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시간과 마음이 머무는 강가

  • 신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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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26 06:00  |  발행일 2025-05-25
신경용 금화복지재단 이사장·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신경용 금화복지재단 이사장·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발끝 아래로 봄과 여름이 스치듯 지나가고, 강은 말없이 모든 계절을 품는다. 새벽 다섯 시, 사문진의 강변길을 걷는다. 한때 나루터였던 이 길은 이제는 마음이 머무는 산책로가 되었다. 걸음을 멈춘 자리마다, 강은 오래된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이곳엔 세월의 결이 스며 있고, 기억의 숨결이 지나며 순고함이 흐른다.


1900년대 초, 선교사 리처드 사이드보텀은 병약한 아내 에피 브라이스를 위해 낯선 조선 땅에 피아노를 들여왔다. 낙동강 물길 따라 도착한 피아노는 이곳 사문진 나루터에 닿았고, 이 땅에 처음 울린 서양 음악의 선율이 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선물을 넘어 문명과 믿음을 함께 실은 상징이자 문화의 물꼬를 튼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사문진은 '기억이 물드는 곳'이 되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천천히 강물 위로 내려앉는다. 수양버들은 바람 따라 유연하게 몸을 흔들고, 500년 된 팽나무는 묵묵히 그늘을 드리운다. 모감주나무는 여름이면 황금빛 꽃비를 흩뿌리고, 배롱나무 붉은 꽃은 이국의 사랑처럼 오래도록 피어 있다. 사문진을 찾는 이들은 각자의 이유를 품는다. 누군가는 풍경을 담고, 누군가는 기억을 되새긴다. 사문진은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품으며 조용히 미래로 흘러간다.


이 길을 걷는다는 건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오래 전 누군가의 깊은 결심과 조용한 헌신을 따라 한 시대의 기억을 되새기는 여정이다. 그래서 다시, 걸음을 멈추고 석양 앞에 선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말. "이 길을 걸어온 것은, 너의 세월을 만나기 위함이었노라." 강물은 말이 없지만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은 오래된 대답을 듣는다.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조형물이나 꽃밭에 있지 않다. 바람과 물결, 햇살과 나무 그늘 속에 여전히 흐르는 '그때 그 고결함', 그것이 사문진을 특별하게 만든다. 여름이 오고 있는 이 길 위에서 바람에 일렁이며 피어나는 물꽃 하나를 본다. 그 꽃은 단지 피어난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품은 기억이었고, 조용히 드러난 사랑의 얼굴이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 강을 따라 흘렀고, 오늘의 사문진은 여전히 사람들의 걸음을 붙든다.


나루터의 주막촌에선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막걸리 옆 전구지 부침엔 세월의 향과 이야기가 고소하게 스며든다. 소박한 밥상 앞에 사람들은 웃으며 머물다 가고, 오늘도 살아 있는 강가, 나루터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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