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순국선열의 날

  • 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 |
  • 입력 2022-11-16 07:40  |  수정 2022-11-16 07:47  |  발행일 2022-11-16 제29면

변재괴
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를 뜻하는 '귀태(鬼胎)'는 일본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처음 쓴 조어다. 민족주의가 군국주의로 왜곡된 1905~1945년의 일본, 특히 '만주국'을 지칭한 것으로 알려졌다. 1850년 말 일본 어느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는 제자들과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30세 안팎의 스승이 한 명 있었다. 한때 존왕양이와 쇄국을 외쳤던 그는 어느 순간 개항과 정한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일본 국민이 가장 존경한다는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그의 제자인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며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저서 '유수록'에서 국력을 키워 뺏기 쉬운 조선·만주·중국을 복종시키고, 교역에서 러시아·미국에 잃은 것은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이 국력을 키워 서양한테 당한 것을 만주·중국·조선에서 되찾아 오자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이 주입한 대로 세계 평화를 해치고 조선 침탈의 선봉에 선다. 조선 입장에서 볼 때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는 절대 태어나선 안될 귀태였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쇼인의 제자들과 하수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거쳐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5천년 역사에서 주권과 언어를 통째로 빼앗기는 미증유의 민족적 수난을 1945년 광복 때까지 50년간 겪게 된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순국선열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명성황후 피살일인 1895년 8월20일부터 광복절인 1945년 8월15일까지의 기간 중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죽은 분들로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을 받은 분들이다. 순국지사의 범위와 유형은 1960년 당시 보사부 순국선열 선정 회의에서 의결된 전사(戰死)·형사(刑死)·자결(自決)·피살(被殺)·옥사(獄死)·옥병사(獄病死) 등 6개항에 해당하는 분을 규정하고 있다.

어디 목숨 바치는 일이 쉬운 일인가. 그러나 선열은 나라를 지키고 찾기 위한 명분으로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은 제31회 회의에서 을사늑약일인 11월17일을 순국선열 공동 기념일로 제정하고, 광복으로 환국할 때까지 매년 임시정부의 법정 기념행사로 거행돼 왔다. '순국선열의 날'은 이렇게 탄생했다.

올해로 순국 100주기를 맞은 예관 신규식 선생은 통분하며 남긴 유고집 '한국혼'에서 망국의 원인을 이렇게 짚었다.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버렸고, 둘째는 선민들의 공렬(功烈)과 이기(利器)를 잊어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國史)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버리길 잘하다 보면 그 나라는 망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국난을 당할 때마다 국민이 나라를 구하지만 정작 위정자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 말 신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는 있었지만, 무사안일과 척사에 밀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세도가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능한 왕을 옹립하고 세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 나라를 잃은 이유는 많다. 일본의 탐욕스러운 영토야욕이 첫 번째고, 조선 후기 위정자들의 매국·부패·무능이 두 번째다.

조선 말 문호를 개방하고 국부를 쌓고 부국강병의 기틀을 만들어 강국의 대열에 올려놓은 큰 인물이 있었다면, 그래서 조선 침략을 꿈도 못 꾸게 했다면 역설적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누구누구는 귀태였다'고 원성과 한탄을 쏟아내지 않았을까. 제83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면서 광복의 밝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스러져간 순국선열의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