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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료카쿠 타워에서 보는 오각형 별 모양의 성곽 모습. 멀리 시가지와 산등성이까지 뚜렷하다. |
홋카이도는 일본 최북단의 섬으로, 면적도 남한의 약 80%나 될 정도로 꽤 넓다. 하지만 인구는 일본 전체의 4%밖에 안 되는 약 520만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홋카이도 도청 소재지인 삿포로에 모여 산다. 그러다 보니 홋카이도의 관광도 거의 삿포로와 근교 오타루 중심이다. 사실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도 홋카이도는 일본의 가장 먼 지역이다. 인천공항에서 3시간 이상 비행을 해야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 닿을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4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만날 수 있는 곳이 하코다테이다. 하코다테 여행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재미있는 것은 삿포로에서 가는 시간이 도쿄에서 가는 시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 해협을 관통하는 세이칸 터널이 있기 때문이다. 이 터널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로 신칸센이 다니고, 하코다테는 그 종착역이다. 그래서 아오모리 공항에서 신칸센을 타는 것이 하코다테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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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로 가는 고속도로의 눈 쌓인 모습. 신치토세 공항에서 4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하코다테에 도착할 수 있다. |
화창한 날씨였다. 인도나 건물에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낭설이 아니라는 듯이 고속도로에는 눈도 없었다. 해안을 따라 놓인 기찻길과는 달리 고속도로는 내륙 산악지대를 관통하였다. 고속도로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날씨도 도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순탄하게 달리던 고속도로가 토요우라를 지나자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번의 터널을 지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석의 시구('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처럼 '푹푹' 내렸다. 차선은 사라졌고, 어느새 우리는 눈 덮인 산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노벨문학상을 안긴 '설국'의 이 기막힌 첫 문장이 감탄문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깨달았다. 우리는 걱정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고, 노 선생은 씩씩하게 질주했다. 그렇게 불안과 환호가 교차하는 묘한 설렘으로 설국을 지났다. 그리고 고도가 낮아지고 바다가 보이면서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다시 순해졌다.
그렇게 만난 하코다테는 얌전한 시골 소년 같았다. 하지만 하코다테는 한때 양복을 빼입은 멋쟁이 신사였다. 서구화의 선봉 도시이자 홋카이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는 말이다. 홋카이도 남서부 쓰가루 해협과 면한 이 항구도시는 1854년 일본 최초의 개항 도시로서 80여 년 동안 홋카이도 최대 도시로 군림했다. 1933년에는 인구 22만명으로 일본 전체에서 아홉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하지만 1871년 행정 기능이 삿포로로 이전되고, 1934년 대화재로 도시가 불탄 후 삿포로에 추월당했다. 1965년에는 아사히카와에도 따라 잡히며 지금은 홋카이도 제3의 도시로 전락했다.
그래도 도시의 매력만큼은 여전히 최고이다. 화려했던 과거만큼 구경거리도 많고 이야기도 다채롭다. 하코다테는 18세기 후반 일본의 어장 개척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천혜의 조건을 가진 하코다테가 북양어업의 중요 기지로 부상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홋카이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의 페리 제독도 '세계 최고의 양항'이라고 극찬하며 시즈오카의 시모다 항과 함께 최초의 개항지로 선택했다.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아이누족이 살던 땅이 서구 문물의 일본 유입 통로가 되었다. 가만 보면 하코다테는 온통 일본적이지 않은 것 천지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이국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2015년에 일본인들이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꼽은 이유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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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민족자료관 전시실의 아이누족 전통 수피 의복. 아이누족은 나무 속껍질을 얇게 찢어 엮은 수피(樹皮) 옷을 만들어 입었다. |
하지만 근대화 시기 일본은 아이누를 구 토인이라고 부르며 '인간의 덜 진화된 모습'으로 간주했다. 아이누를 '아이누(사람)'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1899년에는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을 만들어 아이누의 문화를 아예 말살해버렸다. 마치 아메리카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 인디언을 말살한 것처럼. 아이누는 이처럼 미개인 취급을 받았으며, 일본 곳곳으로 흩어진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문화는 이러한 박물관이나 민속촌에 박제화되어 전시되거나 애니메이션 '골든 카무이'에서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역사가 되려면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아이누족의 비극도 일본의 제국화에서 비롯되었다. 제국화의 역사적 현장이 하코다테의 고료카쿠(五稜郭) 요새이다. 제국에 맞선 막부의 최후 항전지이기 때문이다. 1869년 이 도시에서 벌어진 보신(戊辰) 전쟁은 일본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막부가 와해되자 잔당 일부가 하코다테로 도망쳐 잠깐 에조 공화국을 세운다. 에조 공화국은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막부 세력이 메이지 신정부군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 고료카쿠였다.
사실 고료카쿠는 하코다테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1866년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서양 기술을 도입해 건설한 서양식 요새이기 때문이다. 고료카쿠는 이름 그대로 오각형의 별 모양 성곽이다. 설계자인 다케다 아야사부로(武田斐三郞)가 하코다테에 들어온 서양의 여러 정보와 기술을 모아 5년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성곽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총알이나 대포알이 성 중앙까지 쉽게 도달했기 때문이다. 실제 성곽의 모습도 요새라기보다는 작은 궁궐처럼 보였다. 해자의 넓이도 아담하여 중국 정원에서 흔히 보는 인공 수로 같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특이한 모양 때문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하코다테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겨울에 만난 고료카쿠는 성을 두른 아름드리 나무와 함께 독특한 설경을 만들고 있었다. 성안에는 잘 정돈된 산책로와 행정관청 부교소 건물이 있어서 나름 성의 기품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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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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