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욱 논설위원 |
윤석열 대통령은 싱가포르 국빈 방문 중이었던 지난 10월8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을 이길 수 있는 권력은 없다"라고 밝혔다. 의료개혁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모든 개혁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대통령·여당·야당 그 어떤 것도 국민을 이길 권력은 없다"고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올해 4월19일 자신의 SNS에 4·19 혁명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고 적었다. '국민을 이길 권력은 없다'는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시민혁명의 성공 경험을 가진 국가의 공용어다. 우리나라에서는 4·19혁명, 6·29선언뿐 아니라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도 체험한 진리이기도 하다.
2004년 3월12일, 국회는 다수 의석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 주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당시 TV 화면을 통해 고(故) 김근태 의원을 비롯해 유시민·임종석 등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절규하는 모습을 국민은 지켜봤다. 노 전 대통령이 잘못한 건 있지만 탄핵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당시 국민 정서였다. 그 무렵 여론조사로는 국민의 65% 정도가 탄핵에 반대했다. 그런데 의회 권력은 민심을 거스르는 폭거를 저질렀다.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와 탄핵 무효를 외쳤다. 탄핵을 주도했던 의원들은 그해 4월에 열린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해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국민이 오만한 의회 권력을 심판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탄핵 심판 청구를 기각했다.
2016년 12월9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때와는 달리 탄핵안 상정을 막기 위해 국회의장석을 점거하는 의원도 없었고, 오열하는 의원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조간신문에 나온 리얼미터의 여론조사는 국민의 78.2%가 탄핵을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민심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원했고, 헌법재판소도 민심과 같은 결론을 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세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상정된 지난 7일,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불참하면서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표결은 무산됐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시민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다. 탄핵안 표결 무산에 대한 분노까지 겹치면서 거리로 나올 시민들의 수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까지 부결시킨 여당의 결정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 탄핵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도 많기는 하지만, 분노한 민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지난 5일 발표된 여론조사는 국민의 73.6%가 탄핵에 찬성했다. (리얼미터가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5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4.4% 포인트.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윤 대통령이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 사태는 대통령도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 줄 것이다. 비상계엄령 사태는 권력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향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새삼 일깨워줬다. 동시에 '국민을 이길 수 있는 권력은 없다'는 것이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과 의식 속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것도 거듭 보여줬다.
김진욱 논설위원
김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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