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나는 소위 말하는 '이상한 것'에 관심이 많다. 고대 신화, 종교, 역술… 최근에는 점성술(Astrology)에 빠져 있다. 이런 화두를 꺼내면 대개 의아한 표정이 돌아오지만, 나는 그것들의 진실성을 옹호하거나 증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점성술이 실제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는 철저한 신앙의 영역일 뿐이다. 핵심은, 인간이 자신과 우주의 관계를 이해하려 했던 그 지적 시도에 있다.
우리가 오늘 '상식'이라 부르는 지식의 바깥에는, 수많은 시대정신과 해석의 프레임이 존재했다. 뉴턴이 연금술에 심취했고, 케플러가 점성술사였다는 사실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비합리적'인 탐구를 했다는 이유로 과학적 업적이 무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상상과 실험, 때로는 실패와 시행착오가 인류의 지성사를 성장시켰다. 20세기 초까지도 과학자들은 '에테르'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이 우주를 채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 시절에는 신비와 과학, 이론과 상상이 혼재해 있었다.
그런데 근대 실증주의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너무 손쉽게 과거의 사유 체계에 '미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 가치를 폐기해 버렸다. '지금 기준에선 틀렸으니까, 무의미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현재의 '진리'조차 언젠가 수정될 수 있다. 과학의 위대함은 영원불변의 진리라서가 아니라, 언제든 반증될 수 있는 열린 구조에 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뉴턴역학이 상대성이론으로 바뀌었듯, 진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한때의 지식, 오늘날 '틀린 이론'들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연금술사들이 개발한 증류, 결정화, 실험적 기록법은 오늘날 실험실 과학의 기초가 됐다. 점성술 역시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에서 점성술은 의학, 농업, 정치의 실질적 기준이었다. 별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계산하려던 욕망은 수학, 천문학, 기하학 등 순수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실제 과학적 사실과 다르다고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속에 녹아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융의 '상징 분석'도 오늘날 심리학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심지어 한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인종론'도 지적 폭력과 시대의 한계를 돌아보는 교훈을 준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미신인가, 그 경계는 시대마다 다르게 그려진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던 인간의 태도, 자연현상에 의미를 읽어내려 했던 해석의 열정. 이 모든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비웃는 것은, 미래의 인류가 우리를 비웃을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지금의 지식도 언젠가는 또 다른 신화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단정이 아니다. 왜 인간은 끝없이 해석하고, 이해하고, 의미를 찾으려 했는가? 각 시대의 해석과 지적 모험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AI, 뇌과학, 양자역학처럼 기존 상식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식과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럴수록 '정상'이나 '상식'의 울타리만 고집하면, 정말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된다. 진짜 혁신은 늘 주변부, 기이함, 아직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도들은 언제나 '처음엔 이상해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함과 상식의 울타리 너머, 불확실성과 불가해의 영역에서 진정한 사고의 모험을 만난다. 점성술이든 연금술이든, 한때의 '이상함'을 두고 '과학'과 '신비'의 경계를 너무 쉽게 긋지 말자. 진정한 지적 성숙은 그 경계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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