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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소아청소년과의원 정명희 원장이 진료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3년간 공공의료에 헌신해 온 그는 현재 성장·성조숙증 전문 클리닉을 운영하며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를 돕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
코로나19가 도시를 잠식하던 날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줄지어 선 환자들을 향해 마스크 너머로 눈을 맞췄고, 한 가족 전체가 감염으로 입원해도 끝까지 곁을 지켰다. 아이들의 키를 걱정하고, 성장을 응원하며, 부모를 가르치고, 사회를 품었다. 여의사라는 이름 하나로 막힌 길을 뚫어내고, 스스로 선례가 되기도 했다. 의사이자 엄마, 수필가이자 나눔의 실천자. 정명희 원장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한다'는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지금, 무록남경애 빛나는 여의사상 수상자로서 그가 남긴 발자국 하나하나는 후배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빛이 되었다.
약하고 어려운 이 돕겠다는 어린 꿈
아이들 성장 응원하는 의사 길 인도
'여자라서 그래' 말 듣지 않으려 최선
부모교육·시민강좌로 질병예방 힘써
무록남경애 빛나는 여의사상 수상
몽골·베트남 등 의료봉사 소명 삼아
책 다섯권 발간한 수필가로도 활동
▶33년간 공공의료 일선에서 자리를 지켜왔다. 어떤 계기로 의사의 길을 걷게 됐나.
"초등학교 시절 보육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체로 줄지어 등교했고, 눈빛이 막연하게 슬퍼 보였다. 그때의 연민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었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도 영향을 줬다. 의사가 되면 약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환자를 진료하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회복되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고마웠고, 감사했다. 33년이란 시간이 지나왔지만,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소아내분비 전문가로서 성장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오셨다. 인상 깊었던 사례는.
"아이의 성장은 놓치지 말고 꾸준히 살펴야 한다. 키는 자랄 수 있을 때 잘 자라도록 도와줘야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는 기본적인 생활이 필수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할 일이 많아 그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조숙증은 조기 발견과 예방이 중요하다. 부모가 키가 크다고 아이도 클 거라 막연히 믿다가 성장판이 닫히면 아이는 큰 좌절을 겪게 된다. 한번은 초등학교 여아가 개학 첫날 학교에서 초경을 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모가 당황해 찾아온 적이 있다. 살이 쪄서 가슴이 나온 줄 알았는데, 초경까지 시작된 상황에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집안의 자제가 키 때문에 왔다. 성장판은 거의 닫힌 상태였고 본인은 10㎝를 더 키우고 싶다고 했다. 부모는 아이가 방황한다며 제발 마음을 잡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아이들은 키가 자존감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부모 교육, 시민 강좌에도 힘을 쏟고 계신다. 특별한 이유는.
"2001년 미국 연수 중 초청 교수님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아프지 않게 돕는 예방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마음에 깊이 남아 귀국 후부터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녹화 방송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시간 내어 자료를 준비해 강의했다. 방송을 본 후 해남 땅끝마을에서 병원을 찾아온 분도 있었다. 반복 교육의 힘을 믿는다. 개원 후에는 매주 월요일을 휴진일로 정하고, 부모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은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몽골, 네팔, 베트남 등에서 의료봉사를 이어오셨다. 해외 현장에서 느낀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일생에 한 번 의료인을 만나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도 있었다. 추운 날 맨발로 다니고, 아파도 약 한 번 못 먹은 분들이 많았다. 그런 환경에서 의사를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의 기도와 염원 덕분임을 느꼈다. 의료인은 약자를 돌보고 살피는 일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이 사회적 책임이라고 믿는다."
▶1980~90년대 여의사로서 진료 환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당시 의대 여학생은 전체의 5~10% 정도였다.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과도 제한적이었고, 외과 계열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여자라서 그래'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밤낮 없이 더 열심히 일했다. 나 하나 때문에 후배 여의사의 길이 막힐까 두려웠다. 대구의료원에 지원했을 때, 원장님이 '여자는 안 된다'며 거절하셨다. 은사님께 도움을 요청드렸고, '100일만 써보시라'는 말에 시한부 각오로 일했다. 결국 입원 아동이 1명에서 54명까지 늘었고, 원장님도 '언제 그런 말 했냐'며 웃으셨다. 아이들이 웃으며 퇴원할 때면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여의사회 활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후배 여의사에게 한 말씀 한다면.
"여의사들은 의사이자 어머니, 아내, 며느리로 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전통을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 할 일이면 내가 하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면 더 잘하자'는 법구경의 말처럼, 여의사회 활동도 책임감을 가지고 이어가길 바란다."
▶다섯 권의 책을 쓰신 수필가이기도 하다. 진료와 글쓰기는 어떻게 연결되나.
"진료를 하다 보면 가슴 아픈 사연이 많다. 퇴근 후에도 환자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쓰다 보면 마음이 정리된다. 글쓰기는 내게 케렌시아(안식처) 같은 공간이다. 아무 일 없는 날엔 감사함을 적는다. 하루를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다."
▶'무록남경애 빛나는 여의사상'을 수상했다. 이 상이 갖는 의미는.
"더 열심히 활동하라는 격려라고 생각한다. 머리에 무거운 갓 하나를 얹은 느낌이다. 갓은 멋져 보이지만 때로는 불편하고 무겁다. 남경애 선생님처럼 묵묵히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으로도 내 자리에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겠다. 상을 받은 직후에는 경북 산불 이재민 돕기 성금도 후원했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강승규
의료와 달성군을 맡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깊게 전달 하겠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