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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에 있는 만남재 전경. 조선 숙종 당시 명성을 떨친 어사 박문수가 박은을 포함한 고령박씨 조상을 위해 세운 재실이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Story Memo
고령에서 태어난 박은(朴誾·1479~1504)은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네 살 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여덟 살에는 글의 대의를 알았다. 열다섯 살에는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493년(성종 24) 15세에 이르러서는 문장에 능통해, 당시 대제학이었던 신용개(申用漑)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았다. 17세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강경하고 불의를 보고 참지를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평소 직언을 꺼렸던 연산군은 그런 박은을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시킨다. 파직이후 박은은 자연에 묻혀 밤낮으로 술과 시로써 세월을 보냈다.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는 주로 파직된 23세부터 아내가 죽기 전까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온갖 고뇌로부터 평화로울 수 있는 현실초극에의 노력과, 주변인물의 죽음을 통한 인생무상을 주로 노래했다. 영남일보의 ‘박은 스토리’는 시와 한평생을 함께한 ‘요절시인 박은’의 생애를 주요 소재로 재구성했다.
#1
글친구 우암(寓庵) 홍언충이 한 잔 하잔다. 박은(朴誾)은 흔쾌히 그를 따라간다. 마음 맞는 친구와 술을 하려니 마다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초저녁에 마시기 시작한 술이 여러 순배가 돌자 취흥이 발동한다. 그대로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마신다. 도도한 취흥과 가을밤의 분위기가 젊은 두 사람을 한껏 고조시킨다.
깊은 밤에 박은은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온다. 서재 앞에 걸린 읍취헌(揖翠軒)이란 당호가 보이자 취기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잠이 몰려온다.
불이 켜져 있어서 들어가니, 뜻밖에도 절친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택지(擇之) 이행이다. 택지는 이행의 자다. 호는 용재(容齋). 저녁을 먹고 박은을 찾아왔다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책이나 뒤적이며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어, 택지! 언제 왔는가?” 박은은 비틀대며 주저앉아 웃음을 지어보이나 이내 졸음으로 눈이 감겨지며, 비스듬히 누워버린다. 너무 취해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행은 잠 든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밖으로 나온다. 가을밤의 냉기가 몸에 기분 좋게 스며든다. 달이 환하다. 뜰에는 국화가 피어 달빛에 향기를 토한다. 집 뒤 대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니 달빛이 대숲 사이로 스며들어 길이 온통 얼룽덜룽하다. 이런 밤 어찌 시를 짓지 않을 수 있으랴. 이행은 시를 지어 국화꽃 가지에다 걸어둔다. 새벽 기운이 들자 이행은 돌아간다.
아침에 박은이 깨어보니, 친구는 가고 없다. 밖으로 나오니 이슬이 맺힌 국화 가지에 이행이 시를 지어 걸어둔 종이가 눈에 띈다.
“이 친구, 얼마나 쓸쓸했을까?” 이행의 시를 읽는 마음이 싸해온다. 그리하여 친구의 시를 차운한 시를 지어 바로 이행에게 보낸다.
‘어제 나는 우암을 따라가 밤이 깊도록 술을 마셨네. 그런데 또 택지가 먼저 취헌(읍취헌)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매우 취해서 대화할 수가 없었네. 택지는 홀로 국화와 대숲 사이를 배회하며 시를 지어 꽃가지에다 걸어두고 새벽이 되어 돌아간 모양. 날이 밝자 술이 깨어 국화 사이에 있는 시를 보았지. 쓸쓸히 웃음 지으며 시를 차운해 지어 택지에게 보내며 나의 무례를 사과하네’라는 긴 제목의 시 3수 중 한 수는 이러하다.
오늘 밤 술을 깨니
맑은 달빛이 빈 마루에 가득하다
어떻게 하면 자네를 만나
다시 마음의 회포를 풀까
#2
갑자기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하나가 올라온다. 왕이 사냥하는 걸 삼가라는 내용이다.
왕(연산군)은 화를 내며 펄쩍 뛴다.
“임금이 사냥 좀 하기로소니 뭐가 문제야? 도대체, 어떤 자가 이 같은 불경한 글을 썼단 말인가?”
보니 홍문관에서 올라온 것이다.
“이 차자를 발의한 자를 잡아들이라”고 임금은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누가 쓴 것인지 나타나지 않자 임금은 더욱 괘씸하게 여긴다.
그 다음해 박은은 이극균, 유자광의 전횡과 성준이 유자광에게 아첨하는 걸 지적하는 상소를 연일 올린다. 3년 뒤에 또 그들의 전횡에 맞서 연일 상소를 올린다. 곧 그들의 모함을 받는다. 왕은 그의 직언을 평소부터 꺼리던 차다. 무고(詐似不實)로 파직시킨다.
3년 뒤 지제교로 복직하지만, 왕은 그를 더욱 경계하면서 그를 모함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전 날 왕의 사냥을 연명으로 상소한 것을 빌미로 삼는다.
“평소 강개하며 말을 잘하는 자의 짓이 분명하다. 그래, 홍문관 수찬이었던 은의 짓이리라.”
임금은, 여럿이서 연명을 했지만 실제로 그 글을 쓴 자가 박은이라고 지목한다. 본보기로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며 그를 동래로 유배해버린다. 끝내는 다시 서울로 압송, 군기시 앞에서 참하고 만다.
한 여름의 더운 날씨다. 너무나 억울하게 형장에 나온 그는 기가 막힌다. 하늘을 쳐다보며 세 번이나 크게 웃는다. 그런 다음 칼을 받는다. 그의 머리는 군기시 앞에 효수되어 걸린다. 시신은 들판에 버려진다. 아직 너무나 젊은,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민하여 장래가 기대됐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그는 성종 10년(1479) 고령 용담촌에서 출생했다. 용담촌은 확실한 장소를 알 수 없으나, 대개 쌍림면 하거리 들판인 용담들로 불리는 어귀쯤 될 듯.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揖翠軒)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읍취헌은 그가 서울 남산에 기거할 때 서재에 붙인 당호인데, 그대로 호로 취한 것이다.
평생의 지기였던 이행은 그를 두고 “눈썹과 눈이 그림으로 그린 것 같아 바라보면 속세 사람이 아닌 듯했다. 네 살 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여덟 살에는 글의 대의를 대략 알았고, 열다섯 살에는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고 했다.
15세 때 이미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자,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가 사위로 삼았다. 신용개는 신숙주의 손자다. 연산군 1년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해 사가독서자(조선시대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케 한 제도) 선발에 뽑혀 서울 용산 독서당에서 공부했다. 이후 승문원 권지, 홍문관 정자, 수찬을 역임했고 경연관을 겸임했다.
그렇듯 탄탄한 앞날이 열리리라 믿었던 그가 벼슬살이를 하자마자 죽임을 당한 것이다.
#3
그는 친구를 좋아했고, 술을 즐겼으며, 시를 사랑했다.
그의 친구로는 이행, 남곤, 홍언충, 정희량을 든다. 특히 이행과 남곤과는 형제처럼 지냈다. 이행은 박은과 어릴 적부터 한 동네서 살았는데, 1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박은이 죽은 뒤 3년 만에 흩어진 원고를 수합하여 유고집 ‘읍취헌유고(揖翠軒遺稿)’를 간행한 이도 이행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로 이름을 떨쳤던 남곤은 출세지향적이라 나중에 많은 이들의 배척을 받았다. 박은과 뜻이 달랐다고 볼 수도 있으나 문우로서의 교분은 변함이 없었다. 박은과 이행은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로 꼽혀, 당대 가장 앞선 시인으로 두드러졌으며, 정희량·홍언충과 함께 ‘문장4걸(傑)’로 꼽히기도 했다. 김창협·김춘택 같은 이들은 박은의 시를 우리나라 최고로 꼽았으며, 김만중·신위·홍만종·이수광 등도 박은의 시를 극찬했다.
한 때 파직 후 그는 시와 술로써 친구와 마주하는 생활을 했다. 고독한 자신의 삶을 술과 시와 우정으로 달랜 것이다.
젊었을 땐 술을 끊으려 했지만,
중년에는 즐겨 술잔을 기우렸지
이 물건이 좋다니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가슴 속에 덩어리가 있어서겠지
아침에 아내가 나에게 알리기를
작은 항아리에 새 술이 괴어오른다 하기에
혼자서 주고받기엔 흥이 미진해
나의 친구 자네 오기만을 기다리네.
이행에게 주어 화답을 청한 시 가운데 한 수다. 진한 고독감이 묻어나면서 친구를 그리는 정이 넘친다. 벼슬에서 물러난 기간 동안 그는 맘껏 취하고, 친구들과의 여행도 즐긴다. 1502년(연산군 8) 봄에는 개성 천마산을 이행과 승려 해침과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같은 해 여름과 늦가을에는 박은, 이행, 남곤이 서울의 잠두봉 아래서 소동파의 적벽부를 기리는 뱃놀이를 했다.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은 이 때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절은 문득 신라의 옛 절이고
천 개의 불상은 모두 서축에서 온 것이라네
예부터 신인(神人)도 대외(大)를 찾으려다 길을 잃었는데
지금에 복스러운 땅은 천태산과 같구나
봄날은 흐려 비 오려는데 새들은 지저귀고
늙은 나무 정이 없어 바람이 절로 슬프다
인간만사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되나니
푸른 산도 세상을 겪느라 절로 먼지에 떠있구나
-‘복령사(福靈寺)’ 전문
천마산 유람에서 읊은 박은의 대표작으로 천고의 절조라 일컬어진다. 그의 사후 이행은 때때로 이 시에 나오는 ‘봄날은 흐려 비 오려는데 새들은 지저귀고(春陰欲雨鳥相語)’라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천기를 누설한 단명구(短命句)로 꼽히는, 천하에 둘도 없는 절창의 표현을 기억하며 친구가 곁에 없음을 슬퍼하곤 했다.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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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을 포함해 고령출신 5인의 신의를 모신 운천서원 묘정비각의 모습. 우곡면 사촌리에 있는 이 비각은 167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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