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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 |
토종돼지는 1908년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실시한 가축 개량사업으로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몸집이 작고 성장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늘 개량 대상이었다. 당시 일제는 검은색 버크셔종의 사육을 권장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토종 흑돼지는 버크셔종과 혈통이 섞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외래종이 섞였다고 해도 우리 땅에서 오래도록 자라고 적응했다면 이 역시 ‘토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김천시 지례면은 예로부터 토종돼지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투자 대비 수익성이 낮아 한때 위기도 있었지만, 1980년대 들어 지례면의 몇몇 사육농가를 중심으로 흑돼지를 복원하면서 지금의 브랜드가 탄생했다. 특히 지례 흑돼지는 일반 돼지보다 사육기간이 3개월 이상 긴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섬유질이 풍부하고 육즙이 잘 잡힌다.
지례면에는 흑돼지 전문 음식점이 10여곳에 이른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6편은 김천의 대표음식인 지례 흑돼지에 대한 이야기다. 토종돼지 개량사업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픽션을 가미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등장인물들은 재미와 흥미를 더하기 위해 내세운 가상의 인물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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쫀득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지례흑돼지 구이. 지례면 흑돼지 전문 삼거리불고기식당에서는 삼겹살과 목살은 소금구이로, 그 외 부위는 양념구이로 요리해 팔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네, 지례돈(知禮豚)을 아는가? 광복이 되면 꼭 찾아가 한번 맛을 보게.”
돼지고기를 먹는 자리가 있을 적마다 선생이 늘 하는 말이다. 또 그 얘기인가 싶어 건성으로 듣다가 오늘은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선생이 만주(滿洲)로 오게 된 것은 대구에서 몸담고 활동하던 지하조직이 발각됐기 때문이었다. 형사들에게 쫓기던 선생은 친구 박군(朴君)의 고향집을 찾아가 잠시 몸을 숨기기로 했다. 그곳이 김천 지례였다.
선생은 주로 밤길을 이용해 추적을 피했다. 성주를 지나 똥재를 넘었다. 낮은 산들이 길을 열어주는 듯 마는 듯하다가 마침내 앞을 터주니 감천(甘川)이 차분하게 흘렀고, 그 너머 야트막한 산 아래 자리 잡은 교리 마을이 보였다. 장날이라 지례장터는 일찍부터 붐볐다. 선생은 아침을 사 먹으며 박군의 집안이 몰락해 흩어졌고, 그의 처가 가까운 곳에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교동댁은 향교(鄕校) 뒤편 산자락 초가삼간에서 살았다. 교동댁은 말하자면 박군의 구식 아내이고, 남편에게 소박맞은 여자라 하겠다. 박군에게는 따로 살림을 차린 신여성이 있었다. 훗날을 도모하자며 헤어지던 날, 박군은 애인과 함께 일본으로 잠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그와 재회하는 일이 이후로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생은 박군이 부탁한 편지를 교동댁에게 전해주었다. 박군이 급하게 수첩을 찢어 손에 쥐어 준 것이었다. 편지를 쓸 때 선생이 옆에서 지켜봤는데, 돌아가지 않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일종의 이혼통첩이었다. 선생은 교동댁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이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을 뿐 덤덤했다. 남편의 일을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이었지만, 크게 묻지도 않았다.
“그 사람 친구 분이라 카마 나쁜 사람은 아이지예?”
교동댁은 하고 있는 꼴이 더러웠다. 옷은 너절했고, 얼굴은 땟국이 졌으며, 머리는 귀신 같았다. 갓 스물을 넘긴 여자가 마흔이라고 해도 믿어 줄 정도였다.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병을 얻어 두 돌 맞기 전에 잃었다고 했다. 박군에게서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으므로 선생은 당황했다.
무언가가 자꾸 다리를 비비고 잡아당기기에 선생이 깜짝 놀라 비켜섰다. 교동댁이 회초리를 집어 들자 열 마리도 넘는 흰돼지들이 꿀꿀대며 우리로 도망갔다. 짧은 다리를 가진 조그마한 것들이 오르르 사라졌다. 그런데 교동댁이 이번엔 갑자기 선생을 돼지우리로 떼밀어 넣었다. 향교 쪽에서 비탈길을 올라오는 검은 제복이 있었다. 교동댁은 그의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인 것을 직감하고 선생을 숨긴 것이었다.
“교동댁이, 고마 좀 씻으마 안 되겠나? 냄새가 끝내준다. 헤헤.”
주재소 순사 강(姜)이었다. 교동댁한테 일 없이 와서 자주 집적거리는 인간이었다.
“박가(朴家) 안 왔쟤? 오면 꼭 말해라. 운동가 잡아서 나도 진급해야지. 헤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치근거리더니 밥을 차려 달래서 주워 먹고 갔다.
강이 내려가고 선생이 돼지우리에서 나왔다. 옷이 엉망이었다. 강을 피해 있는 동안, 흰돼지들이 선생의 몸을 파고들었다. 밤색 양복 여기저기 흰 얼룩이 묻었다. 반대로, 몸빛이 희기만 하던 돼지들에게는 숯으로 칠한 것 같은 얼룩이 군데군데 생겨나 있었다.
“이것들이 되는 대로 암거나 줏어 먹고 살아서 더러 버짐이 생기고는 해예.”
선생을 쫓아 우리에서 빠져나온 돼지 몇 마리를 다시 몰아넣으며 교동댁이 말했다.
여벌의 옷이 없어 선생은 오후 내내 속옷차림으로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교동댁은 선생의 양복을 빨아 널고, 지례장에 돼지고기를 팔러 나갔다. 그사이 선생은 오래간만에 달게 잠을 잤다. 시간이 얼마나 됐을까. 우-우- 돼지를 모는 소리에 선생은 잠에서 깼다.
“소낙비가 와서 빨래 걷으러 뛰어 왔어예. 나오지 마이소. 장터는 지금 난리라예.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대니...”
면사무소, 주재소, 조합직원들이 선전대를 조직해 지례장터에서 색의장려운동(色衣奬勵運動)을 벌이고 있다 했다. 그것은 총독부가 열 올리고 있는 생활개선사업 중 하나로 전국 곳곳의 각종 연합회, 진흥회, 장려회가 호응하여 색이 들어간 옷을 입기로 결의하고 논객과 명사들은 흰옷을 버리자고 신문에 사설을 기고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관공서 출입을 막고 변소도 못 쓰게 했다. 흰옷을 세탁하자면 여성들의 시간낭비가 지나치다는 점이 큰 설득논리였는데,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이용하면서 여성의 힘을 군비증산에 돌리려는 의도가 짙었다.
장날이라고 모여든 사람 대부분이 흰옷을 입었는데, 흰옷 입었다고 먹물을 뿌리고 등에 먹도장을 마구 찍어대니 그런 난리통이 또 없더라는 것이다. 강이 하는 짓이 제일 심하다고 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동댁은 마당에서, 선생은 방에서 몹쓸 세상이라며 같이 혀를 찼다.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동댁이, 지금 누구하고 말하노?”
강의 목소리였다. 선생은 긴장하여 문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주먹을 꾹 움켜쥐고 문밖의 동태를 살폈다.
“내 혼자 말했다. 중얼거렸다.”
“외롭나? 혼잣말을 다 하시게. 아까 장터에서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데? 아따, 비 한 번 속 시원하게 내린다. 헤헤. 내가 그렇게 씻으랄 땐 말을 안 듣고, 오늘은 비가 교동댁을 씻었네. 이제야 인물이 난다. 헤헤.”
그때 갑자기 칼을 뽑는 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교동댁이 막을 틈을 주지 않고 강이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이 놈 박가야! 니는 독 안에 든 쥐새끼다!”
강과 선생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말문이 막혔다. 강은 선생이 박군이 아닌 것을 보고, 선생은 강이 들고 있는 서슬 퍼런 칼을 보고 등이 싸늘해졌다. 교동댁이 강을 끌어내리려고 애썼다.
“우리 친정 오빠다. 와 이라노?”
“오빠가 와 홀딱 벗고 있노?”
“가라. 귀찮다. 나가라!”
“말해라. 오빠가 와 홀딱 벗고 있냐고?”
강이 세게 뿌리치는 바람에 교동댁이 마당에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돼지는 영물일까. 주인이 화를 당하는 줄을 알고 돼지들이 몰려나와 강에게 덤볐다. 빗물이 흥건한 마당에 다리 반 백 개가 팥 끓듯 우르르 타 오르고, 열 개가 넘는 입이 깨물어 쌓자 강은 혼자 이겨낼 수 없었다. 달아나는 강을 교동댁과 돼지들이 쫓아갔다.
강을 제외하고는 곧 모두 돌아왔는데, 빗줄기 속에 서 있는 그들을 보고 선생은 아찔했다. 비를 맞은 돼지들은 색물이 빠져 본래대로 거멓게 되었고, 반대로 교동댁은 때를 씻어 희게 되었다. 같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선생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고 교동댁이 설명했다.
“고기도 많고 빨리 자란다고, 요새는 서양돼지를 키우라 그라고 씨를 섞어라 그래예. 조선에서 전래된 것은 전부 하등한 거라고예. 그런데 그거는 핑계고, 지례꺼먹돼지가 씨가 좋아서 빼돌린다 카데요. 만주국으로 보내고 일본으로 보낸다 카데요. 이것들이 쪼맨해도 고기는 제일이라예. 울 아부지가 그랬어예. 그런데 자꾸 조합에서 없애라 캐사서 내가 지킬라고 꺼먼 털에 흰 물을 들였어예... 문 닫아야겠네예. 감기 들리겠어예.”
교동댁이 고개를 돌리고 다가와 방문을 닫았다. 교동댁은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그들이 지금까지 스스로를 더럽혀 자신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가 잦아들었다. 선생은 금방이라도 강이 주재소 순사들을 동반하고 나타날까 염려되었는데, 교동댁의 얘기를 듣고 다시 안심했다. 강이 향교를 지나쳐 갈 때 웬 사람들이 번쩍하고 나타나서 강을 때려 눕혔다는 것이다. 아까 흰옷을 입고 지례장터에 있다가 강에게 먹도장을 찍힌 사람들이었다. 강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앙갚음을 한 모양이었다. 교동댁이 말려서야 사람들은 구타를 멈췄고, 까무러친 강을 큰 길에 버리고 사라졌다고 했다. 강이 금방 정신을 차릴 것 같진 않다고 교동댁이 말했지만, 선생은 그날 밤 지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교동댁은 젖은 마당 한쪽에 돌을 쌓아 화덕을 만들고 장작불을 피웠다. 솥뚜껑을 걸치고 돼지고기를 올렸다. 그래 놓고 교동댁은 또 이리저리 잔일을 해 나갔다. 조선의 까만 돼지들은 자는 듯 조용했고, 선생은 고기를 뒤집었다.
“자꾸 뒤집지마예. 고기 안 익어예.”
교동댁은 된장을 퍼담고 푸성귀를 뜯어온 뒤, 잘 구워진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잘랐다.
“꼭꼭 씹어예. 비계가 꼬독꼬독해예. 기름이 좋아서 입에 찝지부리한 것도 없어예.”
불은 이글이글, 돼지고기는 지글지글. 그리고 선생은 중얼중얼했다. ‘사람이 빈틈없이 꽉 찼구나.’
“뭐라꼬예? 고기가 입에 안 맞아예?”
선생은 고기가 어질고, 그 맛이 참으로 빈틈이 없는 맛이라고 했다.
“맛이 좋지예? 말 안 해도 얼굴보마 알아예.”
비가 씻고 지나간 밤하늘이 깨끗했다. 은하수가 어제보다 더 넓고 깊었다. 고기도 배불리 구워 먹었고, 이제 선생이 떠나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었다. 교동댁이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내가 못 배워서 글을 몰라예.”
아침에 선생이 교동댁에게 전한 박군의 편지였다. 선생은 잠시 머무적거리다가 편지를 읽었다.
“부인, 우리가 우리 빛깔을 갖고 살지 못하니 어려운 시절이오. 때때로 더러운 것에 우리 스스로를 던져 본디의 빛깔을 지켜야 할 때도 있나 보오. 서로가 가진 빛깔을 너그러이 봐주는 세상, 마음 놓고 제 빛깔 드러내고 사는 세상이 꼭 올 것이오. 언젠가 그 진면목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오. 그날이 올 때까지 부디 자신을 지키며 잘 사시오. 당신의 남편 박XX.”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 편지의 실체를 곧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선생은 편지를 그렇게 고쳐 읽고 싶었다.
“뭐라카노, 우짜란 말이고? 돼지 치고 잡고 씻고 굽고 삶고 끓이고, 계속 그렇게 혼자 살으란 말이가?”
교동댁은 편지를 화덕에 던졌다. 화르르 불꽃이 일어 종이를 태웠다.
“별 얘기도 없네예... 진짜 멀리 가는 모양이지예...”
교동댁은 붉게 달았다 삭아 재가 돼 버리는 종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젠가 지례돈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자네도 알게 될 거야. ‘아, 이 맛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바로 그 맛이구나’하고 말이야.”
매번 같은 말. 선생은 또 그렇게 지례돈 얘기를 끝맺었다. 조국에서, 그리고 이곳 만주벌에서 셀 수 없이 생사를 넘나든 광복군의 가슴에 채 하루도 안 되는 지례의 일들과 단 한 번 맛본 그 돼지구이의 맛이 각별히 남은 이유가 뭘까. 선생의 말을 들으며 오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선생은 지례돈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교동댁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망설이다 물었더니 선생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변하였던 선생의 얼굴을 보면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조정일(극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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