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창간 76주년 사람과 지역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x
이춘호 기자
전체기사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韓 '신춘문예 100년' (2) 6·25 전쟁 후 분단현실 소재·80년 민중시 등장…디지털 플랫폼으로 詩공간 이동
전후 현실문제에 대한 첨예한 질문1950년대50년대 신춘문예는 6·25전쟁으로 몇 년간 중단되었다가 부활한다. 1955년 황명의 동아일보 당선작 '분수', 56년 박봉우의 조선일보 당선작 '휴전선', 57년 윤삼하의 조선일보 당선작 '응시자', 58년 강인섭의 동아일보 당선작 '산록', 59년 신동엽의 조선일보 당선작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은 참신한 언어 실험과 전후 현실 문제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당대에 던졌다. 신동엽의 장시가 거칠고 유장한 역사의 굽이치는 강물이라면, 박봉우의 휴전선은 6·25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문제와 분단 현실 인식을 감각적 이미지로 다뤘다. 자유혁명의 불길…순수·참여파 양분60년대4·19는 젊은 피의 외침이자 자유와 혁명의 불길이었다. 유신체제는 근대화의 불균형, 폭압과 감시, 사회 불신, 개인의 불안과 소외 현상으로 규정된다. 당시 시단의 풍향은 전통 서정을 계승한 순수시파와 김수영으로 대변되는 참여파로 양분된다. 62년 한국일보 당선작 박이도의 '황제(皇帝)와 나'는 다양한 시대적 군상의 비유, 단정적 독백, 서사적 흐름의 시적 호흡이 강점이었다. 64년 한국일보 당선작 이근배의 '북위선(北緯線)'은 분단 조국의 아픈 현실을 노래하였다. 65년 동아일보 당선작 김광협의 '강설기(降雪期)'는 제주도 설림(雪林)의 풍경을 몽환적으로 그려내었다. 눈 내리는 숲속에서 읊조리는 화자의 아늑한 독백은 서정시의 새로운 화법이었다. 66년 동아일보 당선작 이가림의 '빙하기- 쟝·바띠스트·클라망스에게'는 개인사의 독특한 비극이 낳은 실존주의 시로 각광받았다. 이 시는 60년대의 젊은 시인의 초상화이자, 모더니즘 시풍을 지향하면서 우울한 비가(悲歌)의 형식을 띤다.독재 저항·기술개발·산업화 빛과 그늘70년대군부 개발독재로 인한 막대한 외국자본의 유입과 기술 혁신은 문화 예술을 급변시켰다. 빈부의 격차, 독재에 대한 저항, 인권 유린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구금과 탄압, 감시와 처벌은 산업화의 빛과 그늘이다. 사상계에 발표된 김지하의 '오적(五賊)'은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70년 정희성의 동아일보 당선작 '변신'은 현실진단 능력에서 어떤 기존 유행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기류의 표현 방법을 구사하여, 한국시의 매너리즘을 극복했다. 71년 나태주의 서울신문 당선작 '대숲 아래서'는 전통 서정의 아름다움을 섬세한 수채화 기법으로 그려낸 점이 돋보였다. 72년 정대구의 대한일보 당선작 '나의 친구 우철동씨'는 70년대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풍경을 놀랍도록 적확하게 묘사하였다. 73년에는 김명인, 이동순, 정호승, 김승희, 김창완 등 훗날 '73작가'로 불리게 되는 스타급 작가가 당선자로 무더기로 쏟아진다. 79년 장석주의 조선일보 당선작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는 그 기법의 참신성, 주제 설정의 여유와 내면성, 몽환적 이미지와 탄탄한 시적 형상화로 극찬을 받았다. 노동과 현실 표방한 리얼리티 작품80년대광주민주화운동의 부채 의식과 민족 문학을 표방한 민중시가 전면에 등장한 시기다. 시단은 도시적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일군의 해체주의와 실험시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혁명과 참여, 노동과 현실을 표방한 리얼리티에 가려 잠복하였다. 신춘문예 작품의 경향은 불의한 시대에 대한 풍자 묘사, 민중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 등장,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와 뒤섞인 작품이 주를 이뤘다. 80년 황지우의 중앙일보 입선작 '연혁'은 해남 앞바다를 삶의 무대로 살아가는 한 가족사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 찾기를 그렸다. 81년 곽재구의 중앙일보 당선작 '사평역에서'는 시골 기차역 대합실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외로움을 당대 현실에 빗대 밀도 높게 형상화하였다. 84년 안도현의 동아일보 당선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85년 정일근의 한국일보 당선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와 더불어 민중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시의 새장을 열었다. 86년 최영철의 한국일보 당선작 '연장론(論)'은 목수가 사용하는 연장을 통해 인간 삶의 존재 방식을 특이한 시선으로 조망한 사물 시로 평가된다. 89년 조기원의 경향신문 당선작 '풍자시대에서 - Videod의 꿈' 은 90년대에 전개될 시풍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그때까지 신춘풍의 기존 패턴을 깨뜨린 파격을 선보였다. 채팅·표절 시비 등 익명사회로 진입90년대소련 공산주의 몰락은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퇴조하고, 자본주의의 승리와 신자유민주주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시기는 활자 문명에서 전자 정보 문명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였다. 인터넷의 등장은 채팅, 표절 시비 등 음습한 익명 사회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90년 박라연의 동아일보 당선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는 현실 인식과 신선한 감수성을 고루 갖춘 작품으로 평가된다. 91년 박형준의 '한국일보' 당선작 '가구의 힘'은 현대 사회의 물신(物神) 숭배를 비판적 시선으로 성찰하였다. 93년 이정록의 동아일보 당선작 '혈거시대'는 벌레들의 방을 통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비판적 시각으로 그렸다. 94년 심보선의 조선일보 당선작 '풍경'은 시 속에 영화적 기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97년 배용제의 한국일보 당선작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는 텔레포트라는 가상현실을 제재로 하여 2000년대의 시적 흐름이 우주로 확장되리란 것임을 시사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98년 여정의 동아일보 당선작 '자모의 검'은 한글 자음과 모음을 '검(劍)'으로 인식한 점이 독창적이었다. 극미세 이미지로 표현한 관찰과 묘사2000년대스마트폰의 등장은 신인류 포노사피엔스의 디지털 혁명을 불러왔다. 기존 인류의 생존 방식이 무너지고,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5G·자율주행 등 디지털 기술이 미래를 대체하였다. 예견이라도 한 듯 2000년대 이후 젊은 '미래파' 시인들은, 본능적으로 '디지털 플랫폼'으로 시(詩) 공간을 옮긴다. 2001년 김지혜의 동아일보 당선작 '이층에서 본 거리'는 언어 마디를 극미세 이미지로 치고 들어간 관찰력과 묘사력이 단연 돋보인다. 2013년 황은주의 중앙일보 당선작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는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과 함께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야무진 시로 주목받았다. 2016년 변희수의 경향신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李箱에게'는, 이상의 시 '거울'의 말투를 빌려 '의자'가 함의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파편적 의미들을 오마주하였다. 정리=김동원 시인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신춘문예는 한 해를 여는 일간지 지면을 통해 새로운 스타급 문인을 발굴하게 된다. 지난 한 세기 문학의 한 축을 담당한 신춘문예의 권위는 유명 문예지 신인상 등으로 인해 많이 퇴색되고 있다. 예전에는 200자 원고지가 대세였지만 이제는 A4용지에 출력해 내는게 관행이 돼버렸다.매년 수천 편의 응모 작품이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해 신문사 문화부로 우송된다. 본심 대상 10여편을 고르기 위해 실력파 젊은 문인들이 예심을 본다. 간혹 휴지통에 처박힌 작품도 심사위원의 눈에 띄어 당선의 영광을 얻는 경우도 있다. 영남일보문학상 예심 장면. 〈영남일보 DB〉
[이재호의 메타명리학] 치유학의 음양오행…내면의 마음상태 각성…질병코드 자동소멸
삶에는 과학이나 수학(數學)으로도 잘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으로 질병의 원인과 치유법이 그렇다. 넘어져 다치는 식 말고는 병의 스트레스 기인설에 동서양 의학계 모두 동의한다. 물질 중심 사회 질서는 탐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이는 사람의 중추신경계를 무질서하게 만든다. 자율신경 중에는 위급 시 대처하는 교감신경이 있는데 자극에 계속 노출되면 비상시 사용할 에너지 저장소 역할을 하는 부교감신경이 무기력하게 된다. 불교에 '탐진치(貪瞋癡)'라는 용어가 있다. 탐심이 생기면 화냄으로 연결되고 결국엔 어리석음, 즉 치매로 간다는 뜻. 잘못된 마음이 질병의 발화점이다. 마음의 불균형 해소가 최고의 의사라는 거다. ◆명리학 관점명리학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석해 보고 싶다. 약간은 생소할 텐데 집중을 부탁드린다. 명리학은 기본적으로 화(火)와 수(水)라고 하는 두 기운(氣運)이 토(土)를 만나 기화(氣化) 작용을 하면 목(木)과 금(金)이라는 세상 만물을 만든다고 본다. 이른바 '만물생성기화 방정식'이다. 화와 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기운인데, 이 둘이 토라고 하는 장(場), 즉 중화(中和) 작용과 결합하면 만물을 생성한다. 만세력엔 각 계절 마지막 달에 토의 글자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계절이 다음으로 넘어가려면 토의 중화를 거친다는 거다. 우연의 일치일까? 에너지 최소 단위인 양자(quantum)의 세계도 유사하게 관측된다. 두 개의 양자 입자가 (정보적으로) 관련성을 지닐 때 그 둘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여전히 하나의 몸체처럼 작동된다는 '양자얽힘'이라는 개념이 있다. 양자 하나가 상승 운동을 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하강을 하면서 짝을 이룬다(실제 관측 시 이런 사실이 확인되지만 비관측 시에는 어떤 양자가 상승 혹은 하강할지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양자의 세계는 아직도 미스터리한 상태다). 아무튼 얽힘관계에 있는 두 입자는 상승(火)과 하강(水)의 결합 관계에 있고 이것이 에너지장(土)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 모든 만물(木과 金)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목은 유연한 것이고 금은 울림을 발생시키는 단단한 물질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음양오행원리인간의 질병과 치유 개념을 음양오행 원리에 접목해 보면 어떨까. 오행 원리는 목화토금수 순서대로 이웃하는 글자 간엔 상생(相生), 이격 시는 상극(相剋)이다. 목과 화는 상생이고, 목과 금은 상극이다. 생은 좋고 극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작용이 다르다. 자세한 원리는 지면상 생략하고, 일단 생명 순환의 관점에서 보면 목이 화를 생하는 '목생화'를 명리학 키워드로 정의해 보면 실력 발휘다. '화생토'는 체화(體化) 과정, 혹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토생금'은 익혀서 꿰차는 습관(習貫) 과정이다. 버릇을 뜻하는 습관(習慣)과는 다르다. '금생수'는 그 습관에 의해 대상과 하나, 즉 흐름이 잘 이뤄지거나 혹은 유통이 잘 되는 거다. '수생목'은 하나 된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다. 만일 사주에 수생목 작용이 적절히 작용한다면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사주풀이에 이런 식의 메시지가 자주 활용된다. 상극의 경우 '목극토'는 정립(正立), 즉 상식과 합리적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화극금'은 효율성 혹은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다. 물질로 보면 불로 쇠를 녹이니 도구를 만드는 것이고, 계절로 보면 가을(金) 결실인 열매가 좋은 씨(종자)를 머금도록 여름(火)의 열로 숙성시킴을 연상하면 된다. '토극수'는 경제질서의 이해를 말한다. 물에 제방을 쌓으니 구분이 되고 길이 만들어지는 원리다. 실제 토극수가 잘 이루어지는 사주는 이재(理財)에 밝다. '금극목'은 구조조정, 즉 불필요성을 제거함이다. 나뭇가지를 칼로 다듬는 모습이다. '수극화'는 충전(充電) 혹은 청량함, 구원(救援)의 이미지다. ◆토의 역할이 과정에서 토의 역할을 보자. 화생토·토생금·토극수·목극토 조합에 토가 들어간다. 굳이 구분해 보자면 상생은 세상과의 조화이고 상극은 창조적 파괴이다. 먼저 상생의 관점에서 토는 화생토라는 체화, 즉 익숙해지는 노력을 통해 토생금의 내 것 만들기 과정에 개입이 된다. 여기서 핵심은 '익숙해진다'는 것과 '내 것으로 만들기'라는 표현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인간의 질병 문제는 우리 마음 상태에 어쩌면 해법이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해져서 내 것이 된다는 것은 분리가 아닌 통합의 개념이다. 즉 오감(五感)에 의한 반응적 의식보다는 내면의 마음(즉 무의식)을 가리킨다. 의학계에선 인간의 행동 의지와 마음에 대해 동시 명령을 내리면 내면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에너지가 훨씬 강력히 작동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설파한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기제' 이론도 같은 맥락이다. 앞서 토는 무엇을 중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 불행했거나 억압받은 부정적 기억은 기억으로 그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와 뇌의 신경회로를 오작동시켜 척수와 연결된 오장육부의 기능을 해칠 뿐만 아니라 호르몬 분비에도 악영향을 준다. 이는 각자의 인체에서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부터 공격함으로써 발병의 단초가 된다. 치유의 해법에 대해 많은 동서양 여러 의학자, 종교지도자, 심리학자들은 '영성(靈性)의 회복'을 주장한다. 즉 악성코드를 각성(覺性)의 힘으로 중화(土)시키라는 거다. 이 지구(土)는 모든 입자가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에너지 마당이다. 너와 내가 하나 됨이 각성이다. 이 각성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가 될 때 내 몸속 질병코드는 자동 소멸한다는 논리인데 과연 이걸 미신이라고만 치부하겠는가. 돈은 나와 남을 분리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 덩어리다. 첨단의학의 발달에도 왜 현대인들은 질병으로 더 고통받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명리서에서 토는 믿음, 신뢰라고 되어 있다. 그럼 사주에 토가 부족한 사람은? 인간이 지닌 의지가 사주풀이에 우선한다고 생각하면 간단치 않을까. 오늘 이야기는 질병과 치유라는 주제에 대해 명리학이 줄 수 있는 통찰에 대해 논한 것이다. 본 지면을 통해 이런 영역을 탐색해 보는 기회를 자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드린다. 사주공학연구소장 logoswater@hanmail.net☞ 필자 이재호는 미국 뉴욕대(NYU)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래에셋증권 상무, 숙명여대 멘토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사주공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새날] 정성채 동양당한의원장…일흔에 화가로 첫 개인전 연 한의사…가꾸지 못한 '사랑을 회복하다'
그는 지난주 목요일, 달성군 가창면 동제미술관에서 칠순을 맞아 생애 첫 개인전(사랑을 회복하다)을 갖고 '화가 선언'을 했다. 50여 작품은 수십 년간 남몰래 부적처럼 그려온 자신만의 삶의 편린이기도 하다. 정성채 원장은 지금 도우(道友)이자 동행 한의사인 아내(이지향 대표원장)와 함께 영남대병원 네거리 모퉁이 동양당한의원을 꾸려가면서 자기 그림의 제2막을 겨냥한 것이다.유달리 그의 척추에는 신산스러운 '바람'이 서식한다. 그 바람은 그의 젊은 날을 종횡으로 관통했다. 그를 낭인처럼 방랑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오래 '풍운아'(風雲兒)였다. 5번의 인도행 그리고 어렵사리 확보한 아디야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정신세계사 출간) 등 정신세계 관련 원서 3권을 번역 출간했다. 그러면서 이승이 어떤 방식으로 저승으로 접어드는지를 알기 위해 캐나다와 미국의 명상공간을 훑고 다녔다. '역마살'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서성거림의 나날이랄까. 빛 보다는 그림자 가득한 행로, 꼭 김성동의 장편소설 '만다라'에 등장하는 주인공 스님 지산과 같은 구도심을 품고 있었다. 한때 구도의 수단으로 민주화운동을 선택하기도 했다. 특별외무고시까지 합격했지만, 전력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길을 서둘러 포기해야만 했다.이승~저승길 알기 위해 북미 훑고 다녀마음 실체 파내보고 싶어 출가하기도77세 은퇴후 그림공부 '美 샤갈' 칭호화가 해리 리버만 삶 스토리 큰 위안사랑은 찾아 헤맬 행운 아닌 되찾을 힘내 안의 색깔, 내 안의 美 재발견 고심국내외 여행지서 만난 풍경 많이 담아◆마음의 뿌리를 찾아서그는 마음의 한계, 그 끝, 그 실체를 파내 보고 싶었다. 성철과 법정 스님의 행적도 뒤좇았다. 범어사 지효 큰스님의 도골선풍에 반해 한 인생 안 태어난 셈 치고 덜컥 범어사로 출가한다. 하지만 그의 구도행은 승단의 엄격한 규율과 좀처럼 상합되기 어려웠다. 마지막 수행처가 바로 저잣거리, 일상(日常)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10여년 북미·남미의 땀집(sweat lodge)에서 수행체험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세 아들을 엄격하게 훈육했다. 덕분에 형을 먼저 의사로 만든다. 어머니의 남은 꿈은 그를 공직자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어머니는 기고만장하기까지 한 그의 드센 팔자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그는 제도권의 피와 야인(野人)의 피를 동시에 갖고 있다. 수재(秀才)의 피를 타고 난 동시에 낭인(浪人)의 길을 동시에 통섭해야만 했다. 그 두 피가 그의 삶의 두 축을 이루면서 '합종연횡'을 거듭해 왔다. 제도권의 피는 그를 한의사로 빚었고 야인의 피는 그에게 그림을 안겨준다. ◆해리 리버만이 나의 뮤즈그럴 때마다 그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준 세무원 출신인 앙리 루소의 성취 그리고 화가 해리 리버만의 삶에서 크게 위안을 받는다. 해리 리버만은 그의 열정과 동질이었다. 단돈 6달러를 갖고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와서 훗날 부자가 되고 77세 은퇴한 뒤 뒤늦게 그림 공부를 해 '미국의 샤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01세에도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103세에 작고했다. 그의 인생스토리를 알게 된 건, 2000년대 어느 날 서울 강남네거리 영업용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였다. 일순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순간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환희심을 느꼈고 그걸 모티프로 훗날 시까지 적게 된다.고교 시절, 그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단칼에 서울대 미대로의 길을 권유했던 첫 사부는 작고한 양인옥 전 호남대 총장이었다. 또 현재 동제미술관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화가 김길후도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고 첫 개인전까지 도와준다.그의 그림 앞에서 인터뷰했다. 일흔임에도 그한테서 나이 듦이 주는 피곤하고 권태로운 하중이 별로 감지되지 않았다. 탄탄한 드로잉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첫 그림의 기억그의 첫 그림에 대한 기억은 뭘까. "세 살 무렵 저는 초가집 바람벽에 빙 둘러가며 숯 검댕으로 비행기를 그려놓았어요. 십자 모양의 몸체에 프로펠러를 네 개씩 그렸으니까 비행긴지 헬리콥터였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같으면 영락없는 첨단 드론 같은 거라고 봐요."국민학교 시절, 제일 신나는 순간은 단연 미술 시간.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웬만한 그림대회의 상은 독차지였다. 하지만 상장 복은 4학년 때 멈춰버린다. 당시 지능검사에서 전남 최고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놀기 좋아하던 아이가 난데없이 수재 소리를 듣게 된 게 화근이었다. 선생들은 그림보다 그의 성적에 더 관심을 둔다. 그러나 그는 산수조차 불감당인 모순적인 아이였다. 허구한 날 상장 대신 매를 맞는다. 광주일고 시절 제주 출신 초청 미술 교사인 양인옥 선생. 그한테서 화가의 유전자를 발견해 준다. 식었던 그림이 양 선생의 인정 때문에 다시 활화산처럼 피어오른다. 그는 박상호·김주석과 함께 양인옥 미술의 3대 총아였다. 한번은 양 선생이 그의 부모를 찾아가 '서울대 미대 전면 장학생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엄청 면박을 당하고 돌아선 일도 있었다. 전남대 신입생 시절, 그리세 클럽에 들어갔으나 뚜렷한 진전은 없었다. 사범대에 다니던 박태희가 황토로 범벅이 된 졸업작품의 평을 부탁한 적이 있다. 당시는 허백련 선생과 강인균, 오지호 정도밖에 몰랐지만 눈높이만은 한껏 높아져서 이중섭, 백남준 등에 관심이 끌리곤 했다. 문학적으로는 박주관, 나종영, 박용모, 박종권, 김순심 등과 시를 논하였으나 기억할 만한 시를 남기지는 못하였다. 곽재구, 나해철, 박재성, 박몽구 등은 아직 어린 후배였으나 문학에 열심이었고 그는 그림으로나 문학으로나 매력적인 주변인이었을 뿐이다. ◆정체성 혼란대학 전후에 '정체성 혼란'을 많이 겪었다. 그 가운데 뚜렷한 한 각성이 있었다. 그건 '나는 초연한 관찰자, 여행자다'라는 믿음이었다. 그는 분명 행동자·혁명자는 아니었다. 드리머(dreamer)였다. 동굴 속의 히에로니무스(374~420·제1차 니케아공의회 이후의 보편교회 신학자이자 4대 교부 중 한 명)의 몰골에 반해서 수차 모사했던 적이 있고 테이레시아스(그리스 신화 등에 등장하는 테베 출신의 맹인 예언자)의 '제3의 눈'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리하기도 했다. 초창기 그의 그림은 매우 괴기스럽고 세기말적이었다. 졸업 기념 시화전에 출품하여 호평받은 '너를 위하여'라는 시 액자가 지금 그에게 남은 학창 시절 그림의 유일한 흔적이다. ◆뒤안길을 누볐던 화력전남대 상대에 입학, 1984년 동국대 한의대에 수석으로 편입 진학한다. 고생 끝에 한의사가 된 후 친척 매제인 김영화에게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1년 만인 1994년 광주 궁동갤러리에서 첫 그룹전 '바람·바램전'을 가졌다. 1995년 화순에 계신 양인옥 선생을 다시 찾았다. 유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대구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부부는 화순을 자주 찾았다. 대구에 정착하던 해 95~96년, 구상화인 '삼선암'과 비구상인 '탄생', 뒤이어 백두산 천지를 그린 'Cold Heaven'을 제작하였다. 천지는 동아일보 신년호 1면 사진에 실린 국내 첫 항공촬영 된 천지의 장엄한 모습에 감동해 그려봤던 거다. 그 그림은 정점식 선생도 칭찬하신 바 있다. 그는 그동안 적잖은 비구상계열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 개인전에는 초심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국내외 여러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을 많이 담았다. 마이산과 사랑은 25년째 미완이다. 청도의 최학노 선생과 알게 된 후에는 선생의 실험정신을 사숙하고 있다. 김일해와 이장우는 오랜 친구로 진지한 회화세계를 배우는 중이다. 아내도 미술에 심취해 있고 딸 녀석들도 다들 미술을 전공했다.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정회원(2019), 한국미술대전 초대작가(2020), 대구미술협회 기획이사(2021) 그리고 대구 예인회에서 활동 중이다.◆그림에서 배운 교훈그림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 '세상에 실패한 그림은 없다는 것과 더 이상 못 쓰는 붓은 없다'는 것이다. 양인옥 선생의 말처럼 작품은 붓을 놓을 때 완성된다. 그림을 그리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고 예술가 또한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이다.그가 이번 '사랑을 회복하다'란 개인전 주제에 부쳐, 글을 적었다. '사랑은 장차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었다. 과연 오래전 하늘에서 내 마음밭에 떨어졌으나 그동안 내가 가꾸지를 못했다. 사랑은 찾아 헤맬 행운이 아닌 되찾을 힘이었다. 그림도 사랑처럼 내 안의 색깔 내 안의 미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조각이 깎아내는 것처럼 보석이 씻어내는 것처럼 나의 사랑도 그동안의 가식을 벗겨내고 내 고집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었다. (중략)'그의 질풍노도는 칠십여 성상 돌고 돌아 이제 하구에 이른 강줄기처럼 화온한 자태를 갖추고 있다. 개인전은 내년 1월5일까지 가창면 헐티로 10길 18 동제미술관전시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일흔에 첫 개인전을 가진 정성채 동양당한의원장. 고향의 산 무등산 그리고 어린 시절 뛰어놀던 광주 태봉산, 온갖 고뇌와 갈등의 시기를 담은 절벽 구역을 담아 자기 의식의 구조를 3분할해서 그린 100호짜리 그림(고향 가는 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림이 완성된 건 1999년. 아직 관망중인 초벌 그림이라 야성 가득하다.그의 기본기를 잘 보여주는 다양한 드로잉 작품.백두산 천지(1997년).인도 아부시장(2020년).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캠핑문화 현주소(2) 풍광은 느긋하게…바비큐는 간편하게…몸도 마음도 여유로운 힐링
이곳이 생기기 전 근처에는 핫플 베이커리카페 3인방(오 봉드 부아·대새목장·온 더 레일)이 포진해 있었다. 라운드힐도 빵과 커피가 필수품목이라 여겨 추가로 골프하우스처럼 생긴 베이커리카페 '주리 485'를 짓고, 연못과 각종 분재형 소나무 100여 그루, 단풍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고목형 능소화가 휴식존을 형성해주는 피크닉존까지 증설했다. 징검돌처럼 드문드문 놓인 100여 개의 간이 테이블은 이 공간의 쉼표다. 쌀쌀한 바람결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겨울 햇살을 어루만진다. 몇몇 손님은 직원을 통해 일찌감치 라운드힐 연말 파티 예약을 해둔다. 그들은 평범한 듯 비범한 구석이 있는 이곳의 풍광에 엄지 척 해준다.라운드힐 905 글램핑촌한폭의 산수화 같은 산세·암괴류존4인용 카라반 13대·글램핑 텐트존 매칭TV·침대·샤워시설까지 다 갖춰 편리블루투스 스피커 음악 가미 모닥불존아웃도어 허브캠프 민들레울바비큐 굽기·썰기·훈연칩 체계적 공부 6~12시간 고기 굽기 Low&Slow 원칙원하는 가격대로 맞춰진 헬퍼 서비스몸만 오면 짧은시간 내 모든 것 만끽◆멍의 인문학사람들은 이제 너무 럭셔리 한 것에는 덜 감동한다. 워낙 삐까뻔쩍 한 걸 많이 봐 온 탓이다. 최고의 시설보다 최상의 '풍광'을 원한다. 그 풍광을 품고 힘든 자기를 위로해주고 싶어 한다. 그게 바로 '멍 문화'의 핵심이다. 맞은편 산자락의 형세가 만만찮다.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최정산 자락에서 갈라져 나온 연봉이 꼭 경복궁 근정전 임금 자리 뒤를 지키던 병풍인 '일월오봉도'의 자태로 시선을 아늑하게 받아낸다. 주변을 둘러봐도 풍광을 훼손하는 고압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글램핑장은 1㎞ 계곡과 맞물려 있다. 앞 산자락에는 돌덩이가 물처럼 흐르는 '암괴류존'이 또 다른 볼거리. 3년여 전 회사생활을 할 때 이 언저리에 왔다가 이 부지를 찜한 사내가 있다. 꿈에도 그리던 글램핑촌을 오픈한 정병창 대표. 돌처럼 다부진 그 사내는 시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뒤 시작한 비즈니스호텔 사업도 잘 굴리고 있다. 그 여력을 이 글램핑촌 개발에 쏟아부었던 것 같다.◆글램핑 카라반4인용 카라반이 13대 설치돼 있다. 다른 곳과 달리 여기는 카라반 옆에 8평(26.4㎡) 크기의 글램핑 텐트존이 매칭돼 있다. 그 공간은 TV, 침대, 샤워시설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갖춰놓았다. 텐트로 구현된 호텔 같다. 음식물을 사 들고 와도 된다. 그게 번거롭다 싶으면 글램핑 텐트존 입구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 갖고 오면 된다. 참나무 장작도 한 묶음을 1만원 정도에 판다. 직원에게 부탁하면 미리 숯불을 피워놓는다. 불 피운다고 생고생할 필요가 없다. 불멍을 즐기도록 괜찮은 모닥불존도 만들었다. 음악이 빠지면 큰일. 블루투스 스피커가 대기 중이다. 예약하고 몸만 가면 바로 '먹팅'이 가능하도록 했다. 내년 벚꽃 필 때를 겨냥 중이다. 현재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연말과 신년 특수를 준비 중이다. 겨울이라고 캠핑촌이 멈추는 건 아니다. 되레 삭막한 풍경을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한 인프라도 꼼꼼하게 챙겨준다. 향후 아이들을 위한 모래놀이장, 맨발걷기길, 풀장 등도 차례로 마련할 예정이다.특히 예술문화가 있는 글램핑촌으로 만들기 위해 여건만 허락된다면 바로 옆에 국제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친구인 향토 화가 박종규를 위한 미술관도 만들고 싶단다.커피도 다른 곳보다 조금 비싸지만 그 값은 한다. 단양의 유명 베이커리카페 '산'에서 일한 김정민 상무를 스카우트 했다. 황명준 바리스타는 콩가, 블루마운틴, 게이샤, 예멘모카 등 4종의 원두커피를 낸다. 그는 무너져가는 가족을 살리는 캠핑문화를 일구고 싶단다. "돈을 떠나 도심에서 강원도 오지 같은 풍광을 절감할 수 있는 가족 단위 전문 글램핑장으로 키워나갈 계획입니다."카라반 평일 15만원. 금·토 20만·30만원(4인기준) 예약 010-7928-1905 ◆차세대 아웃도어 허브 캠프 민들레울2000년 3월,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 모암정 바로 옆에 2세대 허브체험농장을 모티프로 한 전원카페촌 '민들레울'이 오픈한다. 당시 허브와 레포츠문화의 미래를 걱정하던 김양식씨가 '허브맨'을 자임하며 총대를 멘다. 이에 앞서 강원도 봉평의 '허브나라', 경기도 포천의 '허브아일랜드', 충북 청주의 '상수허브랜드' 등이 1세대 허브농원으로 활약한다. 그는 허브를 딛고 특화된 캠핑·바비큐문화를 장착한다. 커피와 차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오감에 감동까지 포함한 '6감 만족 네오 캠핑문화운동가'를 자청한다. 무려 300여 종의 각종 허브를 건드린다. 그걸 토대로 허브차, 허브꽃밥, 허브화장품, 허브향초 등을 판매한다. 반향이 좋아 용인 '에버랜드'와 달성군 가창면 '허브힐즈'의 허브존 컨설턴트가 된다. 점차 소문이 난 민들레울 옆자리를 수시로 찾아드는 캠핑족과 동선이 겹쳤다. 안 되겠다 싶어 정식으로 입장료를 받는 캠핑장도 차려본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이 공간마저도 포화상태. 설상가상 캠핑장이 러브텔로 왜곡되고 한정된 인력으로 제대로 관리하기도 버거웠다. 5년 전부터 한나절 놀다 갈 수 있는 '피크닉카페'로 바꾼다. 하지만 고기 굽는 냄새가 일반 카페족과 갈등을 일으킨다. 별도의 바비큐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바비큐그릴 특화그는 정통 바비큐그릴을 특화시킨다. 이때 '카버'(고기 썰기 전문가)를 자청한다. 대륙별 바비큐 문화의 차이, 바비큐 관련 용품의 연대기, 제대로 고기 굽는 법, 바비큐용 히코리(훈연칩), 그것과 잘 어울리는 와인, 적당한 육해공 식재료 리스트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국내 바비큐용품 현황도 체크한다. 그릴링(하부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방식)과 브로일링(상부에서 아래로 화력 지원하는 방식), 두 기능을 겸하고 있는 웨버 케틀(Weber kettle) 사용법도 익혔다. 지인, 생면부지의 공무원, 마을 이장, 과수원 주인, 직원들을 위한 바비큐 파티까지 수시로 열어주었다. 저변을 넓히고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는 절차였다. 기분이 나면 슬라이스 한 레몬에 보드카를 끼얹어 파티주까지 제조한다. 돼지 목심과 전지를 1㎏씩 절단해 6시간 차근차근 굽는다. 소고기는 12시간, 닭고기도 6시간 이상 익혀야 된다. 그는 한국인이 너무 직화에 빨리 구워 먹는 맛에 길들여 있다고 지적한다. '느긋한 고기시대'로 건너가자는 게 그의 지론. 'Low & Slow' 원칙이다.민들레울은 한때 사양길로 몰린다. 2010년 이후 인터넷을 통해 허브 관련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된 탓이다. 허브농원이 사양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2017년부터 돌파구를 찾았다. 현장에 와야 맛볼 수 있는 계절 허브 판매망을 구축한다. 6월에는 엘드플라워, 7월에는 라벤더를 띄우는 식이다. 별과 달, 계곡물과 싱그러운 바람을 앞세워 고감도 감성충전소로 키운다. 내친김에 김천시 대덕면 문의리. 폐교된 문의초등(1949년 개교, 1995년 폐교) 자리에 신개념 바비큐 전문 밀리터리 오토캠핑장 'CAMP 1950'을 2017년 6월 오픈한다.◆아웃도어리빙 전도사그런 그가 올해부터 '아웃도어리빙 비즈니스맨'으로 또 변신 중이다. 아웃도어는 야외에서 즐기는 스포츠 또는 그에 필요한 옷, 장비, 도구 등을 지칭한다. "고생하는 캠핑도 있고 편리하고 재밌어야 하는 캠핑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캠핑문화가 고도화 국면에 접어들었어요. 둘 중 자기한테 맞는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편하고 싶어 나온 나들이인데 불 붙이는 데 진을 다 빼버리면 어떡하죠. 저는 새로운 바비큐파티를 전파하고 싶어요. 원하는 분들에게는 달려가서 원하는 가격대의 서비스를 깔끔하게 지원 사격해 줄 겁니다. 그 중간에 필요한 분들을 위해 '바비큐문화학교' 같은 공간을 통해 교육도 하고 관련 물품도 저렴하게 공유하고 싶어요."곰곰이 생각해 보니 캠핑이라 해서 야외로 나왔지만 근사하게 바비큐를 즐길 인프라는 현재 글램핑 수준으로는 상당히 미흡하다. 어떤 경우에는 불 붙이는 데 진을 다 빼버린다. 풍광을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음식물을 빨리 해먹을 수 있어야 된다. 생고생, 그게 캠핑이다 싶으면 오지를 찾는 백패커처럼 모든 걸 자신이 다 핸들링할 각오를 하면 된다. 그런 사람은 채 1%도 안 된다. 나머지는 수월하게 음식을 먹고 일행과 풍광을 배경 삼아 재밌는 파티의 밤을 즐기는 게 주목적이다. 김 대표도 바로 그런 헬퍼가 되고 싶단다. 몸만 오면 자신이 알아서 바비큐 음식의 모든 것을 짧은 시간 내 만끽하도록 풀 서비스를 해주려 한다. 1인분 5만~15만원을 내면 지름 1~1.2m 수제 원형 철판에 모둠 야채·생선어패류·고기 등을 와인과 곁들여 먹으며 블루투스 기반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스피커를 통해 개인별 18번을 들으면서 4시간 느긋하게 파티를 즐기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가성비 좋은 신개념 '옥수수그릴'도 판매 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라운드힐 글램핑촌 야간 전경. 이용객의 편의를 위해 4인용 카라반 옆에 글램핑 존을 테라스처럼 붙여놓았다.2000년 3월 경남 거창 민들레울을 통해 허브농원 카페의 신지평을 열었던 김양식 대표가 최근 아웃도어리빙전도사로 한국형 바비큐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서구식 바비큐문화를 국내 사정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중이다.민들레울 바비큐 파티 전경.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캠핑문화 현주소(1) 산멍·별멍·불멍 즐기는 '감성 캠핑족'
지난 2일부터 MBN에서 신개념 오락프로그램 '캠핑 인 러브'가 방영됐다. 캠핑카를 타고 인생 2막을 함께 즐길 여행 메이트를 찾아가는 신개념 리얼 로드 데이팅 프로그램이다. 지난 8월7일 방탄소년단 정국이 첫 '차박 캠핑'을 하며 숯불바비큐 & 불멍 동영상을 올려 캠핑 신드롬을 부채질했다. 대한민국 대표 종합 숙박·액티비티 플랫폼 '여기어때'가 지난해 봄 내놓은 '반나절 캠캉스'는 숙박 없이 약 8시간 동안 캠핑 시설을 대여하는 신개념 숙소 상품이다. 쿡방·먹방의 흐름이 몇 년 전부터 캠핑(글램핑) 모드와 컬래버되고 있다. 덩달아 반려견을 위한 애견글램핑장도 속속 오픈되고 있다. 달성군 가창댐 근처 '슈가파인'도 그런 공간이다. 한국의 캠핑문화는 색다른 감각으로 붐업되고 있다. 예전 피크닉·하이킹·등산·낚시 범주를 넘어섰다. 그때는 그냥 놀러 가는 것, 거의 '야영'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바비큐문화도 부재했다. 그냥 식육점에서 삼겹살을 사 들고 가서 모닥불 돌판에 고기를 구워 먹는 수준이었다. 한국형 아웃도어 문화에 신개념 캠핑이 끼어들게 된 건 주5일 근무제가 큰 자극제가 된다. 국공립공원과 자연휴양림에 캠핑장이 들어서고, 사설 오토캠핑장들이 문을 열면서 인프라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2012년 국내 최대 캠핑·아웃도어·레포츠 박람회인 '국제아웃도어캠핑&레포츠페스티벌'(이하 '고카프 킨텍스 더 파이널 시즌 PART 1')이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된다. 일명 캠핑·아웃도어 박람회다. 2014년 전국에 1천200여 개의 캠핑장이 난립하게 된다.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뉴버전 캠핑존이 등장한다. 그런 흐름 속에서 캠퍼들은 캠핑푸드에 주목한다. 볼거리보다 먹거리가 한 수 위다.재차 맛있는 고기를 굽는 유튜버까지 가세한다. 강원도 홍천의 농업인인 오진균이 그런 사내다. 130만 구독자를 가진 '산적TV 밥굽남' 유튜버로 '고기 잘 굽는 남자 신드롬'을 일으킨다. 그는 이후 샤부샤부 브랜드 '강호연파' 리더로 여의도 더현대 서울점에 입점할 정도다. 집과 캠핑존 사이, 리조트, 펜션, 게스트하우스, 풀빌라 등도 영역을 다각화해간다.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에 캠핑 관련 카페가 생겨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면서 캠핑 수요가 증폭한다. 하지만 캠핑 문화도 한때 조정기를 맞는다. 가성비 좋은 해외여행이 일조한 것이다. 많은 수의 캠퍼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등 여행으로 옮겨 갔다. 점차 캠핑 모드도 다각화된다. 캠핑장에 머물면서 음식과 모닥불을 즐기는 오토캠핑이 존재했는가 하면 배낭에 텐트와 식량을 넣고 오지를 찾아가는 백패킹, 이뿐만 아니라 바이크캠핑, 모토캠핑, 카약캠핑 등도 세를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의 여건은 자녀 교육이 항상 복병이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빼앗기고 그 돌봄을 위해 아내마저 캠핑장에서 사라진 후 커다란 텐트와 장비는 의미가 없어졌다. 충동 구매했던 고가의 캠핑카도 한 번 사용한 뒤 무용지물로 방치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흐름 속에 고생 없이 1박2일 정도 캠핑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글램핑이 최근 대안 캠핑문화로 등장한다. 기자는 지난주 가창 최정산 자락에 오픈한 '라운드힐 905 글램핑촌'과 신개념 바비큐문화 리더로 나선 경남 거창 '민들레울' 김양식 대표를 만나 우리의 캠핑 현주소를 확인해 봤다.대구 달성군 가창면 주리 485, 해발 400m 고지 산언저리 8천여 평(2만6천400㎡) 중 5분의 1을 차지한 '라운드힐 905(Roundhill 905) 글램핑촌'. 지난 10월 오픈했는데 '대구 도심에서 가깝고 그러면서도 여느 캠핑장과는 차별되는, 낮에는 산멍, 밤에는 별멍·불멍 때리기 딱인 핫플'로 자릴 잡는 중이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드론사진=이현덕기자 lhd@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캠핑문화 현주소(2)에서 계속됩니다.한국 캠핑문화가 몇 년 새 급증하고 있는 글램핑 붐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젠 시설보다 풍광, 그리고 캠핑푸드가 더 관심 대상이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대구 달성군 가창면 주리 485, 해발 400m 고지 산언저리 8천여 평(2만6천400㎡) 중 5분의 1을 차지한 '라운드힐 905(Roundhill 905) 글램핑촌 전경.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복어...콩나물 무침 별도로 내는 대구권 복어탕, 종잇장처럼 얇게 포 뜨는 복어회
2300년 전의 중국 전국시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고서는 복어를 '적해' 또는 '패패어'라고 기록하고 이 생선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민물 복어를 가리켜 하돈(河豚)이라고 돼지 돈 자를 쓴 것은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복어는 전 세계에 100여 종이 서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 연안에는 복어목 참복과에는 청복, 수지복, 줄무늬복, 흑밀복, 민밀복, 은민밀복, 밀복, 은띠복, 은밀복, 불룩복, 황해흰점복, 참복, 두점박이복, 황점복, 복섬, 황복, 졸복, 흰점복, 검복, 자주복, 매리복, 까칠복, 까치국매리복, 국매리복, 까치복, 가시복, 개복치 등 약 27종류가 서식하고 있다.서울·경기권서 즐겨먹는 맑은 복국일본식 조리법 알려진 경남권 식당日 이토히로부미 극찬 고급요리 성장복어회 폰즈…한국은 신맛 더 강해대구 60~70년대 최강 복어집 대하림복어불고기 시대 연 미성복어 명맥◆복어에 대한 다양한 기록우리의 복어 식용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복백탕(鰒白湯)'이라 불리는 맑은 복국은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다. 임진왜란을 준비 중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어 독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이유로 복어의 취식을 금지하게 했고 이후 1888년까지 공식적으로 복어는 먹어선 안 되는 생선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결코 '복어 식용 금지령'이 발포되지 않았다. 야마구치현의 어부들은 식민지 조선의 동해와 남해에서 복어를 잡았고, 그것을 부산이나 마산 항구에 풀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어요리법을 배워 부산과 마산 사람들도 복국을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복지리'로 알려진 복어국이다. 복지리의 '지리'는 일본어 지리(ちり)이다. 알다시피 '지리'는 냄비 요리를 가리킨다. 일본인들이 주로 복어를 요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산시사에서는 마산에서 복국이 유명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옛날 마산의 해안은 낙동강 물이 섞이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복이 서식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어시장에서는 복을 경매하여 전국 일식집으로 보내었다. 때문에 마산의 복요리가 유명해졌을 것이다. 사실 1960년 이전의 마산만은 청정해역으로 복어의 서식지였으며, 마산 어시장은 복어 집하장이어서 복요리가 개발되고 전수되어 전국의 유명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251-8의 '남성식당'을 1945년에 처음 개업했던 최달옥은 식민지시기에 일본에서 복어 조리법을 배웠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본래 복국은 일본식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비록 조선 시대에도 복국을 먹었지만 지금의 마산 복국은 일본식에서 진화한 것이다. 새나라가정요리학원장 왕준련은 동아일보 1967년 11월23일 자에 복어국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왕준련이 소개한 조리법은 일본식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당시 새롭게 등장한 고추장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 중반이 되면 복어 식용이 증가하면서 그 조리법이 거의 처음으로 신문에 등장했다. 최달옥의 딸 박복련도 1962년 3월 '특수식품취급자' 증명서를 경남도지사로부터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와 복어일본은 복어의 식용이 위험이 따르는 데도 꾼들은 여전히 이 고기의 진기한 맛과 더불어 '조절된' 분량의 독이 가져다주는 느긋한 행복감과 열이 확 올랐다가 식는 느낌, 얼얼한 맛 등을 즐긴다. '복어취식금지령'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서 풀리게 되었다. 혼슈(本州)의 남쪽 끝자락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의 제법 규모가 있던 료칸인 '春帆樓'에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묵었던 날은 며칠간 풍랑이 불어 총리 일행을 먹일 만한 음식이 변변치 않았다. 평소 시모노세키 앞바다의 생선을 잡아 요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 료칸의 주인은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일행이 처음 보는 생선 요리를 바쳤고 이 요리의 맛을 본 이토 히로부미는 감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주인을 불러 생선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풍랑으로 온 마을에 생선이 씨가 말라 요리 할 생선이 없기에 국가에서 금지한 것을 알면서도 풍랑에 떠밀려 온 복어를 잡아 요리를 했노라고 실토하고 죽여달라 읍소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독을 제거하는 기술을 보급하고 복어를 요리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이 식당을 위해 '국가 인정 복어 요릿집 1호점'의 명예를 내렸다. 이후 복어는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의 재료로 부각되면서 순식간에 고급 요리로 자리 잡아 1920년대에 이미 일본 전체에 복어 요릿집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일본 복요리 코스일본의 복요리 코스는 크게 회(사시미), 껍질무침, 튀김, 수육, 맑은탕, 죽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복어회는 복요리의 백미라고 부른다. 복어의 꾸밈없는 '살맛'을 고스란히 전해 주며 살이 워낙 단단한 생선이기 때문에 종잇장처럼 얇게 포를 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생선회 접시와 달리 복어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한 접시를 사용한다. 일반적인 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하면 시선이 분산되어 생선회가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게 되므로 무늬를 최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복어회는 얇게 포를 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무늬가 회를 통해 투과되어 보이도록 색상도 강렬하고 화려한 무늬의 접시를 사용한다. 일본의 복어회는 보통 석 점을 한입에 먹을 만큼 크기가 작다. 한점의 크기가 보통 폭 1㎝ 정도에 길이가 4~5㎝가 일반적이다. 그렇게 작은 회 석 장을 깔고 가느다란 재래종 쪽파나 미나리 줄기를 한두 개 얹고 돌돌 말아서 폰즈 소스(이하 폰즈)를 찍어서 먹는다. 일본의 찍어 먹는 소스의 변화도 흥미롭다. 복어회는 다른 생선회에 비교하면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지만 사실상 별다른 맛은 없다. 예민한 사람들은 특유의 향이 있고 맛도 거론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무미(無味)에 가깝다. 결국 맛은 소스의 맛일 수밖에 없다. ◆폰즈전통적으로 복어회에 곁들이는 소스는 폰즈이고 이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폰즈는 가쓰오부시 다시 물에 간장을 혼합한 기본 베이스에 식초와 청주, 레몬즙을 혼합한 것으로 원래는 레몬즙이 아니고 유자즙을 사용하는 소스였다. 유자보다 레몬이 흔해지면서 지금은 레몬이 일반화된 것인데 식초, 청주, 레몬(유자) 등은 식중독에 대항하여 살균력이 있는 식재료라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이 폰즈도 한국과 일본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폰즈는 레몬즙과 식초를 비교적 부드럽게 사용하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신맛을 강화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샤브샤브가 일품요리로 한국에 많이 보급되면서 폰즈는 신맛이 더 강해지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폰즈에 무즙과 실파 등을 더해서 색다른 맛을 낼 수 있도록 변형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 오직 폰즈만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곳에 따라서 폰즈에 고추냉이를 곁들여 내는 식당도 있다. 이는 회는 무조건 고추냉이를 곁들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조리사들의 일방적인 실수라 하겠다. 폰즈는 한국에서는 복어튀김에도 찍어 먹는 소스로 주어지는데 이 또한 일본의 복어튀김과의 차이라 하겠다. 일본식 튀김은 원래 '덴다시'라는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 정석이다. 순하고 부드러운 소스인 덴다시는 맑은 간장 국물처럼 만드는데 다시마의 감칠맛을 잘 우려낸 소스로 짜지 않기 때문에 튀김을 푹 담갔다가 먹는다. 갓 튀긴 튀김의 바삭한 질감은 살아있고 겉에 맺혀있는 덴다시의 감칠맛이 튀김의 풍미를 더 좋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진간장을 베이스로 양념간장을 곁들이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음식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빈대떡'이나 '전'에 곁들이는 양념간장이 조금씩 바뀐 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하겠다. 결국 동일한 간장 문화이지만 그 사용 방법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대구 복어 명가역시 60~70년대 대구의 최강 복어집은 '대하림'이었다. 뒤를 이어 시청옆 둥굴관· 송림, 계산동 거창식당, 반월당 네거리 광성식당, 범어동 감포은정복어, 동구와 중구에 직영점을 가진 해금강, 서구의 경우 원대오거리 근처 자갈마당, 그리고 달서구는 성당복어, 본동복어와 월성복어, 대명동은 용궁복어 등이 인기몰이를 한다. '복어를 잡는사람들'은 가맹점 시대로 기반을 잡았다.부산~마산~진해~통영권 복어집에는 대구처럼 복어탕이라 하지 않고 '복국'이라 한다. 대구 토박이가 너무 좋아하는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환상적으로 버무려진 콩나물무침을 별도로 내지 않는다. 복어를 갖고 불고기 시대를 연 미성복어는 원래 예천의 한국관의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지리형 복어불고기를 벤치마킹해 자신의 창법을 승화시켰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구는 부산경남권과 달리 복국이라 하지 않고 '복어탕'이라고 부른다. 특히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무친 콩나물무침은 대구권 복어탕에 없어서는 안 될 으뜸 반찬이다.복어회는 복요리의 백미라고 부른다. 복어의 꾸밈없는 '살맛'을 고스란히 전해 주며 살이 워낙 단단한 생선이기 때문에 종잇장처럼 얇게 포를 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생선회 접시와 달리 복어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한 접시를 사용한다. 사진은 수성구 범어동 감포은정복어의 복어회.대구권 복어탕
[동대구로에서] 遷化의 꿈
낙엽은 동안거(冬安居)에 들어버렸고 노루 꼬리보다 짧은 초겨울의 햇살 속에는 냉기가 박혀 있었다. 주위에 앉은 시민들은 모두 반성문을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시들대로 시든 늦가을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숙이고 '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분은 삼매경을 한숨으로 지워버리고, 혼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성결한 표정이었다. 커피 한 잔을 빼 들고 그 곁으로 다가섰다. 내 커피를 받은 그는 고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지금 가장 절실한 게 뭐죠.""절실한 건 없어요…. 산다는 게, 뭐, 좀 그래요?""그래요가 어떤 거예요?""그건…, 그냥 그런 거죠."젊음은 늘 답을 찾지만 길에서는 항상 헤맨다. 하지만 늙음이란 길은 존중하지만 답이라는 게 수학의 답 말고는 삶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답을 위한 인생은 얼마나 섬뜩한 구석이 있는가. 길은 있지만 답이 없다는 말. 그건 다시 말해 인간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라는 말과 상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사회란 특수감옥에 갇혀 한세월 자기의 일을 완수해야 비로소 삶은 충분해진다. 그리고 삶의 필요충분한 세월을 보내면 비로소 찾아오는 자기와의 결별 수순이 기다린다. 바로 임종(臨終) 아닌가. 이승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놓은 덫일까. 과연 순도 100% 임종은 어떤 걸까?아무튼, 그 어르신은 "지난 시절에는 모든 게 문제인 것 같은데 지금은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자연은 늘 혼자다. 나무도 혼자이고 야수도 혼자이고 바람도 혼자다. 깊은 밤 위장은 혼자 음식물을 삭여낸다. 가로등도 늘 혼자다. 그런데 그 혼자라는 게 황홀하게 다 연결돼 있다. 임종과 포개질 시점이 온다면? 삶의 인식이란 게 도무지 말과 글로는 불감당일 것 같다. 저 어르신도 조만간 찾아올 죽음의 그림자, 저승사자와 어떤 수인사를 나눌 건가를 사색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탄생은 나의 통제범위에서 너무 아득히 멀어져 있는데 다행히 죽음 이 하나는 한 주체가 주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아닌가. 죽음의 과정이 멋진 라이브공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그 공연의 몫을 언젠가부터 의사와 약물한테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향해 보낼 수 있는 능동적 개입의 기회도 이젠 거의 기대할 수가 없어진 것 같다. 완벽하게 타율적인 공간에서의 죽음. 이 찬란한 문명의 이기 속에 도사린 하나의 '악몽' 아닌가. 갑자기 '천화(遷化)'에 대한 부러움이 든다. 천화는 좌탈입망보다 한 수 위의 가공할만한 불교계 고승의 멋진 죽음의 방식이다. 끝이다 싶을 때, 곡기를 끊고 생을 지탱했던 온기를 스스로 죽음 모드로 바꿔놓는 것이다. 삶이 죽음을 가장 통쾌하게 맞이하는 방식 아닌가.천화는 불가능하고, 대책 없이 살기만 좋다는, 이 우라질 세상의 이율배반적 편리함이 오늘따라 더없이 비애스럽게 다가선다.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이춘호 주말섹션부장 겸 전문기자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마지막 잎새
만추(晩秋). 비로소 가을과 겨울이 나무에 공존한다. 그 무렵이면 나무는 자기가 거느린 낙엽을 '창고 대방출'한다. 활엽수 가지에 매달렸던 단풍의 90%가 사라진다. 산의 속살이 여지없이 노출된다. 그래서 도시의 면적이 몇 배나 더 넓어진 느낌. 나무의 동면(冬眠). 수액은 상방으로의 진군을 멈춰버리고 뿌리 쪽으로 서둘러 피난을 간다. 홀로 남겨진 가지와 줄기는 극지 펭귄의 형용이다. 다들 얼어 죽을 각오로 어금니를 악물고 있다. 돌멩이처럼 야문 나뭇가지의 눈초리. 그래서 마지막까지 달린 빛바랜 잎사귀가 더없이 황홀한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단풍나무도 조생종과 만생종이 있다. 서둘러 지는 놈도 있지만 가지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는 질긴 놈도 있다. 그런 단풍일수록 야성이 강하다. 바로 '버즘나무'로 불리는 플라타너스이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멋진 가로수의 대명사로 불린다. 엄청 키다리다. 한국의 플라타너스는 프랑스에 비하면 단신이다. 상당수 잎은 이듬해 2월까지 매달려 있다. 은행잎은 목련꽃 지듯 대책 없이 진다. 단숨에 노랑 폭우처럼 사정없이 땅바닥으로 내려꽂힌다. 그리고 발길과 차의 바퀴에 짓이겨진다. 바나나껍질만큼 미끈거려서 낙상을 초래한다. 봄날 하늘거리는 연분홍 꽃을 매달았던 벚나무는 가장 고혹한 빨강·노랑·주홍의 앙상블을 보여준다. 남천과 화살나무, 담쟁이덩굴도 멋진 단풍을 그려낸다. 물론 감나무도 그 못지않다. 감잎 단풍에는 황톳빛과 녹색이 드문드문 묻어난다. 차인에겐 다식 받침대로 사랑받는다. 가을의 완성은 첫눈과 마지막 잎새가 만날 때다. 첫봄의 첫 잎, 그 연둣빛 움들은 다들 씨앗의 형용에서 점차 총알의 포스로 진군한다. 그게 크게 풀리면서 싹을 지나 잎으로 진용을 갖춘다. 무진장한 잎의 대열, 처음에는 그 잎의 컬러는 제각각이다. 4월의 산하는 그 초록의 각기 다른 스펙트럼이 완벽하게 균존한다. 하지만 찢겨 졌던 그 푸르름의 장막은 진초록으로 통합된다. 지루한 여름이 그 장중한 초록 하나로 버티는 것 같다. 산하의 속내는 좀처럼 들키지 않는다. 짙은 녹음과 폭염 사이에 태풍이 구렁이처럼 지나간다. 이윽고 가을이 도달하면 하나로 통일돼 있던 초록의 산하가 수천수만 갈래의 빛으로 쪼개진다. 식물의 모든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문인은 마지막 잎새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것은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니다. 목숨이 삶의 방식에서 죽음의 방식으로 몸을 뒤집을 뿐이다. 임종 직전의 몸도 어떤 가문의 가지에 달린 마지막 잎새 아니겠는가. 그 잎새를 보내면서 뿌리에 가득 찬 수액들은 더욱 생기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죽어줘서 '생큐'랄까?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최들풀 문경 아라리오 인형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2)
내 생의 최대 변곡점은 단연코 89년이다. 'Tears in heaven'을 애절하게 부른 에릭 클랩튼처럼 나도 목숨보다 더 소중한 딸(두레)을 잃어버렸다. 지독한 내 삶의 암흑기였다. 지나온 길도 지워지고 갈 길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트럭운전사·웨이터·세일즈맨도 되어보았다. 그것도 천명인지 나는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2017년 그렇게 귀향을 했다. 모르긴 해도 모진 인생 고비를 족히 8번 정도 굽이쳐 온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곳은 대전시 삼성동 84번지. 철도관사에서 살았다. 아버지(최대순)는 철도청 소속 축구선수였다. 초등학교 때 석탄의 도시 문경으로 이사를 온다. 아버지가 불정역장으로 전임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근처 신기국민학교에 다녔다. 이어 서울로 가서 응암초등, 충암초등, 배문중, 대광고를 거쳐 덜컥 성악가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악은 아니었다. 원예가가 꿈이었다. 북가좌동의 한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웠지만 맘은 식물에 가 있었다. 합창반 오디션에 참여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낙방. 하지만 테너 엄정행의 제자이자 내 친구인 바리톤 변병철이 내 소리의 가능성을 짚어주었다. 그 때문에 농대로의 꿈은 접고 음대를 선택한다. 하지만 레슨비가 벽이었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싶어 동양방송학생콩쿠르대회에 출전했지만 5등. 당시 '장안사'를 불렀는데 심사위원 중 한 분인 유병무 교수가 "자네 보이스는 이탈리아 본토의 색깔을 갖고 있단 말이야. 한양대 오현명 교수한테 러브콜 해봐"라고 귀띔해주었다. 덕분에 한양대 성악콩쿠르에 우승, 오현명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부친 전임으로 온 탄광도시 문경한양대 성악콩쿠르 우승·美 유학목숨보다 소중한 딸 잃은 후 성악가 삶 내려놓고 침묵의 시간러시아행…고혹한 보드카로 버텨남한보다 먼저 서게 된 북한의 무대北 그림 500여점 소장, 전시도 마련불정역 프로젝트 꿈기차에 꾸민 세계 인형 그라피티 존국토종주 자전거족위한 문화게스트존설렘 가득한 온갖 아이디어로 솟구쳐 ◆딸의 죽음해병대 군악대에 들어갔다. 군함을 타고 난생처음 미국땅을 밟게 된다. 이때 유학의 꿈을 품게 된다. 시카고 뮤지컬 칼리지에 입학했고 인디애나주립음대에서는 특이하게 오페라와 연출을 전공하게 된다. 9년간 미국 유학 생활 중 영주권을 취득한다. 88년 오페라 '여우곰보'에 출연했는데 뉴욕타임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3년 '만약 모차르트가 한국인이었다면?'이라는 화두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한국식으로 번안한 오페라 '아침나라 요술피리'를 뉴욕 플러싱타운홀에서 초연해 뉴욕타임스레져지로부터 호평을 받았다.점차 뉴욕에서부터 내 존재가 각인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89년 딸의 죽음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도무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침묵의 2년, 그리고 나는 러시아 볼쇼이오페라단에 입학한다. 볼쇼이오페라단의 테너인 주랍 소킬라바가 미국 뉴저지에서 마스트클래스를 할 때 내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가 러시아행을 강추했다. 러시아의 무지막지한 추위와 바람이 크게 위안이 됐다. 푸시킨의 시, 솔제니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그리고 자작나무의 수피보다 더 고혹한 보드카가 나를 살렸다.1990년 9월, 평양통일음악제에 초대를 받는다. 내가 취득한 미국 영주권이 큰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남한보다 북한의 무대에 먼저 선 것이다. 당시 정국은 온통 남북 평화무드였다. 나는 변훈의 '명태', 그리고 북한 작곡가 리면상의 '압록강 2천 리'를 장중하게 불렀다. 특히 명태의 배경지기도 한 원산 청년극장 공연 때 '명태는 역시 최상균'이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77년 한양대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약장수 역, 볼쇼이 무대에서는 푸치니 라보엠 주역인 마르텔로 역을 30여 번 했다. 주특기는 모차르트 마술피리 사냥꾼 역 등. 아무튼 그동안 10여 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북한 그림 소장기나는 지난 30년간 우리에게는 금기된 북한 그림, 포스터 등을 500여 점 모을 수 있었다. 나만큼 다양한 북한 그림을 소장한 사람도 국내에서는 거의 없을 것 같다. 통일음악제 때 짬을 내 여러 화랑을 돌며 그림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림값이 너무 쌌다. 100달러 정도면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었다. 나는 너무 추상적인 것보다 사실적인 북한 그림이 맘에 들었다. 정창모, 선우영, 김상직, 최재남, 최계근 등 북한 1급 작가의 그림을 축적해갔다. 그걸 전시로 이어갔다. 2014년 예술의 전당, 2015년 남북평화미술전, 메트로미술관, 춘천시립미술관, 2018년 평창올림픽기념전(백두에서 한라까지), 최근에는 경기도 파주시, 전북 전주시 등에서 북한전을 열었다. 그런데 2011년 이후 현행법 상 만수대 창작사의 그림은 전시할 수가 없다. 정식적으로 수집한 그림, 나처럼 개인이 소장한 그림에 대해서는 외교부가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나의 방 벽에는 북한의 역장을 그린 최장식, 작고 전 내게 선물로 준 정창모의 예사롭지 않은 필선의 수묵화 '내금강 보덕암'이 걸려있다. 향토사학자 이용우는 그 그림을 두고 "겸재 정선, 최북, 강세황, 오원 장승업의 화풍이 다 녹아들어가 있다"고 호평했다.북한통이라서 그런지 2006 북한문화성 해외대리인이 되고 남북평화미술전까지 추진하게 된다. 이 과정에 베를린과 뉴욕을 오가며 문화사업을 전개한다. 중국 선양에 화랑까지 오픈한다. 덕분에 국제델픽위원회(문화올림픽) 아시아국장 자격으로 2009제주도델픽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다. 이밖에 뉴욕유리디쎄오페라단 단장, 대구예술대 특임교수, 칠곡세계인형오페라페스티벌 예술감독, 뉴욕세계합창제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불정역 단상해야 될 일은 산적해 있지만 불정역 프로젝트는 아직 절정의 순간을 못 맞고 있는 것 같다. 문화는 사업이 아니라 설렘을 동반한 오랜 기다림의 결과물인 탓이다. 그래서 되는가 싶은 게 안 되고 저게 되겠나 싶은 게 진짜 되기도 한다. 그건 목숨을 건 꿈이 필요하다. 문경시의 꿈과 나의 꿈이 어디에서 만나야 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인형오페라의 신지평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녹슨 기차 외벽의 녹을 다 벗기고 거기에 산뜻한 세계 각국 인형 그라피티 존도 만들고 싶다. 그 앞을 오가는 국토종주 자전거족들을 위한 문화게스트존, 한 가족 한 객차 갖기 프로젝트, 문화장터, 팬터마임, 저글링, 마술, 장승, 솟대 체험 공방…. 온갖 아이디어들이 솟구친다. 오는 12월7일 대구가락 스튜디오에서 아라리오 예술기획 주최 체코 카로마토 인형극단의 '줄인형 써커스'가 공연된다. 문의: 010-2386-8400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무료하면 곧잘 녹슨 철로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아직 성성한 현역 바리톤의 굵직한 보이스를 열어젖히고 있는 최들풀. 그는 내년 봄 이 선로에서 신춘 음악회를 열 예정이다.그는 30여 년간 수집한 500여 점의 북한 그림을 불정역 갤러리를 찾은 방문객에게 감상할 기회를 주는 걸 큰 보람으로 여긴다.사무실 한쪽 벽에는 그림자인형극 '문경새재 혹부리영감' 등 그가 간여한 각종 행사 포스터가 부착돼 있다.탄광 산업이 숙지면서 1993년 9월1일 불정역의 영업은 중지된다. 한때 철거 위기에까지 처했으나 희소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326호로 지정된다. 근처 영강의 강돌을 석재로 이용해 지은 역사, 그 상단부에 적힌 '불정'이란 역명이 최들풀의 파란만장한 삶과 잘 매치되고 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최들풀 문경 아라리오 인형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1)
예순다섯 따라지 인생. 미스터 시나부렁. 그렇다 이제 나는 비로소 길 끝에 설 수 있다. 고개를 돌리니 저승으로 간 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문경시 불정동 불정(佛井)역장이었다. 운명인지 지금 나도 그 불정역의 명예역장으로 산다. 돌아온 역장 아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오래 타향을 유랑했고 그래서 돌아온 고향을 제대로 품는 게 무척 힘들다. 그래도 어찌하랴, 불정역은 내 삶의 종착역인 것을.불정역은 1954년 개통된 문경선의 한 역사다. 점촌 기점 10.7㎞ 지점에 야생화처럼 피어 있다. 예전에는 역사를 지난 기차는 바로 왼쪽으로 굽어져 문경새재 쪽으로 사라지고 강물은 그 반대로 굽이쳐 내려갔다. 역사를 지을 때 인근 영강의 강돌을 석재로 활용했다. 그래서 더 운치가 있다. 역 옆에는 경남 거창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3번 국도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비포장길이었다. GMC 트럭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동네는 뽀얀 먼지에 휩싸이지만 또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먼지 속을 단거리 선수처럼 질주했다. 인형오페라하우스로 재탄생한 불정역오픈 공연 '문경새재 혹부리영감' 호평'모차르트 마술피리' 한국적 정서 개작삶의 종착역서 만들어가는 희망 씨앗문경이 탄광의 도시였을 때는 돈이 흥청망청했다. 하지만 탄광 산업이 숙지면서 93년 9월1일 불정역의 영업이 중지된다. 한때 철거 위기에까지 처했으나 희소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326호로 지정된다. 이후 문경시 주도로 2008년 전면 리모델링 된다. 무궁화호 객차를 개조한 열차 펜션 영업을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중단된다. 한때 지역 특산물 판매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급기야 2017년 9월 문경 아라리오 인형오페라하우스로 개관된다. 초대 예술감독을 공모했다. 서울에서 그 뉴스를 접한 나는 피가 들끓었다. 그날부터 내 피는 항상 불정역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뽑혔다. 2018년 시즌 오픈 공연으로 그림자 인형뮤지컬인 '문경새재 혹부리영감'을 선보인다. 전래동화에 현대적인 감각을 입혔다. 이 작품은 2017년 경북도 청년일자리창출 공모사업의 일환으로서 문경에 거주하는 7명의 청년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문경새재의 아름다움을 그림자기법을 통해 환상적으로 펼치고 문경새재아리랑을 랩버전으로 소개했다. 색다른 볼거리였다. 그래서 반응도 뜨거웠고 언론도 호평을 했다. 나는 그 자리로 올 운명이었던지 외국에서 오페라 출연을 꽤 오래 했다. 그 역량을 십분 활용해 한국형 인형오페라의 신지평을 넓히고 싶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한국적 정서로 개작해 '아침나라 요술피리'란 책을 김희정의 그림을 보태 동화책으로 출간(학이사)하기도 했다. 밤의 여왕을 '팥죽할매', 파미나공주를 '화미아씨'로 개명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도 그림자극인 '소년장수 견훤', 마리오네트(목각인형극)인 모차르트 요술피리, 막대인형극인 '김문경과 개밥그릇' 등 문경과 관련 있는 소재를 발굴해 인형극으로 만들 준비를 했다. 솔직히 코로나는 내게 하나의 악몽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가 없었다. 불정역은 내겐 생의 끄트머리인 '데드 엔드(dead end)'였기 때문이다. 한겨울, 영하 20℃의 설한풍이 불 때면 노래를 불렀다. 이제 품어볼 수 없는 1989년, 그해 내 딸의 죽음을 생각하며 장작을 난로 안으로 집어넣었다.철길 옆 주택가에는 유난히 아이가 많다. 우리 집은 10명. 10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문경을 떠나 다시 문경으로 돌아오기까지, 30여 년 세계 75개국을 보헤미안처럼 떠돌았다. 나름 괜찮은 바리톤으로 살았다. 뉴욕타임스·독일 오스티렌드 차이퉁·뉴욕 리버 리포트가 나를 주목했다. 내 삶은 너무 척박해 늘 '들풀' 같았고 언젠가 거기서 '들꽃'이 필 거라 믿었다. 본명은 최상균이지만 필명으로 '들풀'을 고집했다. 누가 내 삶을 단 한 줄로 줄이라고 한다면 '들풀에서 들꽃까지'라고 말할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최들풀 문경 아라리오 인형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2)에서 계속됩니다.30여 년 세계 75개국을 돌며 성악가, 시인, 북한 그림 수집가, 트럭운전사, 레스토랑 웨이터, 세일즈맨, 공연기획사 대표, 인형극 연구가 등 다양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가 역장으로 있었던 불정역이 철거 위기에서 벗어나 문경 아라리오 인형오페라하우스로 리모델링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거기 초대 예술감독에 선임되고 덩달아 명예역장 소리도 듣게 된 최들풀. 그가 극장에 비치된 줄인형을 들고 나와 환하게 웃고 있다.
[첫 / 날] 임병애 첫 소설집 '공간에서'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영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방학이 되면 안동 와룡면 큰집에 놀러 갔다. 당시 안동역에서 큰집까지 교통수단은 택시뿐이었다. 우리는 영주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옹천역에서 내렸다. 큰집까지는 한두 시간은 족히 걸었다. 심지어 산과 들을 넘어 다녔다. 아버지·동생과 같이 걸어서 다녔던 그 길이 지금까지도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헤르만 헤세는 유년의 기억을 담은 '데미안'으로 문학예술을 불 피웠다. 글을 쓰는 내게 안동에서의 유년은 소중한 자양분이다. 순수 그 자체였다. 40여 년 서울 생활은 그 순수를 갉아먹었다. 내 몸을 침범하는 비정한 사회는 내가 기억하는 인본 말살을 원했다. 내 의식에 박힌 그 순수를 내 작품 속으로 저장시켰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희망은 유년 때부터였다. 그냥 혼자서 습작을 했다. 모 대학 국문과 신문에 소설가 강의 홍보가 났다. 작가는 강준용이었다. 마침 동서문학에 난 '반쪽의 유희'를 읽은 후 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던 그 문제의 소설가였다. 그 강의를 들은 후 나는 내 작품을 강준용한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습작품을 단숨에 혹평했다. 크게 상처를 받고 좌절을 하였다. 그를 보면서 나의 한없이 부족한 면을 보게 되었다. 혼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새로운 문학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갈수록 습작은 나를 옭아맸다. 나는 호주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내 문학의 방향은 '강준용 문학'이었다. 나는 그의 혹평을 딛고 점차 성숙해갔다. 1996년 '예술세계'에 '유년의 빛'이란 단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첫 소설집 '공간에서'(좋은 작가 刊)를 출간할 수 있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탑재돼 있다. 등단 시기에 비해 작품집 출간이 많이 늦은 편일 수 있다. 나 자신이 많이 게으르고 또 작품은 언제든지 묶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평생 은둔자로 살았던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은근히 그녀의 삶으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일단 내 의식이 든 작품을 책으로 냈단 것에 만족한다. 작품은 작가이다. 자신의 모습을 아무렇게나 내놓는 삼류가 되지 말란 것이다. 절대 작품의 숫자가 아니라 단 한 편의 명작을 쓰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화려한 기교와 화려한 문장보다 진실, 내면의 솔직한 진실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순수의 진실, 진정성만이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내가 쓴 작품이지만 때로는 낯선 작품들도 있고 진짜 내가 썼나 싶은 작품들도 많다. 그중 '공간에서'를 가장 아낀다. 몇 년에 걸쳐서 수정과 수정을 거듭해 완성된 작품이다. 내가 지향하는 의식과 현실 속 현재의 존재, 나의 의식을 단어로 형상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런대로 만족한 작품이다. 한밤에 작품을 집필한다. 그러나 갈수록 작품 집필에 겁이 난다. 쓰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내 창작은 섣불리 작품을 탈고하지 못하게 된다. 그 완성도를 위해 나는 과작의 소설가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했다. 소설은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된 후부터 내 삶의 희망을 이루었다. 더 이상 욕심은 없다. 갈수록 예술적 작품보다 흥미 위주의 작품들이 판을 친다. 그것이 시대상의 주류라 해도 인본의 순수한 의식이 문자화된 예술적인 서사문은 창작되어야 한다. 이름난 문학상 받았다는 작품이 예술품으로 둔갑 되는 현실이다. 등단지가 많아 누구나 소설가가 되는 이 현실,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 나의 기우이길 바란다.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소설가 임병애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2) 소갈비 돌풍 일으킨 수원·포천名家…대구는 진갈비·동인동 찜갈비로 진화
1939년경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 주인이 전남(지금의 광주시) 송정리에 갔다가 그곳의 술집에서 가리를 대로 구워 파는 것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 손님들에게 냉면과 함께 가리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당시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 갈비 한대가 20전이었다. 냉면 보통 한 그릇과 갈비 두 대를 시켜 먹으면 60전으로 종로의 극장이나 요릿집, 카페, 바 등에서 파하고 술도 깰 겸 출출한 속을 채우는 야참으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 인기가 대단했다.냉면 한 그릇 가격과 같은 갈비 한대1930년대 평양냉면집 손님 몰려들어갈비찜은 신선로 다음으로 고급요리뼈길이 2~4인치 따라 이동·수원갈비1961년 대신동 진갈비로 갈비신드롬 서울 마장동 구입 갈비절단기 첫 사용봉덕동 갈비골목 퍼진 안동마늘양념 ◆최고 선물 갈비평양냉면집에 손님이 몰려들었고,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를 달라고 하면 복잡했다.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 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1930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갈비찜의 성황은 계속 이어졌다.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연회에서나 요정에서나 명절 가정 요리로 갈비구이보다는 갈비찜이 인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서 소갈비는 명절 선물로 가장 으뜸에 들었다. 전후의 황폐했던 경제가 제법 안정 상태로 들어선 1960년대가 되면 명절을 앞두고 각 수육 상가에는 소갈비 판매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팔도 갈비 명가들대구보다 훨씬 앞서 소갈비 돌풍을 일으킨 고장은 어딜까. 수원, 포천, 안의, 예산 등이다.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한다. 이동갈비는 1960년대 초 피란 내려온 김정민 할머니가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 처음 시작하다가 문을 닫고 70년대 김정민 할머니 집에서 주방을 맡았던 주방 아주머니와 조카가 김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장암갈비집'이라는 상호로 시작했다. 몇 년 전 '김미자 갈비집'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미자 갈비집'은 조선간장과 조청을 넣고 끓인 후 양념에 사과나 배 등 과일을 넣어 갈비를 재워 그 맛이 독특하다.갈비의 길이가 4인치면 '수원갈비'로 불리는데,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이 원조집. 화춘옥은 수원 팔달구에서 형 이춘명과 1930년부터 화춘제과점을 하던 이귀성이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밀가루 공급이 끊기자 1945년 광복되던 해 수원 영동시장 내 싸전거리에서 소갈비를 듬뿍 넣은 해장국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며 번창했다. 이 과정에 양념갈비를 재웠다가 구워 파는 수원의 독특한 갈비를 탄생시켰다. 화춘옥에서 41년 동안 갈비를 다루었던 문이근은 갈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원길을 배출했고 이원길은 갈비 조리업계의 대부로 후진을 배출했다. 지금은 수원 본갈비, 명성옥, 삼부자갈비집 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빗집이 많이 생겨났다.해운대갈비의 경우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 사장 이귀성이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주면서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집이 어느 집인지 확실치 않고 다만 해운대에서 암소 갈비 맛이 좋고 30여 년간 갈빗집을 해 온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집'이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전통을 지키고 있다. ◆대구 갈비의 뒤안길50년대 말 대구에서 불고기 돌풍을 일으킨 계산동 '땅집'의 흐름을 역이용, 1961년 대신동 타월골목에서 진갈비를 시작해 대구 갈비신드롬을 일으킨 진홍렬. 그는 대구에서 맨 처음 서울 마장동에서 구입한 갈비 절단기를 사용한다. 이후 이 골목에는 우후죽순 갈빗집이 생겨나고 그래서 진갈비가 있는 동산약국 뒷골목을 '갈비골목'이라 했다. 2000년대까지 롱런하다가 지금은 재개발 구역이 돼 휴업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진갈비 시대를 열 모양이다. 그 골목의 마지막 주인공 중 한 곳이 '성주갈비식당(현재 서성로로 이전)'이다. 진갈비 길 건너 '국일생갈비'도 갈비 명가라 할 수 있다. 진갈비의 전통은 마늘과 고춧가루를 만나면서 대구식 동인동찜갈비로 진화를 한다. 또한 참기름과 마늘향이 일품인 안동갈비 스타일은 안동 '서울식당'에서 발원, 남구 봉덕동 갈비골목에도 영향을 주고 그리고 수성구 '혜성식당',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옆 '참한우소갈비'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성구 프리미엄 한정식당인 '안압정'은 초창기 비원이란 이름으로 기존 등심 중심의 대구에서 갈빗살 붐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고성동 대창가든, 수성구 신성가든, 서구 한국가든, 남구 앞산가든, 수성구 제주가든 등도 대구를 숯불구이 고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이 밖에 경산 자인 남산식육식당도 전국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1961년 계산동 '땅집' 불고기 돌풍을 이용, 대구에서 '진갈비'를 통해 소갈비시대를 보여주었던 주인 진홍렬씨. 진씨 덕분에 이 골목은 갈비골목으로 롱런했지만 지금은 재개발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진갈비와 성주숯불갈비 등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모양이다.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1) 수백년 이어온 팔도 별식 '가리구이'
◆갈비 이야기갈비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문헌을 살펴보면 소갈비는 협(脅), 돼지갈비는 박(拍)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갈비는 1600년대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돈박(豚拍)'이 나오는데, '박(拍)을 박(膊)으로 삼으니, 갈비(脅)를 이름이다'란 구절이 나온다.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였던 홍만선은 '산림경제'란 책을 통해 양갈비구이(灸羊脇骨)를 소개했는데, '껍질 붙은 양갈비 한 대를 두 토막씩 내어 망사 가루 한 움큼을 팔팔 끓는 물에 담가 따뜻하게 두었다가 구이를 잠갔다가 급히 뒤적여 익지 말게 하고, 다시 잠갔다가 다시 굽기를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좋은 술에 슬쩍 담갔다가 한 번 뒤적이면 바로 먹을 만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럼 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9월24일에 사헌부(司憲府) 상소 내용에도 갈비가 등장한다. 인조 때는 소갈비나 돼비갈비를 연희 때 빠지지 않고 썼던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정조 19년(1795) 6월18일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 갈비찜(乫非蒸)이 올라갔다.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불을 피워 놓고 소갈비를 큰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었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소고기의 맛있는 부위로 소 밥통, 양지머리, 갈비 등을 꼽았다. 특히 소갈비인 우협(牛脇)을 갈비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 색임'이라 하였으며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 하였다. 쇠가리를 푹 고아서 끓인 가리탕이 1890년 궁중연회상 차림에 보이나 갈비는 고려 시대 전부터 먹어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을 튀한(털을 뽑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낸) 것과 부아·곱창·통무·다시마를 함께 넣고 무르게 삶아 건진다'라고 요리방법을 적시했다. 송만갑의 판소리 수제자 박봉술의 춘향가에도 '갈비찜'이 나온다.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도 '귀신 같은 아이놈이 상 하나를 들어다가 놓으니, 어사(御使)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모조라진 상소반(床小盤)에 뜯어먹던 갈비 한 대'라는 대목이다.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자 요리연구가 방신영 교수가 쓴 '조선조리제법'에도 '가리구이'라는 조리법이 나와 있다.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워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언론인·수필가·동화작가였던 조풍연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 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으며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광주시에 들어간 송정리에서 만난 갈비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정리에는 술집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가리구이를 시키면, 우선 풍로가 들어오고 자배기로 하나 가득 갈비 잰 것이 들어온다. 조그맣지만 한 대에 5전이었으니까 무척 쌌었다. 주객들 옆에서 작부가 가리를 연방 구워서 상에 올려놓는다. 다 먹은 뒤에 셈을 치를 때 남은 가리의 대수를 세어서 돈을 청구한다.'그런데 이 갈비는 수원갈비나 이동갈비와 달리 떡갈비였을 것 같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도 송정리 일대에는 떡갈비집이 많았다. 지금은 해남과 담양에 있는 식당이 더 소문이 났지만, 당시만 해도 송정리가 으뜸이었다.주지하듯이 갈빗살을 발라내 여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다시 갈비뼈에 붙인 후 석쇠에 구워내는 떡갈비. 비록 뜯어 먹는 재미는 덜 하지만 입에서 씹히는 갈빗살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떡갈비는 갈비에서 살코기를 다 뜯어내고 버려야 마땅한 것에서 고기를 발라내서 마치 살이 많이 붙은 갈비처럼 만들어 먹은 것이니,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2)에서 계속됩니다.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전국 49명의 詩人, 사랑하는 구룡포를 낭독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몸을 뒤집는 삶의 한 대목이 있다. 그 절망은 희망보다 더 확장성이 높다. 그런 절망을 과연 경전과 교과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건 어쩜 시인의 비명 같은 시집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지난 1일은 시의 날. 1908년, 한국의 첫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통해 발표된 날이다. 소년 같은 전국 49명의 시인이 의기투합해 '구룡포를 사랑한 시인들' 명의로 멋진 시집을 출간했다. '어화만대(漁花滿代) 구룡포 시가 되다'. 그 시집의 주인공은 어쩜 시인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7천200명의 주민을 가진 구룡포읍 그리고 해녀와 바다, 생선 유통의 최전선에 선 구룡포수협 관계자의 몫일 것이다. 그 중심에 이 행사를 진두지휘한 권선희 시인이 있다. 2000년 3월에 왔으니 이제 구룡포는 그녀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제2의 고향에서 받은 따뜻한 마음 시집 '구룡포…' 출간 기념 이벤트주민이 선보인 풋풋한 詩劇·시노래음악이 흐르자 모두 흥겨운 춤판해녀 14명도 바다 일 접고 어울려뒤풀이때 한상 차려진 대게·참문어 밤 새 잔 돌리며 읊은 시와 이야기 검푸른 밤바다 보며 詩想 굴리기도◆시가 된 구룡포시집의 서문을 읽어봤다. '구룡포는 온몸으로 시를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었습니다. 판장 가득 은빛 청어가 꽃으로 피는 봄, 허파꽈리처럼 오종종 매달린 골목이 눈부신 아침을 받아내는 포구, 초가을 태풍을 배웅하면 이내 희디흰 눈발 치던 포구, 해녀와 배목수와 어부와 아이들, 그리고 검둥이와 누렁이 가리비처럼 오목한 포구에서 노래 바람 다녀가면 명주바람 분다는 이치를 믿고 따르는 순정한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살고 있습니다. 밤바다 수평선 가득 고깃불이 꽃으로 만발할 여기, 구룡포 시인들이 노래합니다. 어화만대, 자손만대 평안과 풍어, 풍요를 기원합니다. 비로소 구룡포는 시가 되었습니다.'올해는 구룡포수협이 생긴 지 100년이 되는 해. 지난달 8일 임인년 풍어제를 했고 다시 29일 포구 한쪽에 있는 아라광장 야외무대에서 시집 출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나는 오후 5시37분에 구룡포 수협이 아스라이 보이는 무대 근처에 도착했다. 구룡포읍의 반쪽은 먹구름, 다른 반쪽은 노을에 젖고 있었다. 음과 양, 하늘과 땅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세상의 선과 악이 그 시각, 모두 구룡포로 소풍을 온 것 같았다. 파도는 자신의 욕망을 출렁거리는 수위로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뱃사람들의 천적은 어쩜 시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솔직히 시인이 부담스럽다. 그들은 자본을 몰고 다니지만 시인 앞에 서면 이상하게 이들한테 빚을 진 것 같다. 그래서일까, 구룡포 뱃사람들이 이 행사를 위한 도움만 전달하고 가능한 폼 잡지 않았다. 박두규, 문동만, 안현미, 이원규, 함순례, 김성규, 정우영, 한창훈이 자작시를 낭독했고 포항에 머물며 레지던시 프로젝트를 이행하고 있는 프랑스 화가인 장미셀 리비오도 초대를 받아 시를 낭독했다.김일란, 권정무, 김정화, 신은자 등 주민들도 풋풋한 시극을 선보였다. 진우와 박경하는 시노래 그리고 이동순 시인이 아코디언 연주로 대미를 장식했다. 목포의 눈물 등 아련한 추억의 옛 가요가 흘러나오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인과 주민들은 뒤엉켜 춤판을 쏟아냈다.◆구룡포는 기용포이날 아침부터 '행사가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로 억센 비가 내렸다. 하지만 행사가 시작될 무렵 비가 뚝 그쳤다. 다들 용왕님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날 주민들이 걸어준 현수막 문구가 단연 화제집중이었다. 주민들은 구룡포를 '기용포'로 발음한단다. 그래서 이런 재밌는 문구가 탄생한다. '아이고 바뿐데 기용포 와조가 고맙니더, 올래만이시더 참말로 반갑데이~' 여기저기 걸린 그 현수막을 본 시인들이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시인들을 위한 행사였지만 실은 주민들의 잔치였다. 시인들은 다들 부러워했다. 한 포구를 위해 전국의 시인들이 시를 잉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건 전적으로 권선희 시인의 너른 품앗이 정신 때문에 가능했다. 수협에서 구룡포의 역사를 다시 정리하고 해녀인문학을 채록하는 정성을 위해 '그냥상'이란 희한한 상을 준다. 그녀는 그 상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14편의 구룡포 관련 시화집 제작비로 쾌척했다. 다들 감동했고 권 시인의 일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정색한다. 이 행사는 '구룡포가 주인공'이라며 선을 긋는다. 구룡포에 최적인 시인을 선정하고 원고를 받고 책을 묶고 행사 당일 일을 도와줄 일손을 확보하는 것까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협과 주민이 음으로 양으로 이 행사를 도와주었다. 14명의 해녀도 수훈갑이다. 이날 바다 일을 접고 행사장으로 직행했다. 시인들의 뒤풀이를 위해 실컷 먹어도 남을 정도로 많은 대게, 참문어, 구룡포 막걸리 등을 구룡포의 이름으로 찬조했다. 행사가 끝난 뒤 시인들은 근처 횟집에서 1차 술판을 전쟁처럼 벌였다. 그리고 구룡포청소년수련원에 사령부를 구축한 뒤 밤을 지새우며 잔을 돌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리산에서 이곳까지 온 이원규 시인은 말총머리를 연신 출렁거리며 호감 섞인 미소와 웃음을 선보였다. 육두문자급 입담을 가진 김해자 시인은 혼자 자청해 유행가를 부르고 어깨춤까지 추는 대단한 신명을 뿜어냈다. 영천에서 농사를 짓는 이중기 시인은 시종 일장훈시 급 법문(?)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이 시인은 이번 시집에 '구룡포 사람들 호롱불 데모이야기'란 시를 실었다. 그 내막은 이러했다. 그해 2월 구룡포항 밤은 불빛 한 점 없이 깜깜했다. 어느 날 전기회사 사원 놈들이 전구 검사한다며 느닷없이 집집마다 쳐들어 와 험악해져서는 자기네 회사가 판매하는 전구 아니라고 계약 위반이라고 전구 몽땅 몰수하곤 추징금 2원까지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 행세가 천한 상것들이라 구룡포 사람들은 대번 데모! 돌입했다. 965개 전등 죄다 전깃불 꺼버리고 뒤란에 처박아 놓은 호롱 찾아 호롱불 밝혔다. 전남 거문도에서 어부의 삶을 사는 한창훈 작가. 대단한 협기(俠氣)와 입담을 가진 그가 이 시인의 말머리에 제동을 걸었다. 그때마다 웃음이 용암처럼 분출했다. 몇몇은 술판에서 벗어나 검푸른 밤바다를 보며 시상을 굴리기도 했다. 숙소는 있었지만 방은 비어있었다. 다들 이 밤에는 잠이 무용지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가 변방으로 쓸려가는 이 시대, 그래도 시 하나로 밤을 덥혀줄 도반이 있다는 사실을 다들 고마워했다.◆동병상련 시인들한창훈의 시에는 소주가 흘러넘친다. '어장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파도가 높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토속적 몸선을 가진 함순례 시인은 '신도여인숙'을 정말 구룡포 토박이 정서로 잘 녹여냈다.'남들 다 내 같지 않제 걱실걱실한 뱃사람들 상대하기가 좀 에려운 기라 고만 둬뿔라 몇 번을 맘묵어도 쪼매 두고 보제 했던가 이날이라카이 지금사 일 놔뿔기도 궁시럽고마 사람들 월세방으로나 돌리뿐 기라 그라도 한 밤만 재와주소 며칠 굶었는데 밥 좀 주소, 하믄 맴이 아퍼가 재와주고 믹인 사람, 빛도 없는 밤에 다리닥쳐가 날마새마 홀랑 도망간 넘들 쌨다 우째다가 방세 줄라꼬 다시 온 넘은 한 분도 못 봐가 속이도 속아주고 함시로 사람이 독해지제 아 이것? 예전 꽁치잡이배 그물에 쓰던 기라 열쇠가 하 쪼매니께 안경집만한 여어 다 잡아매놓으이 십상 좋다 주무이 뿔룩해징께 아참 하고 놓고 가는 기라, 여는 낯 씻는 데고 저짝이 볼일 보는 데라 영화배우도 여그 많이들 왔제 요샌 시인이라는 작자들도 더러 찾아오더만, 근디 시인이 대체 뭐하는 사람잉가? 시악시는 알어?'다음날 함흥식당에서 복국으로 속을 푼 시인들은 근처 다방(읍에는 다방이 28개가 있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근처 방파제 등에서 망막한 눈빛을 바다에 던지곤 구룡포를 떠났다. 오후 5시30분, 한창훈은 구룡포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부산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부산에서 거문도 행 배를 타기 위해서다. 무성한 웃음과 이야기를 남겼던 숱한 화상들을 모두 보낸 권 시인. 한달간 준비했던 행사를 마감하는 그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한 심정을 혼자 추스르기가 뭣했던지 의사들이 절대 먹지 말라던 술을 기울였다. 시인들은 저마다 고마움이 담긴 메시지를 구룡포를 향해 날렸다. 시인 사용법을 아는 이는 누군가. 꿀벌이 없으면 과일도 없듯 시인이 없으면 대책 없이 지루한 일상도 사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구룡포를 떠나며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늘이란 천적, 그 아래서 하릴없이 지구 전과 그 이후의 쓸쓸함이나 파종하는, 혹여 그 뿌리를 향해 제 목숨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검푸른 바다의 행간에 주름살이나 빨래처럼 늘어보자는. 여기는 구룡포 세기말 주막 그리고 그 방파제 등대의 늑골 속 파고드는 한물간 빗소리, 그걸 유행가처럼 흥얼거리면서 평생 그렇게 시인들이 산책처럼 살다 갔으면 좋겠다. 구룡포는 내년에도 변함없이 시가 될 수 있을까?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시의 날, 그리고 임인년 구룡포수협 100주년 특별행사로 구룡포 아라광장 야외무대에서 구룡포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퍼포먼스 행사가 진행됐다. 이동순 시인이 아코디언 연주로 대미를 장식했다. 주민과 시인들은 서로 어울려 춤판을 자연스럽게 연출했다.행사 뒤 전국에서 모인 40여명의 시인과 주민들은 구룡포가 준비한 대게, 문어 등을 먹으며 여흥을 즐겼다. 김해자 시인이 자청해 자기 시를 읽어주고 있다.구룡포항 전경.구룡포와 인연이 있는 전국 49명의 시인이 구룡포를 위해 시집을 출간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2) 윷과 성혈 연구 파고들다 연결된 선덕여왕과 첨성대…다산 기원 '祭儀'
윷을 만나면서 내 삶도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윷은 단순히 어른들의 전통민속놀이가 아니었다. 한민족만의 철학이 담겨 있다. 농경사회의 역법의 축을 이룬 음력과 24절기 그리고 음양오행, 심지어 천문학의 핵심까지 스며들어 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중국의 하도·낙서, 81자의 천부경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신라서 고안한 국민놀이 윷놀이천문학의 핵심까지 스며들어가황룡사 터 바위 새겨진 윷판과 점생명 잉태 '삼신 사상' 성혈 접점◆나는 윷 연구가건구사에서 일할 때 주문이 들어오면 전국 각처를 돌아다닌다. 갈 때마다 쉬는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했다. 윷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축적하기 위해 공사장 근처 경로당과 마을회관 등을 찾았다. 그들은 우리 문화의 보고이다. 기존 민속학도 해결하지 못한 어떤 연결고리의 일부가 그들의 기억 속에 숨어 있다. 나는 그걸 찾고 싶었다. 그 마을만의 독특한 사투리, 특히 자기 마을만의 윷의 모양과 윷놀이 법칙 등을 인터뷰하고 그걸 민요 채록가처럼 면밀하게 기록해 나갔다. 매월 평균 5번 출장을 갔다. 따져보니 채록 횟수가 1천회를 넘어선다. 출장을 다녀오면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윷놀이는 각양각색이었다. 윷과 윷판의 모양이 다르고 노는 방법도 집안마다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경북 고령군의 어느 문중은 윷판 없이 놀았다.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며 말을 움직였다. 경남 통영의 어느 마을에서는 윷을 던질 때 사기 종지에 넣어 사용했다. 그들은 그걸 '종지윷'이라 했다.윷놀이를 고안해 낸 나라가 신라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냈다. 명민한 관료들이 머리를 맞댔다. 농번기에 일할 민초가 겨울 농한기 너무 나태해져 놀기만 하면 이듬해 농사에 큰 지장을 줄 것 같아 몸도 풀고 동민끼리 화합과 공감의 시간을 갖도록 윷놀이를 정책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라만의 국민 놀이라고나 할까. 윷은 주역처럼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윷점'에서 시작되었다. 윷에는 5마리의 가축이 등장한다.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의미한다. 하필이면 왜 그 가축일까. 일단 십이지지 동물 중 사지가 땅에 닿고 사람이 잡아먹을 수 있어야 하고, 집의 재산이 될 수 있는 놈만 골라냈다. 윷판에 오르지 못한 7마리 동물들은 5마리 가축이 윷판에서 놀고 있을 때 떡 등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나는 그 흐름을 벚나무 윷판에 새겼고 2002년 특허를 받아냈다. 2001년에는 나만의 디자인을 한 윷놀이용 말까지 특허출원을 했다.윷은 가장 만들기 쉬울 것 같은데 정말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고난도 공법이 동원된다. 일반인이 나무를 대충 반으로 잘라 만들면 잘 구르지 않아 놀이를 할 수 없다. 보급용 길이는 25㎝. 중간 폭은 2.5㎝, 가장자리는 5㎜ 짧다. 표면은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야 된다. 그래야 던지는 사람이 잘 잡을 수 있고 던졌을 때도 기울기와 물매 차이 때문에 윷이 땅에 부딪힌 뒤 공중으로 잘 튕겨 오르게 된다. 윷을 두드리면 편경처럼 쇳소리를 내야 한다. 윷이 악기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최고는 박달나무, 두 번째는 사리나무, 이 밖에 때죽나무, 쥐똥나무 등을 사용한다. 가방끈이 유난히 짧은 나는 밤에는 부족한 한문 공부를 비롯해 신라사를 축으로 온갖 역사서를 탐독했다. 낮에 고되게 일을 하고도 쉬지 않고 바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력 덕분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800m 육상선수로 대구시항 육상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날 보고 '대구의 이소룡'이라 했다. 그만큼 완력이 남달랐다. 한때 18기 무술에도 심취해 있었다. 사범이 내게 러브콜도 했다.◆성혈 연구에 돌입윷 연구의 정점에서 삼신(三神)사상의 압권이랄 수 있는 성혈 연구에 들어간다. 안동 임하댐 근처에서 바위에 윷판이 새겨진 걸 봤다. 그때 난 무릎을 쳤다. 연구욕이 더 솟구쳤다. 시간이 부족했다. 일을 접어야만 했다. 가족과 결별을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이제 당신의 남편,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고 여겨라. 나는 바위를 연구하러 길을 떠나겠다."동구 지묘동, 파계사, 경주 황룡사 호국변어정과 윷판이 새겨진 돌, 달서구 진천동, 의성군 단촌리, 임하댐 수곡리, 울산 어물동, 북구 구암동, 울산 천전리, 의성 태양동 마을 등지를 돌며 영험한 바위와 거기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신비한 홈과 구멍을 사진 촬영하고 지도로 남겨 비교 분석해나갔다. 갓바위 근처에도 성혈이 있다. 삼신당 위쪽 구멍(여자용)을 통해 물이 흐르고 중간에는 고추를 조각해 놓았다. 다산을 상징한다. 잉태한 생명에게는 첫돌이란 영광이 주어진다. 성혈은 농경사회의 최대 미덕인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 그리고 교합 장면, 출산 등을 상징한다. 여자의 상징으로 큰 사각형과 작은 사각형, 남자는 원과 사각형을 표시했다. 그것은 남녀 생식기와 입을 상징한다. 남녀의 교접, 그건 네모 안에 원을 그려 넣는 것으로 상징했다. 신은 세 범주로 나눠진다. 하늘의 칠성신은 생명, 산신은 물을 전달하고, 용신은 물을 관장한다. 육해공 모든 영역의 영험을 위한 치성 의식이 지금까지 봉헌되고 있다.아들이 결혼하면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자기 자식을 '아범'이라 한다. 아범은 '정자(아이)를 품은 범'이란 의미다.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 첨성대별 우러러보기에는 불편한 구조농업神 섬긴 영성 숭배 제단 추측성골 출신 여왕의 후사 위한 聖物10분의 1 축약 모형 2년만에 완성◆마침내 첨성대를 연구하다내가 성혈에서 첨성대 연구로 가게 만든 결정적 발견이 있다. 바로 경주 황룡사 절터 바위에 새겨진 윷판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윷판 네 구역 복판에 점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이게 뭘까? 연구를 거듭하면서 나는 '유레카'를 외쳤다. 윷판은 여성을 의미하고 그 네 점은 남자의 사지라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남자의 사지가 바닥에 닿는 순간, 그게 언제이겠는가. 생명 잉태를 위한 교접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 네 점이 첨성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원형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는 순간이었다.첨성대에 관한 기록은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 등 선덕여왕 대에 세워진 건축물이 모두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 첨성대. '별을 우러러보는 곳'이란 의미인데 너무 불편한 구조다. 평지이고 내부 구조상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상당히 불편한 구조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의 구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일종의 불교적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동양사학자 이용범이 처음 제기했고, 최근에 고대사학자 김기홍에 의해 좀 더 변형된 형태로 전개됐고 소설가 최홍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 설들은 첨성대의 외형이 불교에 등장하는 수미산(須彌山)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과학사학자 박성래는 이용범의 의견을 받아들여 '외형적인 모습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나, 실제로는 우리 조상들이 농업 신으로 섬기던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라 추측한다. 첨성대를 알려면 우선 선덕여왕을 알아야 된다. 신라는 내내 성골(聖骨)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26대 진평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성골 남자가 없자 화백회의에서 성골 여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15년간 세 명의 남편(김용춘·흠반·을제)을 거느렸지만 후사가 전혀 없었다. 신라 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에게는 삼서제(三壻制)가 시행됐다고 한다. '서(壻)'는 남편을 뜻하므로, 세 사람의 남편을 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 선덕여왕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삼서제는 여왕에게 씨를 제공하는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후사가 없는 선덕여왕.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때 선덕여왕을 짝사랑했고 그래서 분황사를 지은 지귀 그리고 설총, 세 명의 남편이 의기투합했다. 극비리에 신라의 명운을 건 첨성대를 짓는다. 이건 그럴듯한 공공건축물이라 할 수 없었다. 오직 선덕여왕의 후사를 위한 음지에 가려진 성물(聖物)이었다고나 할까.첨성대 상층부에 돌출한 12개 바위는 세 명의 남편이란 사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정사각형 구멍은 생명을 잉태하는 삼신 구멍, 그걸 둘러싼 삼층석은 칠성·산신·용신바위다. 멀리서 보라. 전체적으로 첨성대는 왕관과 왕복을 입고 있는 여왕의 자태와 흡사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맨 꼭대기 정자석 위에는 백구정(白鷗亭)이 왕관처럼 올려져 있었다. 명칭도 첨성대가 아니라 '점성대(占星臺)'였다. 별 '성' 자는 별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자궁도 의미한다. 백구정의 실체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경주 순창 설씨 가문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세헌편(世獻篇)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첨성대에 있는 백구정에서 자주 노닐었다. 상층에 대의 이름 3자가 크게 남아 있으니.' 결국 그 현판의 글씨는 설총이 적은 것이다. 확신이 섰다. 나는 새로운 첨성대 인문학을 위해 첨성대의 원형을 만들고 싶었다. 10년 전부터는 나무 벽돌 하나하나의 크기와 굽이 각도를 달리하면서 10분 1 축약된 박진수 버전의 첨성대 모형 한 개를 무려 2년에 걸쳐 완성했다. 물론 백구정까지 만들어 올려놓았다. 뒤이어 만든 것까지 2개(용암산의 빛이여·바람아 불어다오)를 특허출원을 했다. 조만간 내 자전소설도 출간할 것이다. 나는 출산율 급감의 대한민국 앞에 다산의 상징인 첨성물 모형과 한민족의 영험함이 깃든 윷을 내민다. 그걸 위해 내 청춘과 신명을 다 바쳤다. 그것에 대한 답을 이제 당신이 할 차례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별 관측 공간으로 알려진 경주 첨성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난 50여 년간 윷과 성혈 연구에 배수진을 쳤던 한국첨성대연구소 박진수 소장. 동구 도평동 그의 작업실 사랑채에 가면 그가 얼마나 편집증적인 인물인가를 알려주는 온갖 골동품스러운 물품이 즐비하다. 그가 30년 연구를 거쳐 자신이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모형 첨성대와 윷을 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시간이 나면 비닐하우스 작업실에서 윷과 첨성대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자신의 숙업을 위해 목공업까지 다 접은 상태이다.그만의 논리와 설명을 곁들여 특허를 출원한 신개념 윷판과 윷.그가 관광상품으로 제작한 첨성대 모형.첨성대 정자석 위에 선덕여왕 후사의 염원을 담은 비밀의 정자랄 수 있는 백구정을 제작해 올려놓았다. 그 사이에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하는 박 소장.사랑방 벽에 걸린 윷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박 소장.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정부, 대학 "2025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속도"
"20일까지 전공의 복귀해야"…전문의 취득 늦어질 가능성 커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말띠 5월 18일 ( 음 4월 11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