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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당선작]
[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코타키나발루의 봄 (하)
*처음에는 나비인가 싶다. 하얗고 가볍고 날개 달린 무언가가 공중에서 나선형을 그리며 배춘자 씨 무릎 위로 내려앉는다. 접은 이음매가 말끔하지 않은 종이비행기. 빨간 멜빵바지를 입은 어린애가 우리 쪽과 저만치 할머니인 듯한 노인을 번갈아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더러 오라고 손짓한다. 아이가 한걸음 물러나며 애먼 나를 쳐다본다. 배춘자 씨가 아이 손을 잡아 끌어당긴다. 아이가 엉거주춤 당겨온다. 배춘자 씨가 먼지 묻어 시커먼 아이의 손바닥을 털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이 손을 마디마디 닦는다. 학생, 시간 재는 거 스톱, 스톱. 네네. 배춘자 씨가 홍보물 거치대로 팔을 뻗어 책자 하나를 집는다. 거기서 한 면을 찢더니 눈 깜짝하는 새 아이 것에 비교도 안 되게 말끔한 종이비행기 하나를 접어낸다. 배춘자 씨가 그걸 아이 손바닥 위에 올려준다. 아이는 분홍색 혀를 있는 대로 빼서 한 바퀴 돌리더니 깨금발로 뛰어간다. 아이 뒤통수 너머로 아이 할머니를 보며 배춘자 씨가 혀를 끌끌 찬다. 저이도 나처럼 할마인가 보네. 학생은 할마 알아요? 네네, 할머니엄마 아닌가요. 몸을 돌려 창을 마주하고 똑바로 앉은 배춘자 씨가 창밖을 멀리 보며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다. 참아야 하던 시절의 참았던 이야기를 꺼낼 때 노인들은 잘 이런다.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는 삼 남매가 있어 참을 수 있었다. 배춘자 씨는 참으며 죽을힘 다해 삼 남매를 키웠다. 잘 자란 삼 남매는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오기 시작했고 줄줄이 아이를 낳았다. 자식들은 직장보다 배춘자 씨 집 가까이 살기를 원했다. 아이들을 맡기기 위해서. 참아야 하던 시절, 배춘자 씨에게 참을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준 삼 남매는 이제 배춘자 씨가 참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배춘자 씨는 또 참으며 죽을힘 다해 일곱 손주를 키웠다. 배춘자 씨에게 더는 아이들을 맡기지 않아도 되면서 삼 남매는 도심 가까이 이사하며 멀어져갔다. 큰손주가 아기를 낳아 증손주가 생긴 배춘자 씨는 참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당신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었다. 장남 환갑에 맞춰 삼 남매와 손주들이 함께 비행기 타고 어디로 놀러 간다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놀러 가는 일주일 동안 증손주를 좀 봐달라고 할 때까지도 그랬다. 아기가 순해서 손 갈 것 하나 없다는 별말 아닌 말에 더는 참지 못하게 된 배춘자 씨가 삼 남매를 모아놓고 소리쳤다. 내 인생이 이제사 봄날인데! 이 우라질 눔들아. *일련번호: 31날짜: 10월 10일이름: 배춘자나이: 1939년생메모: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평상(노인들이 이리 부르는)에 다리 뻗고 앉아 태블릿으로 좀 더 가까워진 그랜드 캐니언(A Bigger Grand Canyon)을 보는데 배춘자 씨가 다가온다. 그림 볼 때면 잘 그렇듯, 나는 느끼지 못한다. 배춘자 씨가 바로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봐도 모른다. 그림을 천 원짜리 지폐 석 장이 덮고야 안다. 오늘도 15분. 네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왁자하니 웃는 노인 네댓 중 손 들어 인사해 오는 이가 있다.정자에 드러누워 마냥 자던 내게, 대가를 치를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며 제일 먼저 다가왔던 황 여사. 그럴 기력도 없을뿐더러 이야기 좀 나누는 걸로 사례를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젊은 애랑 말 섞으면서 죄짓는 심정이 안 되려면 돈이라도 줘야겠다는 말에 수락했다. 하긴, 내겐 공짜로 누구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 따윈 없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학교 졸업 전부터 육 년이나 한 짓이니까. 젊은 애가 공항 한구석에서 이리 잠만 퍼지르고 있는 것도, 더는 그 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서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대개, 화가 많이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서다. 이를테면, 교제를 반대하는 애인의 아버지와 극적으로 성사된 통화가 도중에 덜컥 끊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놈이 싹수마저 엿 바꿔 먹었냐며 애인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자 누군가는 그 책임을 내게 물었다. 그래, 어쩌면 난 그걸로 돈을 받으니까. 누군가에게 여긴 휴대폰 이용 서비스 콜센터이니 수리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돌려주겠다고 말할 때만 해도 나는 이달의 베스트 상담사 타이틀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나는 왜 그때 더는 참지 않기로 작심했던 걸까. 돌아보면 별말도 아닌데. 내가 결혼 못하면 네가 내 인생 책임질 거야? 그 숱한 억지와 쌍욕을 다 삭였으면서 그게 뭐라고 터진 걸까. 오냐 그래, 내가 결혼해주면 될 것 아냐! 도통 기억 안 나는데 내가 그랬다고. 씨바. 그 말도 했다고. 헤드셋을 벗어서 사무실 벽에 액자로 걸린 사훈-인내-을 향해 집어 던지며 그랬다고. 물론, 그건 생각난다. 기분 좋게 생경하던 어떤 느낌까지…. 아마도 내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내 몸속에 꽁꽁 갇혀 있었을 무언가가, 몸에 난 구멍이 아닌 살갗을 찢으며 공중으로 흩뿌려지던 느낌. 찢어진 살갗으로 온몸의 피가 빠져나와 발끝을 적시는 느낌. 몸이 가붓해지면서 발이 붕 떠오르는 느낌. 그랬구나. 그게 내 몸의 전부였구나. 내 살과 피는 죄다 씨바로 만들어졌던 거구나. 내 몸을 빠져나온 그것의 힘은 위력적이어서 따라 나오던 팀장도, 팔을 붙잡던 선배도 그 세찬 날갯짓에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낮 밤 따로 없이 집보다 더 길게 머물던 회사를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길거리든 어디든 갈 곳 많고 할 일 많아 뵈는 젊은애들 천지라 나는 후드를 벗을 수 없었다. 노인들이 아침에 집을 나서 뜬금없이 공항으로 향한다는 뉴스는 광화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의 옥외 티브이로 보았다. 노인들과 나는 다를 게 없었다. 젊은 애들 눈치 보여 갈 데가 없다는 점에서.보던 그게 뭐래요? 불이라도 났나, 천지가 벌겋드만.내가 내미는 태블릿을 배춘자 씨가 들여다본다. 화가 이름을 알려 주니 배춘자 씨가 눈을 휘둥그레 치뜨더니 그림을 다시 들여다본다. 할매가 그림도 이리 잘 그리네. 남자가 그린 건데요. 남자? 배춘자 씨가 고개를 돌려 황 여사를 찾는다. 그 할매 이름이 뭐랬소? 누구? 왜 있잖우, 백 살도 더 먹었는데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는. 아, 호프너? 왜요? 오늘 아침에 죽었대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백사 세 나이로 스카이다이빙에 성공한 호프너 여사와 아무 연관 없을뿐더러 올해 86세로 멀쩡히 살아있다고 말하려는데, 하늘에서 뛰어내린 이가 어쩌다 그새 영영 하늘로 가버렸는지 곡절을 알기 위해 배춘자 씨가 황 여사에게로 움직인다. 학생, 잠깐만 스톱, 스톱. 네네. 저 이는 확실히 배운 사람이요. 영어 말도 아주 잘혀. 난 이제 에이비씨디 배우는데. 그림을 다시 보여 달라는 배춘자 씨에게 내가 태블릿을 건넨다. 미간에 깊은 골이 팰 정도로 그림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는 배춘자 씨 옆에서 나는 아주 잠깐, 혹시 비행기를 탄다면 어딜 가고 싶으냐고, 배춘자 씨가 물어오길 기대한다. 대답할 말이 있어서. 이 그림을 직접 보러 캔버라에 가고 싶어요. 운 좋으면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내가 진짜 학생일 때, 미대 입시생을 제치고 사생대회에서 내가 일등상을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있을지 모르고. 물론, 배춘자 씨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태블릿을 건넨다.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그렸나.멀티 앵글이 접목된 작품이라 비행기를 타고 본 정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 말은 속으로만 한다. 학생, 시간 재요. 네네.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는 춘삼월에 내가 태어났어요. 그래서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 같으라고 춘자요. 어제 들은 이야기부터, 배춘자 씨 이야기가 시작된다.다리와 의자 사이에 끼워 둔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J에게서 온 문자 앞머리가 솟는다. 여행 후보지 중 빨리 하나를 고르라고. 가을 특별 할인 기간이 오늘 끝난다는 말끝에 느낌표가 댓 개는 붙었다. 배춘자 씨가 창밖에 관객을 둔 모노드라마 배우처럼 그쪽을 향해 간간이 손발을 써가며 말하는 동안 나는 J에게 간간이 문자를 찍는다. 코타키나발루에는 길거리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대. 뭐래. 정말이야, 찾아봤어. 설마. J에게 어제 찾은 링크를 보낸다. 뭐야, 이십 년 전 자료잖아. 잠시 후, 그로부터 이십 년 후의 정보가 담긴 링크가 전송된다."죽기 전에 한 번은, 코타키나발루"코타키나발루에는 해변을 끼고 자전거를 달릴 수 있는 해변 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도 자전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대여소가 4곳이고 시청에 가면 공짜로도 빌려준다는 사실!-코타키나발루 투어 전문 코코여행사.배춘자 씨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찾아 꺼내 드는 기척에 나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목을 세운다. 그게 그 냥반이 한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 냥반에 관해 알 리 없는 내가 눈을 끔뻑이자 그걸 어머, 그랬군요, 정도로 이해한 배춘자 씨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수건에다 요란하게 코를 푼다. 이제 배춘자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매직아이 그림을 보는 눈이 되어가는 배춘자 씨를 지켜보다 나는 타이머를 끈다. *일련번호: 34날짜: 10월 12일이름: 배춘자나이: 1939년생메모: 싫어하는 음식이 드물게도, 잔치국수배춘자 씨가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그 사이, 나는 와 보라고 손짓하는 황 여사에게 다가간다. 그냥 말해도 배춘자 씨에게 들릴 턱이 없는데 황 여사가 굳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인다. 어제 형사가 다시 와 배선봉 씨를 찾았다고 알려주드만. 자식들이 요양원에 잘 모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기는 일이재. 그게 어찌 잘 모신 거여, 잘 가둔 거지. 배 여사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겠어. 한동안 옆집이었으면서 치매가 깊단 걸 어째 몰랐을꼬. 자식들한테 돈 다 빼 먹히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것도, 그 냥반이 치매란 것도 알아봐야 뭐 좋겠어. 네네. 참, 어제는 왜 안 왔더랬수, 배 여사가 애타게 찾든데. 아버지한테 다녀왔어요. 배춘자 씨가 통화가 끝났다는 신호로 휴대폰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내가 옆으로 가 앉는다. 나는 일천구백삼십구년, 목련꽃 봉오리 터지는 춘삼월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이름이 춘자인 건 아니고요. 날마다 봄날같이 살라고 춘자지요. 이 말을 할 때마다 배춘자 씨가 반달눈이 된다는 걸 나는 오늘에서야 안다. 서로 몸을 완전히 틀어 정면으로 보고 있어서다. 우리 눈이 처음 포개지는 셈이다.저는 일천구백구십팔년, 칠월 한여름에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름은 봄 햇살처럼 웃으라고…. 하이고, 어매가 더운데 학생 낳느라 고생이 많았것어요. 학생 아니에요. 학생이 아니요? 직장 다니다가 얼마 전에 잘렸어요(씨바). 회사에서 잘렸다고? 네. 이 참한 학생을 왜 자르고 그런댜(우라질 눔들이). 제가 더 참아야 했나 봐요. 참지 말아요, 그래봐야 알아주는 눔 하나 없구먼요. 배춘자 씨가 몸을 고쳐 앉는 동시에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비행기 뜰 시간이 되었다. 배춘자 씨가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배춘자 씨를 내려다본다. 우리 눈이 다시 포개진다. 어제 변호사를 만나고 왔는데요, 이제껏 배춘자 씨가 손주들을 키운 시간과 노동의 대가를 자식들에게 법적으로 청구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나중에 할 참이다. 여기보다 비행기가 더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이 말은 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춘자 씨가 가방을 집어 긴 끈을 몸에 빗금으로 매면서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거기가 어디래요, 학생. 배춘자 씨는 양손을 창유리에 붙인 채 까치발을 한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떨어질 기세지만 나는 못 본 척한다. 유도로에서 막 활주로로 들어서는 비행기 한 대가 보인다. 점차 속도를 높여 활주로를 질주하던 비행기는 더는 갈 곳이 없어 뵈는 지점에서 앞발을 치켜든다. 다리를 접고 날개를 펼친 비행기가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비행기 몸통에 쓰인 글자를 하나하나, 배춘자 씨가 허공에 검지로 짚으며 읊는다. 엠, 에이, 엘, 에이, 와이, 에스, 아이, 에이맞아요,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비행기예요.*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바퀴가 단단한 모래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 발에 닿을 듯 파도가 몰려와 부딪으며 거품 올리는 소리. 겁 없이 자전거 뒤에 내려앉은 갈매기가 날갯짓하는 소리. 모래성 쌓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점 상인들이 낯선 언어로 호객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귀 아닌 살갗을 파고든다. 내 몸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줄 것처럼.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카수아리나 나무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는 참이다. 탄중아루 비치를 도는 동안, J는 시청에서 공짜로 빌린 자전거 바퀴가 잘 안 나간다고 내내 툴툴댄다. 한참 뒤에 처진 채, 내가 찾는다는 게 뭔지 알아야 찾는 걸 도와줄 수 있다고 또 소리를 지른다. 내가 찾는 게 뭔지 나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다. J와 보조를 맞추려 내가 자전거를 세운다. 반대쪽에서 다가드는 자전거 한 대. 자전거 탄 이의 얼굴이 또렷이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내 마음과 다르게 입이 인사를 건넨다. 뜨리마 까시. 뭐가 고맙다는 건지 영문 모르는 눈빛이 내게 와 잠시 박혔다가 지나간다. 자전거는, 벌건 혀를 늘어뜨린 채 씩씩대며 페달을 밟는 J의 옆을 가뿐히 지난다. 아빠 까바르. 현지어를 못 써 안달 난 J가 손 흔들어 인사하자 자전거를 탄 이도 손을 흔든다. 아빠 까바르. 나는 자전거를 아예 돌려세우고 멀어지는 자전거의 뒤를 눈으로 좇는다. J가 옆으로 와 자전거를 세우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저 노인, 백 살도 넘었겠지? 여기 코타키나발루는 내 이름처럼, 봄이다. *일련번호:날짜: 10월 30일이름: 배춘자나이: 1939년생시간:전화번호: (555)7140-0148메모: 호크니 그림을 아주 좋아함 〈끝〉변미영 作
2024.01.02
[2024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심사평…우리 시대의 노인과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사뭇 낯설고 엉뚱한 질문
최종심에 넘어온 작품은 '사랑하는 가족 드림' '부진정부작위법' '번트 엄버' '존과 트리니티 클럽' '창백한 풍경' '안녕한 하루' '플라이웨이 파프리카' '코타키나발루의 봄'이었다. 여덟 편의 작품에서 가장 잘 다듬어진 작품은 '창백한 풍경'과 '안녕한 하루'였다. '안녕한 하루'는 위기에 처한 부부의 섬세한 심리와 구체적 상황 묘사가 돋보였다. '창백한 풍경'은 학교 폭력을 모티프로 삼아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학교가 처한 '창백한 풍경'을 잘 그려냈다. 이 두 작품이 흠잡을 곳이 가장 적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동시에 신인으로 보여주어야 작가로서의 개성적인 세계와 방법이 희미하다는 사실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플라이웨이 파프리카'와 '코타키나발루의 봄'은 다소 거칠었지만,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법과 힘이 뛰어났다. 익룡을 닮은 멸종위기종 '넓적부리 황새'를 키우는 한 남자와 창을 마주한 이웃인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혔다. 새를 너무도 사랑한 남자와 사라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남자가 함께 보여주는 것은 애정을 기울이는 일과 애정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소재의 독창성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애인이 만든 영화와 새의 이야기가 서로 알레고리의 의미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않아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코타키나발루의 봄'은 공항에서 지내며 5분에 천원을 받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직업이 된 젊은이와 그의 고객인 노인들의 이야기다. 원래 휴대폰 이용 서비스 콜센터의 베스트 상담사였던 '나'는 이제 나의 새 고객인 배춘자씨에게 묻는다. 비행기, 타보셨나요?'나'는 날마다 공항에 오는 배춘자씨의 옆집 사람 배선봉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못 탄 게 아니라 안 탔다고 대답하는 노인들과 '나'의 대화만큼이나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뭇 낯설고 엉뚱하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노인과 젊은이들의 문제를 이렇게 하나의 서사 안에 쓸어 담는 작가의 뛰어난 힘과 개성이 이 소설이 지닌 다른 여러 허점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판단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아쉽게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게 된 응모자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본심 심사위원 권지예·방현석 소설가지난해 12월20일 영남일보 회의실에서 열린 영남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본심에서 심사를 맡은 권지예(왼쪽)·방현석 소설가가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제7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심사평…"현실과 환상의 교직, 낯선 세계로 안내하는 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일곱 권의 시집 중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시집들은 황인찬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이설야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박시하 시집 '8월의 빛', 김현 시집 '장송행진곡', 이혜미 시집 '흉터 쿠키'였다. 논의를 거쳐 마지막까지 대상이 된 시집은 사뭇 다른 대조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는 황인찬 시집과 이설야 시집이었다.이설야의 시는 반듯하고 견고하다. 시의 발상과 표현이 삶의 구체성에 뿌리박고 있는 그의 시들은 환경 문제, 노동자 난민 문제 같은 사회적 주제를 탐색하면서 동시에 부서진 세계에 대한 시인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공들여 쓴 만큼 개별 시편의 완성도도 높다. 그러나 시집 전체적으로 볼 때는 새롭다는 느낌이 좀 부족했다. 사회적 문제나 타인을 향한 시보다는 시인의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시들에 공감이 많았다.황인찬의 시는 붙잡을 수 없는 추상적 대상을 붙잡으려 하는 시적 노력을 보여준다. 환상이나 유령을 즐겨 등장시켜 현실의 현실성이 휘발되는 지점을 들여다보려 한다. 또한 환상과 현실의 교직을 통해 일상의 이면에 숨은 것들을 드러낸다. 문장의 어긋난 짜임, 이야기와 이야기의 어긋남에 의해 평탄하게 흐르던 문장은 깊이와 굴곡을 얻고 독자를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해명되지 않는 세계에 사는 존재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시들은 유연한 상상력과 진술의 힘, 이미지와 이미지의 비약으로 시의 입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다만 '꿈, 환상, 깨어보니 삶'의 반복은 시적 장치로 볼 수도 있으나 자칫 매너리즘에 빠져 시적 긴장감을 약화시키고 시와 이야기의 경계를 무너뜨려 시를 산문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최종 대상은 아니었으나 박시하의 시도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들은 언어의 감촉과 결을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서정의 깊이를 보여줬다. 감각이 살아있고 묘사의 간결성과 선명성이 인상적이었다. 서정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감상적으로 흐르는 부분이 있어 아쉬웠다.허심탄회한 논의 끝에 심사위원 모두의 추천과 동의를 얻은 황인찬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황인찬의 시가 수상을 계기로 더 넓고 새로운 시 세계를 보여주리라 기대한다.〈본심 심사위원 채호기·전동균 시인, 남진우 문학평론가〉지난해 12월18일 영남일보 회의실에서 열린 제7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본심에서 심사위원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전동균·채호기 시인, 남진우 문학평론가)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제7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 - 황인찬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문학동네/2023.6.15)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황인찬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 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 걸요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애당초 마음도 없지만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차규선 作
[제7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황인찬 시인 수상 소감…"고통 속에서도 희망 찾는 일 詩 통해 계속 해나갈 것"
문학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길 바라며 시를 써 왔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비추는 것은 결국 볼썽사납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삶이 이토록 초라한데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은 기만에 불과하고, 세상이 이토록 참담한데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지나친 순진함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낙담 속에서 문학을 계속하며 배운 것은 그 모든 절망마저 의심하고 검토하는 것이 문학의 소임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올해에도 슬픈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 모든 슬픔을 이 자리에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아픔들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상상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문학을 통해 배웠으니까요. 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크게 즐기는 일이 문학의 좋은 점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슬픔과 더불어 그 슬픔을 견뎌낼 작은 기쁨을 건져내는 일을 시와 함께 계속해 나가고 싶습니다.'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를 묶으며 가장 자주 생각한 단어는 '결심'이었습니다. 슬픔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결심,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떠올리겠다는 결심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심들에 저의 보잘것없는 시가 보탬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시에 큰 응원을 전해주신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그 결심을 언젠가는 이루어 내라는 격려일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1'은 전쟁 이후 초토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죄 없는 미소와 빛나는 내일을 발견하는 시입니다. 학생 시절 구상 시인의 시를 읽으며 인간의 높은 정신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빛과 위안이 될 수 있는지 사무치게 배웠습니다. 고통과 슬픔의 가운데 삶의 희망을 건지는 그 정신을 저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의 무거움과 고마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를 읽고 쓰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와 더불어 기뻐하고, 또 슬퍼하고 싶습니다.☞황인찬 시인은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등이 있고,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황인찬 시인
[2023 영남일보 문학상] 詩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뒷면에 감춘 저항의식…詩 본원적 매혹 느껴"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이하석 시인·전동균 시인.(사진 왼쪽부터)
2023.01.02
[2023 영남일보 문학상] 詩 수상 소감 "작품, 삶과 같아 언제나 미완"
거기서부터 여기까지,아득하기엔 아린 나날이어서 먼 듯하지만 가깝고 가까운 듯하지만 먼 거리였다.움켜쥐어도 끝내 잡히지 않는 햇살, 그럼에도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듯.빛살을 엮어 만든 밧줄과 같은 인연의 힘으로 여기에 서 있다.고마움과 미안함은 이따금 동의어로 쓰인다.시를 쓰면서 그림을 생각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시 쓰는 일을 떠올렸다.그렇게 저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며 걸었다.걷는 것은 견디는 것과 닮았다.작품은 삶과 같아서 언제나 미완일 뿐, 오늘의 뿌듯함이 내일의 부끄럼이 되곤 한다.하지만 등 뒤에 있는 시간처럼 이 또한 성근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여기서부터 저기까지,빛나는 밧줄을 길잡이 삼아 환한 저 너머로 다시 걷는다.제 시의 맨 앞에 계신 이용헌 시인님, 박동기 작가님, 고맙습니다.사랑하는 엄마 아버지 어머니 큰모 삼촌 막모, 그리고 브라더 복문.끝으로 제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2023 영남일보 문학상] 詩 당선작 -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한이로(필명) 내 방엔 거울이 하나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나란히 서면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이따금씩거울을 볼 때나를 잊어버리는데나는 잘 있니?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나란히 자전거를 타고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흩어진다반으로 나눠진 마카롱,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붉어지는늦은 오후의 얼굴들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얼굴처럼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반으로 접는다다른그림찾기와같은그림찾기가다른 말로 들리니?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입 꼬리 살짝, 올라간다
[제6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신미나 시인 수상 소감…"소박하지만 진실한 詩 쓰길 다짐 투병 중인 아버지께 기쁜 소식 되길"
"꼿꼿하고, 강직하게 정신의 날을 세우겠습니다."초등학교 입학식 전날, 아버지가 낫으로 연필을 깎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손이 작아서 날도 짧고, 자루도 한 뼘이 안 되는 낫을 썼습니다. 보통 낫보다 날의 두께가 얇아서 풀이나 잔가지를 쳐내기에 알맞은 낫이었지요. 아버지는 숫돌에 물을 끼얹어 가며 낫을 갈았습니다. 낫이 잘 갈렸는지 눈짐작으로 가늠하더니, 필통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연필 깎는 방법은 따로 있었습니다. 왼손으로 낫을 단단히 쥐고, 오른손 엄지로 연필을 살살 밀며, 부드럽게 돌려 깎았습니다. 연필심이 너무 뭉툭하게 깎인 건 아닌지 살펴보고는 후, 하고 흑심 가루를 불기도 했습니다. 필통 안에 가지런히 놓인 연필을 보면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딸을 응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연장이 낫인 것처럼, 저도 연필을 연장 삼아 살아가리란 걸, 아버지는 짐작하셨을까요? 두 번째 시집을 묶으면서 시의 형식과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 어우러진 시를 쓰길 바랐습니다. 화려한 수사로 덧대지 않고, 소박하나마 진실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는 구상 시인이 몸소 보여주신 윤리 의식과 구도의 자세와도 이어져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하고, 글을 쓸 때도 교묘하게 꾸며 쓰는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인의 말씀을 반석 삼아 꼿꼿하고, 강직하게 정신의 날을 세우고 싶습니다. 수상 소감을 쓰면서, 오래전 아버지의 응원을 다시 받은 것 같았습니다. 미욱하고 더딘 걸음을 격려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삶은 고통 속에서도 영롱히 빛나는 신비인 것을. 언어의 고양감에 취하기 전에, 무섭도록 생생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투병 중인 아버지께 기쁜 소식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신미나 시인은 1978년 충남 청양 출생. 2007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등이 있다.
[제6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심사평…"전통적 사유를 현대의 몸에 받아들여, 현실을 생생히 앓아낸 시집"
여덟 분의 시인들이 펴낸 아홉 권의 시집들을 검토해 '제6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의 수상자를 가리는 것이 본심에 주어진 소임이었다. 하나같이 견실한 성취를 보인 노작들을 두고 숙고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한데 녹여 개성적인 목소리로 벼려낸 신미나 시인의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2021)를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신미나의 시적 사고는 세상 가득한 결여와 고통을 응시하고 체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세목들은 아픈 사람들, 죽은 사람들을 비롯해 자본주의 문명과 체계의 야만에 의해 억압받고 신음하는 뭇 생명의 현재에 두루 걸쳐 있다. 화자 스스로가 이 억압의 수난자가 될 때가 적지 않지만, 그의 괴로움이 타자들과의 연관 속에서 생겨나고 그들과의 지난한 대화와 동병상련의 연대 위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향하는 것은 한결같다. 이것이 흔연한 시적 성취를 얻는 것은 물론 정해진 방향이나 분명한 대답을 믿기보다 절실한 헤맴과 모색의 과정을 기록하려 애써서이다. 시를 쓰는 영혼의 상태와 시 쓰기의 방법은 어긋나지 않는다. 신미나는 알려진 데서 해답을 가져오지 않고 제 속의 모르는 곳에서 문제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말한다. 그래서 정황과 세부는 자주 생략되고 말수는 줄어든다. 장소와 시간, 인물과 사물들은 낯설게 조직되고, 행간의 긴장 어린 빈틈들에서 생소한 이미지들이 솟아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알지 못했던 인간의 얼굴들이나 목소리들에 가깝다.신미나 시의 농경적 배경과 체질은 이 시집에서 다른 차원, 즉 토속적 환경에 깃든 속신의 전통과 불교적 사유와 혼융하여 새로운 정신적 경지를 여는 것 같다. 예컨대, 화자는 죽은 할머니를 '마고'할미로, 잃은 '아기'와 '언니'를 운명의 어린 희생자로 변형시켜 설화적이고 무교적인 상상의 무대를 펼친다. 고통의 인간적 처리를 위한 이 무대에서 화자는 현실과 이계 사이의 중계자가 되어 저편의 말을 이편으로, 이편의 사연을 저편으로 전달한다.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에너지로 하여 이 무대는 섬뜩한 꿈과 환상에 젖는가 하면, 온갖 심리적 뒤틀림과 정신적 착란을 동반한 싸움터가 된다. 마고가 '신'으로, 아기와 언니가 생명적 존재 일반으로 확장되는 지점들에서, 화자는 있는 신을 부인하기도 하고 없는 신에 기대기도 하는 것 같다. 이 거짓 없는 혼란은 그러나, 넋두리와 춤사위의 리듬 속에서 구원의 처연한 증표인 사랑을 불러온다. '인간의 믿음'이 '신의 의심'에 우선하는 자리에서 불현듯 '각을 지운 사랑'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라 요약될 터이다.전통적 사유를 현대의 몸에 받아들여 지금 여기의 현실을 생생히 앓아낸 데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 신미나 시인이 현실과 현실 너머를 엄하게 거두어 더 깊은 곳으로 길을 내길 바라게 된다. 수상을 축하드린다.지난해 12월19일 영남일보 회의실에서 열린 제6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본심에서 심사위원들(왼쪽부터 이영광·김사인 시인, 정과리 문학평론가)이 수상작 선정을 위해 논의하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제6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수상작 - 신미나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2021.3)
복숭아가 있는 정물그대라는 자연 앞에서내 사랑은 단순해요 금강에서 비원까지 차례로 수국이 켜지던 날도 홍수를 타고 불이 떠내려가던 여름신 없는 신앙을 모시듯이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죽어가며 슬어놓은 알 끝으로부터 시작이말려들어갑니다이영륭 作
[2022 영남일보 문학상] 詩 당선작 -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이지현 作
2022.01.03
[2022 영남일보 문학상] 詩 심사평 -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외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외 16편,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외 3편,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외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도)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손진은 시인·안상학 시인.(사진 왼쪽부터)
[2022 영남일보 문학상] 詩 수상 소감 - 손연후씨 "슬픔 가득한 계절 속 상냥한 등불같은 시 쓰고파"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손연후씨
[2022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심사평 "사라져가는 존재들에 내민 연민의 손길 신뢰감"
투고 편수가 예년보다 줄었다. 길어지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창작 활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비일상적인 상황이 창작을 위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투고작들에서 웃음 코드가 거의 실종된 것이며, 자극적인 소재와 극적 서사가 두드러지는 경향을 볼 때 비일상성이 준 영향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본심에 오른 여덟 편의 소설 중에 우리가 주목한 소설은 모두 네 편이었다.'포틀랜드 여자'는 폭력, 마약, 살인에 노출된 문제적 인물을 통해 정의에 대한 묵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파지'는 도서관 창작교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들의 초상을 통해 원고가 '파지'로 전락한 현실의 냉혹한 이면을 살피고 있다.마지막까지 우리의 손에 남은 작품은 '닥터 백'과 '블랙 잭나이프'였다. '닥터 백'은 호주의 타로하우스에서 인연이 얽힌 한국 젊은이들의 삶을 원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경제적 난민이나 다름없는 처지다. 이 소설은 '타로'라는 소재를 통해 각자의 내력을 당기는 구성력이 돋보인다. 삶의 영속성에 대한 의문과 부정은 '이방의 도시'와 '타로'라는 소재주의를 뛰어넘는다.'블랙 잭나이프'는 딸이 찾아 나선 아버지의 유품이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간병하던 딸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와 죄책감과 미안함에 시달린다. 잭나이프를 잃어버린 집에 잠입해 하루를 머물며 목격하는 주인집 여자의 비밀스러운 내력은 부녀의 삶과 겹친다. 이 소설은 인물이 가진 죄책감에 잠식당하지 않고 서사를 세우면서 흡인력을 높이고 있다. '잭나이프'라는 물건이 인물의 행동을 추동한다는 설정이라든가 주인 여자의 내력을 대화에 의존해 전달하는 점이 다소 거슬리기는 했지만 일단 상황 설정 후에 서사를 직조하고, 삽화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솜씨는 믿음직했다.선자들은 오랜 논의 끝에 '블랙 잭나이프'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이 가진 울림이 상대적으로 컸으며, 특히 사라지거나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향해 내미는 연민의 손길이 호들갑스럽지 않고 미약하여 오히려 신뢰감을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드린다. 나아가 삶과 맞서는 글쓰기를 통해 어두운 시대를 묵묵히 건너고 있는 모든 투고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함께 전한다.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더 미루기 힘들어"…계명대·영남대 의대, 13일부터 임상실습 수업
대구경북권 의대 신입생 중 '지역 학생' 인원 현재보다 2배 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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