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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괜찮으세요?" "저 한국인인데요." 공항에서 한 번, 기내에서 두 번째 질문을 받았다. 화장실 가서 거울을 봐야겠다. 아마 면도를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태평양 상공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지구별에서 가장 힘이 세다는 나라에 왔다. 시간, 공간적으로는 가장 먼 나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가장 가까워지고 싶은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각 주(洲)를 상징하는 별 50개가 박혀 있는 성조기와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는 사진을 배경으로 환영한다는 짧은 영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공사 중인 LA공항의 첫인상은 그저 신기하고 낯설 뿐이었다. 두 대의 버스를 연결한 주름 잡힌 버스에 한눈이 팔리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서야 예약된 버스가 도착하였다. 버스는 뒷바퀴 쪽에 한 쌍이 더 있었는데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좌석은 편안하였고 소음도 거의 없었다. 좌석 뒤편으로 이층 침대와 주방, 화장실이 있어 캠핑카로 착각하였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차창으로 유전시설이 눈에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LA는 시내 곳곳에 유전이 있고, 미국의 석유 비축량은 전 세계적으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순위로 알고 있다.
버스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세계 최대의 영화 및 TV 촬영 스튜디오이자 테마파크로, 세계에서 둘째로 오래된 유니버설 스튜디오 산하의 대표적인 테마파크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마다 촬영장소가 궁금하였는데 실제로 와보니 규모와 시설에 놀라웠다. 특히 4D를 이용한 디지털 영상과 아날로그적인 모형은 스튜디오의 공간감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었다. 영화는 미국의 경제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영화 '워터월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무대는 실제 모터보트의 등장, 폭발과 총격 등의 다양한 액션신으로 관람객들에게 재미와 흥미를 제공하고 함께 즐기는 필자로서는 어린이로 돌아가 그저 신날 뿐이었다. 경북관광포럼 위원으로 있을 때 경주 보문단지에서 보았던 물의 무대가 떠올랐다.
작은 유럽마을 '솔뱅'서 퀴어축제
관광객·참가자들 서로 축하하고
같이 사진 찍는 등 행사 평화로워
프리웨이서 오토바이도 함께 달려
굉음과 앞서가는 가죽재킷 무리들
동물 등 모든 생명 자유로워 보여
언덕 위 소들 코걸이·귀걸이 안해
1등급 소고기 前 대통령도 못 먹어
식당서는 동선 고려해 가구 배치
사람들 질서·자연 조화된 건축물
버스는 다시 출발하여 작은 유럽마을 '솔뱅'으로 향했다. 1911년 덴마크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인데 필자는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에 덴마크를 여행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친근감이 드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마침 마을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든 참가자들과 손을 흔들어 축하를 하는 관광객들의 평화로운 축제였다. 참가자들이 사탕을 나눠주기에 사탕도 받고 사진도 찍어 주었다. 대구에서 퀴어 축제로 인한 대구시장과 경찰 측, 축제 측과의 마찰음이 인터넷을 타고 이곳까지 들렸다. 양보와 배려 없는 행사는 신나는 축제가 아니라 성난 시위가 될 뿐이다. 공공의 공간은 누구의 소유나 점유로 일방적일 수 없다. 공간은 사용과 이용의 문제이지 소유나 점유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아무리 나누어도 소비되지 않는 공간은 많이 나눌수록 그 가치는 높아지겠지만 이용자나 사용자는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솔뱅의 거리는 깨끗하였고 사람들은 친절하였다. 길가에 내어놓은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누렸다. 햇살은 따스하고 그늘은 시원하였으며 공기는 평화로웠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중. 프리웨이는 12차로에서 8차로로 바뀌고 3~4m의 블록 차음벽도 함께 달렸다. 우리는 훨씬 높은 차음벽을 유리나 폴리카보네이트 같은 고가의 재료를 사용한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매년 새들의 무덤이 되는 차음벽의 해결책은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50m마다 세워진 나무 전주가 눈에 들어왔다. 오토바이도 함께 달린다. 굉음과 함께 앞서가는 가죽 재킷의 무리들이 이곳이 자유의 도시임을 알리는 선발대처럼 보였다.
길을 떠나면서 유명 경관지의 찬란함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인증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것은 관광이지 여행이 될 수 없다. 여행은 가릴 것 없이 찬찬히 살핌에서 시작된다. 도로 위의, 자동차 안의 운전자를 보며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궁금하고, 함께 탄 동승자는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하였다. 도로변에 공사를 하는 노동자의 인상을 살피고 일과 후에 동료들과 맥주 한잔에 오늘 땀 흘렸던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호탕하게 웃음을 날릴 맥줏집도 상상해본다.
여행하는 자로서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되어보는 상상은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마음을 말랑하게 한다. 보이는 공간 속으로 잠시 유체이탈해 그들의 삶을 대신해보는 것도 장소를 연구하고 디자인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권해석이다.
낮은 구릉지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언덕 위에서 풀을 뜯는 검은 소무리가 보인다. 코걸이 귀걸이도 하지 않았다. 동물에게도 자유가 넘쳐나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에서 가장 맛있는 '흑우'라고 한다. 미국은 모든 생명체가 자유로워 보였다. 방목한 소들은 마이크로칩이 내장되어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쇠파이프 축사 우리 안에서 사육되는 한국의 소들이 무지하게 불쌍해 보였다. 가이드의 귀가 쫑긋해지는 질문이 나왔다. 흑우 소고기의 1등급은 누가 먹는가? 답은 미국을 지키는 특수부대 군인들과 소방대원들의 특식으로만 나온다고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1등급을 먹지 못한다. 물론 2등급은 먹을 수 있다. 돈이 있으니. 여행을 하는 우리는 오늘 저녁에 3등급의 고기를 먹게 된다고 한다. 한우와 비교해 봐야겠다.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힘줄은 무엇일까? 자유, 민주, 자본 그리고 애국, 존경, 평등이 더 보태진다.
새벽 네시에 깨었다. 밖은 아직 컴컴하고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어제 종일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녔던 여독이 채 가시지 않아 씻기도 전에 녹다운됐다. 아침 일찍부터 요세미티 공원으로 향했다.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난다. 낯설기보다 반갑다. 한국에선 하나의 길 위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여기선 건너편의 새로운 길 위에서 새로운 목적지로 떠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원을 지나면 구릉지대에서 목축업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방목을 한다. 그리고 삼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한 요세미티 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디언 사람들은 소유격이 없다고 한다. 살인이란 단어도 없다. 백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큰 곰이 나타나서 위험하다고 외쳤던 소리가 공원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슬픔과 아픔으로 적셔진 이름이었다. "요 세 미 티~~" 이곳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궁금하다. 곰을 비롯하여 곤충까지도. 도로변이나 숲속에는 비닐봉지 하나 보이지 않는다. 흐뭇해진다. 방문객들의 수준 있는 의식이 고마웠다.
도착한 식당은 사람들의 동선을 고려한 가구의 배치와 사람들의 질서 그리고 주변의 숲과 잘 조화가 된 건축물이었다. 특히 플라스틱의 일회용품이 없어서 음식이 더 맛있었다. 화장실에서 만난 꼬마 미국인이 방귀를 크게 뀌는 바람에 서로 눈이 마주쳤다. 어제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손을 씻는 곳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말이 빠르고 매끈거려서 알아듣지 못했다. 난 영어를 잘 못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혹 한국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이 뭐가 유명하냐고 되묻는다. 우선 생각나는 게 '방탄소년단'이 떠올라 대답했더니 그제야 웃으면서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즐거운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서로에게 하고 나오는데 진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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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소장) |
요세미티 폭포의 물줄기는 힘찼다. 부서지는 물방울은 안개처럼 주변의 나무와 바위들 그리고 사람들을 적시고 있었다. 마치 성수를 뿌리듯 자연의 축복을 내리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등산복 브랜드인 노스페이스의 본점이 아니라 본적(本籍)을 찾았다. 하프돔(Half dome)이라고도 불리는 곳인데, 미국의 스케일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 아니 일년 정도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관광으로서는 너무 아쉬움이 컸다. 계절 속의 자연과 교감하며 책도 읽고 편지도 부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일었다. 십수 년 전부터 요세미티를 벼르던 것이 오늘 실현된 것처럼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심어 두고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모처럼 지평선을 본다. 수평선이야 바다로 가면 볼 수 있지만 지평선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선 어렵다. 더구나 울쑥불쑥 솟아 있는 도시의 빌딩 숲에선 보기 힘든 정갈하고 정직한 선(線)이다. 타국에서 짧은 일기는 신선하였다. 주저 없이 적었던 메모들을 정리하며 이만 노트북을 접는다.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소장 a30co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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