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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고마움에 팁을 주려 하자 소년은 이를 받는 대신 힘차게 경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괜찮습니다. 저는 보이스카우트입니다. 스카우트는 다른 사람을 도와줘도 대가를 받지 않습니다". 이 신사는 바로 미국 언론인 윌리엄 보이스이다. 이름 모를 소년의 선행에 크게 감명받은 보이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1910년에 미국보이스카우트연맹을 만든다.
스카우트의 슬로건인 일일일선(一日一善)을 실천한 소년을 찾지 못한 보이스는 그 선행을 기리기 위해 런던 길웰파크에 들소 동상을 만들었다. 이 동상에는 "1909년 이름을 알 수 없는 스카우트가 윌리엄 보이스에게 한 일일일선의 충실한 실행이 미국으로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가져오게 하였다"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무명의 보이스카우트 대원이 실천한 일일일선의 정신은 한국스카우트연맹 헌장에도 그대로 규정되어 있다. 1922년 한국스카우트연맹 설립 이래 1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수백만의 대원들과 지도자들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일 한국스카우트연맹 원로스카우트회 정기총회에 총재로서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다. 어린 시절 웅변을 배우고, 커서는 변호사로 살아온지라 평소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날은 연륜과 열정의 무게에 압도되었다.
원로스카우트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은 매우 까다롭다. 일단 연령부터 75세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 헌법상 대통령도 40세만 넘으면 되는데, 이보다 거의 두 배 가까운 연륜과 30년 이상의 봉사활동이 쌓여야 추대되며, 종신직 명예임원으로 예우받는다. 현재 200여 명의 회원 중에는 1932년에 태어나신 분도 2명이나 계시고 75세가 이쁨받는 막내이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의 산 역사이자 정신적 지주인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사를 모두 합하면 단군 조선까지 포함한 대한민국 역사보다도 더 길고, 평생에 걸쳐 실천한 일일일선은 만리장성의 벽돌보다도 더 많다. 그들의 제복에 부착된 수많은 훈포장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노병은 사라질지 몰라도 원로스카우트의 열정 가득한 봉사와 헌신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제복이 멋있어 보여서 초등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했다. 스카우트 제복을 입고 등교하는 날이면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아 더 의연하고 조심스레 행동하였다. 제복에 하나씩 추가되는 진급 기장과 기능장은 책상 위에 걸려있던 우등상보다 더 뿌듯했다. 제복은 입는 사람을 내적으로 성장시키며 책임감을 부여한다.
요즘 나의 옷장은 빛이 난다. 짙은 양복들 제일 앞에 놓여 있는 50년 만에 다시 입게 된 스카우트 제복 때문이다. 옷장을 열 때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행을 실천한 1909년 영국 보이스카우트 대원과 2025년 대한민국 원로스카우트들의 일일일선을 떠올린다. 제복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세계스카우트의 추세는 학교를 넘어 가족과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한국스카우트연맹의 회원이 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어도 좋고, 간단히 티셔츠에 항건만 매어도 좋다. 자연 속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일일일선을 실천하는 가족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혼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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