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경북 근.현대인물사 . 20 > 백남채

  • 입력 1997-07-08 00:00

백남채(白南埰: 1888~1951, 호는 石泉)는 1888년 1월1일 당시 경북 경산
군 용성면 송림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백용달(白龍達)과 모친 안순이(安順
伊) 사이의 4형제중 장남으로서 어린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성장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22세때 중국 협화대학 (현 북경대
학)에 유학하던 중 독립운동가 우재 이시영 등과 교류하였다. 1918년 졸업
후 귀국하여 대구 계성학교 교감 및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
문이 나돌았다. 이에 식민지 무단통치로 억눌려 왔던 전국민의 반일감정에
불이 붙으면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구남산교회 장로
이던 그는 상해에서 돌아온 김순애(김규식의 처)와 백남규(백남채의 동생)
를 만났다.

백씨는 이들과 함께 당시 남성교회 목사로 있던 이만집(영남일보 3월4일
연재), 남산교회 조사(전도사) 김태련, 천도교 경북교구장인 홍주일 등과
비밀리에 접촉해 독립운동을 논의하게 된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위가 시작되고 이갑성(민족대표 33인)이 보낸
이용상(세브란스 전문학생) 이 독립선언서 2백매를 가지고 3월2일 이만집
을 찾아오자, 대구의 유지들은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웠다. 장소는 서문
밖 시장(서문시장)으로 하고, 장(場)이 서는 3월8일 오후 1시로 시각을 잡
았다. 이 모임의 주도적 인물은 백남채, 이만집, 정재순 등이었는데, 백남
채는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원을 책임졌다.

이러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중 백남채는 거사 사흘전인 3월5일 일제경
찰에 체포된다. 백남채 등의 지도자들이 검거된 상황에서도 거사는 계획대
로 추진돼 3월8일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어 10일에 2차 시위가 대구
남문 밖 시장(염매시장)에서 일어났다.

3년간 복역을 치르고 나온 백남채는 대구요업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
를 경영하면서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해 주었다고 아
들 백형기씨가 회상했다. 이것은 그의 동생 백남규가 상해 임시정부 경상
도 대표로 일하고 있었고, 북경유학시절 이시용과 교류가 있었던 관계로
자금전달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은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타협적 민족주의와 즉
각 독립을 주장하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두 가지 양상으로 크게 나누어졌
다. 백남채는 다소 온건한 독립운동의 길인 교육사업과 경제분야에서 활동
하게 된다.

그는 1922년 10월 조양회관(朝陽會館) 건립에 벽돌을 기증하여 서상일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양회관에서는 시국강연, 국산품애용, 상공업진흥 등
에 관한 집회가 열려 대구지역 계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백남채는 1926년 대구 희원(喜媛)학교와 순도(順道)학교가 병합되어 희
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가 설립될 때에 자금을 지원하여, 이사장에 취임
해 식민지하에서의 어린이교육에 열성을 보였다.

1927년에 접어들면서 민족협동전선 운동으로서 신간회운동이 대두될 때,
그는 여기에 불참하면서 점차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27
년 5월에서 1930년 4월까지 '대구학교 평의원' 을 역임했다. 학교평의회는
일제가 조선인 교육에 관한 경비마련을 위해 설치한것으로, 식민지 교육정
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대구 YMCA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는 대구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는 1936년 일제의 말단지배기구로서의 역할을 한 남산정 제2구 총대(總代)
도 역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조선인 민족말살정책으로 황국신민화정책
을 펼쳤다. 이때 일제는 이 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1938년 기독교대구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 기구에서 백남채는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일본인이었다.

여기에서 추진한 사업은 교회에서 일본의 4대 명절을 지키게 하는 일,일
본인들을 강사로 초빙하여 종교보국 사상을 고취시키는 일 등이었다. 이런
기구에서 재무위원으로 활동한 백남채의 경력은 당시 독립운동의 분위기와
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 독립운동가 서상일(徐相日)은 조선군 대구지구헌병대장 간다
(神田)로부터 치안유지의 협조요청을 받았다. 같은날 자택에서 백남채, 배
은희, 엄성문, 서동진, 장인환, 이재영, 송기찬 등과 협의, 건국의 우선과
제인 치안유지를 위해 경북치안유지회를 발족키로 결의한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재래의 토착 지주계층에 속한 유지급 인사들이었는데, 여
기서 서상일이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보다 먼저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 김관
제(金觀濟) 가 선출되었다. 애국지사들은 해방공간에서 원활한 건국사업을
하기 위해 이 두 조직을 통합키로 하고, 8월22일 대구공회당에서 합동회의
를 열어 '건국준비치안유지회' 란 이름의 통합단체를 발족시켰다. 위원장
에 김관제, 부위원장에 백남채가 선출되었다.

백남채는 1945년 9월 창당된 한국민주당에 관여하여 대구지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이후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여 1946년 12월 조직된 미군정기의
임시입법기관인 과도입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남한지역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에 백남채는
한민당 소속으로 대구 병구에 출마, 당선되어 제헌의원이 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세력에 반대했던 민주국민당(민국당) 소
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란하여 살던 그는 1951년10월2일 폐
암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대구지역 3.1운동을 주도한 공적을 인정받
아 1977년 대통령표창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연보

* 1910년 중국 북경대학 유학
* 1919년 대구 3.1운동 주도
* 1946년 한민당 대구지부 수석 부총무
* 1948년 제헌의원 당선

<> 답사기

대구문화예술회관 뒷산에는 백남채의 묘비가 있다. 그의 유골은 몇년 전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묘비(墓碑)만 그 자리에 남아 백남채가 대구
지역에서 생애의 상당부분을 보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묘소는 양지바른
곳에 편안히 모셔져 있었는데, 봉분도 그대로 있었다.

바로 옆에는 동생 백남규의 묘가 나란히 있다. 험난했던 일제시대에 독
립운동에 참여했던 두 형제의 무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깊
게 다가왔다. 이 무덤 앞에 안내표지판이라도 세워져서 등산객이나 산보객
들이 이들의 행적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희정<대구경북 근.현대사 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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