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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자화상에 깃든 두 화가의 삶·예술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 섬뜩했거든."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을 본 동생의 말이다. 대부분의 반응이 비슷하다. 윤두서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자화상' 한 점에 인생을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100여 점의 자화상에 파란 많은 인생사를 파노라마처럼 기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렘브란트의 자화상('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전)을 보다가 윤두서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17세기 동양과 서양에서 살았던 두 화가의 자화상은 드라마 같은 내면세계를 짚어보고, 동서양 그림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윤두서 자화상 속의 그늘윤두서는 가사문학의 대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이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남인 계열의 실학사상을 실천한 사대부로 친가와 외가 모두 출중한 가문이었다. 16세에 결혼을 하고, 22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다. 둘째 부인을 맞이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집안의 흉사는 끊이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세상은 암흑이었다. 당시 서인세력이 정치를 장악하던 시절 남인의 출세 길은 봉쇄되었다.그의 나이 45세에 양어머니마저 타계하자 서울에서 해남으로 낙향한다. 처절함 속에서 '자화상'을 완성한다. 믿었던 큰 형이 죽자 그의 머리카락은 반백이 되었고, 피부 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낙향한 지 3년 만에 48세로 세상을 떠난다.윤두서는 17세기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던 시절 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단에 선보인 선비화가였다. 시와 글씨, 그림에 두루 재능을 갖춘 학자로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대부호인 가문을 이끌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중국에서 발간한 '화보(畵譜)'를 보고 그림을 익혔다. 마구간에서 하루종일 말을 보고 관찰하여 스케치한 후 작품을 완성하고, 머슴을 모델로 미세한 표정까지 스케치하며 기량을 닦았다. 밭갈이 하는 농부, 나물 캐는 아낙, 돌 깨는 석공, 짚신 삼는 농부 등 농사를 짓거나 아낙네가 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인물 동작은 자연스럽고 얼굴표정은 세심했다.◆렘브란트 자화상의 빛과 그림자렘브란트는 네덜란드에 있는 대학의 도시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서 25세에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17세기 경제의 활성화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초상화를 원했고, 렘브란트에게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었다. 뛰어난 기량으로 명성과 경제력을 얻었다. 1634년 28세에 부유한 집안의 사스키아와 결혼한다. 고급 주택을 구입하여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화려한 삶을 만끽했다. 앞길은 탄탄대로였다.렘브란트는 정형화된 초상화에 변화를 시도한다. 모델의 꾸며진 외모를 탈피하고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아름답게 꾸며줄 초상화를 기대했던 주문자들은 곧 실망하고 만다. 점차 초상화 주문이 줄어들었고, 경제 사정은 어려워졌다. 1642년에 제작한 집단 초상화인 '야경' 또한 주문자에게 외면을 받는다. 설상가상 아내 사스키아마저 사망한다.그럼에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골동품과 작품을 사 모았다. 빚이 늘어서, 결국 1656년 50세에 파산한다. 집과 수집품들은 경매에 넘어갔다. 다행히 두 번째 아내를 만나 몰락의 경지에서 벗어났지만 불행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이 세상을 떠났고, 다시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몇 벌의 헌 옷과 그림 도구만 남긴 채 63세에 생을 마감한다.서민을 주로 그린 선비화가 윤두서출중한 실력 발휘 못한 아픔 담아완벽한 얼굴모습 철저한 삶 대변가족 죽음과 파산 후 그림에 전념렘브란트 100여점 내면세계 기록자화상, 그들의 인생 압축한 자서전렘브란트는 생전에 회화 300점, 동판화 300점, 드로잉 2천점을 남겼다. 그중 100여 점의 자화상이 있는데, 회화 40여 점과 판화 40여 점이다. 그의 초상화는 빛과 어둠을 대비시킨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사용하여 극적 대비효과를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인물 그림으로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판화가 유행했는데, 렘브란트는 유화 못지않게 정교한 에칭기법을 사용한 동판화로도 인정을 받았다.1630년에 그린 '모자를 쓰고 웃는 자화상'은 오른쪽에서 밝은 빛을 받아 명랑한 얼굴이고, '소리치는 듯 입을 벌린 자화상'은 얼굴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다. 머리카락은 거칠고 자유롭다.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634)은 맑은 눈빛에 정면을 바라보는 미소년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1636년에 제작한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를 스케치하다가 정면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부드러운 필치가 섬세하고 정교하다. 아내와 함께 취한 포즈로 단란한 한때를 보여준다. 반면에 '돌난간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1639)은 눈빛이 예리하고 강렬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흑백의 대비가 돋보인다. 그는 인물화에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입체감과 미묘한 표정, 자연스러운 포즈로 내면의 세계를 우러나게 했다.◆자화상으로 본 동·서양화의 세계윤두서의 호 공재는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그의 '자화상'과 오버랩된다. '자화상'은 윤두서의 임종게송(臨終偈頌)이 되어 영원히 살아 울림을 준다. 밝은 색채의 얼굴에 반듯한 이마, 꼬리를 올린 수려한 눈썹이 범상하다. 쌍꺼풀에 또렷한 눈망울이 투명하다 못해 감상자가 빠져들 것만 같다. 둥근 콧방울이 중심을 잡고, 입술을 덮은 수염이 근엄하다. 출중한 기세를 펼치지 못한 시대의 아픔을 한 올 한 올 수염으로 빼곡하게 눌러 그렸다. 완벽한 얼굴모습은 철저한 그의 삶을 보는 듯하다.동양화는 사물을 그대로 표현한다. 빛의 영향을 받지 않아 그림자가 없다. 붓으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외형을 그리고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다. 사물을 화면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여백을 두어 그림을 완성하였다. 여백은 상상의 공간이었다. 동양화는 화가의 기운을 불어넣어 생동하게 만든다.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전신(傳神)'이 가장 중요하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전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그는 서양의 음영법을 받아들여 정물화를 그렸던 만큼 '자화상'에도 서양화법을 구사하여 묘사가 사실적이다.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은 1669년에 유화로 그린 마지막 자화상이다. 무늬가 없는 단색의 모자를 쓰고 주름진 얼굴에 밝은 눈빛이 초연하다. 죽기 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듯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이다. 서양화는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사물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동양화처럼 한 번의 필획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두껍게 덧칠하며 천천히 표현한다. 서양화임에도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전신'의 느낌이 묻어난다.◆자화상으로 쓴 자서전동양과 서양의 두 화가에게 그림은 인생의 무게를 지탱해준 빛이었다. 순탄한 삶이 어디 있으랴만 질병과 죽음은 그들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부와 학식을 갖춘 윤두서는 연이은 흉사에 오로지 그림으로 위로를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부와 명성을 거머쥔 렘브란트 역시 가족의 죽음으로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마지막엔 파산을 겪고, 오롯이 그림에 전념하며 화가로서 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들의 자화상은 곧 자서전이었다.윤두서, '자화상', 종이에 엷은 색, 38.5×20.5㎝, 18세기 초, 해남 녹우당 소장(왼쪽), 렘브란트 판 레인, '돌난간에 기대어 있는 자화상', 에칭 20.5×16.4㎝, 1639렘브란트 판 레인,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에칭 10.4×9.5㎝, 1636김남희 (화가)
2024.02.23
노혜진 오오극장 홍보팀장이 말하는 대구 영화 생태계
"GV(감독·배우와의 대화)를 개최하면 감독·배우들이 '대구 오오극장 관객분들이 질문하는 게 날카롭다'는 말을 자주 한다."대구 오오극장 노혜진 홍보팀장은 대구지역 영화 생태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대구 관객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했다.대구 독립영화에 대한 작품성도 자랑했다. '수성못'(2018)으로 이름을 알린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2023)은 관객 수 1만명을 돌파했다. 노 팀장은 "요즘 독립영화는 관객수 1만명을 넘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해외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대구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잘됐다"고 했다.요즘 독립영화 트렌드는 '여성 서사'다. 대구 영화계에서도 지역에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독립영화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 보니 많은 여성 감독이 활약하고 있는데, 노 팀장은 대구에서 강세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했다. 그는 "독립영화계 전반적으로 여성 감독들이 우세지만 대구는 특히 더 그렇다. 지난해 전국 영화제에 진출한 감독을 보니 한두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었다"고 했다.하지만 지역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지역 영화인을 양성하는 제도가 확대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대구에 영상위원회와 영화 관련 학과가 없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인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에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충분하진 않다"면서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화인을 양성할 수 있는 지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현희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독립영화 천국 대구 오오극장 (1) 대구 독립영화 애호가의 시네마 천국
대구 중구 일대에는 영화관이 유독 많다. 그런데 그중 눈에 띄는 곳이 있다. 롯데시네마 만경관과 곽병원 사이 대충 보면 지나칠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건물에 붙어 있는 여러 간판 중 1층에 숫자로 적힌 검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55'라는 숫자 밑에 '오오극장' '독립영화전용관'이라는 텍스트가 보인다. 인근에 있는 롯데시네마, CGV 등과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은 아닌 듯하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이 작은 극장이 궁금해졌다.극장의 이름은 '오오극장'. 상영관의 좌석 수가 55개라 하여 착안한 이름이라 한다. 대구에서 유일한 독립영화전용관이다. 주로 대구의 독립영화들을 상영한다. 건물 입구 왼쪽 벽에는 영화 상영 시간표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출입문 위에는 '3355'라는 문구가 담긴 간판이 걸려 있다. 외관은 통유리로 돼 있어 탁 트인 느낌을 주며 안쪽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입구 쪽 투명 유리창에는 방명록이 빼곡하다. '오오극장 너무 좋아요!(금정연)' '오오 고맙습니다(홍진훤)'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주세요!(서보형)' 등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극장은 1개 층, 1개 관으로 꾸려져 있다. 북적북적한 멀티플렉스 극장과는 상반되게 조용하고 아늑하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33다방은 11시에 커피로 열어요. 55극장은 23시에 영화로 닫아요"라는 문구가 관객을 반긴다. 입구 왼편에선 '33다방'이란 카페가 운영된다. 아까 출입문 앞에서 봤던 간판의 '3355'란 숫자는 33다방의 '33'과 오오(55)극장의 '55'를 딴 텍스트라 한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이라는 의미. 영화 시간 전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기다릴 수 있으며 영화 관련 발행물들이 구비돼 있어 잡지 등을 읽을 수도 있다.입구 오른쪽 진열대에는 각종 책자가 놓여 있다. 오오극장 소개, 특별전 작품 설명, 지난해 개봉한 독립영화 아카이브 등 극장과 독립영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공책, 필통, 마스킹 테이프, 파우치 등 극장에서 만든 문구류도 판매한다.상영관은 입구 정면 가장 안쪽에 자리한다. 비교적 작은 공간이지만 그래서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상영관 좌석 수는 총 55석으로 일반석 51석, 앞줄 4개 좌석은 휠체어 좌석이다. 일반석은 CGV에서 볼 수 있는 의자와 같다. 지난해 11월 교체한 새것이다. 휠체어 좌석은 휠체어 이동의 편의를 위해 극장 입구부터 상영관까지의 문턱을 최대한 낮췄다고 한다.작고 아늑한 극장.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만 이용하다 아담한 극장에 오니 둘러볼수록 정겹고 애정이 간다. 그런데 오오극장의 매력은 공간에서 오는 매력에 그치지 않는다. 극장은 2015년 처음 개관해 올해로 9주년을 맞았는데, 그간의 역사와 오오극장만의 다양한 프로그램도 눈길이 간다. 자체 기획전·특별전, 영화 소모임 등 지역 독립영화전용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독립영화는 재미없을 거란 편견, 어렵고 난해할 거란 인식을 깨부수기라도 하는 듯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소통하고 있다.이달은 오오극장이 아홉 번째 생일을 맞는 달이다. 생일 주간을 맞아 오오극장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극장이 관객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더 나아가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줄어들고 올해 지역영화 활성화 사업 예산이 삭감된 상황에서 오오극장은 어떤 생존 플랜을 모색하고 있는지도 들어봤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조민수 배우와 오오극장 관객들이 독립영화 '어른 김장하'를 함께 보고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장수현기자영화 '시네마 천국' 토토. 〈영남일보 DB〉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한복부터 후드까지 130년 교복 변천사 (2) 여학생은 이화학당 다홍치마, 남학생은 배재학당 당복이 시초
2월은 학생들이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시기다. 이 시기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교복을 구입해 새 학기를 준비한다. 패션은 시대를 반영하는 요소로 당대의 사회 분위기와 시민들의 가치관 등을 담고 있다. 교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교복은 시대 흐름에 따라 많은 변천사를 맞이했다.조선 말~1990년대 초반가쿠란·세일러복…일제 영향 미친 20세기 교복2차대전 땐 여학생들 '몸뻬' 입어광복 후 윙칼라·주름치마 정형화교복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입도록 정한 제복이란 의미로 학생복으로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교복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곳곳에 학교가 세워지면서 도입됐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여학생의 경우 1886년 이화학당의 다홍색 치마저고리, 남학생은 1898년 배재학당의 당복(堂服)이 시초다. 당복은 당시 일본의 학생복과 비슷한 밴드칼라 형태로 소매 끝, 바지의 솔기 부분, 모자에 청·홍선을 두른 것이다. 색은 주로 검은색, 짙은 감색, 쥐색 등이었다. 이후 1907년 숙명여학교에서 최초로 원피스 차림의 양장교복을 도입했지만 3년 뒤인 1910년 다시 치마저고리의 한복 교복으로 교체됐다.양장교복이 보편화된 건 1930년대 들어서다. 일제가 한복 교복을 금지하면서 남학생은 일본의 남학생 교복인 가쿠란(검은색에 단추만 박혀 있는 형태의 교복), 여학생은 세일러복 형태의 윙칼라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39년부터 일본이 전투태세를 갖춘 제복을 통일해 착용하도록 하면서 남학생들은 국방색 교복을, 여학생들은 블라우스에 '몸뻬' 작업복 바지를 입었다. 광복 후엔 검은색 중심의 가쿠란(남학생), 세일러복(여학생) 형태의 일정한 디자인이 1981년 교복 자율화 시행 이전까지 유지됐다. 교복 자율화는 전두환 정부 문교부(현 교육부)가 중·고등학생들이 교복 대신 자유롭고 간편한 복장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김정숙 영남대 교수(의류패션학과)는 "'아들과 딸' 등 옛날 복고 드라마를 보면 우리나라의 초기 교복은 윙칼라 블라우스, 주름치마 등으로 일제의 영향을 크게 받은 걸 알 수 있다. 그 영향은 1970년대 말까지 뿌리 깊게 간다"면서 "이후 독자적인 교복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잠깐의 시기 교복 자율화로 교복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하지만 자유 복장에 따른 생활지도의 어려움, 가계 부담 증가 등으로 교복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1985년 교복자율화 조치가 일부 보완돼 교복 착용 여부를 학교장 재량에 따라 결정하게 됐다. 1990년대에 들어 전국 대다수의 학교가 착용을 택하면서 사실상 교복 자율화는 사라졌다. 대신 교복을 채택하는 과정에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복은 학생들의 '패션'이 됐다.1990년대 후반~2010년 중반'교복패션'의 시작…날씬해 보이는 슬림핏 대세바지통 줄이고 치마 짧게 수선 유행교내선 체육복 덧입어 활동성 높여"주변에서 교복 바지 통은 스키니진에 가깝게 줄이고 치마는 무릎 위로 오도록 최소 한 단 이상 줄였습니다. 교복 브랜드마다 '핏'도 조금씩 달라 그중 가장 슬림핏으로 나온 곳에서 교복을 구입했습니다." 2015년 대구 달서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세민(27)씨는 학창 시절 입던 교복을 이같이 회상했다. 교복 자율화가 사라진 후 1990년대 후반부터 △스마트 △스쿨룩스 △아이비 △엘리트 등 교복 브랜드가 등장했는데, 브랜드들의 광고 모델을 인기 아이돌이 맡으면서 이들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연예인처럼 날씬하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슬림핏' 디자인의 교복이 최근 몇 년 전까지 오랫동안 유행했다. 재킷과 블라우스는 라인을 살리고 몸에 딱 맞게, 바지는 통을 좁게, 치마는 길이를 짧게 해 입는 것. 브랜드들도 이러한 수요에 맞춰 슬림핏의 디자인을 강조하며 경쟁했다.하지만 날씬한 디자인에만 집중하다 보니 결국 불편함이 속출했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불편한 교복을 개선해달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중학생이라고 밝힌 청원자는 교복의 불편함을 지적했다. 여학생의 경우 상의 기장이 짧고 허리에 라인이 들어가 팔을 올리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또 잘 비쳐서 속옷 위에 여러 겹을 껴 입어야 해 여름에 매우 덥다고 했다. 남학생의 경우 신축성이 부족해 활동하다 보면 바지가 자주 터진다며 개선을 요구했다. 2017년까지 울산 동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김모(여·24)씨는 "중학교 때까지는 (교복이) 불편해도 그냥 입었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등교할 때를 제외하고 거의 입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작은데 라인이 들어가 움직이기 불편해서 교내에선 체육복을 입고 다녔다"면서 "주변에서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체육복을 일상적으로 입는 친구들이 늘어났다"고 밝혔다.2010년대 중반~현재후드·야구점퍼…이젠 실용성 추구하는 생활복편한 원단·남녀공용 디자인 확산"학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좋다"이후 교복도 실용적인 옷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곳곳에서 '편한 교복'이 도입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생활복'이다. 생활복은 일반 교복을 변형한 기능성 소재의 교복으로 2000년대 중반 등장해 널리 퍼졌다. 동복의 경우 상의는 후드티·야구 점퍼, 하의는 트레이닝복 바지, 하복의 경우 상의는 칼라형 티셔츠, 하의는 반바지·치마바지 등 편안함을 추구한 다양한 스타일로 나온다. 남녀 모두가 바지를 입는 학교도 있다. 대구 지역 학교에서도 생활복 도입이 확대되는 추세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교복 브랜드를 운영하는 A씨는 "이 근방에서는 2015년부터 서서히 바뀌었던 걸로 기억한다. 현재 중학교는 70% 정도가 동·하복 중 하나는 생활복을 입는 것 같다"고 했다.대구시교육청에서도 편한 교복의 일환으로 '착한교복'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착한교복은 교복과 생활복의 장점을 결합한 옷으로 학생들의 활동성을 높일 수 있는 편안한 원단으로 제작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생활복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2019년 처음 실시돼 여러 학교로 확대됐다. 지난 5일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교복 미착용 학교를 제외한 대구 지역 중·고등학교 중 착한교복을 도입한 비율(동·하복 중 하나라도 도입한 경우)은 중학교 91.1%, 고등학교 58.1%다.편한 교복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9년 대구시교육청이 착한교복을 도입한 한 중학교를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학생 84%가 만족감을 표시했다. 대구 운암중 김모(14)양은 "추리닝과 비슷한 재질에 여학생도 편한 바지를 입을 수 있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복장으로 불편한 일이 없다. 살이 쪄 교복이 안 맞으면 어쩔까 하는 걱정도 적어 학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전문가들은 이 같은 교복의 변화를 △다양성의 확대 △격식에 매이지 않는 분위기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 유행 등 크게 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한다. 김정숙 교수는 "패션은 당대 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데 교복도 마찬가지다. 현재 편안함을 중시한 교복이 나오는 건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요즘 교복으로 나오는 후드티 등도 본래 남성복으로 규정됐던 의류다. 시대가 바뀌고 패션에서 성(性)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남녀공용 교복으로도 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장수현기자2000년대 초반 대구의 한 놀이터에서 여중생들이 말뚝박기 놀이를 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2024.02.16
[위클리 키워드] 미혼남 60%·미혼녀 55% "국제결혼 의향"…女 절반이상 "주거지로 어느 나라든 상관없어"
결혼하지 않은 청년 2명 중 1명은 국제결혼도 염두에 둔다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나왔다.결혼정보회사 듀오가 결혼 의향이 있는 25~39세 미혼남녀 500명(남 250명·여 250명)을 대상으로 '국제결혼'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성 60.0%, 여성 55.2%가 국제결혼을 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국제결혼 의향이 있는 응답자들은 결혼 후 주거지로 '본인의 나라'(49.6%)를 가장 많이 원했다. '어디든 상관 없다'는 40.1%, '배우자의 나라'는 8.4%였다. 특히 '본인의 나라'를 택한 남성은 66.7%로 여성(26.8%)보다 약 2.5배 높았다. 여성은 '어디든 상관 없다'는 답변이 55.4%로 가장 많았다.국제결혼에 대한 미혼남녀의 인식은 긍정적이었으며 이런 경향은 남성에서 두드러졌다. 응답별로 '긍정' 46%(남 52.4%, 여 39.6%), '보통' 36.4%(남 33.2%, 여 39.6%), '부정' 17.6%(남 14.4%, 여 20.8%) 순으로 나타났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장수현기자 jsh10623@yeongnam.com
[동 추 거문고 이야기] 〈3〉 '백악지장' 거문고, 고구려 고분 벽화 곳곳 연주하는 모습 묘사…선비가 책과 함께 늘 곁에 둔 마음수양 반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 현악기인 거문고는 오래 전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불리어 왔다. '모든 악기 중 으뜸'이라는 의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지식인, 특히 선비들이 그윽하고 담백한 거문고의 음색과 거문고에 담긴 의미를 사랑하고 존숭해 최고의 악기로 대접했던 것이다.'현금(玄琴)'으로 불리어온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무용총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 벽화 곳곳에도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거문고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이 흔히 인용된다.무용총 등 그려진 거문고의 원형왕산악이 100여 곡 만들어 연주검은학이 와 춤춰 '현학금' 불러160㎝ 긴 몸통에 6현 얹은 구조음 높낮이 조절 받침대 '괘' 16개명인 거치면서 민간에 널리 퍼져'심성 수양' 악기로 중요한 역할'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 거문고 제작과 관련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처음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성음(聲音)과 연주법을 알지 못했다. 나라에서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면서 후한 상을 주겠다고 했다. 그때 둘째 재상(第二相)인 왕산악이 칠현금의 본 모양은 그대로 두고 그 법제(法制)를 고쳐서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100여 곡을 만들어 그것을 연주했다. 이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니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하였다.' 왕산악이 언제 거문고를 만들었는지는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왕산악은 거문고를 만든 거문고 명인이지만, 그의 생몰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거문고를 만든 연대는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4세기 무렵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57년에 축조된 안악(安岳) 제3호분 벽화에 그려진 거문고 연주 모습, 집안(集安) 무용총(4세기 말~5세기 초) 벽화에 나타난 거문고 연주 모습 등이 그러한 추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고구려에 칠현금을 보낸 중국 진나라는 동진(東晉·316∼419)일 것으로 추정된다.고구려 고분 벽화 속 연주자들이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고 연주하는 모습은 현재의 거문고 연주법과 비슷하다. 고구려 벽화의 거문고(6현이 아님)는 원형의 거문고이고, 여섯 줄인 현재의 거문고는 그 거문고가 언젠가부터 개작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여섯 줄과 16괘거문고(玄琴)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을 울림통 위에 긴 방향으로 나란히 얹고, 술대라는 막대기로 내리치거나 뜯어 연주한다.거문고는 긴 몸통에 줄 받침대인 괘 16개를 놓고, 괘와 안족(雁足) 위에 여섯 줄(6현)을 얹은 구조이다. 여섯 줄 중 셋째 줄인 대현(大絃)이 가장 굵고, 첫째 줄 문현(文絃), 여섯째 줄 무현, 넷째 줄 괘상청, 다섯째 줄 괘하청, 둘째 줄 유현(遊絃)의 순으로 가늘어진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줄인 첫째 줄이 문현이다. 유현, 대현, 괘상청은 괘(제1괘) 위에 얹혀 있다. 나머지 문현, 괘하청, 무현은 기러기발 모양의 안족으로 받친다. 안족을 이동해 그 줄의 소리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다.선율을 내는 데 주로 쓰이는 줄은 유현과 대현이다. 이때 왼손은 괘를 짚어 소리에 굴곡과 변화를 주는데, 이를 농현(弄絃)이라 한다.거문고의 몸통은 길이가 보통 160㎝ 정도. 몸통은 두 쪽의 나무를 아래위로 붙여서 만든다. 현이 올라가는 둥근 위쪽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평평한 아래쪽은 밤나무로 만든다. 몸통의 속은 비어 있어서 울림통 역할을 한다.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받침대인 16개의 괘는 아래쪽부터 머리 쪽으로 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첫째 괘에서 열여섯 번째 괘로 가면서 점차 작고 얇아진다. 괘 하나를 올라올 때마다 음은 한 음 높아진다.거문고의 머리 쪽에는 '대모(玳瑁)'라고 하는 부드러운 가죽을 붙여서, 술대가 몸통 판에 부딪혀 부러지거나 잡음을 내지 않도록 하고 있다. 대모라는 명칭은 본래 거북이 등가죽 말린 것을 붙이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술대는 대나무(해죽)로 만드는데, 길이는 20㎝ 정도. 기본적인 연주 자세는 반가부좌이다. 오른다리가 바깥으로 나와 왼다리 아래쪽으로 들어가게 한다. 거문고는 머리 쪽, 즉 대모가 붙은 곳을 오른쪽 무릎에 올려놓는다. 머리 안쪽의 오목한 곳을 오른쪽 무릎 쪽으로 괴고, 왼쪽 무릎과 오른발로 거문고를 받친다. 요즘은 악기 받침대를 많이 사용한다.◆지식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거문고거문고는 고구려에서 태어나 신라 때 지리산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한 옥보고(玉寶高)를 비롯해, 그의 제자인 속명득(續命得), 속명득에게 연주법을 전수받은 귀금(貴金), 극종(克宗) 등 거문고 명인을 거치면서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극종은 새로 거문고 곡 7곡을 지었는데, 이후부터 거문고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극종이 지었다는 7곡은 전하지 않는다.신라에서는 거문고를 국가 보물 창고인 천존고(天尊庫)에 신령스러운 악기인 신기(神器)로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거문고는 특히 선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선비들은 거문고에 단순한 악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 수행의 반려로 삼았던 것이다.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책과 함께 늘 곁에 두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책과 거문고를 지칭하는 '금서(琴書)'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도 통했다. 거문고는 이처럼 선비의 심성을 수양하는 악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문고를 가까이에 두고, 거문고를 통해 늘 사심(邪心)과 욕심이 스며들 수 없도록 조심했던 것이다.거문고가 지식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음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옛날 악보 대부분이 거문고 악보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금합자보, 현금신증가령, 삼죽금보, 한금신보, 현금오음통론, 금보, 신작금보, 학포금보 등 현재 전하는 고악보의 90% 정도는 거문고 악보이다. 서유구가 지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의 악보편인 '유예지(遊藝誌)'의 주 내용도 거문고 악보이다.거문고 관련 최고의 저술로는 1620년 이득윤이 지은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가 꼽힌다. 거문고의 구조와 타는 법은 물론, 거문고에 새긴 글귀인 금명(琴銘)을 비롯해 거문고와 관련된 시와 글, 거문고 악보 등 당시까지의 거문고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책이다. 김봉규<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고려청자 청자상감송하인물문매병 그림. 소나무 아래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 앞에 학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발간 '우리 악기 우리 음악' 수록자료〉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 중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의 그림.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한복부터 후드까지 130년 교복 변천사 (1) 치마저고리부터 가쿠란, 후드집업까지…교복 변천 130년史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입니다. 사회 정책부터 시장 환경, 생활 양식, 심지어는 언어까지 급변하고 있습니다. 눈 깜짝할 새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어제 유행하던 것이 사라지고 몇십 년 전 인기를 끌었던 것이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세상이 급변한다는 걸 가장 실감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옷차림 때문입니다. 패션에 그리 해박한 편도 아닌데, 늘 사람을 접하는데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유행이 벌써 바뀌었단 말이야?' 하면서 말이죠. 분명 몇 년 전에는 복고풍이 대세였는데, 지난해에는 청청 패션이 유행하고, 올해의 패션은 또 올드머니룩이라 합니다. 오래전 '핫' 했던 옷들이 귀환하기도 합니다. 최근 11년 전 신었던 모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발장에서 다시 꺼냈습니다. 당시 유행했지만 빠르게 인기가 식었던 이 운동화가 작년부터 다시 떠오르면서 이제는 꾸준히 잘 팔리는 스테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패션이 빠르게 변한다는 건 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그만큼 빠르게 변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패션이라고 하면 '유행'이라는 개념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패션(fashion)의 어원은 행위나 활동하는 것(doing) 또는 만드는 것(making)을 뜻하는 라틴어의 팩티오(fac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전적 의미는 '양식, 방식, 형, 유행, 관습, 습관' 등으로 다양합니다. 단어의 넓은 의미를 고려하면 실제로 우리의 모든 생활 양식을 담은 것이 패션이라 할 수 있는 셈입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맞춰 교복 패션도 변하고 있습니다.얼마 전 평소 잘 타지 않던 버스를 탄 적 있습니다. 중학교 앞에 정차할 때 후드 집업을 입은 학생들이 줄지어 타는 걸 봤습니다. 얼핏 봤을 땐 교복 위에 사복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는데, 다시 보니 단체로 똑같은 옷을 입고 있더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옷은 교복이었습니다. 기존에 입던 교복 겉옷이 편안함을 위해 재킷에서 후드 집업으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길을 걷다 보면 교복 바지를 입은 여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에겐 생소한 광경이라 합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그리 오래된 세대가 아니긴 하나, 당시에도 교복 바지를 입는 여학생은 전교생 중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죠. 학창 시절 추운 날씨에도 치마를 입고 덜덜 떨며 공부하던 기억이 납니다.하복의 경우 중성적인 패션으로도 변화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에 남학생은 반팔 셔츠와 긴 면바지, 여학생은 반팔 블라우스에 면 치마를 입는 게 주였습니다. 요즘은 성별에 따라 디자인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공용으로 바뀌는 곳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학생의 치마가 없어지고 남녀 모두 기능성 소재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는다고 합니다.곧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특히나 졸업을 마치고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학생들은 더욱 실감할 듯합니다. 새 교복을 구매하고 상급 학교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새로운 시작을 알리기라도 하는 교복. 요즘 학생들에게 교복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제는 볼 수 없는 과거의 교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에 교복은 언제, 어떻게 도입됐을까요.우리나라의 교복은 수많은 변천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곧 시작될 새 학기를 맞아 이번 호 위클리포유에서는 교복 문화의 변천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1935년 중국 용정 은진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맨 오른쪽) 시인과 문익환(가운데 위) 목사.199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스쿨룩 교복(위쪽)과 2019년 대구시교육청이 제안한 '착한 교복' 디자인의 후드집업·칼라셔츠. 〈대구시교육청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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