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또 속아줘야 하나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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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06   |  발행일 2022-01-06 제23면   |  수정 2022-01-0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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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중부지역본부장

이른바 '정치어(政治語)'라는 게 있다고 한다. 뭔가를 면피하려는 언어구사법이다. 정치인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라는 말은 '안된다'는 얘기다.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100% 안된다', '함께 노력하자'는 '절대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지난해 한 방송에서 '정치어'를 번역해주겠다며 소개한 한 토막이다. 그는 여기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빈말이었다. 요즘 매일같이 '적극 공감·검토·도입·추진'이란 워딩을 쏟아내고 있는 그다. '정치어'의 속뜻을 진즉 알았다면 5년 전 그날(5월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의 레토릭도 단번에 간파했을 텐데….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약속한 것은 대략 서른 가지. 그 많은 약속 가운데 '국민과의 소통' '능력·적재적소 인사'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 이 세 가지가 각별했다. 안타깝게도 그 약속과 희망은 재임 내내 허언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약속 대부분이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지켜진 것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다. 이 개그 아닌 개그 같은 얘기가 문 대통령 취임사의 실체가 됐다. 부정적 학습효과일까. 앞으론 대통령 취임사를 곧이 곧대로 믿고 싶지 않다. 누가 당선되든지 간에 '2022년 5월10일 취임사'에 거는 기대감이 사라졌다. 이른바 '유력 후보'인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렇다.

둘 다 실망감을 넘어 환멸감이다. 이 후보는 툭하면 말을 바꾸고 잡아떼서다. 특히 부동산 정책에 대해선 조변석개하듯 말바꾸기를 서슴지 않았다. 표심에 눈이 먼 듯 '전두환 성과' '박근혜 사면' 'K 방역' 등에 대해선 대놓고 말을 뒤집었다. 그가 만약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것도 하겠다, 저것도 하겠다'고 한다면 공감이 갈까. 글쎄, 그의 워딩은 왠지 의심스럽다. 윤 후보는 '윤석열도 다를 게 없구나'다. 여전히 숙지지 않는 '부인 허위 경력 논란'과 석연치 않은 대처를 놓고서다. '국민이 불러서 출마했다'고 한 이라면 적어도 출마 전에 '가족의 불공정·비상식 리스크'를 해결했어야 옳았다. 트레이드 마크인 '공정과 상식'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들어도 싸다. 그가 만약 대통령 취임사에서 또다시 '공정과 상식'을 외친다면 공감이 갈까. 글쎄, 지금은 반신반의다.

대선을 지켜보는 마음이 이렇게 신산한 적이 없다. 세론(世論)처럼 '최악(最惡) 중 차악(次惡)을 뽑아야 한다'니…. 비호감·네거티브 홍수 속에서 '축제'도 열리기 전 피로감만 쌓인다. 상대 흠집내기에 몰입 중인 여야 진영 모두에 신뢰를 줄 수 없다. 신뢰를 잃은 후보의 '기계적 약속'은 공허하고 식상할 뿐이다.

대선도 열리기전 뜬금없이 '취임사' 썰을 풀었다. '막장 대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유력 후보들에게 경고로 닿았으면 해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간에 이번 취임사만큼은 추상적 단어로 포장하지 않길 바란다. '공정' '정의' '상식' '희망' '미래' '소통' '약속' '탕평' 등은 이제 듣기 거북하다. 국민은 막연한 '장밋빛 취임사'를 더는 원하지 않는다. 또 속아줘야 할 만큼 너그럽지 않다. 대신 분명한 '시대정신'을 담으라. 과거 DJ 취임사를 관통한 주제가 'IMF 극복', MB가 '경제 발전'이었듯이 차기 대통령 취임사는 '코로나 위기 극복과 경제 부흥'에 방점을 찍으면 설득력이 있겠다. 공교롭게도 이 후보가 지난 4일 신년회견을 과거 DJ가 'IMF 종식'을 선언한 곳에서 열었다. 얄미울 만큼 재바르고 센스있다. 당 내홍을 겪고 있는 윤 후보로선 통탄할 1패다.
이창호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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