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뒷얘기 . 11 > 야구선수 유급

  • 입력 1996-11-30 00:00

유급(留級). 말그대로 학교에서 진급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는 것이다.의
대나 한의대 등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대학에선 타의로 행해
져온 반면 체육, 특히 야구의 경우는 달랐다. 다분히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야구의 경우 60~70년대 유급이 전염병처럼 만연했다. 요즘 30대와 40대
야구선수들의 과반수 이상이 유급을 경험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
는지를 짐작케한다.이만수 류중일(이상 삼성선수) 성낙수(현 성광중 감독)
박흥식(현 삼성코치)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

당시 유급은 지나친 야구열기가 주된 원인이었다.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감독과 학부모 학교 삼자간의 합작품이었으며, 제도의 뒷받침속에 합법적
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유급은 야구선수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배구 농
구 등 인기있는 종목들이 대부분 그랬다.

이처럼 야구선수를 비롯한 운동선수들의 유급이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라며 속출하자, 그 후유증과 에피소드도 잇따랐다. 학교를 5년 다니
는 선수가 있었는가 하면 동생보다 졸업을 늦게 하는 선수도 있었다. 서로
나이와 학년의 앞뒤가 뒤섞여 선.후배간의 위계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했다.

야구에선 보통 한팀 30명중 10명가량이 유급을 했다. 게다가 1학년을 제
외하면 거의 3분의2가 유급생이어서 '중고(中古)선수'들이 팀의 주축을 이
루곤 했다.

야구선수 유급의 발단은 이렇다. 60년대 아마야구붐이 일면서 야구를 하
려는 학생이 늘었다. 팀수도 증가했다. 당연히 학교간의 경쟁도 치열해졌
다. 성적이 부진한 학교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전들을 학교에 1년
더 다니게 했다.

이에 따라 저학년 선수는 주전자리를 차지하기 힘들어 한해를 쉬어야 했
다. 체격이 작은 선수나 실력이 모자라는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유급한 학
생은 협회에 선수로 등록하지 않은 상태여서 '무적(無籍)선수' 로 학교에
다니며 훈련했다.

대구중 감독을 지냈던 구수갑 현 대구야구협회 전무는 당시 누구보다 유
급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69년 대구중은 장효조(현 롯데코치) 김한근(현 OB코치) 등 쟁쟁한 선
수들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국대회에서 네번씩이나 정상문턱에
서 미끄러졌습니다만 그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었죠. 이듬해인 70년 또다
시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타 시.도 선수들의 덩치가 유달리 컸다는 느낌
을 받았었는데 알고보니 유급생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한창 클 나이에 1~2
년 차이는 상당했습니다."

대구중은 이듬해 유급을 실시하면서부터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명성
을 날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만수의 경우,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데에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
지만 유급이라는 '제도권의 지원' 도 한몫했다. 그는 동기들에 비해 다소
늦은 중1때 야구를 시작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1학년을 2년다니며 맹
연습을 한 것이 그에겐 두고두고 '약'이 됐다.

이러한 유급제도탓에 '울며 겨자먹기식' 으로 자식을 학교에 1년 더 보
내야 했던 당시 학부모들은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등골이 휠 정도였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소년체전이 생기면서 대한체육회 규약으로 운동선수
의 나이제한과 함께 유급하면 선수로 못뛴다는 규정이 생겨났다. 이후 운
동선수는 6개월 입원이나 교육감 승인의 경우가 아니면 유급이 불가능하게
됐다. 물론 이는 요즘도 행해지고 있다.
<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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