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직구 핵직구] 싸우는 낙천주의자

  •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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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05  |  수정 2023-07-05 07:02  |  발행일 2023-07-05 제27면

[돌직구 핵직구] 싸우는 낙천주의자
이재동 변호사

고등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배운 영어 단어가 'optimism(낙관주의)'와 'pessimism(비관주의)'였다. 영영(英英)사전에서는 낙관주의를 사물의 밝은 면(bright side)을, 비관주의는 어두운 면(dark side)을 보는 태도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낙천주의자라고 하면 늘 세상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믿고 느긋하게 행동하는 성격 좋은 사람이 떠오르지만 한편으로는 미래의 어려운 일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고 게으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작고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관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대담에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또한 그러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모두가 '호전적인 낙관주의자(belligerent optimist)'가 되어야 한다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

이 대담 당시는 트럼프 행정부 시대로 미국이 1960년대 이후 이루어 온 많은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가치들이 퇴행되던 암울한 시기였다. 민주당 정권으로 바뀐 지금도 트럼프가 임명한 극보수적인 대법관들이 대법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종래 여성이나 소수인종, 사회적 약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판례들을 뒤엎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긴즈버그가 애써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낙관주의가 더 나은 세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소극적이거나 종교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세상을 다시 과거로 되돌리려는 회고적이고 퇴행적인 세력의 시도에 맞서 싸우는 낙관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싸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일어난다. 시인 김수영은 4·19혁명 직후에 쓴 시에서, 민주주의의 적은 선량한 얼굴을 하고 늘 우리 곁에 있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보이지 않으며, 쉬지 않으며, 멋지지 않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어서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고 노래하였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가 배경이었던 영화 '변호인'에서 세금 전문 변호사로서 안온하게 살아가던 주인공이 어느 날 단골 국밥집 대학생 아들이 시국사범으로 고문당하여 생긴 상처를 보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가난해서 대학도 못 간 주인공이 좋은 머리로 변호사가 되어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막연히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가 문득 법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깨우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루어 내었던 유례없는 정치적 사회적 발전들이 지난 1년 동안 후퇴하고 있다. 더 문제인 것은 임기 초반인 데다가 검찰권까지 장악한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언론이나 야당이나 무기력하기만 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존과 이익에만 골몰하여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는 민주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우울한 시간이어서 낙천주의라는 알약이 필요한 때이지만 그 낙천주의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의 백일몽이 아니라 지금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분연히 외치는 낙천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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