 직접 보거나 지인을 통해 들었다." 사고 현장을 수습할 때 정부에 서운한 일이 많았다. 대형 참사가 났는데도 TV에선 야구 중계뿐이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라고 했다.
참사후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가슴속 응어리는 여전히 풀지 못했다. 그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뒤 한동안 외출하지 않았다. 웃지도 못했다. 자식을 책임을 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픔이 가시지 않아 사고 이후 공부도 해 보고, 혼자서 명상도 해봤다. 잠시나마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단다. 그는 아직도 가끔 큰 소리가 나면 흠칫 놀란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그는 유족회장을 맡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회장을 맡았던 남편이 5년 전 별세하면서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 그는 "참사 희생자 대부분이 현재 고령자라서 딱히 맡을 사람도 없다. 유족회 규모도 현재 30~40명 정도로 많이 줄었다. 현재 유족회 차원에서 상인동에 있는 사고 희생자 위령탑 일대를 청소하거나 매주기마다 모여 추모식을 열고 있다"고 했다. 유족들 대부분은 학생을 잃은 부모들이라서 위령탑을 청소할 때는 항상 '자식 방을 치운다'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했다.
유족회는 그간 외부활동을 꺼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말문을 열었다. 그는 "참사 당시부터 지금까지 언론과 정치인들이 유족회에 접근할 때마다 추모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추모사업'보다 '추모' 자체를 다뤄야 하지 않겠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사고는 이미 났고, 돌이킬 수도 없다. 화려한 기념관 같은 건 원치 않는다. 이제 남은 일은 앞선 참사를 반면교사로 재발을 막는 것뿐이다. 상인동 가스폭발사고처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가 제대로 마련됐으면 한다"고 했다. 유족회장의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구경모기자 kk0906@yeongnam.com

구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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