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이뻐져서 죽겠더라

  • 정만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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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4-18  |  수정 2025-04-18 08:57  |  발행일 2025-04-18 제19면
[정만진의 문학 향기] 이뻐져서 죽겠더라
〈소설가〉
1960년 4월18일 청록파 시인으로 기억되는 조지훈이 신작 시를 발표했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이었다. 제목이 말해주듯 '승무' '낙화' '고풍의상' 등 1939년 등단 이래 세상에 선보여온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글이었다.

4월혁명 직전 조지훈은 독재정권에 아부하는 속물들을 '지조론'으로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는 "지조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라고 질타했었다. 중수필풍 '지조론'과 벽시풍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는 4월혁명이 불타오르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 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중략)//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조지훈의 증조할아버지 조승기는 1910년 당시 74세나 되는 고령이었음에도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할아버지 조인석은 독립 직후 좌우 대립으로 가문이 양분된 것을 한탄해 자결했다. 재선 국회의원이던 아버지 조헌영은 전쟁 와중에 납북되었다. 조지훈 가문에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일본식 교육을 거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지훈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뒷날 검정고시로 혜화전문학교 학생이 되었다. 초중등학교에 다닌 적 없는 조지훈이 교가는 남겼다. 경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교가인데, 향토 소재 경주고등학교 교가 1절을 읽어본다.

"꽃다운 혼 피어올라 서라벌 천년/ 수정 앞 남산에 옥돌이 난다/ 젊은 가슴 품은 뜻을 갈고 닦는 곳/ 이상에 불타는 그 이름 경주고등학교/ 퍼져 나간다 빛은 동방에서 서라벌에서/ 아 경주고등학교 영원한 마음의 고향/ 아 마음의 고향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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