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태의 제3의 눈] 캄보디아 훈 센 총리 '권력 대물림 공작' 마무리

  • 정문태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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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05 08:56  |  수정 2023-07-05 08:57  |  발행일 2023-07-05 제24면
'독재자 만의 평화' 날개 펴다
1985년 33세 세계 최연소 총리에
올해로 38년째 최장기 권좌 기록
제1야당 해산시켜 독점의회 구축
무늬만 다당제 '훈센式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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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센 캄보디아 총리가 지난 1일 프놈펜에서 열린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 총선 집회에서 비둘기를 날리고 있다. 캄보디아 총선은 오는 23일 실시된다. 연합뉴스

'삼덱 아꼬 모하 쎄니아 바떼이 떼쪼 훈 센', 이걸 우리말로 풀면 '총리 겸 군 최고사령관 훈 센 나리'쯤 될 법. 여기서 '삼덱'에 어울리는 우리말이 없어 '나리'로 썼지만, 사실은 캄보디아 국왕이 나라에 중요한 일을 한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 같은 이들한테 내리는 최고 경칭이다. 으레 캄보디아 총리 훈 센을 일컫는 공식 호칭이고.

2016년 꼭 이맘때였다. 캄보디아 정치판을 취재하던 내게 총리실 공보관이 "우리 언론처럼 외신도 총리 이름 앞에 공식 호칭 삼덱을 붙여 달라"고 닦달했다. 공보부가 막 자국 언론에 '훈 센 총리 공식호칭 사용' 명령을 내린 뒤였다. 거북함을 느낀 현지 기자들이 수군대자 훈 센 총리가 나서 "기자들이 (공식호칭) 쓰기 싫다면 필요 없다. 다만 기자들은 윤리 강령을 존중해야 한다"며 얄궂게 되박았다.

"쓰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게 더 무서운 말이다. 정부가 총리 호칭까지 명령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도뉴스' 프놈펜 지국 기자 뿌이 끼어 같은 이들이 웅성댔으나 현실은 딱 거기까지였다. 말이 되든 말든, 주눅 든 캄보디아 언론은 여태 이 공식 호칭을 써왔다. 참고로 국경없는기자회(RSF)가 해마다 내놓은 언론자유지표에서 캄보디아는 180개국 가운데 늘 140~150위 언저리였다. 삼덱 훈 센이 쥐락펴락해온 캄보디아, 압제사회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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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열린 총선 집회에서 훈 센(뒷줄 왼쪽) 총리가 장남 훈 마넷(뒷줄 오른쪽)에게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 깃발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훈 센이 7월23일 총선을 앞두고 다시 외신판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훈 센'은 내가 기자로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입에 올린 이름이 아닌가 싶다. 30년 넘도록 아시아 정치판을 취재하면서 변함없이 불러온 이름이다.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의 괴뢰정부 시절인 1985년 서른셋에 세계 최연소 총리가 되어 올해로 38년째 세계 최장기 총리 기록을 이어가는 훈 센이고 보니.

그사이 나는 훈 센과 4번 단독인터뷰를 하며 제법 인연을 쌓았다. 가장 기억에 박힌 건 1997년 당시 제2 총리였던 훈 센이 쿠데타로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를 몰아내고 꼭 1주일 뒤 마주 앉았던 인터뷰다.

"이보게. 내 나이 이제 마흔다섯이다. 은퇴하고 쉬라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나는 인민이 원할 때까지 캄보디아를 위해 일할 생각이다." 이미 12년째 총리를 해온 훈 센이 되받아친 말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훈 센이 영구집권을 노린다는 낌새를 챈 자리였다.

CAMBODIA-POLITICS
훈 센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이 지난 1일 프놈펜에서 총선을 앞두고 열린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집회에서 유세를 지켜보고 있다. 훈 마넷은 육군대장으로 캄보디아군 부사령관과 캄보디아인민당 상임위원을 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일흔인 훈 센은 그 영구집권 꿈을 이룬 셈이고 이제 권력의 대물림을 향해 가고 있다. 바로 이번 7월23일 캄보디아 총선의 고갱이다. 그리고 이 총선의 결과는 볼 것도 없다.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의 하원 125석 싹쓸이로 결판났다. 새로울 것도 없다. 훈 센은 제1 야당이었던 캄보디아구국당(CNRP)을 해산시키고 의장 껌 소카를 정부 전복 혐의로 불법 구금한 채 치른 2018년 총선에서 125석 독점의회를 구축했으니. 다른 말로 훈 센의 전체주의 정치가 이미 작동해왔다는 뜻이다.

이번 총선은 그 2018년의 되박이판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22%를 차지한 캄보디아구국당 후신인 촛불당(CLP)이 지난 5월 말 해산당해 캄보디아인민당은 또 야당 없는 선거판을 실현했다. 캄보디아인민당을 제외하고 이번 총선에 참여한 17개 정당은 모두 실질적인 선거운동 불능 조직이거나 훈 센에 빌붙은 곁다리들이고 보니.

캄보디아인민당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힌 촛불당이 꺼진 이번 총선은 무늬만 다당제 선거일 뿐이다. 지난 5월1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 등록 문서의 사본을 첨부하지 않은 촛불당의 총선 참여 신청을 거부했다"고 밝힌 데 이어, 5월25일 헌법위원회 의장이자 캄보디아인민당 중앙위원인 임춘림이 "촛불당의 항소는 불법, 위법임으로 기각했다. 이건 최종 결정이고 더 이상 항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촛불당은 "정당 등록 원본을 정부의 2017년 캄보디아구국당 본부 공격 때 잃어버렸다"고 외쳤으나 먹히지 않았다. 훈 센은 "정당 등록증을 잃어버렸다는 걸 안 믿는다. 추측건대, 질 게 뻔한 사실을 아는 그들은 총선 참여를 원치 않았다. 대신 그들이 진짜 바라는 건 외세가 캄보디아 정치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며 되레 촛불당과 외세를 싸잡아 나무랐다. 그게 끝이었다. 으레, 지난해 지방선거 때는 촛불당의 문서를 아무도 꼬투리 안 잡았다. 이번 총선을 앞둔 훈 센의 정치적 공작이란 뜻이다. 7월1일, 970만 유권자를 향해 공식적인 선거운동 막이 올랐지만 정작 시민사회가 떨떠름한 까닭이다.

"누군들 흥이 나겠냐? 찍을 데도 없고 결과도 뻔한데. 지난 30년 동안 제대로 된 선거도 없었지만 이번은 그야말로 최악 가운데 최악이다." 프놈펜에서 인권운동가로 일해 온 내 친구 아운 끼엇은 이번 총선을 "자유도 공정도 없는 선거, 허울뿐인 민주주의로 포장한 권력 대물림의 출정식"으로 규정했다.

이번 총선 싹쓸이를 통한 훈 센의 권력 대물림 야심은 "앞으로 두 임기(2028년까지)를 더 하고 총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지 2018년 총선 때 이미 드러났다. 그로부터 훈 센은 틈날 때마다 장남 훈 마넷을 '차기'로 입에 올리며 주요 직책을 맡겼다. 그러더니 2021년 12월 공식적으로 훈 마넷을 후계자로 선언했다.

올해 마흔다섯 살 훈 마넷은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거쳐 영국 브리스톨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현재 육군대장으로 캄보디아군 부사령관과 캄보디아인민당 상임위원을 겸하고 있다. 말하자면 훈 센의 뒤를 이어 벌써 군권과 정권의 정점에 오른 셈이다. 훈 마넷은 하원의원 가운데 총리를 뽑도록 명시한 헌법에 따라 이번 총선에서 프놈펜 지역구에 출마했다. 차기를 향한 총총걸음으로.

앞서 훈 센은 훈 마넷으로 대물림을 위한 중대한 발판을 깔았다. 캄보디아인민당이 100% 의석을 지닌 하원은 총선 한 달을 앞둔 지난 6월23일 만장일치로 새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총선을 비롯한 모든 선거의 입후보자는 반드시 최소 두 번 직전 투표에 참여해야만 자격이 있다고 못 박았다. 2028년 권력 대물림을 노린 훈 센의 야당 제거용 법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훈 센의 정적인 삼 랭시를 비롯한 캄보디아구국당 지도자들이 해외 망명 중이거나 투옥 상태인 현실이 그 증거다. 새 선거법에 따르면 이번에 투표할 수 없는 훈 센의 정적들은 2028년 총선 입후보가 불가능하다. 손 안 대고 코 풀기, 이제 '체포' '구금' '정당 해산' 같은 전통적인 훈 센식 선거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셈이다.

이렇게 2018년에 이어 올 총선뿐 아니라 2028년 총선까지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의 하원 싹쓸이가 결정되었다. 훈 센의 정치 공작은 모두 끝났다. 영구집권에 이은 권력 대물림에 남은 건 시간문제다. 이르면 내년 2024년 상원의원 선거 뒤가 될 수도 있고, 늦어도 2028년 언저리쯤에는 아버지 훈 센의 후광을 업은 훈 마넷이라는 이름이 캄보디아를 쥐고 흔들 수도.

돈과 인력이 넘쳐나는 캄보디아인민당은 선거운동 첫날부터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 전역의 상징인 푸른색과 흰색 윗도리로 메웠다고 한다. 훈 센은 수천 지지자들이 모인 컨벤션센터에서 "우리 국민은 오롯한 평화를 이뤄냈고 독립, 단결, 주권, 영토를 지켜낸 나와 캄보디아인민당이 제7대 입법부를 이끌도록 투표할 것"이라며 목청껏 소리 질렀다고.

선택은 캄보디아 시민 몫이지만, 유효기간이 끝난 이른바 민주선거제도의 한계를 다시 떠올리는 아침이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이 자조적인 말을 오물거리며 캄보디아 시민의 건투를 빈다.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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