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티베리우스 황제가 남긴 것들

  • 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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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19 07:02  |  수정 2023-07-19 07:05  |  발행일 2023-07-19 제26면
인기보다 재정건전성 주력
독특한 행적에 상반된 평가
원로원과 갈등 계속되자
마지막 12년 카프리서 생활
'로마의 평화' 주춧돌 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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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남부 이탈리아 여행의 백미는 한동안 '나·폼·소'였다. 로마·피렌체·베네치아를 둘러본 사람들은 다음 여행지로 아름다운 항구와 지하 유적으로 유명한 나폴리와 베수비오 화산이 남긴 폼페이, 음악 시간에 이탈리아 가곡으로 알았던 소렌토를 많이 찾았다. 이 일정의 꽃은 나폴리만(bay) 건너편의 카프리섬이었다.

독도보다 작은 이 섬은 풍광이 빼어나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가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섬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2대 황제에 오른 티베리우스(서기 14∼37년 재위)였다. 티베리우스는 군사 지휘 능력으로 황제에 올랐지만 원로원과의 오랜 갈등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주로 재정문제였다. 서기 26년 어느 여름날 나폴리를 여행하던 그는 돌연 카프리섬으로 들어간다.

그의 행적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이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46년 만들어진 새로운 태양력(율리우스력)에 7월을 양아버지 '율리우스의 달(July)'로 이름을 붙이고, 8월은 본인(August)의 달로 만들어 황제의 권위를 신격화했다. 티베리우스가 즉위하자 원로원에서는 9월을 '티베리우스의 달'로 결의한다. 그는 "앞으로 황제가 12명이 넘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면서 거절한다.

재위 4년 원로원 연설의 한 대목에서도 그의 통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의 권익을 위하고,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황제로서 행정적·정치적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낮은 자세로 '제1의 로마시민(Princeps civitatis)'을 자처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행적은 후대에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당대 역사가들은 그의 군사적·행정적 능력은 평가하면서도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사생활에 관한 소문을 근거로 '악명 높은 황제' 중의 하나로 기록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볼테르와 역사학자들은 새로운 사료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물려받은 국고의 20배를 남겨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올린 황제라는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치적 홍보와 인기를 얻기 위한 공공투자를 멀리했다. 확대되는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선심성 정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건축물을 만들지 않았고 황제가 주최하는 검투사 경기와 인기 절정의 전차경주(chariot racing)마저 중지했다. 대중에게는 인기 없는 황제가 되었지만 제국 전체의 안정과 지속성을 위해 이 정책을 고수했다.

로마가 자랑하는 수로(aqueducts)도 기원전 312년부터 7개가 건설되었기에 티베리우스는 추가 건설보다는 유지보수에 주력했다. 당시 군인의 제대 전역금이 부족해지자 원로원은 금화(aureus)의 순도를 낮추어 비용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의 유혹을 물리치고 긴축 재정을 통해 금화의 가치를 유지한다. 불과 30년 뒤 네로 황제 이후 금화의 순도를 낮추어 가면서 로마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카프리섬에 도착해 케이블카(funicular)를 타고 섬의 중앙에 오르면 티베리우스의 흉상을 만나게 된다. 그는 외딴 섬에 들어와 마지막 12년 동안 대중적 인기보다 국고를 탄탄히 해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그가 남긴 균형재정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함을 카프리섬은 알려주고 있다.
김영우 동반성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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