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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윤 (전 경북도립대 총장) |
이번 탄핵이 단지 한 정치인의 자충수였고 그래서 '대통령을 제대로 뽑아야 해'라고 만 한다면 대한민국 헌정질서가 직면한 보다 구조적이고 심각한 위기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치권과 학자들이 비상계엄과 탄핵소추 이후 1987년 헌법 체제의 문제점과 개헌 등 백가쟁명식 문제 제기와 해결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논의들이 대통령 선거에 묻히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충분히 공감했던 나라의 위기가 1987년 헌법 체제의 문제이자 헌법 제1조가 천명하는 민주공화정의 헌정질서가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발생했음을 다시 한번 주목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민주공화정은 국민이 주권을 갖고 권력이 법과 제도에 따라 분립되는 정치 체제다. 권력의 균형과 절제가 작동할 때만 존속할 수 있다. 비상계엄이전 이미 무수한 헌정질서의 위기 징후들이 일상화되어 왔다.
위기의 징후로 대표적인 것이 입법 권력의 과도한 비대화이다, 입법부는 민주공화국의 핵심축이다. 국민의 의사를 입법으로 실현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며, 권력 남용을 막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입법부는 감시자 역할을 넘어 권력의 실질적 중심으로 작동하며, 오히려 헌정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모습마저 보인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법안들이 충분한 공론화 없이 다수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리되고, 입법 권력이 정당대표 개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도구화되고 있다.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태도 역시 민주 공화정의 위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이 땅의 귀태(鬼胎)"라고 지칭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귀태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뜻으로, 이는 단순한 정권 비판을 넘어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비정상적 정치문화를 고착시켰다. 정치의 사법화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정치는 본래 대화, 타협, 절차를 통해 문제를 조정하는 영역이다. 이를 사법에 넘기는 순간, 정치는 그 본질을 상실하며, 헌정질서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마저 무너진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않고 대통령만 새로 뽑는다면 똑같은 문제들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들과 정당들은 국민에게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제도적 방안들을 마련해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간 논의가 되어왔던 4년 단임의 대통령제의 권력 구조의 개편, 지방자치형 국가로의 전환, 탄핵 제도의 남용 방지, 특정 정치세력의 과도한 의회 장악을 가능하게 하는 소선구제의 개편,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감사원 등 핵심 헌법기관의 독립성과 중립성의 확보 등이 논의가 되어야 할 과제들일 것이다.
이제 곧 전개될 선거 국면 속에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이러한 과제들은 묻히고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관한 관심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충수는 불행하지만 우리나라의 문제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선거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개혁과 혁신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1987년 국민의 현명한 선택을 다시 한번 기대해야만 한다.
안병윤 (전 경북도립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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