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의 문학 향기] 주인을 만난 물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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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19 07:58  |  수정 2024-04-19 08:00  |  발행일 2024-04-19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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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우리말 '그리스 공화국'은 서양어 'Hellenic Republic'으로 옮겨진다. 헬렌은 제우스에 맞서 인간에게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의 손자이다. 제우스가 대홍수로 인간을 모두 죽일 때 헬렌은 유일하게 생존해 인류의 조상이 된다. 즉 Hellenic은 그리스인의 엄청난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개념어이다.

그리스인은 유럽 문화를 일으킨 세계사의 민족이다. 하지만 신흥국가 로마에 멸망당한 뒤 1900년 이상 나라 없이 지냈다. 기원전 148년부터 기원후 1453년까지 1600년 이상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다시 1830년까지 약 38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식민지로 참담하게 살았다. 그리스인은 1821년에야 처음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국권을 빼앗긴 지 5년 만에 국내는 물론 만주까지 지부를 둔 독립운동단체 광복회를 결성해 제국주의와 싸웠고, 9년 만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런데 그리스는 망국 후 1969년이나 지나서야 독립운동을 개시했다니,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가 1830년 독립 이후 1974년까지 왕정 아니면 군부독재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594년에 이미 정치 지도자들을 민회(民會)에서 선출했던 나라가 그리스 아닌가! 그런 그리스가 기원후 20세기 현대에 왕정과 군부독재라니! 민주주의의 성지에 어찌 그런 퇴행이 가능할까!

1824년 4월19일 영국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자원 참전했다가 생명을 잃었다. 바이런은 유럽인들에게 그리스 독립운동 지원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바이런이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 종교학 시험에 제출한 답안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함없는 감동을 준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주어지자 바이런 학생은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혔구나!"라고 답을 썼다. 신학교수들이 한결같이 감동해 바이런에게 최고 점수를 주었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바이런은 교권 침해 등의 죄목으로 처벌당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성싶다. 바이런 사후 136년 지난 1960년 4월19일 대한민국 '국민' 186명이 국가권력의 총격에 목숨을 빼앗겼다. 마산 3·15민주묘지에도 52분이 모셔져 있다.

4월19일을 기려 바이런의 시를 읽는다. 4월혁명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 김윤식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도 연례행사처럼 읊어본다. 행동하는 시민정신은 오늘을 맞아 대구2·28공원 또는 경산남매공원 김윤식 시비를 다시 한번 애틋하게 쓰다듬어 보리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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