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한류의 중심 대구 .1] 국채보상운동과 대구 시민정신...나라 위기때마다 빛났던 대구시민운동, 한류의 시작이었다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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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21   |  발행일 2021-10-21 제10면   |  수정 2021-10-2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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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대구 중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해마다 '제야의 종' 타종식을 진행하는 달구벌대종을 품고 있고 소나무숲과 시상의 오솔길, 명언 순례의길, 화합의 광장 등도 갖추고 있다.
8억9천110만달러. 넷플릭스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가치를 추산한 액수다. 한국 드라마 한 시리즈의 가치가 무려 1조원에 달하는 셈이다. 오징어 게임이 '대박'을 치기 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스위트홈도 호평을 받았다. 또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 한국 대중 가수의 세계적인 영향력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 가고 있다. 한류의 기세가 심상찮다. 한국 대중음악과 드라마를 필두로 영화, 패션, 음식,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시작한 아시아발 한류가 이젠 전세계적인 주류 문화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신한류의 중심 대구' 시리즈를 8회에 걸쳐 연재한다. 시리즈를 통해 대구의 다양한 한류 콘텐츠(contents)에 대해 알아본다. 관광코스와 먹거리 소개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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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운동으로 확산

첫번째로 소개할 대구의 신한류 콘덴츠는 시민정신이다. 미시적 관점에서 볼땐 조금 생뚱맞은 주제일 수 있다. 하지만 대구의 시민정신은 코로나 시대에 꼭 필요한 세계 시민의식(global citizenship)의 표상이다. 그렇다면 대구의 시민정신은 무엇일까.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엿볼수 있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다. 구한말 일제의 경제 침탈로 나라가 도산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우리 손으로 해결하자며 민중이 일어선 곳이다.

1907년 1월29일 광문회를 이끌던 서상돈과 김광제가 불씨를 지폈고,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열린 뒤 점차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됐다. 국채보상운동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중심에 서민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라 빚을 갚기위해 의연금을 낸 이들의 대다수는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었다. 부녀자들도 자신이 아끼던 패물을 내놓으며 기부행렬에 동참했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호소하며 애지중지하던 은장도, 은비녀, 은가락지 등을 내놓았다. 더욱이 당시 서민들은 돈을 내라고 강요받거나 훈육받지 않았다. 모두가 자발적이고 솔선수범했다.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 오로지 경제주권을 되찾겠다는 순수한 애국심의 표현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으로 평가 받는 이유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운동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일제강점기 나랏빚 갚으려고 기부
영자신문 통해 전세계로 알려지자
中·멕시코서도 유사한 운동 일어나

IMF 금모으기 등 코로나 확산때도
일상멈춤에 대구시민 자발적 참여



◆국채보상운동의 '나비효과'

국채보상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 발행하던 영어신문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이 서방국가에 알려지게 됐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소식은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후 중국(1909년), 멕시코(1938년), 베트남(1945년) 등 외채로 시달리는 피식민지국가에서 한국과 유사한 방식의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한류에 앞서 제국주의에 반하는 국민적 운동을 전세계에 전파한 셈이다.

또 일제의 핍박으로 끝내 좌절됐지만 국채보상운동은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안중근 의사와 이준 열사 등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심을 끓어올렸다. 이 열사는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고, 안 의사도 '국채보상관서동맹회'를 설립하고 지부장을 자처했다. 기부운동과 독립운동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지 나라를 위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환란 시기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된다. 당시 국민들은 너나 할것없이 나라 빚을 갚기위해 자발적으로 금을 내놓았다. 4개월간 모인 금의 양만 약 225t에 달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진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그리스·스페인 등지에서 경제회복 모델로 주목받기도 했다.

201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의 과정이 담겨있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채보상운동과 그 기록이 진정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난게 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전히 대구의 시민정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해 3월 대구에서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할 당시에도 시민정신은 어김없이 발현됐다. 시민들은 지역과 나라를 위해, 서로를 위해 스스로 일상을 멈추고 코로나 확산에 의연히 대처했다. 앞으로 대구의 시민정신은 코로나 시대 종식을 앞당기는 한류 모델로 발전 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그래픽=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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