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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 돌아온 인간들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진은 2차 세계대전 재현 행사에 등장한 독일 병사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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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지음/유월서가/292쪽/1만6천800원 |
이 책은 20세기를 비명의 늪에 빠뜨렸던 2차 세계대전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중에서도 특히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주목한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특정 집단과 국가의 적'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체포되거나 살해당했던 이 극한의 상황에서 기적같이 살아 돌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의 상황이나 위치는 각각 다르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뒤에 두고 있다.
생존자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하다. 이 책은 한 사건의 집단 생존자들,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들, 영웅적 행동으로 승리자가 된 군인들, 가해자를 용서하고 트라우마를 이겨낸 사람들, 그리고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부지한 악인 등 다채로운 사례를 조명한다.
책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은 저마다의 지옥을 견뎌낸 역사의 증인들이다. 1940년 반나치 예술가들의 탈출을 기획하고 지원한 미국인 배리언 프라이는 마르세유 외곽의 한 비밀스러운 저택에 자신이 돕는 유럽 지식인 및 예술가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이 안식처에 모인 이들은 한나 아렌트,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등 다양했다. 이들은 비록 난민 신세였지만 자신들의 존엄을 잃지 않았고 신세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들은 유럽을 떠날 수 있는 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며 절망의 시대에 진정한 유머와 사랑을 꽃피웠다.
한편 베를린이 소련군에 함락된 후 끔찍한 범죄에 노출된 이도 있다. 당시 독일 베를린의 여성들은 복수에 눈먼 소련군들로부터 무차별적인 성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책의 8장에서 다루는 '무명 여인' 역시 이들 중 하나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세세히 기록해 종전 후 출간하면서 당시 승자인 소련군이 독일 여성들에 자행했던 수많은 폭력을 고발했다.
생존자들 중 피해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6부 '악인의 생존 방법'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을 떨쳤던 사람들의 생존기 또한 다룬다. 그중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나치 친위대로, 유대인과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을 잔혹하게 고문해 '리옹의 도살자'라는 수식어를 얻은 인물이다. 그는 고아원을 습격해 어린 아이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까지 했다. 독일이 패망하면서 그의 운명도 막다른 길에 다다를 것 같았지만, 그의 대공 첩보 및 정보 수집 능력을 높이 평가한 미국이 그를 정보요원으로 활용하면서 보호하게 된다. 바르비를 끝까지 추적한 나치 사냥꾼들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났지만, 그를 보호해 주었던 국가 권력의 도움으로 죗값을 별로 치르지 않았다.
이처럼 생존자들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똑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각기 다른 전쟁을 치른 셈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생존의 의지를 벼리며 전후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
올해로 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을 맞게 됐지만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 등,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폭력과 화염이 들끓고 있다. 전쟁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과거보다 더 잔혹한 살상 무기와 더 교묘한 정보 및 언론 통제가 전쟁지역과 비전쟁지역을 극단적으로 갈라놓는다. 거대 역사와 권력 앞에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희생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이자, 현재와 미래의 폭력 앞에서 우리의 생존 의지를 북돋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저자 이준호는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의 해외 거주 경험과 여행 등을 통해 많은 전적지와 박물관을 견학했으며 인문과 역사에 대한 견문을 넓혀왔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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