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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생태', 종이에 채색, 51.5×87㎝, 1951,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
탄생 100주년 채색화의 선구자 천경자 화백
비극적 생애 뱀에 투영한 작품들로 주목받아
고구려 벽화·中 무덤 내부서도 뱀그림 출토
재생의 상징·묘주의 영생 인도하는 수호신役
새해, 지혜로운 뱀의 기운 닮아 희망찬 삶되길
◆포효하듯 솟구치는, '현무도'의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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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도' 강서큰무덤 널방 북벽 벽화, 고구려, 6세기 후반, 평안남도 강서군 |
앞으로 힘차게 뛰어가는 거북이 머리를 뒤로 돌려 뱀을 본다. 뱀은 최대한 자신의 몸을 길게 늘어뜨려 거북을 감싸 승천하듯 높이 솟았다. 거북과 뱀의 머리가 서로 마주 보며 불을 뿜어낸다. 영생의 기를 묘주에게 불어넣을 듯 불길이 솟구친다. 황금색과 붉은색의 몸에 날카로운 발톱과 날렵한 다리를 가진 거북은 짙은 갈색의 등껍질에 옅은 갈색의 육각형 모양이 다이아몬드처럼 선명하다. 뱀의 몸은 금빛 마름모꼴 무늬에 붉은 갈색의 껍질이 반질거린다. 현무는 묘주의 영생을 인도하는 신으로 당당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하반신이 뱀인 천지창조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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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여와도' 삼베에 채색, 188.5×93.2㎝, 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복희와 여와는 중국 고대의 전설로 내려오는 천지창조의 신이다. 남자인 '복희'는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팔괘(八卦)를 만들었고, 불을 발명했다.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는 법을 사람들에게 전수했다. 여자인 '여와'는 인류를 탄생시켰다. '복희여와도'에는 복희가 구부러진 '¬'자 모양의 도구와 먹물통을 매단 끈을 쥐고 있다. 여와는 가위 모양의 컴퍼스를 들고 있다. 두 신이 들고 있는 것은 우주를 창조할 때 쓰는 도구로,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희여와도'는 복희와 여와가 어깨동무를 하고 왼팔을 번쩍 들어 올려 서로 마주본다. 상반신은 각각의 몸이지만 긴 옷이 마치 치마처럼 늘어뜨려 한 몸으로 보인다. 치마 아래는 두 마리 뱀의 몸이 교차하여 다리처럼 서있다. 화면 중앙 위에는 흰 바탕의 큰 원안에 작은 주황의 원을 그려 바깥으로 줄을 그어서 바퀴모양을 그렸다. 그 둘레에 열 개의 흰 원을 점처럼 둘렸다. 흰점은 화면 가장 아래에도 똑같이 그렸으며 화면 가득 눈송이처럼 사방에 퍼져 있다.
하얀 얼굴에 긴 눈썹과 가늘게 뜬 눈, 수염을 가진 복희는 왼손에 긴 자를 들고 팔을 들어 올렸다. 여와의 어깨에 올린 오른 손에는 먹물통 끈이 매달려 있다. 흰 볼에 주황의 곤지를 찍은 여와가 왼손에 컴퍼스를 들고 있다. 주황색 옷을 입고 옷깃에는 흰색과 주황의 둥근 무늬를 그려서 변화를 주었다. 주황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치마처럼 긴 옷 아래에 뱀 역시 고동색 바탕에 흰색과 주황색에 검은색 선으로 실타래가 엉켜있는 것처럼 그렸다. '복희여와도'는 부적처럼 무덤의 주인을 수호하며 영생을 빌었다.
◆인생을 바꾼 35마리의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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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도' 강서큰무덤 널방 북벽 벽화, 고구려, 6세기 후반, 평안남도 강서군 |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1941년 18세 때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채색화를 배웠다. 태평양전쟁 상황 속에 귀국하여 1944년 결혼을 한다. 전남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첫 개인전을 가졌다.
먹구름도 뒤따랐다. 1950년 6·25전쟁 중 폐결핵으로 동생을 잃고, 전시의 혼란과 집안의 몰락,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겪는다. 큰 아픔과 고통을 승화시키고자 붓을 놓지 않았다. 그때 재생과 치유의 힘을 가진 뱀이 눈에 띈다.
수많은 스케치를 통해 그림 소재로 외면 받던 뱀을 작품에 담았다. 35마리의 뱀을 그린 '생태(生態)'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데 엉겨서 겨울잠에 든 모습이 징그럽다. 황토색 공간에서 큰 무리를 이루며 온기를 나눈다. 화면 오른쪽 아래 두 마리가 엉켜 있다. 왼쪽 아래엔 한 마리가 떨어져 나와 있다. 공간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뱀을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한 것 같다. 위쪽 공간에 두 마리를 더 배치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검은 바탕에 붉은 무늬가 있는 뱀과 녹색계열의 뱀이 엉켜 눈길을 끈다.
그녀는 겨울잠으로 에너지를 축적하는 뱀의 지혜에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뱀은 화가 인생을 바꿔 놓았다.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현실에서 뱀은 한 줄기의 빛이었고, 수호신이었다.
◆슬픈 전설의 머리에 똬리 튼 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그녀의 자서전적인 그림이다. 결혼과 출산, 남편의 죽음, 집안의 몰락과 동생의 죽음이 겹친 22세 때의 아픈 인생이 농축되어 있다. 그녀는 이십대 때 행운을 안겨다준 뱀을 소환한다.
목이 긴 여인은 가름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눈 화장으로 음양을 표현하여 얼굴이 입체적이다. 노란색 눈동자에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얼굴을 중심으로 짙은 고동색이 첩첩이 밝은 고동계열로 머리카락을 묘사했다. 긴 터널을 지나 얼굴을 드러낸 모습이다. 머리에는 황금빛의 뱀과 주황빛의 뱀 네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1951년에 그린 '생태'보다 더 사실적이며 색채가 화려하다. 뱀은 서로 방향을 달리하여 그녀를 지킨다. 옅은 하늘색 옷에 장미를 달았다. 고통이 희망으로 거듭나 행복을 약속하듯, 가슴에 꽃이 달려 있다. 스스로에게 꽃을 선물한 것 같다.
1995년 100여 점의 작품으로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지고, 2002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3점을 기증한다. 1998년 큰딸이 있는 뉴욕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2015년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재생과 탄생의 상징인 뱀을 통해 인생의 불을 밝히고 한국 채색화의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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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작가 |
지금 내 인생은 몇 페이지쯤에 와 있을까. 고통과 슬픔도 극에 달하면, 희망이라는 꽃을 피우게 한다. 희망은 무형의 에너지원이다. 희망은 뱀을 닮았다. 삶에 빛과 그늘이 공존하듯이 뱀은 징그럽고도 지혜롭다. 무덤의 주인에게 영생의 기쁨을 주고, 탄생과 재생으로 아픈 자에게 치료의 손길이 된다. '징그러운 몸뚱어리'와 달리 화가를 지켜줬듯이, 뱀은 우리에게 핫팩 같은 온기와 지혜를 쥐여준다. 2025년은 '사족'을 그리지 않는 한해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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