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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경북 의성군 단촌면 후평리 한 마늘밭에서 농부가 제초제를 뿌리고 있다. 마늘밭 뒤 이웃주민의 집이 폐허로 변해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
"눈앞이 온통 불길이었어요. 바람을 타고 태풍처럼 몰아치는 불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경북 청송군 파천면 옹점리에서 1만5천평 규모의 친환경 과수원을 운영하는 박경순(69)씨는 지난 3월말 발생한 산불로 사과밭 1만평을 잃었다. 지난달 25일 의성에서 시작된 불길은 안동을 거쳐 청송까지 확산됐고, 불과 한 시간 만에 파천면 일대를 집어삼켰다. 박씨는 과수원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불길에 차 안에서도 죽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박씨는 지난해 4천500평 규모의 밭에 사과 묘목을 새로 심었다. 그러나 이번 산불로 모두 죽어버렸다. 불길이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뜨거운 열기만으로도 묘목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인접한 과수 농가들 또한 유사한 피해를 입었다. 청송군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인해 약 170㏊의 과수 농가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길에 닿지 않고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 해도 열기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는 만큼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피해는 사과밭뿐만이 아니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서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는 김범현(65)씨는 올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1만2천평의 밭에 배추를 심기 위해 정성 들여 키우던 배추 모종이 산불로 인해 모두 소실됐기 때문이다. 그는 1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에서 전기 패널까지 가동하며 960판의 배추 모종을 정성스럽게 키워왔다. 밭에 옮겨 심을 날만 기다렸지만, 불길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농기계와 장비들 또한 전소돼 농사를 지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김씨는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못 하겠어요. 저는 모종과 농기계를 잃었지만, 집과 가족을 잃은 분들도 계시잖아요. 힘들다고 하면 죄를 짓는 기분"이라고 허탈해 했다.
사과농가와 배추농가만 피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김씨의 농가 인근에서 복숭아, 자두, 오미자 등을 키우던 장모씨의 8천평 규모 과수원도 전소됐다. 불길이 스치기만 해도 나무들은 타들어 갔다. 마을 곳곳에서 농민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번 산불로 인해 수많은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들에게 이번 재해는 단순한 피해를 넘어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사과, 배추, 복숭아, 오미자 등 농작물이 불길에 사라졌고, 농기계와 시설 또한 잿더미가 됐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박경순씨는 "한 해 농사는 망쳤지만, 다시 심고 다시 키울 것"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김범현씨 또한 "올해는 어렵지만 내년을 준비해야죠"라고 담담히 말했다.
불길은 모든 것을 태웠지만, 농민들의 희망까지 태우진 못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피해 농가를 위한 실질적 보상과 즉각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들의 땀과 노력이 다시금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다.
정운홍기자 jwh@yeongnam.com

정운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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