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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살로메 소설가 |
몇 년 전 독서회 한 회원의 고백이 떠오른다. 70대였던 그분은 조심스레 앞으로 모임에 나올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 문득 살아온 삶보다 남은 삶이 짧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밀려오더란다. 시간이 너무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져 주변 정리부터 하게 되더란다. 덜 중요한 순서대로 벌인 일들을 거두고 삶을 단순화하게 되더란다. 눈은 침침해지고 기운도 달리는데 욕심 때문에 모임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더란다. 남은 시간은 오롯이 당신 자신에게 집중하겠다고 했다.
그분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도 컸지만, 그때의 나는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는 어떤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그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남은 시간의 활용에 절박함을 느끼고, 그 시간의 주체적 향유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나는 노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분들이 얼마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또한 아껴 쓰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깊이 사색할 줄도 몰랐다.
이제야 그때의 그분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아직 '늙음'이란 신호와 한참 거리가 있지만, 어느 날부터 시간이 몇 배나 빨리 흐른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남은 삶이 귀해 보이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 같은 게 생기는 것이었다.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생활 패턴을 단순화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어졌다. 주변에 휩쓸리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맘 깊이 요청하게 된다.
인간의 한살이는 여타 동물에 비해 비교적 긴 시간을 자랑한다. 하지만 인간 자체의 욕망 주기를 생각하면 결코 만족할 만한 수명은 아니다. 너무 짧은 생이기에 스스로에게 집중한다는 말은 헛된 시간을 줄인다는 말과 같다. 달아나는 시간에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가장 빛나는 시절"이란 표현 대신 "가장 빛나는 날"을 강조했다. 느긋하고 태평하게 한 달을 지나고 한 해를 보낼 수 없다.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때 그랬었지. 앞으로 좋은 때가 있겠지. 이런 생각은 무소용하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세네카의 이 말은 '카르페 디엠'과는 사뭇 다르다. 카르페 디엠이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에 방점을 둔다면, 세네카의 저 말은 오늘도 '최선을 다해라'라는 쪽에 강조점이 있다. 고루해 보인다고 핀잔을 들을지언정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이란, 즐기는 쪽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쪽이어야 한다.
유한한 삶, 정해진 시간 속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순간은 많지 않다.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건 남은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이다. 저축처럼 남아 있는 시간이지만 그 저축은 약속된 기한 없이 언제든지 소멸 가능하다. 사라지기 전에 충실하게 쓸 수밖에 없다.
타인을 위한 삶이나 타자의 방식을 의식하는 하루는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하물며 세네카도 나 자신이 아닌 타자를 위해 분주한 삶은 가련하다고 하였다. 남의 눈빛에 조종당하고, 남의 행보에 휘둘리는 삶이야말로 무의미한 삶이다. 평판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하루를 생각한다. 타인이 만든 울타리를 넘보느라 내 꽃밭을 망가뜨리고 운 날이 몇이던가. 남의 잣대에 들기 위해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헤맨 날이 몇이던가. 몇천 년 전의 철학자를 빌려 스스로에게 묻는 하루이다.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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