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배롱나무(1) 여름 100일간 붉은 자태 뽐내다 가을꽃에 바통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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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23   |  발행일 2022-09-23 제33면   |  수정 2022-09-23 08:23
2~3개월간 꽃이 피고 지는 백일홍
동래정씨 시조 선산에 900년전 심어
원줄기는 썩고 새로 자라난 두 그루
천연기념물 유일 지정…공원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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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양정동 배롱나무. 196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배롱나무는 900년 전 정문도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두 그루가 성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진우 촬영, 2015년 7월)

여름에 피는 꽃은 대부분 오래 피는 것 같다. 연꽃과 능소화가 그렇고, 무궁화도 마찬가지다. 꽃이 100일 동안 꽃이 피어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도 마찬가지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라는 의미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꽃들이다.

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한 배롱나무꽃은 지금도 피어난다. 꽃이 한 번 피어 2~3개월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꽃들이 연이어 피고 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는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주고 가을로 들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더 진해진 빛을 발하며 가을꽃들에 바통을 넘겨준다.

이런 배롱나무를 요즘은 쉽게 볼 수 있다. 근래 들어 전국 곳곳에 가로수와 정원수 등으로 많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흔하지 않았다. 오래된 산사나 서원, 종택, 묘소 등이 아니면 잘 만나보기 어려웠다. 배롱나무도 고목이 적지 않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한 건(두 그루)뿐이다. 부산 양정동 배롱나무다. 1965년 4월에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이 배롱나무는 지정 당시의 명칭은 '부산진 배롱나무'였고, 추정 수령은 800년이었다.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1동, 화지산 화지공원 내에 있다.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이 나무에 대한 기록이다.

'원줄기는 죽고 새로 자란 동쪽의 4그루와 서쪽의 3그루가 있다. 동쪽의 것은 키가 7.2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60~90㎝ 서쪽의 것은 키가 6.3m이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50~90㎝ 정도이다. 고려 중엽 때, 동래정씨의 2세 정문도공의 묘소 앞에 동서 양쪽으로 각기 1그루씩 심어진 것이 원줄기가 썩고 변두리 부분만 살아남아 오늘날의 모습으로 된 것이다.'

두 그루의 원줄기는 오래전에 죽고 그 주변에 새로 자라난 가지들이 성장해 지금의 상태가 된 것이다. 지금은 별개의 나무들처럼 보인다. 최근에 측량해본 결과동쪽 나무는 높이 8.9m, 나무 전체 폭은 남북 10.9m와 동서 11.2m로 원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 나무는 높이 7.7m, 나무 폭은 남북 9.4m와 동서 4.11m이다.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는 묘소는 동래정씨 시조 선산인 화지산 자락에 있는데, 정씨 가문이 이 묘역 일대를 가꾸어 오다 근래 시민들에게 개방하면서 '화지(華池)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천연기념물 배롱나무는 동래정씨 시조로 알려져 온 2세조 정문도의 묘소 앞 좌우에 있다. 정문도는 고려 중기 동래 지역의 호장(戶長·고려 시대 지방 향리직의 우두머리)을 지낸 인물이다. 이곳에 그의 묘소를 쓴 이후 후손 중 고려와 조선 시대에 많은 인재가 배출돼 명문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이 정문도 묘는 '정묘(鄭墓)'로 불리어 왔다. 배롱나무 아래 1732년에 세운 묘비 '동래정씨 시조 고려안일호장부군묘갈(東萊鄭氏始祖高麗安逸戶長府君墓碣)'이 서 있다. 묘비명은 후손이 썼다.

이곳은 명당으로도 유명한데, 묘비 내용 중 '공께서 세상을 떠나서 장사 지낼 적에 행상(行喪)이 화지산에 이르자 마침 눈이 녹은 것이 범이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 같은 기이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장사 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다.

배롱나무는 이 정묘를 조성할 때 심은 것이라 전한다. 정문도의 생졸년은 알려지지 않으나 그의 손자 정항이 1136년 57세 때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문도가 110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면 그 수령이 지금은 900여 년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무둥치가 900년이 된 것은 아니다. 국내 최고령 배롱나무인데, 현재 생장 상태가 양호한 상황은 아니다. 양쪽 다 주홍색 꽃이 핀다.

정묘 주변에는 정문도를 기리는 사당인 추원사가 있고, 정묘를 수호하기 위해 고려 때 창건한 화지사도 있다. 화지사는 영호암(永護庵), 만세암(萬世庵), 정묘사(鄭墓寺) 등으로 불리다가 최근에 화지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배롱나무가 '정묘사 배롱나무'로도 불리는 이유인 것 같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김봉규의 수류화개(水流花開)] 배롱나무(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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