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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
허구연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로 기억한다. 1980~1990년대 프로야구 해설자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한 TV 중계방송에서 이런 말을 던졌다. "좋은 수비는 절대 화려하지 않습니다." 관중은 대개 안타성 타구를 멀리서부터 달려와 멋지게 슬라이딩 캐치하는 외야수의 플레이에 열광한다. 물론 이 또한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허구연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 잘 맞은 타구도 평범한 타구처럼 처리할 만큼 위치 선정이 뛰어난 수비수를 더 높이 쳐줬다. 상대 타자의 습관, 성향 등을 미리 파악한 후 타구 방향을 예측해 수비 위치를 이동(수비 시프트)하는 전술적 플레이를 제시한 셈이다.
'수비 시프트' 개념이 확실치 않던 시절, 허구연의 해설은 야구가 아니라 철학처럼 들렸다. 문제는 이 같은 지능적 수비가 일견 너무 평범하게 비쳐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MLB(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가 내년 시즌 수비 시프트를 금지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관중은 아슬아슬하지만 화려하고 묘기 같은 수비를 더 좋아하는 게 사실이다. 이런 관중의 태도는 때때로 해당 팀 전체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수비를 잘한다는 개념마저 왜곡시킨다. 만약 관중이 국민이고, 화려한 플레이의 외야수가 국가 지도자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궁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경찰관·응급구조대원 등은 사건이 발생한 지점(혹은 시점)에서 활약하는 영웅이다. 하지만 애초에 궁지에 빠지지 않도록 조용히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은 속성상 빛나지도 않고 영웅 대접받기는 더 어렵다. 세계적 경영 리더인 댄 히스는 '반복되는 문제의 핵심을 뚫는 힘'이라는 부제가 달린 저서 '업스트림(상류로)'에서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문제가 발생한 지점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문제 자체를 차단하는 방법을 찾을 것을 주문했다. 댄 히스의 통찰은 허구연의 해설과 궤를 같이한다. 위기를 자초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선제적 대응을 하라는 것.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는 팽창의 경험을 거의 가져보지 못한 민족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정도를 제외하면 '수비의 역사'로 일관한다. 위험에 늘 노출되고 위기상황은 반복됐다. 그럴 때면 또 늘 그렇듯 영웅이 등장한다. 이는 DNA처럼 유전됐다. 대한민국의 많은 조직은 '문제가 발생해야 수습하는 패턴'에 익숙해져 있다. 태풍 '힌남노'에서 보듯 피해는 반복되고 정부·지자체는 뒤늦게 대책을 마련한다고 부산을 피우니 어찌 이렇게 판박이일 수 있는가. 참으로 희한하다. 미국이 반도체·자동차·바이오 등 미래산업 패권을 쥐기 위해 '미국 내 생산 땐 인센티브'라는 행정명령을 내릴 것을 알고도 선제 대응하지 않은 것은 또 뭔가.
출범 4개월 지난 윤석열 정부가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경제적으로는 IMF급 고환율 위기, 정치적으로는 여당 내홍과 부인 리스크, 대외적으로는 4강 외교력 부재 그리고 대북정책의 '담대한' 실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뭐 하나 쉬워 보이는 게 없지만 국정 지지율 30% 턱걸이가 말해 주듯 뚜렷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강한 대한민국에 걸맞은 리더십을 기대했지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되레 '기본부터 배우라(South Korea's president needs to learn the basics)'고 일갈했다. 참으로 모욕적이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대통령 주변의 권력 놀음은 참으로 한심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상류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순신'만을 기다릴 순 없다.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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