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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당선작]
[제5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유계영 시인 수상 소감..."다 지우고 눈부신 무지 속에서 다시 시작하렵니다"
어제 오전엔 시각장애인 안마사에게 동해 바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보는 바다'가 아니라 '듣는 바다'에 대한 상상으로 온종일 바빴습니다. 오후엔 학교에 나가 시 쓰는 아이들과 딸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줄딸기 덩굴에 오직 줄딸기 모양으로 줄딸기가 맺히는 것'에 경탄하는 아이의 감수성이 즐거워 박수쳤습니다. 오늘은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친구의 눈동자에 차오르다 잦아들고 다시 차오르다 잦아드는 물기를 보면서, 다만 내 앞의 눈동자를 마주 보려 했습니다. 손을 잡고 끌어안고 등을 쓸면서, 친구의 손과 어깨와 등 위에 내 손의 무게를 포개어보려 했습니다.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로 북적입니다. 아름다움은 어떤 존재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한발 굼뜨고 노둔합니다. 아름답고 충격적이며 첨예한 것은 바깥에 있습니다. 내가 아닌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밖을 나가는 일은 두렵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루라도 밖을 나서지 않으면 영영 바깥은 꿈도 못 꿀 것 같습니다. 삶의 순간들을 시로 대하지 않고, 문장으로 세공하지 않고, 나의 판단으로 의미 짓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어느샌가 내 안으로 고개를 처박고 그걸 세상이라 믿게 됩니다. 시를 쓰는 동안에는 의심하고 점검합니다.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나와 내가 아닌 것들로 뒤범벅된 세상을 향해 있는지를. 움직이는 시의 곁에서 충분히 흔들리고 있는지를.'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을 내어놓고서 겪어본 적 없는 무력감 속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채로요. 시에 대해 내가 알고 경험한 것들을 모두 지우고 눈부신 무지 속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수상 소식은 기꺼이 무지 속으로, 다만 백지 앞으로 가라는 응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족한 시집을 열고 함께 흔들려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발부리에 차인 조약돌 하나와의 만남에도 나날의 깊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구상 시인이 일깨운 삶의 신비일 것입니다. 사소한 마주침 속에 영원을 비추는 만남의 신비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생생한 영원 속에 있겠습니다.☞유계영 시인은 1985년생.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이 있다.
2022.01.03
[제5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 - 유계영 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버거빈집 있으면 꼭 무언가 들어왔다 벌렁 드러눕고 껌 쩍쩍 씹고 주인 행세 했다밤의 양조주 부어라 마셔라 부드러웠다 천국 가까웠다「사람들 나를 찾아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비탄에 잠겨 있는지 떠들어대는 꼴 더는 볼 수 없어 사람들 나를 찾아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비탄에 잠겨 있는지 꼼꼼히 설명할 때마다 나는……」이것은 빈집의 말이다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버거에 관한 범성애적 구두 연습 기억합니다납작한 것과 납작한 것 사이 납작하게 엎드린 사물들부드러운 것과 부드러운 것 사이 무너지는 층계참우리를 기어코 벌리는 것들오늘만 다섯 개째 당신은 버거 타령 하고 있으므로내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슬픔 두툼 입술 슬쩍 핥는 것입니다 버거와 버거 사이 빈집 쌓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교수법입니다토할 것 같아요 풀 죽은 내가 검은 봉지 속에 얼굴 파묻자 아버지 말씀하셨지요「네가 얼마나 어지러운지 울렁거리는지 칭얼대는 소리 더는 들어줄 수 없구나 네가 나의 딸이라면 그네 위에서 흔들리는 사람 아니라 그네를 흔드는 사람이 되어라 사람 탄식 듣는 사람 아니라 사람 탄식하게 하는 사람 되어라……」 아버지 나를 찾아와 버거와 버거 사이 쌓고 계십니다그런 것 반복하고 있습니다쓰러질 듯 휘청이는 버거 아름다운 장면이다나는 버거 들고 조심조심 걷는다 찾기 위함이다 빈집에서벌렁 드러누워 껌 쩍쩍 씹고 주인 행세 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천국 어째서 멀고 멀어아버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껌 쩍쩍 씹고 바지춤에 손 넣고쌓고 있다 무한 가까웠다곽훈 作
[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 임은영 '블랙 잭나이프' (하)
나의 일상도 흐트러졌다.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다. 몇 년을 사귄 동아리 선배와 헤어졌다. 선배는 직장 동료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내게 통보했다. 대학 선배로 만났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졸업 후 지인 소개로 다시 만난 사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배와 헤어진 뒤로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요가가 지루해졌고 즐기던 쇼핑도 귀찮아졌다. 친구들과의 수다도 심드렁해지고 어느 순간 밥 냄새가 싫어졌다.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다가도 헛구역질이 났다. 머루는 운동을 시키지 않아 비만이 되었고 목욕을 못 해 털이 지저분해졌다. 아버지와 머루를 걱정하면서도 집을 떠나는 생각을 때때로 했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더 못하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 엄살은.오빠는 처음엔 나를 달래더니 횟수가 잦아지자 화를 냈다. - 요즘 취업하기 얼마나 힘든데 일이라고 여겨.- 잠시라도 떠나고 싶다고. - 나도 바빠. 돌아버리겠어. 도우미와 간병인을 부르라고.그 뒤로 오빠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작년 가을을 버티지 못했다. 당분간 찾지 마. 아버지를 부탁해. 오빠에게 문자를 보낸 뒤 핸드폰을 식탁에 두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내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그렇게 아버지를 버렸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가능한 집과 거리가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제주도에 머물다 친구가 있는 도쿄로 갔다. 열흘 정도 지내다 보니 도쿄의 뒷골목이 마음에 들었다. 빈티지 골목과 특색 있는 작은 서점들을 돌아다니다 좋아하는 초밥을 먹었다. 다시 식욕이 생겼다. 도쿄에 더 머물고 싶어졌다. 친구 소개로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디저트 스쿨도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일 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안 보였다. 오빠에게 연락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오빠는 전과 다르게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오빠는 할 말을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 요양원에 모시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간병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을 나가셨어.- 어디로?- 사고가 났어. 근처 도로에서. 밤이어서 운전자가 보지 못했대. - 지금 아버지 어디 계셔? - 떠나셨어. 사고 후유증으로. 한 달이 지났어.오빠에게 바로 달려갔다. 아버지를 왜 그렇게 보냈냐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오빠가 입을 열었다. 너는 핸드폰도 두고 갔잖아. 연락도 안 되고. 처음으로 우리는 격하게 다투었다. 서로를 탓하고, 저주의 말을 퍼붓고, 함께 울었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욕을, 모욕을. 나는 오빠에게, 오빠는 나에게. 그때부터 딸꾹질이 더 자주 올라왔다. 소리를 너무 질러 목이 놀란 걸까. 친구들은 목에 혹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고 우려했다. 딸꾹질이 사라지지 않아 병원에 들렀지만 이비인후과 의사는 검사 결과로 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여러 사이트에서 딸꾹질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도 특별한 정보는 안 보였다.아르바이트하다 딸꾹질로 난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편의점 점주는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신경 쓰인다며 짜증을 냈다. 딸꾹질 뒤 시큼한 것이 올라와 내과 질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종합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검진 결과에서도 건강상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사회생활이 불편한 정도라고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자 의사는 약 대신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유했다. 그 뒤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일 층을 살피다가 발이 저려 주저앉았다. 잭 칼만 찾아 이 집에서 나가면 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밤이 되면 움직이기 편할까, 아니 새벽이 나을지도 몰라. 고민하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주인 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는 서둘러 차를 탄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를 보자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온다. 인터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가 방문한 걸까? 아니면 간병인이 나가는 걸까? 간병인이 나간 거라면 칼을 찾아 이 집을 떠날 기회다. 바깥을 보니 골목에 쿠팡 차량이 보인다. 택배물이 온 것 같다. 오후가 되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옆에 있는 생수병을 들이켜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간병인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이 층까지 들린다."못 나가. 일하는 중." 아래층을 주시했다. 핸드폰을 가지고 서성거리는 간병인의 모습이 보인다."주인 남자는 주말에만 오고 아내는 귀찮게 하지 않아. 부르는 일이 없어. 잠만 자거든."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짐작할 뿐이다. 여자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온다.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는다. 요가 동작을 되풀이하며 통화한다. 목소리가 밝다. "네가 이리로 와."상대방이 뭐라고 한 걸까, 여자가 목청을 높여 말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아무도 없다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와." 간병인은 전화를 끊고 다시 흥얼거린다. 아무도 없다니, 주인 여자는 투명 인간인가. 간병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다리를 뻗고 잠깐 누웠다. 방바닥이 차서 내장이 서늘해지는 것 같다. 속에서 비릿한 냄새와 함께 딸꾹질이 또 올라온다.등이 차가워 일어났다. 밖을 내다보니 간병인의 옷이 또 바뀌었다. 외출이라도 하는 걸까. 모자까지 쓰고 있다. 간병인이 장바구니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간다. 나는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잭 칼은 어디에 있을까. 눈에 띄는 곳, 몇 군데만 살펴보고 없으면 그냥 나가야 한다.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었을까. 주인 여자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정수기에 컵을 대고 냉수를 받아 물을 마시려다 컵을 제자리에 두었다.지하에는 수납장이 많다. 나는 생수병을 꺼내 배낭에 넣었다. 수납장 안에는 참치, 스팸, 다양한 통조림과 각종 생필품이 보관되어 있다. 청소하러 온 날, 청소업체 직원이 투덜거렸다. 사재기했다고. 그러면서 수납장에 든 전기 포터를 꺼내 컵라면을 슬쩍 먹었다. 두세 개 없어져도 모를 거라고. 나는 주방으로 올라와서 싱크대를 살폈다. 잭 칼이 안 보인다. 보조 주방에서 서랍을 살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방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남자의 목소리다. 간병인과 통화하는 것 같다."시장에 갔다고요? 지갑을 두고 가서 챙기려고 왔는데 안 보여서요. 안방에 둔 것 같은데."남자의 발걸음이 안방 쪽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들어갔다. 침대 밑으로 휴지를 던지기라도 한 걸까, 쌓인 휴지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았다. 먼지 때문에 코가 간지럽다. 핸드폰 벨이 울리고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핸드폰 밖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엄마는 며느리가 자는 것도 걱정이야?"남자가 투덜댄다. "놓아주긴. 내가 뭘 붙잡는다고!"통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다. "또 참견이야. 어디로 보내라고?" 남자가 혼자 중얼거리더니 버럭 소리를 지른다."요양 병원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수상하다. "눈 감기 전에는 여기서 못 떠나."남자의 도트무늬 양말이 안방 바닥을 쓸고 다닌다. 딸꾹질이 나와 가까스로 숨을 참았다.남자가 침대 쪽으로 다가온다. "그래. 계속 자. 이렇게 수명대로 살아."저 남자 도대체 뭐지? 이상한 남자잖아.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주인 여자는 지금 빨랫줄에 걸린 이불처럼 누가 수거해갈지도 모른 채 축 늘어져 있다. 아무렇게나 개켜진 상태로 옷장에 들어가서 누군가가 꺼내주기 전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옷처럼 꼼짝없이 갇혀있는 건 아닐까.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나고 곧 발소리가 멀어진다. 딸꾹질이 올라와서 소매에 얼굴을 급히 묻었다. 남자가 돌아선 건가. 발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다."너, 딸꾹질한 거니?"남자가 혼잣말 끝에 거실 쪽으로 걸어 나간다. 곧이어 현관문이 쾅, 닫힌다.침대 밑에서 가까스로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미친놈이군.""그래요."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인 여자와 나밖에 없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잘못 들은 거겠지. 다시 여자를 바라본다. 허공에서 눈길이 마주친다. 여자의 눈가가 짓물러 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어요."이참에 주인 여자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단침입자로 신고되면 곤란하니까. 여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나간다.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온 걸까. 간병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저, 저기요?""네?""개가 날 찾아요. 우리 개. 밥 좀 ……."자기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개 걱정은. 나는 못 들은 척 뒷걸음질 친다. 침대 맞은편 화장대 위에 흰색 약통이 보인다. 얼마 전 남자가 간병인에게 건넨 약통 같다. 여자를 돌아보았다. 다시 잠이 든 걸까. 침몰하는 배처럼 헝클어진 이불 속에 죽은 듯이 몸을 맡기고 누워 있다. 여자의 약통이 마음이 쓰인다. 아버지는 유독 푸른 띠를 두른 약통을 보면 바닥에 패대기치듯 던졌다. 내가 수면제를 먹인 걸 아버지는 몰랐을 텐데. 거실 수납장을 뒤적이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다. "저, 전화 좀……. 받을 사람도 없지만."여자의 동공이 흔들리며 커졌다. 나는 여자에게로 몸을 바짝 붙였다. "말씀하세요. 뭐라고요?"여자는 대답이 없다. 기력이 없는 건지, 다시 잠든 건지, 무슨 이유로 입을 다물었는지 알 수 없다. 피곤한 일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뒤로 물러설 때였다. "기……기다릴게요."다가갔을 때는 이미 여자의 눈꺼풀이 내려간 뒤였다. 잠이 든 것 같다. 거실로 나와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안방을 돌아봤다. 계속 잠만 잘 것 같은 여자의 방으로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음이 헛헛하여 안방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꼼짝없이 누운 채로 마음 나눌 친구 하나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을 죽여 가는 것. 다가올 미래의 시간이 더 나을 것이라는 믿음 따위는 이미 버렸을지도 몰라. 날마다 눈을 뜨면 언제 들어갈지 모를 자신의 관을 짜고 있을 여자의 모습이 스친다. 개 짖는 소리가 또 들려온다. 저 소리가 잠든 여자를 계속 깨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수납장 한쪽에서 본 애견용 사료를 꺼냈다. 여자의 개를 생각하며 정원 뒤쪽을 한 바퀴 돌았다. 개집이 보인다. 배설물을 치우고 개집에 깔린 방석을 꺼내 털었다. 사료를 봉지째 두고 일어서는데 머루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보이지 않는 머루. 여자의 개처럼 머루도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진 않을까. 출구 쪽을 바라보며 걸었다. 머루를 찾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나는 걷다가 개집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너 발치 앞에 금속 재질의 뭉텅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잭나이프. 체리 나무로 된 손잡이가 풀에 묻혀 반쯤 드러나 있다.잭 칼을 가지고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간병인이 들어선다. 여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뒤따른다. 여자의 손에 맥주 캔 두 개가 들려있다. 두 사람은 정원에 있는 야외용 테이블에 앉는다. 야외 조명이 테이블을 훤히 비추었다. "오. 풀장이 있네. 여기 누가 살아?"여자의 말에 간병인이 키득거린다."잠자는 공주.""정말?""잠만 자거든.""좀 깨우지?""아니. 공주가 깨어나면 난 실업자가 돼. 목소리 낮춰."여자들이 소곤소곤, 수다를 떤다."캔 맥주 더 있어?""당연하지. 창고에 널린 게 술인걸."간병인 여자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조용한 밤공기를 뒤흔든다.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기다릴게요, 금방이라도 감겨서 다시는 뜨지 못할 것 같은 눈으로 겨우 내뱉던 여자의 말이 아버지의 말과 겹쳐진다. 잘 다녀오라고 내게 손을 흔들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아버지의 손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을 거다. 멈추지 않는 딸꾹질과 함께. 〈끝〉박종규 作
[제5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심사평..."깨진 시간들이 만들어내는 엇갈린 황홀경의 체험"
유계영의 시는 신비로운 만화경 속에 빠진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신비는 먼 나라 색색의 놀이공원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다. 세계의 깨진 시간들이 서로를 비추며 만들어내는 엇갈린 황홀경이다. 우리를 아프게 찌르는 것이 밤하늘의 별빛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일상의 순간들이 통점처럼 떠 있는 행성일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편린들로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시간은 무심히 지나가는 듯하지만, 어느 한자리에 묶인 것처럼 목줄에 당겨져 앞발을 치켜들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 목을 조이는 그 찰나는 현재의 것이지만 또한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체감되는 몸의 시간이기도 해서, 달려온 시간과 달려갈 시간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속도계처럼 흔들린다. 말하자면 유계영의 시는 그 속도계의 바늘을 보여주기 위해, 저 개와 모자와 여름과 빌딩을 향한 언어를 때로는 구부러뜨리고 때로는 구부러진 그것을 탕탕 펴낸다.때문에 그의 시 앞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내가 보았던 것들의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낯선 느낌을 갖게 된다. 저 찬물과 두부와 적별돌의 마음을, 저 저수지와 썩지 않는 빵의 마음을, 시인은 인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더는 '나'가 아니라 "돼지 공장에서 생산되는 돼지들"('예감')이 되고, "밥이 된 나와 기계가 된 나와 바위가 된 내가/ 시장 좌판에 나와"('미래에 관한 네 가지 입장')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통과할 때, 우리는 마치 "두 사람의 심장박동이 동시에"('두고 왔다는 생각') 울리는 것처럼 하나로 연결되고 만다. 물론 그 풍경이 "플래시가 터질 때 울음을 멈추고 활짝 웃어버린 여자 아이"('눈딱부리 새의 관점')처럼 슬픔을 동반하는 것은 그 연대의 필요성이 환기하는 세계의 모순 때문일 것이다. 유계영 시가 가진 결정적인 위의는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한다. 세계의 표면과 시선의 이면을 꾸준히 파고들며 낯선 문법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고 세계를 향한 엇갈린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다.덧붙이자면, 심사자들은 예심에서 올라온 황성희·임승유·김현·민구 등 9명이 모두 수상자가 되어도 손색이 없다는 데 동의하고 각각의 장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개성을 지키면서도 모종의 예감을 실어나르는 시들이 가진 경의로움에 대한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다만 유계영 시인의 장점이 더 오래 이야기되었고 그의 시가 구상 시인의 시력에 뒤따르는 영예를 받아안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데 쉽게 동의했다.신용목 시인·이혜원 평론가·장옥관 시인.(사진 왼쪽부터)
[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 임은영 '블랙 잭나이프' (상)
지하철 승강장을 걷다가 동전 하나를 주웠다. 손바닥을 폈을 때 숫자가 보이면 떠나고 학이 보이면 이 도시에 하루 더 머물 것이다. 동전을 공중으로 높게 던지고 떨어지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손바닥을 펴자 학이 난다. 녹이 슨 탓일까, 날갯짓이 무거워 보인다.해가 저물면서 바람이 제법 차다. 스카프를 꺼내려고 배낭에 손을 넣었다. 손을 휘젓는 동안 차가운 질감의 잭나이프를 스친 느낌이 없다. 나는 배낭 입구를 벌리고 안을 뒤졌다. 잭나이프가 보이지 않는다. 퇴직하던 날, 아버지는 내게 세관통관번호에 관해 물었다. 해외 직구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리킨 건 '블랙 잭나이프'였다. 평소 당신 물건을 사는 일이 잘 없던 아버지였다. 나는 서둘러 주문해주었다. 물건은 배송되어 오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 아버지는 캠핑장을 만들 거라고 꿈꾸듯이 말했다. 아버지가 항상 가지고 다녀서일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면 잭나이프가 절로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봉투나 상자를 열고, 노끈을 자르고, 과일을 깎고, 방어용으로도 몸에 지녔다. 아버지 집을 나오면서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잭나이프를 챙겼다. 그걸 잃어버리다니. 며칠 전,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층집이 스친다. 거기서 흘린 걸까. 역을 빠져나와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0분 정도면 이층집에 도착할 수 있다. 산책로를 따라 강이 길게 뻗어 있고 수면 위로 크고 작은 낙엽이 바람이 부는 대로 떠다닌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가끔 눈에 띈다.아버지가 머루를 데리고 온 날도 가을이었다. 웬 강아지냐는 오빠의 물음에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한 시간 전부터 날 쫓아온 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아버지는 머루를 내치지 않았고 머루는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도 아버지 옆을 지킨 건 오빠와 내가 아닌 머루였다.벨을 길게 눌렀다. 외출 중인가, 여러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다. 나는 대문 앞에 앉아 누구라도 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 온다. 일어나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다. 주인이 그사이 비밀번호를 바꾸었을까? 혹시 문이 열리면 물건만 찾고 나오면 될 것이다. 안전키의 덮개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공영일, 비밀번호를 잊을 리 없다. 엄마의 이름이 공영이니까. 문이 열린다.파라솔과 벤치가 놓인 정원은 나흘 전 그대로다. 대문을 닫고 돌아섰을 때 그림자 하나가 벽 뒤로 어른거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개의 그림자 같기도 하다. 나는 청소 왔던 날의 기억을 찬찬히 되살려본다. 집을 나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이곳 C 도시에 잠시 머물렀다.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죽이다 보니 통장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일자리가 필요해 급하게 구한 게 청소 알바다.잭 칼을 맨 처음 꺼낸 건 베란다에 설치된 그물막을 없앨 때였다. 그물막을 쓰레기봉투에 담고 칼은 호주머니에 넣었을 텐데. 그때 바닥에 흘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주워서 수납장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현관에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운동화를 들고 현관 안으로 서너 걸음 걸을 때까지도 인기척이 없다. 붙박이장 문을 연다. 밑창과 굽이 연결된 웨지 스타일의 여성용 구두가 보인다. 거실 쪽으로 걷는다. 천장이 높은 거실과 베란다로 통하는 슬라이딩 도어의 통유리 창문이 눈에 들어온다. 휑하던 거실에 가구가 채워져 있다. 거실 중앙에 4인용 소파가 스툴과 함께 니은자로 놓였다. 소파 뒤에는 키 작은 장식장 두 개가 벽면을 따라 나란히 서 있다. 장식장 내부에는 원색 계열의 찻잔이 가득하다. 찻잔 아래에는 여행지에서 가져온 듯한 그림엽서가 어지러이 쌓여있고 작은 종들과 다양한 종류의 오프너가 뒤섞여 있다.잭 칼은 어디에 있을까, 거실 수납장을 둘러보고 안방으로 갔다. 붙박이장 안으로 두툼한 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맨 왼쪽 칸에 의료용 보조기가 보인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관절 보조기와 비슷하다. 주방으로 와 싱크대를 뒤져도 잭 칼은 보이지 않는다. 이 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오른쪽에 스피커가 달린 미디어 룸, 맞은편 방은 게스트룸이다. 두 방을 확인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주인이 들이닥치기 전에 나가야 하는데 잠깐만 쉬다 가자는 마음이 발목을 잡는다. 베란다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는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캠핑장처럼 지대가 높은 곳이다. 날이 밝으면 공원이 훤히 내다보이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가을 풍경이 가득 찰 거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에 캠핑장을 만들었다. 건립조건이 까다롭지 않을 때였다. 사람을 불러 땅을 고르고 시설을 정비해 캠핑장을 시작하는 데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캠핑장을 오갔다. 잭 칼이 수호신이라며 항상 몸에 지녔지만 내겐 흔한 접이식 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캠핑장에 텃밭을 일구고 블루베리 농장을 만들었다. 새를 막기 위해 나무작대기에 고무를 걸어 새총도 만들었다. 나는 농장에 가면 새총부터 쥐었다. 새를 쫓는 게 아니라 블루베리만 떨어뜨린다고 아버지가 언짢아해도 몰래 새총을 쏘곤 했다. 이 년을 근무한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온 날,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블루베리를 따다 주었다. 왜 그만두었냐고 물어도 답하지 않았을 거다. 입에 옮기기조차 싫었다. 반 아이가 등원하자마자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3세라도 말이 늦는 아이였다. 다리를 살펴봐도 다친 흔적은 안 보였다. 아이 집으로 급히 연락했다. 어머니가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오후 수업 중에 어머니가 교실에 들이닥쳤다. 아이가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며 내 뺨을 후려쳤다. 반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뒤늦게 원장이 달려와서 무조건 부모에게 빌라고 했다. 나는 원장 말을 듣지 않고 일을 그만두었다.그날 밤 아버지가 준 블루베리를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다.그해 여름 내내 비가 내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창밖을 두드리는 빗줄기만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이집에서의 피로감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어쩌면 다가올 가을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설핏 들었다. 하지만 여름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전국이 태풍에 휩싸여 피해지역이 많았다. 아버지의 캠핑장도 안전하지 못했다. 폭우가 캠핑장을 덮친 날, 아버지는 밤늦게 귀가했다. 자정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비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한숨이 코 고는 소리로 바뀌었다. 잠을 설치다 새벽 한 시가 지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쿵, 소리가 나서 일어났다. 정전 상태였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방에서 나갔다. 발바닥이 아렸다. 넘어진 거실장 앞으로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소음에 섞여 들려왔다. 옆방으로 갔다. 아버지가 소리쳤다. 천장이 무너져 벽 안에 갇혔다고.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119로 전화를 걸 때 등 뒤로 차고 단단한 것이 나를 스쳤다. 돌아보니 서너 걸음 뒤에 거울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내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천장에서 철 구조물이 돌 부스러기와 함께 쏟아졌다. 나는 몸을 돌렸다. 아버지를 두고 현관 쪽으로 뛰었다. 집 안의 가구들이 넘어지고 부수어지고 벽이 허물어졌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많은 것들이 폭우에 휩쓸려 사라졌다. 아버지의 거처는 무너졌고 야영객이 잠을 자던 컨테이너들은 강어귀에 처박혔다. 아버지가 정성껏 가꾼 블루베리 농장과 텃밭이 쓸려갔다. 해마다 만들던 매실청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다.뒤늦게 구조된 아버지는 잭 칼부터 찾았다. 일흔다섯인 아버지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리와 다리를 다쳐 치료 뒤에도 거동이 불편했다. 아버지를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다.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만 요양 병원에 계시는 건 어떠냐고 오빠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베개를 던지고 오빠에게 평생 안 하던 욕설까지 퍼부었다.아버지가 떠오르면 딸꾹질이 나온다. 지금도 그러하다. 아버지를 두고 혼자 집 밖으로 나간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피곤함이 몰려온다. 수납장을 더 찾아봐야 하는데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온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이 검은 바다 같다.잠결에 벨 소리가 들린다. 인터폰에서 방문자 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여기서 자다니. 현관문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라는 다급함에 재빨리 이 층으로 몸을 피했다. 핸드폰을 보니 벌써 열 시다. 누굴까? 문틈으로 귀를 기울인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일 층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준 미니 망원경을 배낭에서 꺼냈다. 베이지색 재킷을 걸친 중년 남자가 앞서고 병원 유니폼을 입은 청년 두 명이 뒤따른다. 계단 옆으로 간이침대가 옮겨진다. 침대에 사람이 누워있다. 체형이 왜소하고 긴 머리인 걸로 봐서 여자 같다. 몸이 불편한 모양이다. 움직임이 없다. "여기가 안방입니다. 조심하세요. 아내가 놀라요."말투로 봐서 주인 남자 같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다 목소리가 나긋하다. 남자가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에게 약봉지를 건넨다."약, 잊지 말고 먹여요.""수민 씨를 돌본 지 벌써 일 년이에요. 약 정도는 제때 먹일 수 있어요."여자의 말에 남자의 얼굴이 편안해진다.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여자는 긍정의 제스처를 반복적으로 보인다. 안방으로 들어간 남자가 밖으로 나와 여자를 부른다. "곧 겨울이네요. 이불 좀 두꺼운 거로 가져다줘요. 아내가 말을 못 하니 알아서 챙겨줘요.""알았어요."여자의 대답이 짧다.잠시 뒤 청년들이 주인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클랙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 한 자락을 들었다. 흰 개 한 마리가 차 주위를 어슬렁거리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전원을 끄려고 보니 오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차례 와 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 그만 좀 해.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너 때문이 아니라고. 매번 같은 내용의 문자다. 가끔 철자가 틀리거나 어순이 바뀌는 경우가 있지만 문자에 담긴 의미는 비슷하다. 딸꾹질이 올라와 소매로 입을 막는다.사고 뒤에도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기보다 걸으려고 애썼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시트러스 향의 화장품을 바르고 거울을 자주 들여다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몸이 회복되지 않자 조금씩 변해갔다. 냉장고를 열고 직접 반찬을 꺼내 식탁에서 밥을 먹는 모습은 더 볼 수 없었다. 침대에서 식사하려고 떼를 쓰고 아침, 저녁으로 하던 세수를 하루에 한 번, 언제부턴가 격일로, 그러다 며칠에 한 번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좋은 낯빛은 이내 거무스레해졌다. 아버지는 예전과 다르게 침대에 자주 누웠다. 안방을 들여다보면 늘 자는 것 같았다. 잠을 깨우면 짜증을 내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없던 식탐까지 생겨 체중이 표나게 늘어났다. 바깥 볼 일이 있을 때는 휠체어를 침대 앞에 두고 나왔다. 식사 시간을 챙기지 않는 날이 늘자 아버지가 입을 닫았다. 딸의 무신경함이 섭섭하고, 무시당한다는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외출을 하고 종종 밤늦게 귀가했다. 친구를 만나 자주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스파게티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보면 집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감옥 같겠다고, 한 친구가 농담 삼아 한 말에 다른 친구들이 점심 내기를 했다. 내가 언제까지 아버지를 돌볼지를, 얼마나 버티는지, 반년과 일 년 중 하나에 걸었다.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물의 이름을 자주 잊었다. 인지력에 문제가 생기면서부터는 잭 칼에 집착했다. 날카로운 것이라 옷장이나 서랍장에 숨겨도 귀신처럼 찾아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요양원에 대해 여쭤보면 어눌한 말로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곳은 유령의 집이야. 요양원에서 무엇을 본 걸까, 아버지는 뭔가를 되새기며 완강히 거부했다. 오빠는 회사 일로 바쁘다고 집에 오지 않았다. 뭐든 필요한 건 다 사준다고 했지만 딱히 오빠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아버지의 체크카드로 충분했다. 가끔 밖에 나가면 쇼핑을 하고 들어왔다. 집안은 생활에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로 쌓여갔다.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옷장을 자주 뒤졌다. 잭 칼을 찾다가도 자신이 무얼 찾는지 종종 잊어버렸다. 내 옷을 휘감고 즐거워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를 못 본 척하거나 함께 놀이를 했다. 카드놀이를, 숨바꼭질을, 줄 당기기를 했다. 나보다 머루가 아버지와 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면 머루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 임은영 '블랙 잭나이프' (하)에서 계속됩니다.박종규 作
[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수상 소감 - 임은영씨 "의연하고 자유롭게…오래도록 성실히 쓰겠습니다"
산책길, 나는 대숲 앞에서 종종걸음을 멈추었다. 겨울바람이 대숲을 훑고 지나가면 군집을 이룬 대나무가 한 방향으로 뒤척이며 수런거린다. 부러지지 않고 다시 서는 의연함과 휙휙, 소리를 질러대며 바람을 타는 나무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러웠다.막막해지는 순간, 걷는다. 좀 더 단순해지고 무용해지기를.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산책의 끝은 늘 다르지 않다. 읽고생각하고쓰고그리고무엇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부족한 내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영남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래도록 성실하게 쓰는 것으로 보답하겠다.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 덕분에 계속 쓸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소설의 길을 이끌어주신 스승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좋은 소설로 정진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다. 작마와 동리 문우, 대학원 동기들, 가까이 혹은 멀리서 응원해준 그들의 온기로 많이 웃었고, 덜 외로웠다. 늘 고맙다. 그간 소설을 쓰면서 만나고 지나친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임은영씨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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