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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
변호해 주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평론가답지 않은 태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이념적 오해를 사는 영화들이나 예기치 못한 배우 혹은 감독의 스캔들 때문에 완성도까지 폄하되는 영화들을 보면 안타깝다. 최근 개봉한 '설계자'(감독 이요섭, 2024)의 경우에는 장르적 선입견이 문제다. 심리 스릴러라는 영화의 콘셉트를 인지한 후 관람하면 지금처럼 낮은 평점을 받을 작품은 아니다. 물론, 강동원과 이동휘, 이종석 등 인기배우들이 출연하고, 청부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팀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상업영화로서 관객들의 기대와 영화의 방향성이 어긋날 수 있음을 예측 못했다면 기획의 실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관객들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감 독이 의도한 심리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와 디테일들은 충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원작인 '액시던트'(감독 정 바오루이, 2010)는 홍콩 스릴러로, 주인공 '브레인'이 조직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정신적 문제를 겪게 되는 과정이 느리고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본래부터 액션이 거의 없고, 저예산으로 찍은 작가주의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이 영화를 상업영화로 리메이크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은 든다. 이에 대해 이요섭 감독은 조작된 뉴스와 사건사고들이 판치는 요즘, 아끼던 동료의 죽음 이후 아무도 믿지 않게 된 설계자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밝힌 바 있다. '설계자'가 추구하는 것은 이처럼 의심과 공포가 만들어낸 정신적 혼란이며 액션이 아니다. 다만, 캐릭터와 플롯은 원작에서 상당 부분 수정되어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영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설계자'의 각본에 점수를 더 주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영일'(강동원)은 '짝눈'(이종석)의 죽음 배후에 거대 설계자 조직인 '청소부'가 있다고 믿고, 늘 그들을 경계한다. 검찰총장 후보의 딸인 주영선(정은채)으로부터 의뢰받은 일을 완벽히 처리하던 날, 근처에서 발생한 사고로 '점만'(탕준상)이 죽고, '재키'(이미숙)가 사라지자 그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그는 끈질기게 주영선이 만나는 사람들을 쫓으며 청소부의 존재를 파고든다. 마침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내부의 배신자를 처단한 후 청소부까지 제거하려 하지만 오히려 스스로가 만든 덫에 걸렸음을 직감하는 순간, 그는 사이버 레커인 하우저로부터 대규모 재난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모스맨'으로 지목당한다. 무엇이 사고이고 살인인지 분별하는 데 실패했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영일의 추리와 심리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영화는 느리거나 지루하지 않다. 감독의 세련되고 섬세한 미장센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장면 하나만 봐도 훌륭하다. 영일의 조직이 흩어지고, 불안장애도 심해지게 되는 시점은 주영선이 카메라의 강한 플래시 때문에 아버지가 타고 있던 휠체어의 손잡이를 놓치고, 발작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연출된 신 중 하나로, 카메라 플래시, 주영선의 질끈 감은 눈, 손을 빠져 나가는 휠체어 등이 비 오는 밤의 부산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편집되어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어느덧 데뷔 20주년이 넘은 배우 강동원의 표정도 새롭고 이종석, 이현욱, 탕준상, 이미숙 등 배우들의 호흡도 좋다. 좀 더 주목받기를 응원하게 되는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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