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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 밀란 쿤데라가 향년 94세로 최근 별세했다. 그는 역사적,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자신을 항상 '소설가'라고 했다. 그는 "소설가는 역사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끌어당기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으로서 역사다"라고 말했다. 그는 말년에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농담' '생은 다른 곳에' 등의 많은 명작을 남겼다. 나는 그의 소설 '느림'을 특히 좋아한다. 책을 꺼내 예전에 연필로 밑줄 친 부분을 다시 읽었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한량들은? 그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처음 읽었을 때나 지금이나 '게으른 주인공' '방랑객' 같은 단어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여름 방학이 시작됐다. 학생들에게 "방학이 여유로운가?"라고 물어보면 "숨 막혀 죽을 정도로 바빠요"라고 답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남모르게, 남보다 빨리, 많이'를 자녀 교육의 금과옥조로 중시한다. 사교육의 불안 마케팅은 방학이야말로 이 슬로건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부추긴다. 모든 학생이 정말 바쁘다. 그들은 학교 보충 수업에 참여하거나 학원 등에 등록해 압축적이고도 밀도 높은 시간 관리를 받는다. 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을 미리 배워야 경쟁력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학생이 "학기 중은 학교의 시간이고, 방학은 엄마의 시간"이라고 했다. "방학에는 엄마가 짠 프로그램대로 움직여야 하니 더 힘이 듭니다. 학교의 시간에는 엄마의 간섭을 피할 수 있지만, 방학에는 일거수일투족이 엄마의 감시 감독하에 있기 때문에 정말 괴롭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께 꼭 권하고 싶은 시가 있다. "회전목마 타는 아이들을/ 바라본 적 있는가./ 아니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펄럭이며 날아가는 나비를 뒤따라간 적은,/ 저물어 가는 태양 빛을 지켜본 적은,// 속도를 늦추라./너무 빨리 춤추지 말라./ 시간은 짧고,/ 음악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중략…아이에게 말한 적 있는가,/ 내일로 미루자고./ 그토록 바쁜 움직임 속에/ 아이의 슬픈 얼굴은 보지 못했는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서둘러 달려갈 때/ 그곳으로 가는 즐거움의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걱정과 조바심으로 보낸 하루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버려지는 선물과 같다.// 삶은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라./ 노래가 끝나기 전에." 아동심리학자로 서른 살 때부터 신장 투석을 받아야 했던 데이비드 웨더포드가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고 발표한 시 '느리게 춤추라(류시화 번역)'이다. 신장 이식 수술에 실패한 후 매 순간을 소중하게 느끼며 쓴 시다.
'도로'는 목표 지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0에 근접하게 하려고 한다. 포장도로와 터널이 '도로의 이상'을 잘 구현하고 있다. 반면에 '길'은 비포장과 우회를 순리와 여유로 간주한다. 장애물이 있으면 그 밑으로 터널을 뚫는 것이 아니고 돌아간다. 길은 나무와 들꽃, 구름과 새들을 좋아한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속도와 지름길을 추구하는 '도로의 문화'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건물도 빨리 지어야 하고 공부도 남모르게 먼저 시작해야 한다. 빠름과 느림이 조화를 이룰 때 생산성은 극대화된다. 빠름이 성공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느림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느림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필요할 때 즉시 속도를 낼 수 있는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음미와 여유가 없는 속도는 무모하고 위험하다.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않은 건물이 무너지면 그 손실은 막대하다. 선행학습의 폐해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속성 재배한 식물은 깊이 있는 맛이 없다. 진도에 매몰되면 창의력과 응용력, 깊이를 얻기 어렵다. 공부에는 지름길이 없다. 그래서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고 말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래 되씹고 곱씹으며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야 어떤 문제가 나와도 그 개념을 잘 적용할 수 있다. 과도한 선행학습은 배우고 깨치는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
부모 자녀 모두가 한 학기 동안 정말 수고했다. 휴식은 전체 시간의 길이보다는 밀도 있는 순간의 길이로 그 질이 결정된다. 몸과 마음을 몰입하게 하는 운동이나 독서, 여행 등 일상을 떠나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있는 휴식의 시간, 게으른 시간을 가져보자. 속도가 우리를 몰아붙이게 해서는 안 된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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