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표절보다 더 무서운 자기 복제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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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2   |  발행일 2021-11-22 제27면   |  수정 2021-11-2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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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논설위원

대구에서 꽤 유명한 한 화가가 몇 년째 같은 고민에 빠져 있다. 화풍을 바꾸고 싶은데 아직 변화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20년 넘게 같은 그림을 그리는 데 지쳐 있다. 그의 그림이 인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작가는 작업할 때마다 창작보단 반복적인 노동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새로운 화풍을 찾기 위한 지난한 그의 시도는 언제 끝날지 모른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을 본 뒤의 감동을 잊지 못해 그의 다른 영화 '키스 오브 드래곤'을 보고 느꼈던 실망감이 문득 떠올랐다. 범죄 드라마였지만, 신선했던 레옹을 생각하며 봤던 키스 오브 드래곤에서 내 기대는 처참히 깨졌다. 무대와 출연진만 바뀌었을 뿐 레옹의 재탕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유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한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영화적 재미의 단순 재생산에만 집착하는 영화기술자'의 흔적만 가득했다. 한편으론 이해할 만도 했다. 유명한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마저 '똑같은 작품을 400곡이나 쓴 자기 곡을 표절한 작곡가(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작곡가)'란 혹평을 받았는데 자본주의 논리로 돌아가는 영화계에서 자신의 흥행작을 재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바야흐로 미술시장이 활황기에 접어들었다. 갈 곳 없는 막대한 자금이 미술시장에 몰리면서 그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최근 열린 대구아트페어에서도 사상 최대 매출(98억원) 기록을 세웠다. 코로나19 사태로 꽁꽁 얼어붙은 미술시장에 봄바람이 불고 있다니 다행이다. 그래서 더 두렵기도 하다. 잘 팔리기 때문에 더 많은 자기복제를 할 수밖에 없는 화가의 고민이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는 족족 팔리는데 어떻게 다른 시도를 하겠는가. 시간적 여유가 없고, 컬렉터도 세상에 잘 알려진 화풍의 그림을 좋아한다.

예술계에서 잊을 만하면 터지는 이슈 중 하나가 표절이다. 표절은 그림 등을 그릴 때 남의 작품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를 가리킨다. 타인의 작품을 베끼되 출처를 밝히는 모방과는 다르다. 예술은 흔히 모방으로 시작되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만들어간다. 모방을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는 이유다. 고흐가 평생 존경했던 밀레의 작품을 모방해 그린 것은 유명하다. 모방으로 시작하는 타인 복제가 시발점이 돼 자신의 독창성을 만드는 게 예술이다 보니 표절이나 자기복제에 빠지기 쉽다. 둘 다 위험하나 표절보다 더 위험한 게 자기 복제다. 표절은 외부 제재가 가해질 수 있지만 자기복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컬렉터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는 미술시장에서 자기복제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빠져나오긴 어렵다. 지역화단만 보더라도 변화 없이 한 화풍을 수십 년째 고집하는 화가가 허다하다.

타인보다 자신과 싸움이 더 힘든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이김으로써 한층 성숙해진다.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은 단순히 보이는 결과물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삶·철학 등이 모두 예술의 가치가 된다. 그래서 결과물이 빈약하더라도 예술가의 연구·시도는 존중받는다. 벽지보다 못한 그림이란 비아냥을 받았던 모네의 '인상-해돋이', 소변기를 내놨다며 전시조차 거부당했던 뒤샹의 '샘'만 해도 그렇다. 표절을 넘어서 자기복제를 끊어내려는 작가의 고민에 손뼉을 쳐주고 싶은 이유다. "작품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다른 그림을 그릴 때가 된 것"이라는 한 원로 화가의 말이 답이다.
김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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