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아무래도 나는 조금쯤 비켜 서 있다"

  •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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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4-29  |  수정 2025-04-29 07:02  |  발행일 2025-04-29 제22면
AI와 기계적인 융합의 삶 속

여행은 '비켜선 듯' 보이지만

낯선 길에서 자신을 세우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인간적인 창작의 원천
[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아무래도 나는 조금쯤 비켜 서 있다
시인
#김수영

현실적인 여건이 녹록하지 않거나, 정보 시대의 속도 속에서의 소외감과 멈칫거림 때문일까? 요즘 들어 김수영의 시를 읽는 경우가 잦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에 눈이 자주 간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한 구절이다. 60년대에 맞이한 현실이 '자유·민주·정의·혁명' 등을 내세웠던 4·19정신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시다. 독재정권 시절의 지식인으로서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싸우지 못하고 매일 일상의 작은 일에만 분노를 쏟아내는 것에 대한 자조와 부끄러움. 그리하여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라는 탄식과 반성이 터져 나온다. 어쨌든 이 시는 어려운 현실에 선 지식인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당대 현실에 대한 탁월한 시각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60년대 참여 시인들의 전위적인 예로,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로 떠오른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 역시 이런 질문 앞에 우리를 몰아세우는 듯하다. 생뚱맞은 계엄의 논리로 자칫 국가가 위기에 빠질 뻔한 걸 시민들이 나서서 격렬하게 막아낸 일에 모두는 박수를 치면서도 그런 현실에 자신은 '아무래도 비켜 서 있다'는 반성을 하기도 한다. 일상 삶에서도 그러하다. 과거와 엄청나게 달라진 정보화한 세상에서 허우적대면서, 이 또한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는' 게 아닌지 묻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나'의 정체

무엇보다 일상의 문제에서 '나'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뭇없이 넘나드는 삶. 딥페이크 기술의 발달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이 실제인지 가상적 합성물인지 헷갈리게 한다.

과학인들은 우리의 앞날이 머지 않아 '통합과 융합의 시대가 될 것'이라 내다보지만, 그런 기계적인 정보 세계에 적응이 잘 안되는 우리 같은 '나이 든 구닥다리'들에겐 공포스러운 전망이거나, 정치적 수사같이 들린다. 당장 시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인공지능(AI)의 수용 여부만 해도 그러하다. 인공지능 챗GPT의 창작 활동 개입이 진화하는 가운데, 그것과의 협업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늘어나는 데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작곡과 미술 작품의 제작이 그렇게 이루어져 예술계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시집이나 소설이 출간되기도 한다. "챗GPT를 창의적 파트너로 삼으면, 자신의 글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더하는 과정에서 막힘없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런 흐름에서 비켜나거나, 주춤거리며 떠밀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한편으로 식당이나 카페에서 말 대신 테이블 오더나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해야 하는 인정머리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무인 단말기를 두고, 인간미가 없다느니, 단골이라는 정(情)적인 관계가 흔들리는 일이라고 항의할 수가 없을 지경으로 확산일로다. 편리를 추구하는 그런 흐름이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점점 더 '아무래도 나만 비켜 서 있는 듯'한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세상이 되어간다.

#여행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서리라 마음먹을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가 하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운명이라며 온라인이 아닌 아날로그적 감성의 만끽으로 삶이 충만함을 믿자고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장 잘 만나질 수 있는 세계를 찾는다.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면서 진솔하게 반성하고, 고독을 느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세계. 여행을 통해 그러한 세계를 찾기도 한다. 챗GPT적 질문으로 정보를 찾고, 새로운 감성을 접하는 것과 달리, 이런 수공업적인 행위로 낯설지만 풍부한 감정을 만끽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집 가까운 강변이나, 산길을 산책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때로는 멀리 낯선 장소를 돌아보는 것도 별다르다. 그냥 혼자서 고적하게 나선다. 그러할 때 사물과 인간과의 교감과 소통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 관광이 아닌 여행을 권한다. 관광이 새롭고 특이한 장소를 둘러보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여행은 낯선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행위이다. 새로운 장소의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못물에 골짝 물들이 스며들 듯이 이방인의 마음이 새롭고 낯선 세계에 스며드는 과정은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여행을 일상화한 작가와 시인들이 많은 건 그게 창작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아는 시인 중 상당수가 혼자의 여행 벽을 갖고 있다. 과거의 문인들이 대개 그러했다. 헤밍웨이의 여행은 고독한 탐닉에 가까웠다. 휘트먼의 시들은 산책과 여행을 통한 언어 교감의 산물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계를 줄타기하듯 오가는 속에도 천변만화하는 세계가 있지만,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되묻는 비극성을 가진다. 인공지능 기술이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융합을 두고 융합은 서로 다른 것들과의 대결보다는 공존과 소통을 통해 얻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우려 때문이리라.

여행은 아득한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어온 소통의 지름길이다. 낯선 길 위에 자신을 세우는 가장 원시적이면서 본질적인 삶의 모습을 경험케 한다. 온갖 정보와 기계적인 융합의 삶에서 '비켜선 듯' 하지만, 낯선 곳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세우는 흥미 있고 감성이 넘치는 일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가장 인간적인 창작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것이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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