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 사이] 공부와 삶의 균형

  •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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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5 08:03  |  수정 2024-03-25 08:04  |  발행일 2024-03-25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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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한국인 10명 중 7명은 연봉과 워라밸 중에서 후자를 더 중시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워라밸은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의 앞글자만 딴 신조어로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한다. 여기서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특히 MZ세대는 일정 기간 일한 후 문화생활, 취미활동, 체육활동 등을 통해 '드림 데이(dream day)' 즉 꿈 같은 날을 향유하길 원한다. 인간은 가진 힘을 한꺼번에 다 소진한 후 탈진 상태에서 푹 쉬는 것보다 힘을 나눠 쓰며 중간중간 휴식하는 것을 선호한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긴 휴가를 원한다.

워라밸이란 용어는 어떤 상황에서 생겨났을까? 이 말속에는 일하는 시간이나 일 자체는 크게 재미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노동 시간이 일 안 하는 시간만큼 즐겁고 행복하다면 이 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별로 즐겁지 않지만, 먹고살 돈을 벌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쁘고 고된 생활을 해야 하지만, 금요일 저녁부터는 긴장을 풀고 마음껏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금' 같은 용어가 생겨났다. 학생들은 금요일이 와도 즐겁지 않다고 말한다. 주중의 학교생활과 공부가 다 힘들지만, 주말에는 학원과 과외 등으로 더 바빠 '공부와 삶의 균형'은 그림의 떡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삶의 질과 학업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의 소외란 노동의 주체인 인간이 주체로서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객체로 수단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원시인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때 재료의 취사선택에서 완제품이 나오는 그 모든 과정에 직접 주체적으로 관여했다. 한없이 힘들지만, 작업이 끝났을 때는 창조의 기쁨과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분업이 가속하면서 인간은 거대한 생산 공장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게 됐다.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자신이 맡은 단순 반복 작업을 계속하는 노동자는 작업이 지루하고, 완제품이 나와도 그 제품을 자기가 다 만들었다는 창조의 기쁨이나 자부심을 느끼기 어렵다. 창조의 주체인 인간이 거대한 공장의 생산수단 즉, 객체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워라밸이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힘겨운 세상살이를 견뎌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결단에서가 아니고 부모의 이루지 못한 소망의 실현이나 주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위해 인내와 절제를 지나치게 강요받는 학생들이 많다. 자신의 결단에 의해 주체적으로 생활하고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 다른 요인에 의해 공부를 강요당하는 객체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문의 즐거움이나 배움의 기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직장에서 구성원들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 환경과 일터 문화를 바꾸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삶의 질 향상뿐만 아니라 노동 생산성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교도 학업 생산성과 학교생활의 즐거움을 위해 교육 환경과 교과 과정 등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갖춰야 할 학력과 취업에 필요한 기능이나 기술 등을 학교 정규 수업과 방과 후 교내 보충 수업만을 통해 거의 다 충족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부모와 학생이 실제로 만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사교육비를 줄일 수 있고, 주말에는 온 가족이 함께 여가를 즐기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가 1만원 오르면 합계출산율은 0.012명 감소한다고 했다. 자녀 양육이 고통이 아니고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인식될 때 출산율은 높아진다.

지금 선망받는 직종에 모든 인재가 벌 떼처럼 달려드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정원이 한정된 소수 인기 학과를 향해 모두가 전력 질주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좌절감과 맹목적인 분노가 계속 쌓이면 어떤 사회도 안전할 수 없다. 젊은이들이 현재 인기 있는 몇몇 일자리를 두고 치열한 소모적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스스로 새로운 자리를 창조하려는 분위기가 넘쳐흐를 때, 그 사회는 활력이 넘치고 살맛이 난다. 미래 사회의 새로운 직업과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실효성 있는 진로 교육이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 현 상태를 계속 방치하면 우리 사회는 회복 가능성과 탄력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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