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인·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베트남戰 굴곡진 슬픔속에서 누른 셔터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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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1-04   |  발행일 2019-01-04 제34면   |  수정 2019-01-04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사진가 이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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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촬영한 나가사키 지옥 섬 군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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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백마부대가 승리한 베트남 오작교 승전비를 제대로 찍기 위해 3시간40분간 차 위에서 구름을 기다리고 있는 이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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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갑은 지난 11번의 개인전을 정리하며 혼혈인,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일본 속 잔재, 베트남 증오비 등 모두 5권의 근대사를 녹여낸 사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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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찍은 베트남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 학살 증오비. (사진제공=이재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맏딸 서현이가 내 누선을 터트렸다. 2011년 나가사키 군함도 등 일본에 살아 숨쉬는 조선인 희생자의 흔적을 찾아다닌 기행기 ‘일본을 걷다’란 책이 출간됐을 때다. 맏딸이 내게 다가와 “책 두 권을 기증하라”고 부탁했다. 한 권은 선생님, 또 한권은 도서관에 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 아이가 내게 준 짠한 손편지를 코팅해 늘 부적처럼 갖고 다닌다. 비록 아내에겐 철없는 넷째 아이였지만 처음으로 맏딸한테 인정받았을 때 난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역사 속 나그네였다. 사진을 위해 오래 고향 대구를 떠나 있었다. 하지만 사진 30년전 때 새삼 대구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사실 내 e메일 ID도 ‘053PHOTO’. 1989년 12월 제대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지인의 소개로 연극 무대를 촬영하게 되었다. 1991년 난 연극배우한테 빠져 있었다. 무대에선 왕이었지만 무대 뒤에서는 쪼그려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배고픈 배우들. 그들의 이율배반적 일상의 이미지가 사진작업에 엄청난 기운을 제공해주었다. 어느 식당 뒤풀이 술자리에서 들은 한 배우의 농담성 촌철살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술요? ‘예, 술’이나 마십시다!”라고 넋두리했다. 섬뜩한 풍자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술은 폼도 미학도 아니고 그냥 일상의 연장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내 작가정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와의 시간을 사진으로 환원시킨 뒤 1991년 4월에 ‘무대 뒤쪽의 차가운 풍경’이란 제목으로 동아백화점 동아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다. 난 그때만 해도 역사보다 일상에 더 매몰돼 있었다.

◆혼혈인… 그 연대기 속으로

1991년이 1992년으로 건너갈 때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든다. 선후배들도 내 곁을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다. 아직 나는 나밖에 보지 못했다. 그게 남들에겐 되레 ‘상처’였다. 연극무대 뒤 차가운 풍경은 내게 예술적 허탈감을 안겼다. 덫같은 시간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긴 독서와 여행에 매달렸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날 정신차리게 하는 회초리같은 TV프로그램이 있었다. 혼혈 가수로 유명한 박일준이 “저는 어린 시절 우유를 정말 많이 먹었다. 흰 우유를 먹으면 내 검은 피부가 하얗게 변할 줄 알았다”면서 혼혈인으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지난 시절을 뼈아프게 고백했다. 새로운 이재갑이 되는 터닝포인트였다. 당장 홀트복지회에 전화했다. 혼혈인 지원단체가 펄벅재단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장편소설 ‘대지’를 쓴 펄벅 여사. 그녀는 동아시아 혼혈인의 인권을 공론화한 인물이다. 그녀는 혼혈인을 아메리카와 아시안의 합성어란 의미로 ‘아메라시안’이란 학술용어로 제시했다. 현재 동남아 이주노동자 같은 다문화가정 사람들은 ‘코시안(코리아아시안)’으로 불린다.


잊혀가는 韓 근대사 이면 속 ‘나그네’
딸이 인정한 나의 길…평생 갈 자신감

방송에서 본 혼혈가수 박일준의 고백
정신 번쩍 들게 한 국내 혼혈인 문제
26년간 아메라시안·코시안과 공감대

서대문 형무소·미곡 수탈현장·탄광…
석탄빛으로 물든 조선인 군함도 만행
7년간 경산 코발트 광산 현장도 품어

베트남 민초들에게 가한 또다른 폭력
유족이 세운 한국장병 증오비도 기록

현재 직면한 기형도시 쓸쓸한 풍경 작업
조만간 만주 독립군 루트 기록할 계획



난 당시 한국혼혈인협회장이었던 가수 윤수일 등과 잦은 접촉을 하면서 국내 혼혈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시한 박근식과 형제처럼 지내게 된다. 그들의 아픈 맘을 달래주지 못하면 절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일단 혼혈인과 공감대 형성을 위해 콧수염부터 길렀다. 혼혈인들을 촬영할 때 나는 몇 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는 평생 인연을 이어나간다는 것, 둘째는 그들의 역사를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덕분에 1997년 ‘혼혈인-내안의 또 다른 초상’, 2006년 ‘또 하나의 한국인-주민등록증시리즈’, 올해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빌린 박씨 사진전’을 열 수 있었다. 무려 26년간 지속된 ‘혼혈인 시리즈’를 마감할 수 있었다. 난 아직도 박근식을 잊을 수 없다. 1970년 초여름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필 진정서를 앞세운 채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게 혼혈인 처우개선 여론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의 밀양 박씨를 성으로 삼았다. 그는 밀양 박씨가 아니라 빌린 박씨라 했다.

◆역사 속으로 잠행하다

혼혈인의 역사를 훑어나가자 우리의 모든 아픈 역사가 줄줄 풀려나왔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2차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 참전 등을 둘러싼 한국·중국·일본·미국·러시아의 상호 잔학사는 하나의 비극이었다. 흉터에 근접할수록 그 비극사가 ‘현재진행형’이란 걸 절감했다.

일단 한국 속 일제강점기 잔재에 대한 사진작업에 착수한다. 1996년 2월이었다. 그 무렵은 개발지상주의시대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촬영 장소에 다시 가보면 택지구역, 도로 등에 편입되기 일쑤였다. 다들 일제가 물러갔으니 잔재도 빨리 잊는 게 좋다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경일대 앞 한 사과밭에 가려져 있던 폐가로 방치된 일제강점기 주재소를 촬영할 수 있었다. 주재소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같은 심정이었다.

관심은 전국으로 향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해체되기 전의 중앙청, 군산·목포·강경 등 전라도 미곡 수탈의 현장, 문경 등 경상도 여러 탄광을 훑고다녔다. 근대사 공부를 병행해나가야만 했다. 촬영 전에 반드시 관련 사료를 훑어야만 한다. 역사의 현장, 그 공간만 봐선 복잡다단한 역사의 층계를 알 수 없다. 그런 어름 난 내 인생에서 가장 참혹한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민간인 학살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경산 코발트광산’이다. 처음에는 금광이었다가 나중에 코발트가 발견되자 일본 정부가 직접 개발하다가 광복 직후에는 보도연맹에 연루된 3천600여명의 민간인 학살지로 둔갑한다. 유족회와 접촉했다. 거기서 열 가족을 밀착촬영했다. 장화를 신고 물이 차오른 수직갱도로 내려갔다. 마치 내가 학살된 보도연맹원 같았다. 그렇게 7년간 그 현장을 품었고 전시회도 할 수 있었다.

◆군함도와 베트남 증오비를 찾아서

적산가옥 작업 일환으로 전국 자전거투어를 했다. 일제 때 바둑자 모양의 군사계획도시가 구획되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일본에서 역추적하기로 했다.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홋카이도, 도쿄 등 징용된 조선인이 머물렀던 흔적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요즘 인구에 많이 회자되기 시작한 나가사키 군함도 작업이 시작된다. 작고한 의인 오카마사하루 목사를 비롯한 나가사키 활동가를 만나 전수조사할 수 있는 도움을 받는다. 이를 통해 조선인 196명이 군함도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은 놀랍게도 군함도 만행을 1964년부터 고발했다. 세밀한 도면까지 보여주는 전시관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우린 겨우 2015년에 되어서야 군함도를 터트렸다. 본말이 전도된 일이 아닌가. 군함도는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늘 몰래 들어가서 촬영했다. 그 섬을 얼추 50번 이상 다녀온 것 같다. 아직 일반인에겐 생소한 조선인 숙소 구역 촬영 때의 서글프고 무기력한 기분이 떠오른다. 2008년 7월 그 여름에 찍힌 군함도 앞 바다는 푸른빛을 잃어버렸다. 석탄빛 그 자체였다.

“우린 일본을 욕하지만 아직도 일본 각처에는 21만명의 의로운 활동가가 있어 일본이 침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조선인 희생자를 위해 오키나와와 경북 영양에 ‘한의비(恨의碑)’를 세워준 오키나와의 민중조각가 긴죠 미노루도 그런 활동가 중 한 명이다.

일제강점기엔 일본, 군정 때는 미국이 이 나라의 주인이었다. 근대사를 파고들면 일본과 미국이 마구 쓰다버린 휴지조각 같은 한국의 우울한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폭력은 저마다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의 희생물이었다. 제국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냉전체제, 이데올로기갈등 등으로 인해 권력도 국가도 민초도 모두 희생자였다.

드디어 베트남 민초들에 대한 기록에 나선다.

나는 치과의사 송필경의 도움으로 14박15일로 ‘호찌민루트’를 간다. 거기서 한국과 베트남의 굴곡진 슬픔을 하나씩 확인할 수 있었다. 1991년 한겨레신문에 처음 베트남 내 파월장병들의 민간인 사살을 고발한 활동가 구수정도 만났다. 그렇게 7년간 베트남 격전지를 돌아다녔다. 베트남 유족이 세운 한국 장병 증오비도 하나씩 기록해나갔다. 그 결과가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이란 개인전이다.

◆나도 나를 위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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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생 30년전 포스터.

역사도 하나의 미궁. 출입구만 있고 나오는 길은 없어 보인다. 너무 많은 상처를 밟았다. 나도 통증 같은 내 작업으로부터 잠시 위안을 받고 싶다. 역사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원은 언감생심, 늘 내 돈이 깨져야만 했다. 고비마다 지원군이 나를 지켜주었다. 모두의 길은 그래서 시종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2002년부터 부담없는 촬영을 시작했다. ‘뇌(腦)안의 풍경-기형도시’다. 여긴 피울림 범벅된 역사는 없다. 그냥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시 주변의 쓸쓸한 풍경을 담는 연대기다. 내가 강의를 다녔던 경일대 등 도농복합지역의 음산한 정경이다. 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학교 옆 원룸촌 센서등은 차량이 들어올 때마다 깜빡거린다. 한밤 중 그걸 멀리서 보면 무슨 도깨비불 같다. 그래, 거기는 ‘기형도시’ 였다. 마침 그때 제자가 건넨 기형도 시인의 시에 몸을 벤다. 기형도시와 기형도 시인의 시. 둘의 묘한 앙상블이 내 사진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조만간 만주의 ‘독립군루트’도 기록할 계획이다. 며칠 후 12일 일정으로 중국으로 간다. 나도 독립운동을 하는 건가?

집과 길 사이에 근대사란 종이배가 떠 있다. 난 그 배를 타고 막장 석탄처럼 웅크리고 앉아 머나먼 항해 중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 작업도 끝이 날 것이다. 더이상 셔터를 못 누르는 이재갑. 그때 비로소 난 집으로 돌아와 초침처럼 밀쳐둔 ‘가사(家事)’를 돌 볼 것인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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