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영호남 상생 서화 연대기(3) 전라도의 서예… 일본서 세한도 찾아온 손재형, '서예'라는 용어 만들고 中·日과 차별화

  •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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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6   |  발행일 2021-11-26 제35면   |  수정 2021-11-26 09:05
창암이 동국진체 완성 후
손재형·송성용이 꽃피워
중앙 서단과 어깨 나란히
남도는 그림, 북도는 서예
세계서예비엔날레서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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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한 공재 윤두서(1668~1715)와 유배 온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의해 전라도를 중심으로 '동국진체' 서예가 꽃을 피워 전주의 창암 이삼만(1770~1847)에 이르러 만개할 무렵, 서울에서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완당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처럼 전라도는 진즉부터 서울 중심의 중앙 서단에 필적할 만한 지방 서단을 형성한 지역이다.

김병기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대륙에 청나라가 들어선 후, 조선 사대부들이 조선의 문화가 중원의 문화보다 우위라는 생각을 하면서 조선의 산하와 풍속을 그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고, 조선백자와 한글 소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서예도 옥동 이서(1662~1723)가 동국진체를 주창하고 나섰는데 이 동국진체를 전라도로 이끌고 들어온 인물이 윤두서이다. 이후 나주에서 일어난 영조 비판 벽서(壁書·대자보)사건에 연루되어 이광사가 전남 신지도에서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동국진체의 꽃을 피운다. 이런 이광사의 영향 위에 독자적인 창의력을 더하여 동국진체를 완성한 인물이 이삼만이다. 이삼만은 까칠한 해·행서와 물 흐르는 듯이 유려한 '유수체(流水體)' 초서 등 조선인의 고유 민족 미감이 담긴 서체를 창조하였으나 중앙 서단의 완당 바람으로 인해 크게 기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전주 풍남문 북편의 현판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을 쓴 서홍순(1798~?)과 대구사람으로서 전주에 와서 이삼만으로부터 글씨를 배운 서석지(1826~1906) 등에 의해 그 서맥이 이어졌다.

조선 말기로부터 항일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전라북도 김제에서는 특이한 문화현상이 일어났다. 이정직(1841~1910), 조주승(1854~1903), 박규환(1868~1916), 조기석(1876~1935), 송기면(1881~1956), 최규상(1891~1956), 강동희(1886~1963), 유영완(1892~1953), 송수용(1906~1946) 등 기라성 같은 서예가들이 다 김제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당시 전북에서는 이순재(1869~1943), 유재호(1870~1953), 송태회(1872~1941), 박호병(1878~1942), 이광열(1885~1966), 김정회(1903~1970) 등이 활동했다. 이 시기에 남도에서는 송운회(1874~1965), 구철우(1905~1989), 안규동(1907~1987) 외에 특별히 활약한 서예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허백련(1891~1977)은 고격의 남종 문인화와 함께 독특한 서풍을 이뤄 남도의 서예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허건(1907~1987) 또한 문인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이때부터 '남도는 그림, 북도는 서예'라는 인식이 싹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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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명 이상의 지역 서예인을 배출하며 '봉강서계'를 만든 소헌 김만호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 명사급 서예인 25명이 휘호를 보내온 걸 한데 모아 만든 송수병(頌壽屛). 호남의 경우 의재 허백련, 강암 송성용, 남농 허건, 송곡 안규동이 휘호를 보내와 영호남 서화교류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었다. <소헌미술관 제공>


광복 이후 전라도는 남도의 소전 손재형과 북도의 강암 송성용을 배출함으로써 중앙서단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세한도'를 일본으로부터 찾아온 일로 유명한 손재형은 광복 후 우리의 서화 진흥을 위해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의 강령에서 처음으로 '서예'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본의 '서도', 중국의 '서법'과 다른 우리만의 용어를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서예 종목을 포함 시키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운영과 심사를 맡아 우리나라 서예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독특한 '소전체'를 창안하여 한국 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격조 높은 문인화를 창작하여 전북의 송성용과 함께 광복 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도태되다시피 한 문인화의 정맥을 이어 후대에 전했다.

강암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5체를 다 잘 썼고, 사군자는 물론 연, 소나무, 파초에 이르기까지 격조 높은 문인화를 모두 잘 그렸는데 특히 묵죽은 중국이나 일본, 대만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고 있다. 손재형, 김기승, 유희강, 송성용, 김충현, 김응현 등을 광복 후 한국서단의 6대가로 친다면 작품의 다양성과 영역의 광범위함에 있어서는 단연 송성용이 으뜸이다. 동아시아 전체 서단에서도 오창석(吳昌碩)과 제백석(齊白石) 이후 송성용만큼 서예와 문인화에 정통한 서예가는 없다. 송성용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어 한문으로 쓴 유고집을 남겼는데 이 점도 종전 후 동아시아 서예가 중에 보기 드문 일이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강암서예학술재단을 만들고, 강암서예관을 건립한 것도 선례가 없는 업적이다. 동국진체 이후, 손재형과 송성용에 의해 새로운 꽃을 피운 전라도의 서예는 1997년에 창립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와 함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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