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 인사를 찾아서] '구미 출신'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정치로 풀 것은 정치로 풀어야…법원에 판단 의뢰, 옳은 해결책 아냐"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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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24 08:14  |  수정 2024-01-24 08:15  |  발행일 2024-01-24 제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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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좌우명은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다. 이달 말로 36년간의 법관생활을 마무리하는 그는 은퇴 후 우리사회의 인공지능(AI)·디지털 정보격차를 줄이는 사회공헌활동을 계획 중이다. 〈강민구 제공〉

강민구(사법연수원 14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자칭 '별난 놈, 독한 놈, 이상한 놈'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손쉽게 사는 길을 찾을 때 그는 일부러 멀리 돌고 돌아서 길을 만들었다. 매년 봄날이 되면 섬진강가의 차밭으로 가 직접 차를 만들었다. 어린 찻잎을 수차례 덖고, 찌는 과정을 반복하여 만든 녹차는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눠 마신다.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혼돈에 빠졌을 때는 매일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전 세계 뉴스를 분석해가며 1년 6개월간 '페이퍼'를 만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 또 장기 미제사건과 같이 어려운 재판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모두 맡아서 하다 보니 '바보 판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구미 출신으로 이달 말 퇴임을 앞둔 강 부장판사는 "1988년 3월2일 서울지법 의정부지원에 들어설 때 막연하게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공의롭게 닦아주어 퇴직 시 강민구 1인 주식회사의 1주당 가치를 무한대까지 올리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그 다짐을 실현한 듯해서 후회나 여한은 없다"고 말했다.

일국의 판사라는 자신감으로 일해
헌법·공평한 정의감 등이 '동아줄'

법원 외부 '통합중재원' 신설 필요
영미법계 국가서 보편적으로 활용

법조계도 AI시대에 적극 대비해야
정보 격차 줄이는 사회활동 하고파


◆재임기간 36년, 1만201건 판결

한국에는 대략 3천명의 법관이 있다. 강 부장판사는 그중에서 독보적으로 많은 재판을 진행했다. 36년 재임기간 동안 1만201건의 판결문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 1만건이 넘은 경우는 강 부장판사가 유일하다. '구로공단 농민토지 강제수용 손실보상 사건'이 강 부장판사에게 가장 뿌듯한 기억으로 남는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서울 구로동 일대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겼던 농민과 유족들이 국가로부터 650억원을 돌려받는 등 소송 47년 만에 피해를 회복하게 된 사건이다. 또 10년 만에 조정으로 종결시킨 '녹십자 혈우병약 에이즈 감염사건'을 비롯해 '4대강 한강유역 사건' '군대 가혹행위 피해자 유공자 인정 사건' 등도 남다르게 다가온다.

강 부장판사는 "재판에서 저의 동아줄은 '헌법·헌법정신·법률·확립된 선례와 판례·공평한 정의감'이었다. '일개 판사'가 아닌 '일국의 판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해왔던 것"이라며, "선한 일을 한 집안에는 필시 경사가 쌓인다(積善之家 必有餘慶)를 좌우명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자타 공인 IT 전문 법조인

최근 프랑스에서는 법률전문 AI(인공지능)가 등장해 관심이다. '변호사가 1년 걸릴 일을 단 1분이면 해결'이라는 파격적 홍보문구를 내세운 AI 법률상담은 열흘 만에 2만명 이상이 몰려들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 법조계도 AI 도입을 예고하고 있다. 대법원은 오는 9월부터 재판업무에 AI를 도입하기로 했다. 법원은 AI를 이용해 판결문 쓰는 속도를 2~3배 단축하는 등 재판 지연 문제를 해소할 방안으로 보고 있다.

강 부장판사는 법원 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IT(정보통신기술) 전문' 법조인이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전부터 사비로 구입해 독학으로 프로그램을 익혔다. 지금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필기앱에 저장하고, 챗GPT· 빙·바드 등 생성형 AI를 적극 활용한다. '법조계의 스티브 잡스' '디지털 선구자'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닌다.

강 부장판사는 "이제 생성형 AI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미리 대비하여 AI를 잘 다루고,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 앞으로 AI를 잘 사용하는 법조인이 그렇지 못한 법조인을 대체하게 될 것인 만큼, 젊은 변호사 세대는 송무 사건에만 집착하지 말고, AI 등에 올라타서 다양한 분야로 속히 진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후속 재판부에 욕먹는 판사 안 돼야"

최근 한 유명인 부부의 소송을 담당하던 판사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 또 이재명 대표의 사건을 맡은 법관은 사표를 제출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는 법원 안팎의 분위기는 무겁다. 선배 법조인으로서 그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고(故) 강상욱 고법 판사는 능력이 탁월하고 재판업무에 몰두하여 장기 미제를 남기지 않은 판사였습니다. 법관은 자신의 후임 재판부에 의해 가장 정확한 평가를 냉정하게 받습니다. 적어도 후속 재판부에 의해 욕먹는 판사가 되면 안 됩니다."

정당 또는 사회적 갈등이 생겼을 때 구성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법원에 판단과 해석을 의뢰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난 데 대해 강 부장판사는 옳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정치의 사법화가 유행인데, 이는 옳은 분쟁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치로 풀 것은 정치로 풀고, 꼭 법이 개입되어야 할 사건만 법정에 와야 합니다. (영미법계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법원 외부에 '통합중재원' 조직을 신설하고, 법원의 개입 없이 당사자 간 소송 관련 정보를 서로 공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국내에도 도입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디지털 상록수' 운동에 앞장

강 부장판사는 우리 사회의 디지털·AI 정보격차를 해소하는 '디지털 상록수' 운동을 수년 전부터 펼치고 있다. 특히 디지털 문화에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은 실버 세대에게 쉽고 자세한 설명을 해줘 인기다. 2017년 부산법원에서 한 그의 강연을 갈무리한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 유튜브 영상은 자그마치 136만 뷰를 기록했다. 코미디나 엔터가 아닌 학술 영상으로서는 이례적인 조회수였다. 또 2018년 개설한 그의 네이버 블로그는 '디지로그 명심보감 시리즈' 등 3천여 건의 게시물로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은퇴 후에는 법조인으로서 후배들과 같이 변호사 본업을 하는 동시에 틈틈이 짬을 내어 디지털·AI 정보격차를 줄이는 사회공헌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엄숙한 판사의 이미지보다 대중과 격의 없이 소통하면서 보다 편리한 디지털 세상을 널리 전파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주변 사람들과 아낌없이 나누는 철학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강 부장판사는 "어머니는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지금 여기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덕이 쌓인 결과이며, 언젠가 나 또한 살아가며 받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어깨가 되고, 방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라고 밝혔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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