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8] 이여성(上)…민족해방·조국 통일위해 선각자로 파란만장 삶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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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2 08:05  |  수정 2021-04-22 15:15  |  발행일 2021-04-12 제20면
부모 땅 몰래 팔아 큰돈 들고 17세 나이에 만주 독립운동기지 설립 시도…대구서 혜성단 창단도
30대땐 언론인으로 식민통치 허구성 폭로 힘쓰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쫓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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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 '무제(연도미상)' 28x36, 비단에 채색. <대구미술관 소장>

이여성(李如星·1901~?)은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화가, 역사학자, 미술사가, 평론가, 사회주의 이론가, 체육인(역도) 등 근대 시기 여러 방면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월북화가 이쾌대의 친형이기도 한 그는 1958년 북한에서 숙청될 때까지 민족해방운동과 통일 조국 달성을 위해 선각자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여성의 출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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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뒷줄 가운데 부부가 이여성·박경희이며, 앞줄 가운데 부부가 동생 이쾌대와 그의 부인 유갑봉이다. <이쾌대의 책>
이여성

이여성의 출생지에 관해선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 수성구 지산동 498), 중구 계산동,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49 등 세 곳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용균 고려대 연구교수는 대구를 출생지로 보고 있다.

이여성은 1901년 창원현감을 지낸 만석꾼 이경옥과 윤정렬의 2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로 대지주였다.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개화사상을 수용했다. 이여성은 8세 때 서울로 가 보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4학년(16세) 때 동맹휴학을 주도해 일제에 저항하다 자퇴하고 중앙학교로 편입했다. 이때 중앙학교 동기생인 평생 동지 김원봉·김두전을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된다. 독립지사인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가 이때 셋에게 각각 '조국 산천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산과 같이(若山)' '물과 같이(若水)' '별과 같이(如星)'라는 호를 지어줬다고 알려진다.

셋은 김약수와 같은 부산 동래 출신인 연안파 김두봉과 함께 해방공간 후 월북, 북한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6·25전쟁 책임 및 종파주의 활동 죄목으로 김일성에 의해 거의 동시에 권력에서 축출됐다. 이즈음 이여성은 같은 대구출신 월북화가이며 미술평론 및 미술사학자인 김용준(전 서울대 미대 학장)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는다.

이여성의 청소년시절은 조국독립을 향한 질풍노도의 시기다. 17세 때 부모 몰래 토지를 팔아 거금 6만원(일제기록 4만5천원)을 마련, 김원봉·김약수와 함께 중국 난징으로 가 금릉(金陵)대학(현 난징대)에 입학한다. 그 돈으로 만주 길림 신장에 둔전병제를 본뜬 무장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고등학생 나이에 지금의 수 백억원이나 되는 독립자금을 들고 만주로 가 제2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이보다 1년 앞선 1917년 21세 대구 청년 이종암도 은행 돈 1만900원을 빼돌려 의열단 창단자금으로 쓴다.

이여성은 그러나 국내에서 벌어진 3·1운동으로 독립기지 건설의 뜻을 접고 대구로 왔다. 대구3·8독립만세운동 후 최재화·김수길·이영식·이덕생 등과 독립단체인 혜성단을 조직해 대구에서 악덕 관리들에게는 '암살 경고'를, 민족자본가들에게는 '독립운동자금 요구'를 하는 강력한 반일투쟁을 펼치다 발각됐다. 이에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여성은 출소 후 22세 때 일본으로 유학 가 이듬해 릿쿄대 예과에 입학한다. 그는 김약수와 문경출신 박열 등이 주도한 흑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아나키즘과 결별하고, 김약수와 함께 북성회를 만들어 기관지 '척후대'를 발행한다. 이후 김약수·안광천 등과 일월회를 창립해 '사상운동'과 '대중신문'을 창간하는 등 간부로서 활동하며 민족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이여성은 1923년 7~8월 재도쿄조선유학생 학우회 순회강연회 연사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대구에서 또다시 기소됐으나 풀려났다. 25년 릿쿄대 예과를 졸업하고 상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일본 경찰의 요주의 불령선인으로 분류돼 퇴학당한다.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저항한 이유에서다. 그는 더 이상 일본에서의 장기체류가 어려워지자 26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여기서 일본 유학시절 열애에 빠졌던 성악가 박경희와 신접살림을 차리고 매제인 사회주의독립운동가 김세용(대구고보 퇴학-경성의전-모스크바대 수학)과 함께 생활한다. 이후에도 이여성은 김세용과 사상적 인연을 이어간다.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이여성은 3년간 중국생활을 하면서 민족운동의 방법을 모색하던 중 언론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의 30대는 언론인으로서 역할이 뚜렷하다. 29년 말 귀국한 이여성은 이듬해 1월부터 서울에서 김세용과 함께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한다. 그해 봄 사회부장으로 승진했지만, 기자동맹 사건으로 사회부장에서 조사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32년 조선일보사를 퇴사할 때까지 조사부장으로 일했다. 안재홍·홍명희·문일평 등과 함께 사설을 썼고, 유대인과 터키·베트남·필리핀·아일랜드 등 약소 민족운동 연구에 힘쓰며 지면에 연재했다. 특히 베트남민족 운동에 관해선 9회에 걸쳐 시리즈를 이어갔다.

이 밖에 조선·동아일보 조사부장 재직 기간인 31년부터 35년까지 김세용과 함께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전 5집)를 출간했다. 이 책은 농업, 공업, 상업, 정치, 법률, 교육, 농민, 노동자 등 일제 식민통치 전 영역에서의 조선총독부 통계자료가 조선인을 수탈하기 위한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조선의 실제 사정을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조선인들이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여성은 각 분야의 통계를 분석하고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조선, 재조선 일본인과 식민지조선인의 통계 수치를 비교해 각 부분에서 조선의 열악한 처지를 증명했으며, 식민통치의 허구성과 조선과 조선인의 궁핍과 고난을 실증했다. 일제강점기 차별정책을 통계적으로 비판한 이 연구서는 우리나라 출판물 중 최초로 끝에 색인을 실은 역작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여성의 현장 취재 경력은 적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7월4일 만주로 파견됐다. 그는 당시 '국자가'로 불리던 조선인 집거지 중국 연길(현 옌지시)에서 '국자가(局子街)의 밤'이라는 시를 써 후일 동아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여성은 32년 말 조선일보를 떠나 동아일보로 직장을 옮겨 사설을 쓰고 숫자조선연구 연재를 이어갔다. 이듬해 조선경제학회를 창립, 재무간사와 조사위원회 상무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조사부장으로서 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제패 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퇴직했다. 당시 조사부의 청전 이상범 화백과 대구출신 빙허 현진건 사회부장은 구속됐다. 이상범은 이여성과 2인전을 열기도 했으나 이상범은 현진건, 이여성과 달리 후일 '매일신보'에 일제의 징병제를 축하하는 삽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을 그려 친일미술인으로 오명을 덮어쓰게 된다.

이여성
1945년 8월16일 홍수 피해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이상백·여운형·이여성. <몽양기념사업회 제공>

◆해방공간에서의 정치활동

이여성은 몽양 여운형의 중도좌파적 정치 행보와 궤적을 같이한다. 1935년 동아일보 재직 시 '숫자조선연구'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 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의 발기인 10명 중 한 명이 여운형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1944년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결성했을 때 함께했다. 이여성과 여운형의 개인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다만, 둘은 언론에 종사했고 체육활동에 열심이었다.

광복 후 이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당, 민주주의 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의 중앙 간부로 활동했다. 이때 대구출신 이상화 시인의 동생 이상백도 함께한다. 이여성은 민족연합전선운동을 통한 건국을 원했으나 실패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휴회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은 좌우합작과 삼당 합당운동을 전개했으나 인민당은 좌우파로 분열되었다. 이여성은 인민당 우파로서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을 창당해 제2차 미소공위에 대응했다.

이여성은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한 뒤 체포됐으나 풀려났다. 그는 남한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느끼고, 1948년 초 가족에 "분실한 역사화를 찾기 위해 북으로 간다"고 말하고 월북했다. 그해 8월 해주에서 남북한 요인 57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서열 77위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이후 북에선 정치적 활동을 접고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하면서 한민족의 복식 및 미술사 연구에 매진한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대구광역시

▨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대구미술협회),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지부), 신용균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 박사학위 논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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