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역사가 녹아있는 근대건축 .8] 대구제일교회(약전골목 위치)

  • 이지용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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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10   |  발행일 2015-10-10 제4면   |  수정 2015-10-10
대구읍성 첫 교회…종탑 하나에 층마다 다른 6개 창문형식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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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제일교회는 정면 우측에 종탑을 둔 벽돌조 2층의 고딕식 건물로, 대구 중구 남성로에 있는 약전골목 중간지점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교회 자리는 조선시대 대구읍성의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이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이 집은 대지 420여평(1천380여㎡)에 초가 다섯 채와 기와집 네 채가 있는 큰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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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에 찍은 야소교회당.
1879년 '야소교회당'

1897년 신도의 기와집 매입해
美 북장로회 경상도 선교기지로
남문안·성내 교회 등으로도 불려


대구지역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893년,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구역이 경북지역으로 정해지면서 그해 4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인 베어드(W. M. Baird) 선교사가 대구읍성 안 종로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1895년 12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를 대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북장로회 선교부의 이전의 이유는 다양했다. 대구가 경상도 북부의 중심지이고, 인구 7만5천명으로 추정되는 최고의 밀집지역인 데다 낙동강을 통해 부산의 선교기지와 연결되며, 정치적·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고, 외국인이 부동산을 구입·수리·입주하는 경우에도 관리들이 방해하지 않아 선교기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산에 있던 당시 대구 종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베어드 선교사는 1896년 1월 대구읍성의 남문 안에 있는 신도 정완식의 집을 매입하여 수리한 후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이듬해인 1897년, 베어드 선교사는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이 되어 대구를 떠나고 후임으로 그의 처남인 아담스(J. E. Adams, 안의와) 선교사가 왔다.

1897년 11월 대구에 부임해온 아담스 선교사가 이 집의 기와집 한 채를 야소교회당으로 사용함으로써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창립되었다. 당시 교회의 이름은 대구읍교회, 성내교회, 남문안교회로 불렸다. 대구읍성 바로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들이다.

1898년에는 의사인 존슨(D. B. Johnson) 선교사가 이곳에 있었던 초가에 대구 최초의 서양 의학병원이며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워 서양 의술을 소개했다. 1900년에는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 최초의 근대학교인 희도학교를 개교하였다. 이어 브루엔(H. M. Bruen, 부해리) 선교사와 그의 부인(M. S. Bruen, 부마태)이 합세하여 대남학교, 신명여학교를 설립하여 의료와 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후 교세가 확장되면서 큰 예배당이 필요해졌고 1907년 이근배, 이영민, 정인구 등의 교인이 교회 내에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새 예배당 신축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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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건립 초기의 제일교회.

1908년 ‘남문안 예배당’

전통목수 참여로 韓·洋양식 절충
일제 땐 ‘남성정교회’로 불려져
1931년 철거…사진 한 장만 남아


그리하여 1908년 교인들의 헌금을 모아 그때까지 교회당으로 사용해 오던 야소교회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예배당을 지어 남문안 예배당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동명(同名)이 개정된 후에는 남성정에 있는 교회란 뜻으로 남성정교회라 하였다.

남성정교회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전통목수들이 함께 지은 교회당이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흙벽을 쳐서 하얀 회반죽을 발랐으며, 지붕은 한식 합각지붕에 양철(함석)을 이었다. 교회의 정면 한가운데 출입구를 겸한 종탑을 세우고 그 양쪽에 세로로 긴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좌우가 대칭을 이루었다. 이 건물의 양철지붕, 창문, 종탑 등은 당시 대구부민들에게는 매우 이색적이고 경이로운 것으로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예배당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과 그동안 대구지역에 들어온 서양의 건축양식을 본뜬 한·양절충 양식의 건물로 지붕 모양에서는 토착적 요소가 느껴지나 벽면 구성은 서구적 특성을 보였다. 이 건물은 건축역사적, 문화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1931년에 철거되고 현재 정면을 찍은 사진 한 장만 남아 있어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1933년 ‘제일교회’

헌금으로 고딕 벽돌조 2층 신축
37년엔 우측부 벽돌조 5층 종탑
높이 33m·연 13평 現 모습 완성


남성정교회는 1923년부터 교회 내부의 문제, 이른바 자치파동(이만집 목사의 출옥 후 한국인 목사와 선교사 세력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문제들)으로 1천여 명의 교인이 분열되는 등 창립 이래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31년 11월 교회 내부의 문제들이 해결되어갈 무렵 남성정교회에 부임한 최재화 목사는 피폐된 교회의 정신을 쇄신하기 위해 새 예배당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1933년 9월 교인들의 헌금과 지방교회에서 모금한 헌금으로 고딕풍의 벽돌조 2층 교회당을 건축하고 제일교회로 개명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7년 이주열 권사가 수성들에 있던 논을 팔아 희사한 헌금과 교인들의 특별헌금으로 예배당의 정면 우측부에 벽돌조 5층(높이 33m), 연 13평(약 42㎡)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 건물의 설계와 공사는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던 건평사에서 하고, 공사감독은 신도인 김종수씨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제일교회 설계도를 보면, 종탑이 현재와는 달리 교회 정면의 좌측(서쪽)에 위치해 있어 교회 몸채가 건립된 후 종탑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우측부인 동쪽으로 위치를 바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는 서쪽보다는 동쪽을 선호하는 한국인 신도들의 방위관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약전골목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높은 종탑, 그 좌측에 3개의 반원아치로 구성한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출입구 위의 2층은 베란다로 구성되어 교회 앞 마당과 멀리 앞산을 조망할 수 있다. 정면의 2층 벽은 커다란 뾰족아치창(창의 윗부분을 뾰족하게 한 창)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각각 같은 모양의 아치창을 쌍으로 배열하여 균형감과 조화로움을 느끼게 하였다.

교회의 측면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벽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부벽을 세워 보강하고, 1층에는 반원 아치창, 2층에는 뾰족아치창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정면에 두 개의 탑을 구성한 계산성당과는 달리 종탑을 한 개만 설치한 일탑형이라는 것과 종탑부의 구성이다. 종탑은 붉은벽돌을 5층 높이로 쌓고, 그 위에 팔각형의 첨탑을 높게 세웠는데 각 층에 설치된 창문의 모양과 구성형식이 층마다 다르다. 즉 이 종탑 하나에 여섯 가지 창문형식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 내부, 평면의 전체적인 모양은 정면 폭보다 측면이 긴 장방형이다. 정면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긴 홀이 있고, 이 홀의 앞쪽 중앙에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가 있으며, 홀의 좌우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은 전체가 예배실로 안쪽 가운데에 설교단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긴 목재 마루판을 깔고, 벽면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목재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붙여 마감하였다.

1981년 증축-94년 ‘이사’

69년 중수 이어 건물 뒤편 증축
94년 본교회 옮긴 후 선교관 활용
각부 비례·조적 수법 귀중한 자료

제일교회는 1933년 건축된 후 1969년 내부 중수공사에 이어 1981년 6월 본당이 협소하여 건물 뒤편으로 514.8㎡(156평)을 증축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해오다가 1994년 동산동 옛 영남신학교 자리에 본교회를 신축하여 옮겨갔다. 본 교회가 옮겨간 이듬해인 1995년 4월 원인 불명의 화재로 내부가 많이 훼손되고, 교회 뒤편으로 소방도로가 개설되게 됨에 따라 1997년, 교회 뒤편의 증축 부분을 철거하고, 지붕과 내부를 수리·보수하여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구하였다. 현재 이 교회는 제일교회 선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벽돌 조적조이기는 하나 외관 구성에서 고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각부 비례와 조적 수법 등이 정교하여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이곳은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회인 남문안교회가 창립되어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활동과 교육을 전개하였던 장소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대구제일교회는 대구지역 기독교 교회사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1992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공동취재= 윤재웅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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