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사찰로 향하는 길은 분주해진다. 입구와 마당엔 연등이 가득해 마치 축제가 열리는 듯하다. 파란 하늘 아래에선 각양각색의 연등이 빛나며, 녹음을 덮은 나뭇잎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사찰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대웅전에서는 누구나 참배하고, 앉아서 참선이나 명상을 즐길 수 있다. 자유롭게 머물며 마음을 다스리기 좋다. 산새들의 노래는 최고의 음악과 같다. 특히 이 계절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개구리들의 합창이 들린다. 대구 달성군지역 비슬산 자락에 위치한 수많은 사찰이 그렇다. 예전엔 수백 개의 사찰이 있었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현재는 대견사와 유가사, 용연사를 중심으로 한국 불교의 미래를 이끌고 있다.
달성 대견사
'北 봉정 南 대견' 전국서 명성
석조관음상 땀 흘렸단 기록도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대견사는 대구 달성군 비슬산 정상에 자리 잡은 조계종 동화사 말사다. 신라 헌덕왕 때에 보당암으로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조선 세종 때 대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 봉정(암), 남 대견(사)'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전국에서 손꼽히는 기도사찰이었다.
이 절의 석조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면서 세간에 영험한 절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폐허와 중건을 반복하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돼 한동안 삼층석탑 흔적만 덩그렇게 남아 한때는 '대견사지'라고 불렸다.
2011년 달성군과 동화사에 의해 전각 재건공사가 시작돼 2014년 마무리됐다. 벼랑 끝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1988년 가장 먼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후 시간을 두고 대견보궁, 명부전 등 주요 건물도 다시 지어졌다.
대견사는 비슬산 정상부의 좁은 부지에 들어섰기에 사찰 배치가 단조롭고 건물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다만 앞으로 펼쳐진 풍광은 일품이다. 대견봉과 조화봉을 뒷배로 앞마당이 훤하게 열려 있고 멀리 관기봉(992m) 등 산자락 능선과 현풍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은 모두 석종형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괘불은 가뭄과 질병, 왜군의 침략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찾아가 소원을 빌던 유물이다. 삼층석탑은 1920년 인근 원각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높이 3.64m로 고려 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달성 유가사
'삼국유사' 일연스님의 주석처
임진왜란 승병 키운 호국도량
조계종 9교구본사 동화사 말사인 유가사(유가읍 양리)는 신라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한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의 주석처였고, 고려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였던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을 양성하는 호국도량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조선에 이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세가 급격히 쇠락해 전통사찰로서의 면모를 잃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1976년 당시 동화사 주지 서운 스님이 유가사 중창 불사를 발원하고, 스님의 후학들이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유가사 중창 불사가 이어졌다. 특히 계성 스님과 호암 스님이 주지를 역임하며 유가사는 대웅전, 용화전, 나한전, 산신각, 범종루, 일주문, 천왕문, 국사당, 염화실 등을 중수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됐다. 거듭된 불사 속에서도 지역 저소득 계층을 위한 자비 나눔, 장학금 사업 등으로 유가사는 지역주민들에게 큰 위안을 줬다.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용화전·산령각·범종루·천왕각·백화당·나한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우송(友松)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내부에 높이 102㎝인 석조미륵불좌상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석가모니삼존불과 후불탱화, 삼존불 좌우에 각 8폭씩 십육나한도가 있다. 산령각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1976년에 조성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달성 용연사
임란 때 불탄 곳 사명대사 중창
일주문 '자운문'은 보물로 지정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인 용연사는 달성군 옥포읍 용연사길 260(반송리 882)에 위치해 있다.
신라 신덕왕 3년(914) 보양이 창건하고 조선 세종 1년(1419) 천일이 중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선조 36년(1603) 탄옥·경천 등이 사명대사의 명으로 중창했다.
광해군 13년(1621) 범종각을 지었지만 효종 1년(1650)에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효종 4년(1653)에는 홍묵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이 명부전을 건립했다. 효종 6년(1655) 희감과 홍묵이 함허당과 관정료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이 관음전을 지었다. 효종 9년(1658)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 현종 1년(1660)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했다.
현종 11년(1670) 천왕문 앞 석교를 완성했고 현종 17년(1673)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경종 2년(1722)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했다. 당시 절 규모는 200여 칸에 이르렀고 거주하는 승려 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2023년에는 '자운문'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자운문은 정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우진각 지붕틀을 구성한 뒤 위에 맞배형의 덧지붕을 씌워서 건축했다. 정면 평방에 5개 공포, 전체 14개 공포의 다포계 공포 구조로 서까래와 부연의 겹처마 형식이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달성 대견사
'北 봉정 南 대견' 전국서 명성
석조관음상 땀 흘렸단 기록도
대견사는 비슬산 정상에 있는 절이다. 한때는 폐사된 상태에서 삼층석탑만 있어 '대견사지'라고 불렸다. <달성군 제공> |
이 절의 석조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면서 세간에 영험한 절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폐허와 중건을 반복하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돼 한동안 삼층석탑 흔적만 덩그렇게 남아 한때는 '대견사지'라고 불렸다.
2011년 달성군과 동화사에 의해 전각 재건공사가 시작돼 2014년 마무리됐다. 벼랑 끝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1988년 가장 먼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이후 시간을 두고 대견보궁, 명부전 등 주요 건물도 다시 지어졌다.
대견사는 비슬산 정상부의 좁은 부지에 들어섰기에 사찰 배치가 단조롭고 건물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다. 다만 앞으로 펼쳐진 풍광은 일품이다. 대견봉과 조화봉을 뒷배로 앞마당이 훤하게 열려 있고 멀리 관기봉(992m) 등 산자락 능선과 현풍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승탑은 모두 석종형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괘불은 가뭄과 질병, 왜군의 침략 때마다 마을 주민들이 찾아가 소원을 빌던 유물이다. 삼층석탑은 1920년 인근 원각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높이 3.64m로 고려 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달성 유가사
'삼국유사' 일연스님의 주석처
임진왜란 승병 키운 호국도량
유가사는 달성군 유가읍 유가사길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다. 달성군 제공 |
조선에 이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세가 급격히 쇠락해 전통사찰로서의 면모를 잃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1976년 당시 동화사 주지 서운 스님이 유가사 중창 불사를 발원하고, 스님의 후학들이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유가사 중창 불사가 이어졌다. 특히 계성 스님과 호암 스님이 주지를 역임하며 유가사는 대웅전, 용화전, 나한전, 산신각, 범종루, 일주문, 천왕문, 국사당, 염화실 등을 중수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됐다. 거듭된 불사 속에서도 지역 저소득 계층을 위한 자비 나눔, 장학금 사업 등으로 유가사는 지역주민들에게 큰 위안을 줬다.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용화전·산령각·범종루·천왕각·백화당·나한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으로 내부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우송(友松)이 제작한 칠성탱화와 신중탱화가 함께 모셔져 있다. 용화전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내부에 높이 102㎝인 석조미륵불좌상이 있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석가모니삼존불과 후불탱화, 삼존불 좌우에 각 8폭씩 십육나한도가 있다. 산령각은 정면·측면 각 1칸으로 1976년에 조성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괘불과 삼층석탑, 낙암과 월호(月湖) 등 15인의 승탑이 서 있다.
달성 용연사
임란 때 불탄 곳 사명대사 중창
일주문 '자운문'은 보물로 지정
용연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석조계단에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웅전에 창을 내어 놓고 석조계단을 향해 기도한다. 달성군 제공 |
신라 신덕왕 3년(914) 보양이 창건하고 조선 세종 1년(1419) 천일이 중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선조 36년(1603) 탄옥·경천 등이 사명대사의 명으로 중창했다.
광해군 13년(1621) 범종각을 지었지만 효종 1년(1650)에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효종 4년(1653)에는 홍묵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이 명부전을 건립했다. 효종 6년(1655) 희감과 홍묵이 함허당과 관정료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이 관음전을 지었다. 효종 9년(1658)에는 도행(道行)이 명월당(明月堂),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香爐殿), 현종 1년(1660)에는 일순(一淳)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했다.
현종 11년(1670) 천왕문 앞 석교를 완성했고 현종 17년(1673) 자진(自珍)이 세존부도(世尊浮屠)와 비석을 세웠다. 경종 2년(1722)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했다. 당시 절 규모는 200여 칸에 이르렀고 거주하는 승려 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극락전, 적멸보궁, 나한전을 비롯하여 사명당, 보광루, 일주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2023년에는 '자운문'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됐다. 자운문은 정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우진각 지붕틀을 구성한 뒤 위에 맞배형의 덧지붕을 씌워서 건축했다. 정면 평방에 5개 공포, 전체 14개 공포의 다포계 공포 구조로 서까래와 부연의 겹처마 형식이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강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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