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 권응상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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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8-09  |  수정 2024-08-09 07:45  |  발행일 2024-08-09 제13면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운하와 어우러진 화이안의 도시 모습. 오른쪽은 국사탑이다.

화이안(淮安)이라는 도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신(韓信)이나 '서유기', 주은래(周恩來)는 대부분 익숙할 것이다. 화이안은 가랑이 사이를 기는 굴욕을 참아냈다는 '과하지욕(跨下之辱)'의 주인공 한신의 고향이고, 서유기의 작가 오승은의 고향이며, 중국 인민의 영원한 총리라는 주은래의 고향이다. 이 외에도 한나라 부(賦) 작가 매승, 송나라의 여장군 양홍옥, 청나라의 민족영웅 관천배, '노잔유기'로 문명을 떨친 유악 등이 태어난 도시이다.

장쑤성에 위치 인구 500여만의 도시
대운하로 사람 드나들며 요식업 발달
4대 전통요리 하나 회양요리 발원지
미식 도시답게 다양한 요리 즐기는 곳
中인민의 존경받는 총리 저우언라이
서유기 저자 오승은의 고향으로 유명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오승은 생가 담에 장식된 '서유기' 등장인물의 가면.

화이안은 상하이에서 약 400㎞, 장쑤성의 성도 난징에서 200㎞ 정도 북쪽에 있는 도시이다. 예로부터 중국의 남방과 북방을 경계 짓는 강이 회수(淮水 또는 淮河)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회수를 편안하게 품고 있는 도시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그 회수 말이다. 옛날에는 '회음(淮陰)'이라 불렀다. 그래서 한신도 '회음후(淮陰候)'라는 작호를 받았다. '한양(漢陽)'이 한강(漢江) 북쪽을 의미하듯 회수 남쪽에 자리하여 붙은 이름이다. 1983년에 화이허(淮河)가 홍수 없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아 도시 이름을 '화이안(淮安)'으로 바꾸었다. 화이안 지역에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중국 하나라의 시조인 우(禹) 임금이 이 근처에 머물며 화이허의 범람을 다스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진나라 때는 현(縣)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도시로서의 역사만 해도 2천200년이 넘는다. 예로부터 또 '청강포'라고도 불렸는데, 회수와 대운하가 교차하며 사람과 물자가 들고나는 주요 거점도시여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조운(漕運)의 허브로서 소금 물류인 염운(鹽運)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남선북마교회지지(南船北馬交匯之地)', 즉 남쪽의 배와 북쪽의 말이 모여드는 땅이라고 불렸으며, 역사적으로 쑤저우, 항저우, 양저우와 함께 운하 연안 4대 도시로 일컬어졌다. 그뿐인가. 중국에서 넷째로 큰 담수호 홍택호(洪澤湖)도 품고 있으니, 가히 '물의 도시' '운하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인구는 중국 도시치고 많지 않은 564만명(2015년 기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이안은 미식의 도시이다. 전통적으로 강남을 대표하는 회양(淮揚)요리의 발원지로 유네스코 '세계미식도시' 칭호도 받았다. '회양'은 화이안과 양저우 두 도시의 앞 글자를 땄는데, 사실 상해나 남경요리의 기원이 이곳이다. 양저우나 화이안은 대운하가 지나는 도시여서 수많은 상인과 여행객들이 드나들었으므로 여관업과 요식업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흔히 중국 전통 4대 요리로 '천회로월'을 든다. 사천요리, 회양요리, 산동요리, 광동요리를 일컫는 약어이다. 이 가운데 회양요리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데 집중하여 맛이 자극적이지 않다. 뭍과 물에서 나는 다양한 재료로써 풍성한 맛을 낸다. 그래서 회양요리는 '한 숟갈의 국물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맛을 알 수 있는 요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회양요리문화박물관. 입구의 배추 조각상이 타이완 고궁박물관의 옥조각 배추를 연상시킨다.

이 도시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회양요리문화박물관'에서 엿볼 수 있었다. 2009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6천500㎡의 면적에 회양요리의 발전 과정과 요리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놓았다. 요리관, 민속관, 시식을 위한 품상관(品嘗館), 회양요리문화연구원 등 회양요리의 기원과 형성, 풍속과 문화, 요리의 내용과 방법은 물론 향후 발전 전략까지 펼쳐놓은 인상적인 박물관이었다. 전시실의 입구에는 4개의 대형 부조(浮彫)로써 회양요리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중요 과정의 장면들을 묘사해 놓았다. 이어서 '수향택국(水鄕澤國)', 즉 물과 호수의 고향이라 불리는 화이안의 지리적 환경과 결부시켜 다양한 요리 재료를 설명하고 전시했다. 아울러 회양요리의 발전 과정과 미식(美食)의 풍격을 소개하는 자료들과 대표 음식 및 그 조리 방법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의 내용과 설명만으로도 회양요리를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박물관을 나와 찾은 식당은 대중적인 로컬 식당이었다. 그렇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중국요리라고 하면 으레 뜨거운 기름에 튀기고 볶은 화끈한 불맛, 달고 자극적인 맛 등을 연상하는데, 이 식당의 요리는 전혀 달랐다. 한 마디로 깔끔하면서도 요리마다 모두 다른 풍미가 났다. 중식의 대가들은 회양요리가 모든 중국요리의 기초라고 한다는데, 실제 맛을 보니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볶고, 튀기고, 졸이고, 끓이는 중국의 기본적인 요리법을 재료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 양념이 재료를 해치지 않아서 요리마다 재료 고유의 다양한 향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미식 투어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요리는 만족감이 높았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 생가.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중국 화이안(상)…화이허강 품은 운하의 도시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음식 때문에 도시의 인상도 좋아진 걸까. 거리가 깨끗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비는 중국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거리가 휑할 정도로 한산했다. 그 흔한 오토바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조성된 신도시 구역이어서 그렇단다. 그러고 보니 공기도 좋았다. 500만명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니 여기저기 '서유기' 관련 아이템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이곳이 '서유기'가 탄생한 도시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서유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전형적인 OSMU(One Source Multi Use) 콘텐츠다.

화이안시는 '서유기'가 탄생한 도시답게 '서유기'를 활용한 테마파크 조성에 공을 들였다. '서유기 테마파크'는 삼장법사가 겪는 '팔십일난(八十一難)'의 이야기 소재를 빛과 소리, 전기 신호와 가상 현실, 라이브 화면 등으로 현대적 놀이시설과 체험시설에 접목했다고 설명한다. 또 '서유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첨단 기술을 통해 환상적으로 재현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겨울에는 개장을 하지 않아서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의 옛집을 찾았다.

오승은의 옛집은 다퉁샹(打銅巷)에 있는 전형적인 명나라 건축양식의 고건축물이었다. 담장에는 '서유기' 등장인물의 탈을 달아놓아 한눈에 봐도 오승은의 집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집 내부는 전시관으로 꾸며 오승은이 태어난 방과 그가 사용한 서재 등을 포함하여 여러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집 뒤편 정원에는 삼장법사를 모신 사당도 만들어 놓았고, 손오공의 여의봉이라며 커다란 암석도 진열해 놓아 '서유기' 기념관이라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오승은은 슬하에 자식도 없었고, 재주는 뛰어났지만 변변한 벼슬 하나 못했다.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 겨우 하급 관리 자리 하나를 얻었는데, 그나마도 탐관오리라는 누명을 쓰고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곧장 낙향해 '서유기'를 썼다. '서유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지만 당시 가정제 치하 명나라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기묘한 상상력을 동원해 풍자했다는 평이 설득력 있다. 그것은 그의 생애와 삶의 태도를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화이안 시민들의 가장 큰 자부심은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대한 호오(好惡)는 뚜렷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중국인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정치인이 저우언라이이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세워진 저우언라이의 추도비에는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했다'는 헌사가 있어 이를 증명해준다. 저우언라이를 '삼무(三無)'의 정치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재산이 없고, 자식이 없고, 무덤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축재하지 않았고, 부인인 덩잉차오(鄧穎超)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으며, 매장으로 국토가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공산당 주요 간부 가운데 처음으로 화장을 했다. 그의 공직생활은 '멸사봉공'의 전형이었고,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의 여러 일화가 실릴 정도로 청렴하고 정직했다. 1976년 1월8일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을 때 유엔본부에서 사상 처음으로 개인을 위한 조기를 내걸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매우 신망이 높았다. 당시 그를 추모하는 수많은 인파가 톈안먼 광장에 모여들어 '사인방'을 규탄하며 민주화를 외친 '1차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화이안시 서북의 푸마샹(駙馬巷)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12세까지 생활했고, 생가는 지금 기념관이 되어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평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붐볐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많았다. 저우언라이의 기록 사진을 가리키며 아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아버지의 말투에서 저우언라이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생가는 동서로 연결된 두 개의 정원에 32칸의 방이 딸린 꽤 큰 주택이었다. 그가 태어난 방은 물론 어릴 때 독서하던 곳도 단장해 놓았다. 그의 혁명동지이자 아내였던 덩잉차오(鄧穎超)의 자료도 같이 전시돼 있었다. 김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의 저우언라이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던 사진 자료도 눈에 띄었다.(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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