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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도 반한 마력의 매운맛
느릿·깐깐하고 그러면서도 쿰쿰했다. 달팽이 기세로 살아가는 고장, 바로 ‘순창(淳昌)’이다. 누군 순창을 두고 ‘청산청수청인(淸山淸水淸人)의 고장’이라 했다. 산은 ‘강천산’, 물은 ‘섬진강’, 사람은 바로 ‘선비·고추장 명인·명창’을 의미한 걸까. 이 고장은 다른 곳에 비해 근대화로 인한 자연훼손이 덜했다. 섬진강은 4대강사업에서도 비껴갔다. 철길도 이 고장을 파헤치면서 지나가지 못했다. 순창으로 가는 내내 바람은 더없이 풍성했다. 5월의 산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푸르고 객수감(客愁感)까지 어른거렸다. 대구에서 2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순창읍 백산리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이하 고추장마을). 거기로 막바로 가선 안 된다. 탁미(卓味)는 탁지(卓地)에서 난다고 했다. 순창을 잘 아는 한 여행가가 고추장마을로 가기 전에 먼저 가봐야 할 데가 있다고 했다. 적성면 괴정리에 있는 채계산이었다. “정상인 장군봉에 오르면 기막힌 풍경을 친견할 수 있고 유려하면서도 균제미가 빼어난 그 산하를 보면 왜 순창이 고추장으로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순창IC에서 불과 10분 떨어진 곳에 나지막하게 앉아 있는 채계산을 올랐다. 일광사 옆 무량사 가는 길을 통해 정상으로 올라갔다. 30여분의 고즈넉한 초여름의 산길. 이 산의 수호신이랄 수 있는 ‘돌노인’에게 합장을 했다. 30m 높이의 ‘화산옹(華山翁)’이다. 순천군민에겐 각별한 바위다. 돌노인의 눈매는 항상 섬진강과 순천읍 방향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고추장 장인들은 장을 담글 때 돌노인 앞에서 고유제를 올리기도 한다. 군민들은 이 바위의 색감을 보고 그 해 운세를 점쳤다.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 같으면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하지만 순창고추장의 붉은색은 오히려 액막이 구실을 한다. 바위가 적변(赤變)해도 순창고추장이 액기(厄氣)를 중화시켜준다. 결과적으로 순창이 순박(淳朴)한 건지도 모른다. 등산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모처럼 구름나그네였다. 산정부는 공룡의 등 같은 암릉군이었다. 불과 몇평 되지 않는 좁디좁은 장군봉 전망대. 하지만 예측불허의 가경이 발아래 무릉도원처럼 깔려 있었다. 산맥·강·들판·촌락이 이렇게 완벽한 황금비율로 짜여 있는 경우를 최근에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산 발치는 넓은 들이다. 보리·밀 수확과 모심기 준비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그 광경이 조각보 같은 형색이다. 바로 옆에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212.3㎞)이 임실군을 훑고 S자로 굽어져 순천읍으로 굽이쳐가고 있다. 강 너머는 중국 계림을 축소해 앉혀 놓은 듯한 연봉이 연꽃처럼 피어있다. 전남 구례군 사성암(四聖庵)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이 압권이란 말도 이젠 수정해야만 될 것 같다. 채계산에서 본 섬진강. 성형수술한 4대강에 비해 훨씬 토속적이고 친환경적이었다. 순창고추장, 그게 장인의 손끝보다 어쩜 섬진강과 기름진 옥토의 산물인 것 같다. ◆고추장 사찰 …회문산 만일사 순창이 고추장의 고장이란 걸 알려주는 중요한 비석이 있다고 해서 구림면 안정리에 위치한 만일사(萬日寺)로 향하였다. 만일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고찰이다. 조선 건국 전 무학대사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해 공을 들일 때 머물던 절이다. 이성계는 임금이 되기 전 무학대사와 인근 김좌수의 집에 초대받아 점심을 먹게 된다. 그때 먹은 고추장 맛이 이성계에겐 특별했던 모양이다. 조선을 건국한 후 이성계는 그 고추장 맛을 잊지 못해 진상토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록은 사료로 전해지지 않는 구전설화다. 6·25전쟁 등 두 차례 소실 끝에 195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다. 만일사는 두 거장이 머문 곳이라 하기엔 너무 작았다. 6·25전쟁 당시 회문산에 북한의 남부군 총사령부가 자리하였다. 만일사는 집중 포화로 모든 것이 소실된다. 다만 훼손된 중수비만 살려냈다. 순창군이 파손되고 마모된 비문에서 태조 대왕과 무학이란 단어를 찾아낸다. 이걸 토대로 비각 옆에 고추장전시관도 만들고 ‘순창고추장스토리텔링’의 가닥을 잡아나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6.0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달성군 <하>
한때 ‘공단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달성군. 대구도 그렇지만 달성군은 더더욱 먹을 게 없다는 평가였다. 그건 잘못된 시각이었다. 현재 전국구 버전으로 치닫고 있는 이런저런 먹거리가 꽃을 피운다. ‘기능성 닭요리’로 유명한 아낙네 3명도 아름다운 경쟁을 한다. 매머드 닭백숙 명가로 성장한 ‘큰나무집’의 조갑연씨, 옻닭백숙 전문점인 ‘토담집’의 최영란씨, 솔잎조림닭을 개발한 ‘돈마을’의 윤영숙씨. 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창면에 모여 산다. 전국적 명성을 가진 발효와 전통농법 전문가도 여럿 있다. 천연식초 신드롬을 일으킨 가창면의 구관모씨, 비슬산 자락 밑에서 달성명주 ‘하향주’를 빚고 있는 박환희씨, 전국에서 가장 좋은 미질을 자랑하는 유가찹쌀 재배전문가인 곽동준씨, 가창면 우록리 우미산 자락에서 전통기법으로 ‘다슬기 진액’을 제조하는 김삼정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대구 육개장과 따로국밥 사이를 파고드는 ‘현풍박소선할매곰탕’과 타운을 형성한 현풍시장 내 ‘소구레국밥촌’. 그 스펙트럼의 연장에 서 있는 논메기매운탕의 메카로 급성장한 다사읍 부곡리의 ‘논메기매운탕촌’. 가창찐빵은 2000년 태동한 ‘뉴밀레니엄 찐빵’으로 전국적 선풍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출하되는 참외는‘옥포 참외’다. 연근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은 동구 반야월이지만 전국에서 가장 비싼 연근은 하빈면 봉촌리 연근이다. 2013년부터 달성군 하빈면에서 서남해안권에서만 재배되는 것으로 알려진 무화과가 출하된다. 현재 우당농원 등 7농가가 ‘하빈무화과연구회’를 결성했다. 2008년 전국에선 처음으로 ‘토마토와인’이 개발됐고 3년 전부터 토마토축제를 열며 ‘토마토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금호·낙동강이 둘러싼 ‘매운탕의 고장’ 60년대 화원유원지 등 강변서 역사 시작 90년대 초부터는 논메기매운탕도 인기 식당 옆서 농사 지은 밀로 빚은 칼국수 옻닭백숙·솔잎조림 등 기능성 닭요리 이름 대면 고개 끄덕여지는 식당 즐비 ◆민물매운탕의 추억 달성군은 금호강과 낙동강에 둘러싸여 있어 꾼들 사이에선 ‘매운탕의 고장’으로 불렸다. 6·25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한 1960년대 초부터 대구권 금호강·낙동강변에 청천·동촌·강창·강정·화원·옥포 매운탕촌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1978년 화원동산이 생겨나면서 화원유원지 매운탕촌에는 화성·제일·시민·중앙·오복·국일·성주·아궁이·버들·명성식당 등이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금호강이 낙동강과 합수되면서 만든 강창·강정 매운탕촌도 강세였다. 이후 강창에서 가장 유명해진 ‘대구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참모들과 두 차례 찾아 회식했다. 지금 강창 매운탕촌은 1990년대 페놀사태 등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맞은편 강정 매운탕촌이 힘을 받는다. 백씨 할매가 작고하면서 대구관 명맥은 1971년 세워진 강창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강정(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정정수장 근처)의 ‘경산식당’으로 편입된다. 거기 금호강 뱃사공이었던 한동호씨. 그가 바로 대구관 백씨 할매의 고종사촌 동생이고 그의 다섯째 며느리 우명자씨가 경산식당을 지킨다. 또한 옥포 용연사 초입 옥연지 매운탕촌도 유명했다. 도서방, 옥포식당, 돌고래 등 한창때는 10여 개 업소가 운집했다. 현재는 옥포식당과 돌고래만 남았다. 달성군은 ‘논메기매운탕의 고향’. 특히 달성군 다사읍 부곡1리 일명 ‘샛터마을’은 그 신화의 발상지다. 1990년대 초 거기서 ‘손중헌논메기매운탕’이 대박을 친다. 이로 인해 죽곡리·문산리·성주대교 가도가 졸지에 ‘논메기탕 벨트’로 짜인다. 이와 함께 작고한 경남 함양군 출신 이귀달 할매가 만든 ‘서재할매매운탕’도 논메기 전성시대를 리드한다. ◆ 할매칼국수의 전통 달성의 대표 칼국수로 등극한 ‘동곡원조손칼국수식당’과 가창면 삼산리 ‘우리밀원조할매칼국수’. 이 둘도 숱한 사연을 갖고 있다. 반들거리는 현대식 칼국수와 거리가 있는 ‘토속칼국수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1970년 하빈면 동곡리 동곡막걸리 맞은편에서 칼국수 인생을 시작한 강신조 할매. 장바닥에서 ‘안동 건진국수 스타일’의 칼국수를 팔았다. 지금은 타계한 대구백화점 옆 ‘경주할매칼국수’의 황금연 할매, 명덕네거리 근처 ‘할매집’의 송주연 할매와 함께 ‘대구 3대 칼국수 할매’로 불렸다. 지금은 시어머니로부터 기술을 전수한 며느리 석종옥씨(64)가 진두지휘한다. 국수 못지않게 ‘면수(麵水)’가 압권이다. 메밀차에 숭늉차, 거기에 쌀뜨물을 조금 가미한 맛이다. 김월자씨가 꾸려가는 우리밀원조칼국수.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에 ‘착한식당’으로 뽑혀 단숨에 스타칼국수로 승격됐다. 식당 옆에서 직접 밀농사를 짓는 게 특징이다. 뚝배기 같은 용기, 흙벽의 기운이 감도는 투박한 면발이 특징. ◆ 우록리 흑염소 거리 1999년 가창면 우록리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전국 첫 ‘전국염소싸움대회’였다. 이때 30여 개 업소가 똘똘 뭉쳤다. 그 덕분인지 우록리는 한때 ‘전국 최고의 염소마을’로 소문난다. 아직도 전성기를 암시하듯 동네 입구에 ‘흑염소마을’이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가창 2번 버스 종점, 우록마을회관 옆에 자리한 ‘고향흑염소가든’. 우록리에 남은 마지막 염소식당이다. 식당 옆 우리에서 직접 염소를 키우고 있다. 염소싸움대회 이야기를 듣고 싶어 우록리 염소 부부로 불리는 김용관·임형옥 부부를 찾아갔다. 아내가 식당 옆 사육장에서 놀고 있는 흑염소 30여 마리를 구경시켜주었다. 암컷과 수컷은 분리시킨다. 함께 넣어두면 수컷이 암컷을 너무 괴롭혀 고기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록리 최초 염소식당은 ‘복숭아밭집식당’이다. 당시 복숭아집 할매가 소일거리로 염소를 몇 마리 키웠다. 여름철이면 친척이나 별미를 찾는 미식가들이 할매한테 염소를 잡아 요리를 해달라고 특별주문을 하기 시작한다. 입소문이 나면서 할매는 본격적으로 염소 전문식당으로 키워나간다. 당시 할매는 우미산 자락에서 특히 많이 생산되는 평편한 구들장돌 위에 고기를 구웠다. 이어 화담장, 무림장 등 염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식당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 다끼파를 아시나요 1960년대만 해도 화원유원지에선 파시장이 열렸다. 그 파가 바로 따로국밥(대구 육개장) 맛의 원천인 ‘다끼파’다. 다끼파는 낙동강 하구의 대표적 대파였던 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의 ‘명지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생산은 고령 쪽에서 되지만 유통된 건 건너편 화원읍 성산리 화원유원지 백사장이었다. 60년대 동절기엔 파를 싣기 위해 몰려들었던 달구지, 리어카 등으로 진풍경을 펼쳤다. 따로국밥의 맛이 특별한 건 바로 이 다끼파 때문이다. 다끼파는 뿌리 중심의 파였다. 다끼파의 산지는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다. 사문진교는 호촌리와 달성권 화원읍 성산리를 이어준다. 호촌리와 성산리는 둘이 아니었다. 나룻배에 의해 한 몸으로 묶여 다녔다. 하지만 1970년대 초 경지정리 과정에 다끼파의 호시절도 끝나버린다. 호촌리는 일명 ‘다끼’로 불렸다. 출하기가 되면 밭주인들 모두 크고 작은 저울을 들고 다녔다. ‘(저울로) 파를 달기’ 할 때의 ‘달기’가 다끼로 음운이 변이됐고 그게 지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대표적 종묘회사 중에도 ‘다키이(瀧井)’가 있다. 다키이는 자기가 개발한 파를 1910년쯤 한국으로 수출해 짭짤한 수익을 올린다. 이 파는 원래 한국 토종인데 일본의 육종학자가 몰래 그 파의 씨앗을 받아 일본 본토에서 육종해서 한국에 되팔았다는 설도 있다. 한국 역시 파의 종주국은 아니다.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유입된 ‘조선파’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잎만 먹는 ‘잎파’, 전체를 다 먹는 ‘쪽파’ 두 종밖에 없었다. 대파는 일제강점기 초반에 형성된다. 다끼파는 요즘 파처럼 길지 않았다. 1년에 두 번 팔러 나갔는데 2~3월엔 푸른 잎만 잘라 팔고 육개장용 올파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팔았는데 길이는 한 자쯤 된다. 굵기는 어른 엄지손가락 정도. 다끼파의 뿌리 부분은 자줏빛이 감돌았다.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5.26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달성군 <상>
1995년 경북도에서 대구시로 편입된 달성군(達城郡). 달성군의 음식의 본질과 특징은 뭘까. 이 화두를 제대로 풀기 위해선 비슬산에 올라가서 달성 산하를 제대로 관망해봐야 한다. 분출된 비슬산 지류수를 품어 안은 가창댐. 1959년 8월21일 준공됐다. 86년 4월 높이 45m, 길이 250m로 증축된다. 왜관을 빠져나와 화원유원지로부터 논공, 그리고 구지면에 이르는 동안 무려 20㎞ 구간을 사행(蛇行)한다. 낙동강 521㎞ 중 이렇게 긴 사행을 하는 구간은 달성군 구역이 유일하다. 물의 고장 달성군의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냉천 백숙식당터 바위에 새겨진 ‘寒泉’ 옛 냉천유원지 맛집 명성 뿌리 보는 듯 옻 알레르기 고치는 옥분리 ‘옻약수터’ 속병앓이에 탁월한 효험 가창 ‘황물탕’ 전국서 몰려와 며칠 묵는 일도 다반사 ‘정대미나리 역사의 시작점’ 추병수씨 논 빌려줬다 방치된 미나리가 계기돼 88년 농부 전업 김정복씨 등 속속 가세 재배면적 1만6500㎡ ‘미나리촌’ 명성 ◆냉천 약수터 달성군은 ‘수향(水鄕)’이다. 무려 5가지 버전의 약수가 있다. 첫째가 ‘냉천(冷泉)’. 냉천은 ‘한천(寒泉)’으로도 불린다. 냉천(冷泉)이란 마을 이름은 국내에 모두 6곳(달성군 가창면,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전남 구례군 마산면, 경주시 외동읍, 영천시 금호읍, 경남 창녕군 성산면)에 흩어져 있다. 우리말로 풀면 ‘찬샘’. 냉천은 지명이기도 하고 한 약수터의 이름이기도 하다. 대다수 사람은 그 약수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냉천이란 지명을 짐작게 하는 약수터가 지금은 사찰로 변한 냉천의 한 유명 닭백숙집에 있다. 그 식당 이름은 ‘찬샘집’. 둘째는 대일리의 ‘대림생수’, 셋째는 행정2리의 산속에 있는 ‘황물탕 약수터’, 넷째는 옥분리에 있는 ‘옻샘(옻약수터)’, 마지막엔 광덕사와 운흥사의 약수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파워풀한 닭백숙촌으로 불렸던 냉천유원지 상가는 성주식당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전성기에는 쌍바위, 성주식당, 버들집, 찬샘집, 높은집, 청수장, 냉천장 등 7곳이 운집해 있었다. 스파밸리와 힐크레스트(옛 허브힐즈) 상권과 맞물려 냉천 푸드타운이 형성되면서 닭백숙촌은 지역민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현재 혼자 남은 성주식당 서무 사장만 호시절을 그리워한다. 여기 사장들은 ‘한천교’ 신도나 마찬가지였다. 약수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상 대하듯 했다. 정월 초하루에는 아무리 추워도 정성을 올렸다. 매년 입춘 때면 자시(밤 11시~새벽 1시)에 나온 물을 기단에 올리고 맘을 정성스럽게 했다. 수소문 결과 그 백숙촌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찬샘집 약수 바위에 한천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3년 전 그 식당을 인수해 대법서원사 도량으로 만든 주지 문수 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이 식당을 인수했을 때는 잘 돌보지 않아 약수가 많이 시들어 있었단다. 다시 정비한 끝에 현재의 1급수 등급의 약수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에게 한천이란 글씨가 새겨진 약수터 바위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가 약수 원탕 입구를 가려놓은 유리를 치워준다. 상당히 오래전에 새겨진 듯한 ‘한천(寒泉)’이란 해서체 한자가 뚜렷하게 좌정하고 있다. 옥분리에 있는 ‘옻약수터’도 찾았다. 바로 옆 주민인 구성회·이순이 노부부. 이들이 이 옻약수터의 효험을 알려준다. 신약이 없던 시절, 옻 알레르기를 약을 먹지 않고 여기 약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약수터 왼쪽에 ‘구 약수터’, 바로 오른쪽엔 ‘신 약수터’가 있다. 그 사이에 신단 같은 기단이 마련돼 있다. 한때 여기에는 사찰도 있었다. 약수터를 사용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여기 올 때 절대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는 것. 근처에는 뱀이 많았고, 자연 고기를 먹은 사람이 오면 뱀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수터 뒤에 하부산이 있다. 옻나무가 많은데 옻나무 뿌리가 옻샘까지 밀고 내려왔다. 특히 가창면 행정리에는 한때 전국 각처에서 속병 앓는 사람들이 줄지어 몰려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던, 광물 성분이 풍부한 ‘황물탕’이 아직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검사를 통해 최고급 미네랄 광천수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했다. 현재 약수터 옆에 쓰러져 있는 함석 안내판에는 약수 성분 분석표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지금은 무인지경이지만 70년대만 해도 며칠 작정하고 묵으면서 그 물을 장복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고려정을 찾아서 화원자연휴양림 초입에 있는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에는 ‘고려정(高麗井)’이 있다. 500년 이상 묵은 이 고천(古泉)은 문익점(1331~1400)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1874)의 둘째아들 죽헌 문달규의 종택에 있다. 터를 잡은 인산재가 여러 집안에서 사용할 우물이 필요해 일일이 우물이 될 만한 데를 골라 단장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물을 사용하고 있다. 비슬산에 거처하던 일연 스님은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시키기 전, 훗날 인흥(仁興寺)사로 개명되는 인홍사(仁弘寺)에서 11년이나 주석했다. 그 인흥사 자리가 바로 남평문씨 세거지다. 일제 총독부의 ‘조선 보물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 마을에 높이 12척의 3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3년 출간된 ‘인흥록’에는 인흥마을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절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군에게 많은 사찰이 폐사된다. 인흥사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중기 이후 이런 폐사지는 거의 묘나 집터로 바뀐다. 온갖 길흉사 때마다 통과의례 음식을 장만할 때 이 샘물을 사용했다. ◆정대 미나리 이런 수질 덕분에 청도 한재미나리와 힘을 겨룰 수 있게 된 국내 메이저급 미나리로 등극한 정대미나리. 이젠 화원읍 본리·명곡 미나리촌까지 가세했다. 연초록이 난무하는 4월 중순. 기자는 정대 미나리촌을 찾았다. 청록 정대미나리작목반의 지난 역사를 잘 알고 있고 본인도 상당한 규모의 미나리밭을 갖고 있는 ‘벚꽃집 아저씨’로 불리는 김정복씨(70). 그를 통해 정대미나리의 뒤안길을 챙겨볼 수 있었다. 88년 미나리 키우는 농부로 변신한 김씨. 한때는 대구역전 최고의 포장마차 사장이었다. 달성군 옥포면 출신인 그는 30대 초반에 권리금 500만원을 주고 대구역전에서 ‘복이집’이란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당시 역전에는 딸랑이엄마, 홍합아지매, 기복이부인, 계란아지매 등 7동의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뤘다. 거기서 적잖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포장마차는 롯데백화점 대구점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된서리를 맞는다. 사업까지 난관에 봉착, 적잖은 돈을 날린다. 2부 인생을 농사로 시작하자고 맘을 먹는다. 아내와 정대 골짜기로 들어와서 자기만의 ‘전원일기’를 쓴다. 당시에는 헐티재로 넘어가는 지방도가 비포장이었다. 93년에야 포장이 끝난다. 그가 들어왔을 때 정대리에는 식당도 거의 없었다. 수제비와 멧돼지바비큐를 잘했던 큰바위집, 정대숲 안에서 칼국수 두부 닭백숙 등을 팔았던 가게 두 곳이 전부였다. 지금은 명물이 된 미나리조차 없었다. 현재 정대마을회관 근처에 자기 논이 있었던 추병수씨(2002년 83세로 작고). ‘추 노인’으로 불렸던 그가 오늘의 정대미나리 농사의 터전을 닦는다. 어느 날 대구시 서북쪽 변두리 미나리밭에서 미나리를 키우던 한 사내가 추 노인을 찾아와 논을 임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조건도 괜찮고 해서 추 노인은 그 사내에게 논을 넘긴다. 하지만 빚만 지고 사내는 정대를 떠난다. 사내가 떠나자 빈 논을 보고 있던 추 노인은 쌀농사보다 미나리 농사가 훨씬 경제성이 있을 것 같았다. 정대미나리가 인지도를 갖게 된 것은 헐티재로 가는 길이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판로가 괜찮았다. 이에 고무된 주민들이 하나둘 가세한다. 두 번째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은 김정복씨. 그다음에 최판용, 최우석, 장일란, 이근만씨 등이 가세를 한다. 16년 전부터 청록 정대미나리작목반이 만들어진다. 11년 전부터 농장별 간이 판매대가 설치된다. 현재 길거리 판매대에서 미나리를 파는 사람은 최우석, 최판용, 김정복, 이말돌, 이영환, 이영만, 우진기, 김재현, 이영태씨 등이다. 재배 면적은 족히 1만6천500㎡(5천평)가 넘는다. 한재는 이른 봄에 한 번 반짝 특수를 누린다. 반면 정대는 2월~4월 초는 하우스용, 4월 초~5월 말은 더 부드러운 노지 미나리를 판매한다.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5.1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 ‘레이지 모닝’ 홍사광·배현진
프랑스는 누가 뭐래도 일본과 함께 제빵의 메카. 가장 프랑스적인 빵은 뭘까. 단연 바게트와 페이스트리가 아닐까 싶다. 페이스트리도 두 종류. 무발효면 ‘퍼프(Puff) 페이스트리’, 발효하면 ‘데니시(Danish) 페이스트리’라 한다. 크루아상은 데니시 페이스트리. 겉은 운모·층석처럼 파삭하게 잘 부서지는 반면 속은 촉촉한 벌집 구조를 가진 ‘크루아상(Croissant)’. 유래가 재밌다. 1683년쯤 오스만제국(터키)이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할 당시, 헝가리의 한 제빵사가 우연히 굴을 파 기습하려던 적의 침입을 엿듣게 되었고 이를 즉시 성주에게 알려 적을 막을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제빵사는 그 지역 귀족들에게 빵을 납품할 수 있게 된다.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든다. 이후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후가 되면서 프랑스로 퍼진다. 최근 프랑스가 크루아상을 자기 것이라 우기자 터키는 크루아상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 모양을 본떠 만든 ‘달빵’이 원형이라고 맞서고 있다. 아무튼 그 크루아상이 대구에도 상륙해 세몰이를 시작했다. 17C 오스트리아서 유래 초승달 모양 빵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되면서 佛로 전파 충남지역 대학 제과제빵과 출신 두 청년 ‘나이 적을때 망해야 재기확률 높다’신념 월급 등 꿈 실현 자금 마련 후 장소 물색 ‘전국순례’ 100여곳 중 2010년 대구 낙점 중앙로역 인근 미니커피숍 ‘로더’2년여 삼덕성당 옆 롤케이크점‘노엘블랑’이어 시청 근처에 크루아상 전문 ‘레이지모닝’ 우유버터와 유기농 재료로 갓 구워 내 ◆ 청년장사꾼 & 크루아상 대구시청 근처 크루아상 전문점인 ‘레이지 모닝(Lazy morning)’. 오후 3시 한가할 줄 알고 찾았는데 아니다. 오후의 무료한 뱃속을 크루아상으로 달래려는 20대가 적잖이 포진해 있다. 이 빵집은 커피숍·카페·레스토랑의 특징을 고루 가졌다. ‘빵은 주인이 만들고 손님은 그냥 먹는 사람’이란 고정관념도 파괴했다. 주방과 진열대를 최대한 오픈하고 손님 동선과 맞물려 돌아가도록 설계했다. 31세 동갑인 둘은 충남 홍성군 혜전대 호텔제과제빵과 출신. 2009년 졸업했다. 홍사광(이하 홍)은 서울 홍대 앞 커피숍, 배현진(이하 배)은 대한항공 케이터링 관련 베이커리 파트에 있었다. 둘의 스타일은 좀 달랐다. 이론에 강한 배는 회계학적인 감각, 반면 홍은 추진력이 강하다. 배는 머리, 홍은 몸이다. 둘은 월급만으로 짤 수 있는 인생설계는 꽝이라 생각한다. ‘한 살이라도 적을 때 망해야 재기할 확률이 높다’고 믿었다. 둘은 알바를 통해 사업 자금을 모았다. 코피가 터졌다. 손님이 남긴 안주로 허기를 기웠다. 수면은 4시간 남짓. 교통편은 지하철과 버스. 그렇게 반년 뛰어 1천500만원 정도 모았고 동시에 사표를 낸다. 새로운 창업. 꿈은 부풀었지만 실천할 탄알이 턱없이 부족했다. 1천만원이 부족해 친구들을 동원시켰다. 서울에서 사업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왜 굳이 서울이어야만 하지? 자신의 꿈을 받아줄 만한 공간을 찾아 전국순례를 감행한다. 숙박비를 아끼려 빌린 승용차에서 잤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100군데 이상을 찾아도 마땅한 가게가 없었다. 대전을 떠나 포항으로 가던 중 무심결에 대구에 오게 된다. 거기서 권리금 없는 가게를 잡게 된다. ◆ 맨땅에 헤딩하듯 개업 두 달간 개업준비. 공사도 직접 챙겼다. 2010년 가을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3번 출구 앞에서 ‘로더(Lodeur)’란 미니커피숍을 차린다. 주메뉴는 커피와 쿠키. 아메리카노를 1천500원에 팔았다. 달리 수가 보이지 않아 일단 박리다매로 갔다. 쿠키도 딱 두 종류(버터·초코쿠키)만 구웠다. 첫날 매출은 7만원.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가게 바닥에 스티로폼을 요처럼 깔고 잤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때 울컥한 기분에 홍이 배한테 편지를 보낸다. ‘맘이 맞지 않아 우정에 금이 갈 것 같으면 사업을 접자. 우정을 잃을 순 없잖은가?’ 그걸 읽은 배도 홍에게 같은 의미의 답장을 보냈다. 둘은 그 편지를 지금도 부적처럼 지니고 있다. ‘동업하면 찢어진다’는 통설을 뒤엎고 싶었던 것이다. “7만원의 숫자는 절망의 숫자가 아니라 시작의 숫자였어요.” 거기서 2년을 버텼는데 1년은 적자. 매달 50만원 정도 갖고 갔다. 직장 시절보다 훨씬 못했다. 2년차부터 단골이 생기기 시작한다. 월 200만~300만원을 찍었고 나중에 월 1천만원 매상을 올린다. 2년차까지는 전공인 빵보다 커피에만 집중했다. 슬금슬금 지치기 시작한다. ◆ 재충전의 필리핀 여행 가게 정리하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는데 갑자기 필리핀으로 간다. 한 사업가가 둘에게 필리핀 현지 카페 창업컨설팅을 요청한 것. 하지만 현지에서 괴한한테 납치당할 뻔한 사고를 당한다. 도망치듯 대구로 온다. 정신 차리고 중구 삼덕성당 옆에 ‘노엘블랑’이란 베이커리카페를 차린다. “유명 브랜드 세상이라서 커피만으로는 승산이 없었어요. 그래서 빵을 잡은 거죠.” 비로소 둘은 주특기를 발휘해 롤케이크 전문 커피숍을 차린다. 무려 14가지 롤케이크를 팔았는데 당시 지역 첫 케이크 전문점으로 알려진 ‘최가네’와 차별된 뭔가를 선보여야만 했다. 그래서 롤케이크 하나만 잡았다. 기존 케이크는 크림이 아니고 잼이 주종이었다. 둘은 일본 ‘도지마 롤케이크 버전’을 벤치마킹했다. 잼을 버리고 유기농 생크림을 잡았다. 기본 생크림부터 티라미수, 녹차, 단호박, 고구마 등도 차례로 사용했다. 버터, 유화제 등을 사용하지 않는, 임산부와 아이까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힐링 케이크’를 홍보포인트로 잡았다. 커피도 드립해주고 곁에서 직접 케이크도 만들어냈다. 석 달째부터 정상궤도. 그사이에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에서 카페 하나를 위탁경영했다. 커피와 기본 쿠키 정도를 파는 테이크아웃점인데 1년 정도 했다. 이제 밑바닥 경험은 끝. 크루아상을 위한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크루아상 위한 유럽여행 크루아상 때문에 유럽의 기본적인 빵문화를 체득하기 위해 한 달 벤치마킹 유럽투어를 떠난다. 미슐랭 스타 음식점도 가봤다. 한국이 유럽·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걸 감안할 때 아직 대중화는 안 됐지만 조만간 크루아상 붐이 불 것 같았다. 유럽에선 크루아상이 이미 주식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기존 롤케이크는 유행을 많이 탈 것 같았다. 반면 페이스트리는 유행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배가 적극적으로 나서 서울 강남구 한남동 아티장베이커스 대표인 모태성씨 밑에서 한 수 배우고 온다. 크루아상 메뉴는 4종(기본·아몬드·크림·초코), 구운 과자는 마들렌 등 6종, 치아바타·버터프레츨 등 모두 14종의 메뉴라인이 형성된다. 둘은 승리를 위해선 최고의 재료만 사용하고 종일 빵을 구워내자고 다짐한다. 당일 판매 원칙, 남는 건 푸드뱅크에 기부. 저급한 마가린과는 결별하고 더 비싼 100% 우유버터만 고집한다. 밀가루는 프랑스·캐나다산 밀가루와 유기농 통밀을 섞어 사용했다. 시간대별 빵 판매량 추이를 분석하곤 하루 5~6회 빵을 굽는다. “오븐에서 나온 뒤부터 빵의 노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1~2시간마다 갓 구운 걸 팔려고 한 거죠.” 크루아상은 적당하게 층이 잡히도록 접어줘야 된다. 현재 55겹(90g)을 유지한다. 200겹 이상도 가능하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식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겹 수가 적으면 겉은 파삭한데 기름기가 많이 빠지고 수분기가 부족한 반면 겹이 많으면 파삭한 식감은 줄고 대신 속은 부드럽고 촉촉한 것 같아요. 너무 발효를 많이 하면 결이 예쁘게 안 나와요. 공기층도 벌집 구조가 유지되도록 합니다. 무척 까다롭죠?” 기본형 크루아상을 한 점 씹었다. 파삭한 겉은 과자, 속은 빵, 침과 함께 식도를 넘어갈 땐 떡의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개 평균 4천원. 묵직한 가격이지만 재료를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웃을 때 둘의 표정은 ‘누룩톤’.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의 위대한 힘을 비로소 깨달은 걸까. 더 큰 꿈이 있다. 맘이 맞는 열정파 청년에게 일자리를 안겨주고 싶단다. 식재료를 공유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빵체인’이다. 직원이 사장이 되는 구조. 이들이 독립해 자기 가게 내고 서로가 정보를 공유하는 ‘행복한 빵공동체’를 찾는 것이다. “양심이 없으면 셰프도 없죠. 더 잘될수록 더 만족해선 안 됩니다.” 의미심장한 첨언을 주곤 서둘러 작업장으로 사라지는 두 남자. 갑자기 빵집이 수확 직전의 밀밭처럼 일렁거린다. 매주 일요일 휴무. 중구 동인2가 56-9.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5.1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로스터 리 커피하우스’ 이선기
로스터 리(LOASTER LEE). 대구 중구 방천시장 김광석길 골목 중간에 자리한 ‘로스터 리 커피하우스’ 이선기 대표의 닉네임이다. 종일 사람으로 들끓는 시장 동쪽 구역에 비해 그의 가게 앞 길은 늘 한산하다. 그의 말로는 ‘여기서 제일 부산한 건 바람뿐’이란다. 그 무료한 골목에서 그는 아내(조문경)와 함께 매일 바다를 건너온 커피 생두를 10번 정도 볶는다. 손님이 오면 직접 드립해준다. 그는 종일 음악과 커피 사이에서 재밌게 논다. 그는 한때 대구의 골수 재즈마니아로부터 재즈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게에 들어가니 주인보다 더 컬러풀한 자태의 7종류의 원두가 빵긋 인사를 한다. 시다모(에티오피아), SHB 안티구아(과테말라), 수프리모(콜롬비아), 예가체프(에티오피아), 만델링(인도네시아), 케냐 AA(케냐), SHB 따라주(코스타리카). 이 7남매도 그의 가족. 커피를 패션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커피의 본질을 직시하기 어렵다. 노래도 각양각색 장르로 나눠지듯 커피도 나무 수종에 따라 맛도 제각각. 수종은 크게 아라비카·로부스타·리베리카로 갈라진다. 전 세계 유통 커피의 70%가 아라비카. 이 수종은 병충해에 약해 재배하기도 무척 어렵지만 산도가 높고 향도 진해 전 세계 로스터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로부스타는 재배가 수월한 반면 향이 부족해 아라비카에 비해 저렴해서 저가커피 관계자들이 선호하는 수종이다. 리베리카는 나무가 너무 커서 재배하기가 어렵고 쓴맛이 지나쳐 시장에선 외면받고 있다. 로스터 리. 아라비카종과 손을 잡은 그가 커피향과 동고동락했던 씁쓸했던 재즈클럽 사장 시절을 회상한다. ◆ 차렸다 하면 망했던 재즈클럽 계명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화가의 길을 갈 것 같았는데 그에겐 그림에 대한 열정 이상으로 생계가 더 절박했다. 1988년 대구 첫 재즈클럽 ‘올드뉴’가 생겼을 때 지역에서도 제대로 된 커피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도 그 흐름과 함께했다. 사인펀 등을 이용해 원두커피를 추출해 먹었다. 서울에서 광고인테리어 일을 하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생애 첫 재즈클럽 사장이 된다. 1997년 중구 통신골목 중간에서 태어난 ‘붕어’다. 지금은 서울로 가버린 은둔형 소설가 장정일. 그는 장정일과의 추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북부정류장 근처 허름한 주택에 살았던 장정일은 아예 붕어로 출근을 했다. 보던 책을 팔아 산 새 재즈 음반을 들고 와 종일 죽치고 앉아 재즈에 샤워를 했다. 덜컥 첫 애까지 태어났다. 2000년 삼덕성당 뒷골목에서 ‘코너(Corner)’를 오픈한다. 붕어 시절부터 함께했던 장정일 등 2명이 동업자로 가세한다. 하지만 코너도 무력했다. 다시 장소를 물색했다. 2003년 2·28공원이 보이는 곳에서 ‘인디고’란 클럽을 열었다. 세 번째 재즈클럽이었다. 이때 색소포니스트 박시홍 등 지역 재즈뮤지션이 출연료와 상관없이 열정페이 무대를 가졌다. 하지만 남는 게 없었다. 설상가상 도둑이 들어 괜찮은 음반을 다 가져가버렸다. 죽을 맛이었다. 재즈클럽에 대한 미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번의 재즈클럽 실패. 아내도 슬금슬금 남편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클럽을 그만둔 그는 이후 별별 직군을 전전한다. 정육점에서 발골도를 갖고 갈비살점을 발라내는 알바도 해봤다. ◆ 재즈맨에서 커피맨으로 그런 와중에 서울에 있던 커피회사 ‘루왁코리아’에서 연락이 왔다. 사장(이정무)과 그와는 동서 간이었다. 동서는 재즈클럽 시절, 이탈리아제 커피머신을 구입하는 등 단 하루도 커피를 손에서 놓치 않고 있었다는 걸 알고 그 근성을 인정했고 결국 그에게 딱 맞는 일을 제안한 것이다. 2007년 가족을 대구에 두고 재즈클럽의 쓰디쓴 추억을 뒤로하고 상경한다. 그의 말마따나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의 심정’이었다. 동네 선배한테 대충 당구를 배우면 절대 고수가 못 되는 법. 기본기를 확실히 배워야 된다. 당시 한국 커피 1세대의 리더격으로 불렸던, 강릉의 커피숍 ‘보헤미안’의 대표 박이추 문하에 들어간다. 사실 강릉이 한국 커피1번지로 급부상한 것도 보헤미안과 후발주자 ‘테라로사’ 등이 한몫을 했다. 장정일이 보던 책 팔아 음반 사서 찾던 곳 1997년 통신골목 재즈클럽 ‘붕어’주인장 이후 ‘코너’ ‘인디고’까지 세차례 폭망 재즈클럽 시절부터 그의 손엔 늘 커피 2007년 동서 제안에 상경 ‘로스터의 길’ 韓 커피 1세대 리더 박이추 문하서 사사 대구 방천시장 김광석길 중간 언저리 현재 하루 10차례 로스팅해 드립까지 에티오피아 시다모 등 7種 커피맛 선사 아무튼 루왁코리아 직원 자격으로 박이추 교주한테 몇 수를 배우려고 했다. 그때 깨달은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이 세상에서 커피가 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쩜 아무도 없다는 생각,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조건에 따라 커피의 본질은 교과서에 배운 것과 확연하게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기타의 거장 세고비아가 임종 때 “나도 기타가 정확하게 어떤 악기인지 잘 모른다”고 고백했듯 사부도 “아직 커피를 가르칠 정도는 아니고 계속 배우고 있는 처지”라고 그에게 귀띔해줬다. 그는 그 교주의 겸손한 고백에서 엄청 자신감을 얻었다. 커피에 대해 한없이 겸손해질 수 있었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회사 전용 생두 볶는 로스팅룸이 있었다. 그에겐 ‘매혹적인 감옥’이었다. 많이 볶을 땐 1주일 2t씩 감당했다. 공장표 원두는 양보다 동질의 품질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자기 기분대로 볶는 건 거기에선 통용되지 않았다. 표준화가 생명이었다. 그래야만 체인사업도 가능했다. 머신 옆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콩의 색깔을 판별해야만 했다. 시간대별로 변화되는 상황을 일지처럼 기록했다. 그 엄청난 양을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사용하지 않은 근육을 사용해야 하니 늘 급피곤이 엄습했다. 졸다가 오버히트돼 버린 콩도 적잖았다. 로스팅 머신을 210℃ 근처에 맞춰두고 신맛이 강조되는 ‘약배전’, 구수하고 묵직한 맛이 특징인 ‘강배전’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따다다닥~. 콩이 볶이면서 균열이 형성되는 소리(POP)는 재즈 드러머의 브러시스틱이 북의 표면을 스치는 사운드를 닮았다. 로스팅이 재즈 공연 같았다. 첫 팝에서 1~2분 지나면 두 번째 팝이 생긴다. 커피는 15분 안팎에서 볶는 승부가 결정난다. 거기에 불의 온도와 양, 그리고 굽는 시간을 안배해야 하는 도공의 육·직감이 필요하다. 매뉴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같은 일의 반복. 어느 날 갑자기 로스팅룸에서 콩 볶는 일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나만의 예술적 로스팅의 세상을 맛보고 싶었다. 2013년 대구로 내려왔다. 그는 요즘 유럽형 수제 로스터 ‘하스 가란티’를 사용한다. 더 큰 용량도 있지만 그는 그게 딱 맞는단다. 사용하는 생콩은 10종이 있다. 바다를 건너 온 커피콩, 이놈의 수분 함유량, 콩의 크기, 콩의 밀도를 봐야 하고 특히 로스터에 들어갈 땐 콩의 크기가 일률적이라야 골고루 열기가 닿게 된다. 크기가 들쭉날쭉하고 상하거나 너무 말라버린 걸 선별하지 않고 볶으면 그게 맛에 치명상을 준다. 그가 커피맛에 영향을 주는 건 생두·로스팅·드립퍼 순이라고 했다. 중요한 건 좋은 생두를 사용하는 건데 저가의 로부스타종을 쓰면 아무리 탁월한 로스터라도 커피 본연의 맛을 내기 어렵단다. 중구 동덕로 14길 29. (053)291-1824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이선기 대표가 말하는 ‘맛있는 커피’ 로스팅 3~5일 원두·1분30초 드립 일미 저급 로부스타種 사용 커피숍 난립 우려 요즘 저가 커피숍이 난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집의 생두가 대다수 저급한 로부스타종인데 대다수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싼 집으로 몰려가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다. 볶은 후 3~5일이 가장 맛이 좋은 것 같다. 커피 알갱이 굵기는 0.3~0.4㎜가 적당하다. 너무 가늘면 드립 시간도 길어져 쓴맛이 강해진다. 드립 시간은 1분30초 정도가 적당한 듯하다. 로스팅 자체는 기술이지만 커피맛을 낼 때는 매뉴얼 이상의 뭔가가 섞여야 된다. 그 뭔가는 ‘소울(Soul)’이다. 콩볶는 집? 그게 ‘쇼’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솔직히 일반 가게에서 주인이 직접 볶고 드립하고 서빙까지 하기는 무리다. 있어 보일 것 같아 일단 전후 사정 안 가리고 무턱대고 기계부터 사놓는다. 잠시 볶는 걸 보여주다가 문닫는 집이 부지기수다. 배우려는 사람이 오면 “일단 큰 공장에 가서 밑바닥부터 시달려본 뒤 이 길을 계속 갈 건지 결정해라”고 조언한다. 책, 인터넷 정보 등은 솔직히 안 믿는 게 좋다. 많이 먹어보고 시행착오 끝에 더 깊은 맛을 알아가는 거지, 배워서 절대 아는 건 아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4.2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 ‘골목 카페’ 이정연 셰프
향촌동·북성로. 영욕의 세월을 건너왔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는 절정의 호경기. 특히 북성로와 향촌동으로 연결되는 자잘한 골목엔 유달리 여관과 전당포가 많았다. 경기가 그만큼 좋았다. 하지만 그 골목은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일락서산(日落西山) 같은 신세. 폐광된 탄광촌 같았다. ‘도심공동화’의 표본이랄 정도로 황량해져버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은 철거대상 1순위로 지목됐다. 다행히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중구청의 도심재생사업이다. 여러 건물이 심폐소생술을 받게 된다. 향촌동 여관골목의 한옥형 카페 건물 차정보 고건축물 복원 전문가 야심작 별칭 ‘골목에 봄’답게 예쁜 파스텔풍 여수 출신 50대 女 오너셰프가 주인장 고추장 요리에 훅 빠져 택호도 ‘순창댁’ 2014년 순창에 남편이 만든 ‘봄’ 이어 낯선 대구서 고추장요리로 한판 승부수 바른 식재료로 요리‘정직한 음식’ 원칙 엄마 찾아가는 기억의 지도 그리듯 요리 1년여 연구로 고추장요리 3인방 탄생 26일까지 ‘…놀자전’ 예술공간 활용도 ◆ 친절한 순창댁 향촌동 여관골목. 여긴 양지보다 ‘음지’가 더 푸짐하다. 대낮에도 그늘이 8할 이상. 그런데 올해 그 골목에 외계인 같은 카페 하나가 ‘홀씨’처럼 피어났다. 카페 이름은 ‘골목’. 이 카페의 별칭은 ‘골목에 봄’이다. 고건축물 복원 전문가이자 ‘다연발 예술쟁이’로 불리는 차정보가 지은 건물이다. 하얀 아크릴 간판이 담장 위에 메주만 하게 앉아 있다. 담장 위 강아지풀과 마당 복판의 억새가 수런·일렁거린다. 정면은 한옥, 오른쪽은 요즘 카페 스타일. 신구 건축물의 절묘한 앙상블이다. 낡은 골목이라서 카페는 한몫 더 빛날 수 있었다. 드문드문한 행인들에겐 더 ‘느닷없는 보너스’ 같다. 한겨울 같은 골목에 비한다면 이 파스텔풍 카페는 그야말로 ‘봄날’. 그런데 참 사각지대다. 장사가 도무지 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 온 한 여성 오너셰프가 이 공간을 임차했다. 이정연 골목 카페 대표(51). 그녀에게 ‘택호(宅號)’가 있다. ‘순창댁’이다. 고향은 여수인데 워낙 고추장 요리에 빠져 있고 ‘고추장 셰프’로 인터넷에서 조금씩 알려져서 그렇다. 현재 순창과 대구를 오가면서 양식 같은 고추장요리 전파에 여념이 없다. 여느 셰프처럼 음식에 달통한 실력파는 아니다. 음식 갖고 ‘재밌게’ 논다. 그런 그녀가 고추장파스타와 고추장돈가스를 갖고 대구 입맛과 한판 붙기 위해 대구행을 결심한 것이다. ◆ 예술과 동거한 음식 순창댁에겐 대구가 퍽 낯설다. 인맥이 제로였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지역의 몇몇 예술가와는 찰떡궁합. 그 때문에 큰맘 먹고 대구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차정보다. 그와의 인연으로 이 카페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대구·부산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도 순차적으로 알게 된다. 오는 26일까지 이 카페에서는 ‘북성로 골목에서 놀자’전이 열린다. 정태경, 변미영 등 지역에서 좀 놀 줄 아는 작가 16명의 작품이 전시된다. 실은 전시를 가장한 ‘음주가무 행사’랄까. 순창댁의 남편은 순창에 있다. 주말부부다. 남편은 양식, 그녀는 한식에 능하다. 남편이 순창에서 꾸려가는 카페 ‘봄’에서 먼저 ‘봄에서 놀자’전을 론칭했다. 1박2일간 술을 푸고 놀았다. 아무튼 차정보의 아들이 아버지가 신축하다시피 한 대구의 골목 카페에서 먼저 커피를 팔고 있었다. 그런 언저리에 순창댁이 고추장을 권총처럼 차고 장고처럼 나타난 것이다. 곱게 생겨 남들은 ‘팔자 편한 삶’인 줄 착각한다. 그런데 아니다. 10대 후반에 엄마가 타계했고 이후 남편을 만나 서울에서 살림을 시작할 때까지 빡센 세월이었다. 아이 셋을 낳고 현모양처로 살던 2013년 어느 날. 시부모 두 분이 동시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외아들인 남편이 병간호를 전담해야만 했다. 운명이었다. 시댁 어른이 운영하는 업을 이어받아야만 했다. 비즈니스호텔을 짓기 위해 귀촌을 결심한다. 요리에 관심 많고 엉뚱하고 핫한 아이디어맨인 남편. 모 건설사 구매팀에서 20년 이상 재직하다 퇴사한다. 순창댁도 처음에는 서울과 순창을 오가며 놀 요량이었다.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 설계가 몇번 엎치락뒤치락. 고심 끝에 레스토랑을 연다. 대학에서 한식 강의하는 시누이에게 몇 개월 속성으로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나머지는 현장에서 피 튀겨가면서 시행착오 겪으며 몸으로 익혀나갔다.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2014년 순창에서는 새로운 버전인 한정식카페 ‘봄’이 탄생했다. 일단 맛있는 음식보다 ‘정직한 음식’을 내자고 결심한다. 시대가 힐링푸드 시대라서 그랬다. 그런데 주위에 너무 맛있는 식당이 즐비했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선 이길 수 없다. 몇 가지 원칙을 정한다. 일단 식재료를 속이지 말자,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요리를 하자, 화학조미료 도움을 일절 받지 않겠다 등이었다. 참기름은 농사지은 깨를 방앗간에서 직접 짜서 사용했다. 고춧가루도 산지의 농민 걸 사용했다. 그때 그녀는 ‘요리란 엄마를 찾아가는 기억의 지도’란 독백을 자주 했다 한다. ◆ 음식에 문화를 섞어라 늘 ‘음식은 문화’라고 생각했다. 음식은 먹는 게 아니라 ‘감상’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요리할 때 사용하는 두건도 패션모자 스타일로 변형했다. 문화예술인이 절실했다. 그들 모두 최고의 ‘인테리어’였다. 그들이 자주 오도록 해서 갤러리·공연장 같은 카페로 반죽해나가고 싶었다. 봄 카페는 단번에 전라도 지역 문화예술인의 쉼터로 변해나갔다. 이재무, 림태주, 최돈선, 이호, 황풍년, 임재천, 백중기, 연규현 등 예술인들을 불러 작가와의 만남도 마련했다. 작은 음악회도 덧댔다. 돈이 안 되는 출판사 사장 림태주를 위해 출판사 ‘행성B잎새’ 책 코너도 카페 한편에 마련해줬다. 순창댁의 계획이 적중했다.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봄은 1년 만에 모범음식점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제 순창에서도 문화의 향기가 피어나는 제대로 된 한정식집 하나가 생겼구나’란 덕담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문제였다. 그녀는 워커홀릭 상태였다. 일에 빠져 있어 쉴 틈이 없었다. 대상포진이 수차례 재발했다. 툭하면 입원이었다.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았다. 결심했다. 매출의 80~90%를 차지하는 한정식을 과감히 없앴다. 식당의 메뉴라인을 혁파했다. 고추장파스타 전문점으로 바꿔나갔다. ◆ 고추장파스타 만들기 대구로 내려온 건 일종의 ‘숨고르기’ 절차. 순창댁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고추장소스를 이용해 퓨전파스타 메뉴라인을 만들어 볼 요량이었다. 신메뉴를 개발할 때 다들 ‘고추장과 파스타는 상극’이라고 말렸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기존 고추장만 갖고는 제대로 된 파스타를 만들 수가 없었다. 파스타에 잘 스며들어갈 수 있게 기존 고추장을 잘 숙성시켜야 한다. 공장표 장 갖고는 얘기가 되지 않았다. 다른 재료를 첨가해서 맵지도 텁텁하지도 않은 최적의 파스타용 특제 고추장을 별도로 만들어야만 했다. ‘고추장이 잘 어울리는 파스타를 만들면 그건 퓨전한식의 쾌거’란 믿음을 가졌다. 남편이 시식을 거들면서 맛의 오차를 줄여나갔다. 첫 개발품을 내놓았다. 젊은층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너무 텁텁하다는 지적이었다. 신세대의 입맛을 무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다소 매콤한 맛이 가미된 파스타를 선호했다. 이 두 계층의 입맛을 고추장소스가 만족시키려면 고추장의 양, 불 조절, 숙성 시간 등 고려해야 될 변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손님한테 낼 때도 올리브오일에 고추장소스를 먼저 버무려 파스파 위에 올려서 갖고 가면 퍼지기 일쑤였다. 아이·청년·실버세대가 모두 좋아할 수 있는 고추장파스타. 국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선 아주 생소한 메뉴였다. 그 메뉴는 온라인상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1년 이상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고추장의 텁텁한 맛을 우유 등을 활용해 부드러운 맛으로 숙성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소스에 다진 소고기도 섞어넣었다. 식감과 향을 위해 한국형 대표 허브로 불리는 깻잎을 썰어 고명으로 올렸다. 중앙 공중파는 물론 전북의 방송3사에도 동시에 소개되고 순창장류축제에도 210인분을 출품했다. 고추장파스타에 이어 고추장돈가스도 개발했다. 돼지고기 등심, 고추장, 샐러드, 과일 등이 합쳐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요리에서 핵심 식재료로 주목받는 달팽이(에스카르고)에 고추장을 가미한 달팽이파스타까지 태어났다. 달팽이는 수입 캔에 든 게 아니다. 순창군 풍산면 ‘참살이 달팽이 농장’에서 키운 달팽이를 받아 사용한다. 이로써 ‘고추장 파스타 3인방’이 구축된 것이다. 우렁이가 들어간 강된장은 ‘봄’이란 라벨을 붙여 일부에만 팔고 있다. 심심한 게 아니고 ‘섬섬한 맛’이다. 기본 조미가 잘 돼 있어 초보 주부가 된장국 끓일 때 사용하면 괜찮을 것 같다. 고추·된장은 매년 시어머니와 함께 만든다. 그 장맛이 무너지면 식당 메뉴라인도 무너진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매주 월요일은 휴일. 일요일 밤 10시면 쉴 틈도 없이 남편이 있는 순창으로 차를 몬다. 순창에 가면 대구에서 사용할 1주일 치 고추·된장을 20여통 갖고 올라온다. 맥주는 독일수제맥주. 서울에 업장을 갖고 있는 장 앤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순창군 인계면에 순창 공장을 만들고 독일맥주를 생산하는데 그중 IPA순창, 라우크비어 밤 베르크, 스위트스타우트 등 4종을 여기서 판다. 안주는 삼진어묵과 함께 부산 어묵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고래사’의 수제 프리미엄 어묵이 어울린다. 포항 죽도시장에서만 판매된다는 ‘개복치’ 살 맛을 닮았다. 중구 경상감영1길 62-5. (053)426-2006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4.1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교동시장 먹자골목
한때 국제시장과 함께 한강 이남에서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구축한 가장 강력한 상권으로 불렸던 ‘교동시장’. 교동(校洞)은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인 향교가 있던 곳. 교동시장은 동네이름이 교동(법정동)이라서 ‘교동에 있는 시장’이란 뜻이다. 1956년 정식 허가를 냈다. 행정동은 중구 성내1동. 1950년대는 정식 시장의 틀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무허가 좌판과 난전이 얽힌 한마디로 ‘도떼기 시장’이었다. 광복 직후엔 달성권번과 함께 대구의 기생양성교육기관이었던 ‘대동권번’이 현재 교동백화점 자리에 있었다. 전쟁 중 많은 물자가 동촌비행장과 대구역을 통해 들어왔다. 시청에서 남전(남선 전기·한전의 옛 이름)까지는 수많은 지게꾼과 ‘리야카(리어카)꾼’, 그리고 ‘말 구루마꾼’이 품을 팔기 위해 모여 있었다. 63년 골목에 노점들 하나둘 들어서 72년 동아백화점 개점과 함께 성업 80년대 60여 곳 호황…현재 10여 곳 현대화로 2009년 소라 좌판도 정비 50여년 빈대떡 부친 전문자 할매 등 골목 가득 ‘분식요리 匠人’ 내공 발휘 ◆FROM 1956 보따리 무역을 통한 수입물품과 군수품을 기반으로 1970~80년대는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먹자골목을 지나면 옷가게 골목, 컴퓨터와 가전제품 메카인 전자골목, 귀금속거리, 수입식품, 오디오, 조명상가 등이 섹션을 이루고 있다. 양키시장은 미군 군복과 군화, 구제품 등 미국제품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 예전에는 현역 한국군과 미군이 사용하던 걸 음성적으로 유통시켰는데 이제는 서울 동대문 패션특구에서 ‘밀리터리룩’이란 버전으로 만들어 전국에 팔고 있다. 교동 군복도 그 흐름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군복 전문점은 6곳이 몰려 있다. 미군정기가 시작되며 미군부대에서 쏟아져 나온 군수품이 교동에서 팔리기 시작했고 전자골목도 그 군수품에서 시작됐다. 부대에서 나온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들이 시장에서 팔렸던 것. 정식 시장으로 허가를 받으면서 번듯한 점포를 내고 전자제품만 취급하는 대동전자 같은 가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자가 40여개, 전기·조명 30여개, 가전 30여개, 컴퓨터 80여개, 오디오 20여개 등 200여개의 관련 가게가 모여 있다. 컴퓨터는 IMF 당시가 가장 장사가 잘됐는데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PC방 창업을 하면서 갑자기 수요가 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유통단지와 대형마트의 등장, 인터넷쇼핑몰 활성화 등으로 골목 분위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골목을 찾는 사람은 많다. ‘교동에 오면 없는 게 없다’는 말처럼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경북이나 경남 등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교동 먹거리골목 교동시장의 이름을 한껏 올려준 골목이 있다. 바로 72년 동아백화점 오픈과 함께 절정기를 맞은 쪼그려 앉아 먹어야 제격이었던 먹자골목이다. 이 골목의 주메뉴는 ‘분식의 완결판’이었다고 할 정도로 다양했다. 그중 최고 인기는 단연 ‘납작만두’. 여기선 납작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납딱’이라고 말해야 제맛이 난다. 납작만두 옆에 적잖은 분식 메뉴가 도열한다. 김밥과 순대, 떡볶이, 소라, 감주, 오징어부침개, 빈대떡, 양념어묵 등이다. 여긴 사장보다 아줌마, 할매, 이모 등이 더 익숙하다. 86년까지 60여 개소가 호황을 누렸지만 이젠 15곳 남짓 남아 있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많은 냉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강산면옥’. 1951년 생겨나 돌풍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부산안면옥, 대동면옥 등이 등장해 대구 냉면 3인방 시대를 개막시킨다. 하지만 사업을 너무 방만하게 운영한 ‘강산호’는 침몰한다. 2001년 김재한 대표가 강산호의 선장이 돼 회생에 나선다. 65년부터 강산면옥에서 일을 한 현광옥씨가 지금 조리장으로 일하고 있다. 여기 가면 50~60년대 사용하던 철제 국수틀도 볼 수 있다. 63년쯤 먹자골목이 조금씩 형성됐다. 동아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확 피고 80년대에 최대 호황을 누렸다. 2000년부터 시장 현대화 바람이 불면서 먹거리촌이 위축, 급기야 2009년엔 그 유명한 소라 좌판까지도 정비됐다. 길을 걸어본다. 그리고 하나씩 사먹어 본다. 좌판 할매가 없어서 그런지 느낌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열차처럼 가게가 길쭉한 열차할매는 밀양 출신이다. 여긴 개그맨 김영희의 단골로 유명했다. ‘교동할매’ ‘매일분식(예전 빨간집)’, 런닝맨 등 방송을 탄 ‘개미분식’의 배명자 할매의 오징어부침개 굽는 손길은 여전히 활기차다. ‘서울순대’도 아직 내공을 안 잃고 있다. 빈대떡 명가 ‘교동할매빈대떡’ 전문자 할매도 여든이 넘었다. 이 바닥의 고목이다. 미진식당 등에서 일한 경력을 합치면 빈대떡만 만들어 온 지 50년이 넘었다. 빈대떡으로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100% 녹두전만 판다. 감주 한 잔에 1천원, 국산 배추는 한 봉지에 6천원. ◆교동납작만두 이 먹자골목에서 가장 오래 납작만두를 굽고 있는 할매는 ‘묵자집 할매’다. 그 시절 길 복판에서 고락을 함께했던 그 할매들은 이제 모두 현역에서 물러났다. 묵자 할매 혼자 만두를 굽는다. 그녀는 다른 건 안 팔고 오직 만두와 감주만 판다. 묵자집 할매는 경산시 하양에서 태어나 8세 때 대구로 와서 먹고살기 위해 행상의 나날을 보낸다. 고단한 삶, 바로 그녀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른다. 10대 때 6·25전쟁을 맞았다. 이후 60년대를 대구백화점 등 동성로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감주를 팔았다. 나중엔 김밥도 팔고 종국에는 만두에서 멈췄다. 70년대초 이 바닥에 정착해 줄곧 ‘납작만두 할매’로 살아왔다. 올해 78세. 하지만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자기집 납작만두가 제대로 반죽을 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는 식감이 확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랬다. 3천원을 내면 한 접시를 주는데 직접 수제 양념장을 수북하게 끼얹어준다. 처음 먹는 사람은 그 양에 지레 기겁하는데 먹다 보면 그 장물이 다 스며들어가 다시 장을 찾게 된다는 걸 할매는 잘 알고 있다. 교동 먹자골목은 상가 통로 한편에서 시작됐다. 좁은 상가에는 이불점, 가방코너, 비단가게 등이 몰려 있었다. 납작만두 할매는 가게 통로의 한 코너에 앉아 감주·김밥부터 팔았다. 자기 점포가 없어 단속반한테 붙들려 근처 파출소에서 하루 묵기도 일쑤였다. 나중에 동서로 길이 생긴다. 그때부터 소라 파는 할매 등 20여명의 할매가 묵약된 지점에 앉아 장사를 했다. 다들 아는 처지라 할매들의 영업행위에 딴죽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40여년 만에 그 좌판코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서로의 이권 때문이다. 할매들도 ‘그때가 할 맛이 더 났다’고 강조한다. 현재 교동납작만두는 칠성시장 내 ‘경남식품’에서 만든 것이다. 피가 유난히 얇고 밀가루 숙성 비법 때문에 식감도 여느 곳과 다르다. 원래 서구 평리동의 한 할매가 손반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술이 칠성시장 쪽으로 건너갔다고 할매가 증언해 준다. 교동납작만두를 비롯해 63년 남산국민학교 정문 맞은편에서 오픈한 ‘미성당’, 그리고 남문시장 내 ‘남문납작만두’를 ‘대구 납작만두 3인방’으로 부른다. 이 중 만두의 피가 가장 얇은 건 교동납작만두, 가장 두꺼운 건 남문납작만두다. 여기에 가세한 제4의 납작만두가 있다. 바로 서문시장 허둘순 할매가 론칭한 ‘삼각만두’, 이 만두는 달서구로 넘어가 ‘잎새만두’로 화려하게 진화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迷路 속 작은 가게 ‘다닥다닥’…말만 하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뭐든 ‘뚝딱’ ◆교동시장 60여년 한때‘도깨비시장’‘구제의류 메카’명성 2007년 상인회 출범 1천곳 중 800여 회원 취급 품목 따라‘딸라 할매’ 등으로 불려 한때 교동은 구제의류의 메카였다. 멋 좀 부릴 줄 아는 학생들은 ‘당코바지 유행’ 때 교복의 바짓단을 확 줄이기 위해 여길 찾았다. 덩달아 맞춤 남방 및 수선집도 붐을 일으켰다. 숱한 수예용품·단추·지퍼점. 미제 ‘간주메(통조림)’ ‘만능 로션’으로 불렸던 미군부대 바세린과 손톱깎이도 여기 와야 구할 수 있었다.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 양주는 교동이 ‘판쓸이’했다. 도깨비시장. 외제물품 단속반이 떴다 하면 상가마다 그 많던 물건이 순식간에 감춰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점에서 손님이 주문만 하면 무엇이든지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 낸다고 해서 얻은 닉네임. 교동시장 상인회는 2007년 3월에 정식으로 출범해 현재 1천여 상가 중 800명이 회원으로 등록한 상태다. 아직도 폭이 1m 남짓한 미로가 주먹구구식으로 연결돼 있다. 60년 역사가 건물 곳곳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서문시장처럼 대형화재가 없었던 때문이다. 평생을 교동시장에서 보내온 한 양품점 할매를 찾아갔다. 양갱, 다시마캔디 등 주로 일본 과자류를 많이 팔고 있었다. 기자의 로드인터뷰 요청을 받은 터줏대감 할매는 돌연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가게를 떴다. 그녀의 눈에는 기자가 단속반으로 보였을 것이다. 미로의 양품점은 교동시장의 ‘숨겨진 근육’이다. 다들 1평(3.3㎡) 남짓, 하나같이 상호도 이름도 필요 없다. 아동용 한복을 주로 파는 곳을 ‘애기한복 할매’로 부르는 식이다. 처녀시절 여기 들어와 백발이 돼버렸다. 20년 역사를 가진 갱시기·육개장·고디탕 전문인 ‘친정엄마’의 이선희 사장(63). 유달리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그녀는 이곳 할매가 하나같이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건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 더없이 힘겨웠던 교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후천적으로 무장해야만 했던 일종의 ‘포커페이스’라고 분석했다. 계단 아래 한 귀퉁이에 자릴 잡은 ‘샘물찻집’의 쌍화차도 미로의 할매한테 큰 위안이 된다. 가장 포스가 강한 할매는 단연 ‘딸라(달러) 할매’. 향촌동 조폭들도 그 할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기 점포도 없다. 한때 10명 이상이 활동했는데 이제는 키다리 할매 혼자 교동의 서쪽 입구 초입을 고수하고 있다. 그녀가 갑자기 6·25전쟁기 한국 유일의 레코드회사였던 오리엔트 이병주 사장, 작사가 강사랑, 작곡가 박시춘, 가수 현인이 송죽극장 맞은편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강산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가게를 나오다가 부리나케 작곡한 ‘굳세어라 금순아’, 그 금순이의 올드 버전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4.0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포항물회 이야기-간월도횟집 김헌찬·김준식 부부
대낮 기온이 20℃에 육박. 미식가는 벌써 하절기를 예감하곤 단번에 물회를 떠올린다. 물회는 대한민국 선원에겐 부적 같은 먹거리다. 식당밥에서 멀 수밖에 없는 그들. 물회는 망망대해 외딴 선상에서 손쉽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였다. 그냥 생선·고추장·생수만 있으면 끝. 물회와 코드가 맞는 메뉴는 국밥, 비빔밥, 회국수, 냉면 등일 것 같다. 전국에 별별 물회가 널렸다. 그 별스러움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더 많이 팔기 위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다들 전국 여러 스타일의 물회를 골고루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 자기 고장의 물회가 물회의 전형인 줄 착각한다. 인지도로 보면 단연 ‘포항물회’가 좌장격. 한국 물회의 대명사를 ‘포항물회’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포항 횟집은 모두 연중무휴 물회를 특미로 판다. ◆팔도 물회 이야기 물회는 역시 동해가 서·남해를 압도한다. 크게 분류하면 물회는 포항권, 울진·속초권, 울릉권, 제주도권, 장흥권 등 5대 권역으로 나뉜다. 울진·속초권 물회는 오징어, 울릉도는 꽁치, 식초와 된장이 주재료로 등장한 제주도와 장흥권은 자리물회와 된장물회가 활성화돼 있다. 회를 고추장에 비비고 물 부어 후루룩 선원들의 선상 간편식서 비롯된 물회 제주도와 장흥권은 된장을 주로 사용 첫 포항물회식당은 1967년 ‘영남물회’ 뱃사람인 남편 통해 알게 된 것이 계기 최근 환호동 일대‘설머리 물회지구’조성 북부시장엔 터줏대감 격인 간월도 횟집 신선한 생선회·2년 숙성 고추장이 기본 새콤달콤 육수보다 재료 본연의 맛 충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갈 때 울릉도와 제주도 마라도 인근에선 꽁치와 자리돔이 많이 잡힌다. 울릉도는 꽁치를 특별하게 대접한다. 4월부터 물이 오르는 제철 꽁치를 손질해 냉동해두고 두고두고 먹는다. 심지어 꽁치살에 밀가루를 섞어 꽁치미역국으로 끓여먹기도 한다. 제주 자리물회는 오직 자리돔만 사용한다. 자리돔은 까만 도미의 일종으로 5~8월에 주로 잡힌다. 찬물에 고추장과 된장을 풀고 반드시 식초를 넣어 간을 맞춘다. 그 어떤 지방의 물회보다도 간이 세다. 웬만한 횟집에는 반드시 식초통이 비치돼 있다. 자리물회와 사촌 간은 전남 장흥군의 명물인 ‘된장물회’. 원래 된장물회는 며칠씩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이 시어진 김치류에 생선과 된장을 섞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 지난해 장흥문화원 위종만 사무국장과 군청 바로 근처에 있는 ‘싱싱횟집’에서 된장물회를 먹었다. 열무김치가 주재료로 등장한다. 된장, 양파, 풋고추, 마늘, 매실 진액 등을 넣고 막걸리식초 등과 버무려 낸다. 회진면에서 3분 정도 차로 달리면 진목리 ‘삭금마을’이 나타난다. 삭금마을이야말로 장흥 된장물회의 출발지다. 회진면 회진리에 20여년 역사의 ‘우리횟집’이 있다. 된장물회 원조식당인데 2년전 작고한 김실녀 할머니가 그 음식을 장흥 전역으로 퍼트렸다. 여름엔 제철인 갯장어(하모)가 된장물회의 으뜸 재료로 사랑을 받는다. 진목리 ‘용궁횟집’은 연안 갯벌에 사는 쑤기미를 주재료로 해서 된장물회를 낸다. ◆포항물회 스토리 “어느 포항물회가 원조지?” 포항 가서 절대 그런 질문 하지 마라. 우문 중 우문이다. 모두 원조고 맛의 질감도 조금씩 다르다. 우열이 아니라 차이밖에 없다. 포항물회를 전국구로 만든 건 유명 TV 프로그램. 1박2일·생활의 달인·백종원 3대천왕 등이 환여식당, 마라도회식당, 새포항물회 등을 줄서는 물횟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전국에서 찾아온 탐방객 때문에 이들 식당은 언젠가부터 ‘관광식당’으로 내몰린 것도 사실이다. 이 세 식당이 포항물회를 독점할 수도 없는 일. 토박이들은 저마다 뒷골목에 박혀 있는 단골 물횟집을 제일이라고 고집한다. 물회의 첫 출발은 선상. 선원들은 이런저런 잡어 등을 막회 형식으로 썰어 ‘상비약’ 같았던 초고추장에 비며 먹었다. 더 빨리 먹으려고 물을 넣어 후루룩 마시듯 들이켰다. 그게 지금도 변하지 않은 포항물회의 기본이다. 영일대해수욕장 근처에 포항물횟집이 30여곳 모여있다. 그 때문에 환호동 일대는 최근 ‘설머리 물회지구’로 태어난다. 설머리는 영일대해수욕장 맨 끝 해안마을. 이 밖에 영일대북부시장, 구룡포항, 죽도시장 등도 물회권이다. 죽도시장은 ‘관광객 천지’라서 토박이들은 상대적으로 잘 가지 않는다. 포항물회를 전국에 알린 식당주는 누굴까. 1960년대 최초로 포항 육거리에서 문을 연 ‘영남물회’의 허복수 할매. 자타공인 포항물회식당의 원조로 불린다. 1991년 동아일보 김봉호 편집위원이 그 할매를 취재했다. 그 기사에는 61년이 개업 연도로 소개됐지만 실은 사업자등록증을 낸 건 67년이다. 할매는 뱃사람인 남편 때문에 물회를 알게 됐다. 훗날 남편 사업이 망하자 물횟집을 열게 된다. 물회 제조법은 이후 김태식·전경화 부부에게 이어진다. ◆물회 아저씨를 찾아서 지난주 화요일. 북부시장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인 간월도 횟집 김헌찬 내외는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기자가 취재를 간다고 하자 시간을 내주었다. 북부시장 내에는 간월도 말고도 호수, 대신, 경아, 오대양, 특미, 감포 등 물회 취급 횟집이 여럿 모여 있다. 물 마를 날이 없는 그의 손은 너무나 고단해 보였다. 그게 횟집 주인의 운명이다. 고기는 그가 장만하고 한 살 아래인 충청도 보령시 바닷가 출신인 아내(김준식)는 고추장과 밑반찬류를 담당한다. “물회용 생선도 두 종류가 있어요. 그물바리와 낚시바리가 있는데 덜 상한 낚시바리가 훨씬 더 비싸죠. 비싼 걸 사용해야 되는데 가격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포항 송도수협활어위판장에선 오전 5시30분부터 그물바리, 오전 11시부터는 낚시바리를 경매한다. 그는 지금 이 횟집을 오픈하기 전까지 여러 직종을 전전했다. 대구시 북구 침산동의 주물공장에서 4년, 포항시 기계면 고향에서는 자전거 수리점, 다시 포항 시내로 나와 건설현장에서 철물을 만진다. 어느날 20층에서 추락해 중상을 당한다. 재택 물리치료 등 3년간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낸다. 아내는 죽도시장에서 양장점을 꾸려갔다. 죽도시장의 텃세가 너무 세 북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현재 식당 자리에서 25년간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늦깎이로 횟집을 차리게 된다. 평소 생선 손질은 누구 못지않게 잘했다. 물리치료를 할 때 낚시가 주된 소일거리였다. 고향 근처 저수지에서 잡아 온 민물생선을 직접 손질했다. 아내는 초피 가루를 넣고 매운탕을 끓였다. 아내의 손맛도 횟집으로 그대로 옮겨온다. 8℃에서 사는 참가자미, 14℃에 맞춰야 잘 사는 우럭, 광어 등 양식 어종의 생리부터 습득해나갔다. 수족관 설치비만 650만원. 하지만 교과서적 지식만으로 고기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많이 죽어나갔다. 그물바리와 낚시바리 생선의 생존 온도가 제각각이란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좋은 물회의 출발이 좋은 생선일 수밖에. 일반 회와 달리 물회용 회는 그 육질이 집집마다 들쭉날쭉하다. 그걸 손님이 정확하게 감지할 수 없다. 비싼 낚시바리를 정상대로 사용하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참고로 30여년 역사의 대구시 동구 신천4동 포항물회의 경우 자연산 세코시 도다리물회가 2만7천원. 상대적으로 저렴한 양식이나 그물바리를 뒤섞고, 심지어 흠집이 있어 횟감을 미리 썰어 정상 생선과 섞은 뒤 자극적인 육수까지 부어놓으면 생선 선도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다. 싼 게 비지떡일 수밖에. 2000년쯤 포항에도 새콤달콤한 육수를 앞세운 물회가 등장한다. 관광객 탓이다. 하지만 토박이는 육수 없는 걸 선호한다. 마니아일수록 해삼, 멍게, 해초류 등 요즘 유행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버전도 멀리한다. 새콤달콤한 육수는 매실 진액, 설탕, 물 등에 배와 사과, 양파, 식초 등으로 만든다. 관광객 때문에 영일대해수욕장권에선 육수와 맹물을 동시에 내놓고 골라 먹게 한다. 하지만 본토 물횟집은 육수 자체가 없다. 포항과 달리 서울로 올라간 포항물회는 거의 새콤달콤한 육수형 물회로 변해버렸다. 담백한 광어보다 고소한 맛이 더 짙은 도다리가 물횟감으로 제격이다. 물회의 맛은 거의 고추장 맛이다. 그래서 이 집은 보리쌀, 찹쌀, 엿기름 등이 들어간 2년 정도 숙성된 집표 고추장을 고집한다. 옥상에 고추장 항아리가 15개 있다. 김가루, 깨소금, 쪽파, 오이·배채, 다진 마늘, 참기름 등이 기본 재료다. 참기름은 매일 짠다. 김가루도 생김을 직접 구운 것만 사용한다. “공장표 고추장은 분명 맛을 가로막죠. 수제보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고 맛도 얇아요. 많은 분이 왜 물회에 배채가 들어가는지 궁금해하더군요. 무채가 들어가면 잘 넘어가지 않고 풍미도 덜해집니다.” 시식을 했다. 물회를 먹기 전에 1분 정도 잘 비벼준다. 상태를 봐가면서 물을 조금씩 부어준다. 장모가 보내온 까나리액젓으로 만든 깍두기가 특히 별미 반찬이다. 기존 물미역보다 떫은맛이 덜한 ‘쫄쫄이 미역’. 이게 고추장으로 조금 얼얼해진 입안을 중화시켜준다. 물회는 장만하는 식당주보다 먹는 손님에 의해 맛이 더 좌우되는 것 같다. 아무튼 토박이 스타일의 물회를 보고 싶다면 북부시장권으로 가보시라. 북구 대신동 63-5. (054)255-3612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3.3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브런치카페 ‘슬로우’ 최상윤
대구 도심을 벗어나 팔조령쪽으로 차를 몰다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는 신개념 건축물에 자주 눈길이 간다. 달성군 가창면 옥분리. 전원주택 짓기도 좋고 해외파 오너셰프가 허름한 시골집을 리모델링해 자기만의 메뉴를 라이브콘서트처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들게 할 그런 동네다. 동양화와 수채화, 그리고 유화가 한데 섞인 듯한 풍광이다. 올해 마흔넷의 최상윤 셰프를 만날 수 있었다. 화가의 유전자, 그것도 모자라 실내인테리어 전문가의 아우라까지 겸비했다. 끝내 오너셰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 그가 옥분리에 신개념 브런치카페 ‘슬로우’를 차렸다. 샐러드, 빵, 파스타, 스테이크 등을 무겁지 않게 심플하게 엮고 싶다. 잘 정리된 턱수염과 콧수염, 헌팅캡, 그것에 잘 어울리는 친절한 농도의 미소. 그게 갓 추출해낸 커피향과 잘 섞여 돌아간다. 두 살된 흰색 레트리버 ‘산’. 그 놈은 이 집의 마스코트. 무료하면 어슬렁거리며 맘에 드는 테이블을 찾아 재롱을 피운다. 견고한 성채처럼 보이는 노출콘크리트 건물. 널찍한 통유리창은 심야엔 등불 같이 변모한다. 이강소·최병소·이명미 등 지역 출신 유명 화가의 작품이 여럿 걸려 있다. 수문장 같은 두 그루의 소나무를 지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에 빠진 청년기 생애 첫 열정은 그림이었다. 중1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고1 때는 그맘때면 누구나 빠지게 되는 록뮤직에 젖었다. 그림과 음악이 스파크를 일으킨다. 수순대로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시절에는 현대미술의 한 지류인 개념미술에 심취했다.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색·면·선·비례 등이 맘에 와 닿았다. 2000년부터 대구에 있는 ‘백신디자인’이라는 건축사무실에 닻을 내린다. 이후 17년간 건축, 그 중에서도 실내인테리어 분야에서 잔뼈를 키운다. 대구 달성 가창면 옥분리 핫플레이스 미술 전공후 17년 건축에 몸담은 이력 요리 못잖게 건물 외관·실내 작품 눈길 식당 관련 인테리어 하다 음식에 관심 고향 경주 교동 주점‘풍악’으로 첫발 연애시절 데이트코스에 차린 ‘슬로우’ 스페셜 원두로 선뵈는 커피맛 입소문 보름 걸린 특제 스테이크용 소스 별미 2층엔 탄노이 오디오 갖춘 음악감상실 그의 현재 삶의 모토는 ‘맑고 담담하게 살아내는 것’. 음식도 그 수단이다. 하지만 담담하게가 갈수록 어렵다. 젊을 때는 정신이 그를 흔들었다. 이젠 화두가 ‘물질’이다. 다들 정신 운운하지만 실은 그게 물질이란 것도 안다. 음식과 여행이 함께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따로 논다. 장사라는 게 사람을 잘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대신 그에겐 오디오가 하나의 여행이다. 슬로우 2층은 작업실 겸 음악감상실. 일을 마치고 피로를 푸는 곳이다. 그 작업실에 비장되어 있는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을 슬로우로 내려 단골과 공감할까 싶어 고민 중이다. ◆식당 인테리어…거기서 요리를 엿보다 대구식당의 색과 모양이 하나같이 우중충하고 촌스럽다. 그래도 국제도시인데. “인테리어 일을 할 때는 건축주와 시공자 간에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소통이 부족하거나 오해가 생기면 후에 더 비효율적인 문제가 발생해요. 건축주가 ‘내가 본 그림이랑 다르잖아’ 이러면 ‘멘붕’이죠.” 그는 식당 간판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간판은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룰을 무시한 간판이 대다수예요. 집만 한 간판에 원색분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자기 얼굴과 음식사진을 흉칙하게 배치할 수 있는 게 대구의 음식문화인가 싶어요.” 그는 ‘오리 화가’로 불리는 한국 최고급 단색화가 이강소의 경기도 안성 작업실을 설계했다. 그 건으로 나름 인정받았다. ◆경주에서 5년간 식당 경영 그의 고향은 경주다. 특히 경주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 한옥마을과 인연이 깊었다. 우연찮게 교동 한옥마을 사업자공모에 참여해 운좋게 선정된다. 그 계기로 전통 민속주점인 ‘풍악’을 오픈한다. “사실 여러 해 식당 관련 인테리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페나 레스토랑의 속내를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음식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죠.” 민속주점을 영어로 어떻게 표기하는지 알려고 참 애를 많이 썼다. 그래서 ‘Korean native pub’으로 정했다. 그가 구상한 풍악은 한옥이라는 멋은 살리면서 조금은 가볍고 쉽게 대중이 한옥과 그에 걸맞은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주막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문화재구역이란 경주 특성상 그 콘셉트가 쉽게 유지될 수가 없었다. 메뉴구성도 육개장을 비롯해 각종 전류, 최부자 가양주 외 다양한 막걸리 종류 등으로 했다. 간단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곳곳이 덫이었다. 육개장의 경우 소고기국밥과는 달리 재료의 손질, 준비, 배합 등 각 공정이 꽤나 복잡하고 힘이 들었다. 육개장과 소고기국밥의 차이를 알아야만 했다. 육개장 특성상 각 재료가 잘 어울릴 수 있게 버무려주는 게 관건인데 그걸 터득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전이 그렇게 만들기 힘든 음식인지도 처음 알았다. “파전은 파 고유의 아삭거림과 달콤함이 느끼하지 않게 표현되어야 해요. 부추전은 부추의 신선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특히 밀가루 양은 너무 많아도 부족해도 제맛이 안 나와요.” ◆경주에서 대구시절로 집사람과 연애시절 가창~청도 코스를 데이트 삼아 자주 다녔다. ‘담안마을’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 옥분리는 괜찮은 담이 많았다. 대구 도심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골마을이었다. 그래서 풍악과 슬로우를 병행했다. 풍악을 그만두자 슬로우가 빠듯해졌다. 경주의 고정수입이 사라진 것이다. 슬로우는 대구 중심에서 차로 약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타인보다 내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해보자는 의미로 상호를 슬로우로 정했다. 자본 위주의 삶을 마음 위주의 삶으로 전향시키고 싶었다. 그는 요즘 사람과 사람 간의 ‘간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사람과 사람의 간격이 멀어지면 오히려 앞사람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음식은 물론 인테리어, 음악, 소품 등도 슬로우와 관계 있다. 재즈나 소편성 클래식을 많이 튼다. 음식도 메뉴의 하나로 본다. 그의 컴퓨터에는 그가 여러 장르로 분류해 놓은 8만5천여곡이 수록돼 있다. 절대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모든 음식을 직접 조리한다. 한우스테이크 소스의 향미가 상당히 셌다.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요즘 여느 레스토랑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브라운소스 계열이다. 알고보니 된장 만들 듯 소스를 빚었다. “스테이크용 그레이비 소스를 만들려면 거의 보름이 소요됩니다. 제 주변의 지인들은 저보고 ‘요즘 세월에 무모한 짓’이라고 뭐랍니다. 특히 스톡(Stock·서양요리의 기본이 되는 고기 육수)은 물론 밀가루를 버터에 볶은 ‘루’도 만들고, 소뼈를 고아내고, 각종 채소들을 볶아 다시 끓이고, 거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메인요리 과정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런 과정을 아는 손님은 거의 없죠. 그래서 외롭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것 그게 슬로우라는 생각을 합니다.” 새우오일파스타(1만7천원)와 치킨스테이크, 모차렐라치즈 등이 어우러진 슬로우브런치(2만2천원)를 먹었다. 파스타에 게향이 깊숙하게 박혀 있다. 감미롭지 않고 좀 무뚝뚝한 맛, 그래서 진솔하달까. ◆슬로우 & 스페셜티 슬로우는 이미 커피맛이 괜찮은 곳으로 소문이 나있다. 핸드드립에 쓰이는 원두는 모두 스페셜티커피. 케냐 키리냐가, 과테말라 COE, 콜롬비아 게이샤,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 등 네 가지만 핸드드립에 사용한다. 커피머신은 슬레이어(Slayer)를 사용한다. 이 머신은 스페셜티커피의 맛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하다. ‘프리인퓨징’이란 기능이 있어 마치 핸드드립커피처럼 압력을 걸지 않고 커피를 추출할 때 뜸들이는 기능이 있다. 또한 온도에 따른 흔들림이 거의 없다. 그라인더는 메저 로버, 말코닉 EK43, 후지로얄 R300 등을 사용한다. 매주 직접 장을 본다. 물론 공산품이나 가공식품류들은 사입을 하지만 제품의 상태나 품질은 직접 장보는 게 이상적이다. 아직은 평일에는 식사하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거의 평일은 재료 손질이나 선처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약간 이상한 재료들은 과감히 버린다. 아깝지만 별수 없다. 그날 그날 체크하지 않으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전통적인 다이닝 식당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객들이 소위 가성비를 편협한 관점에서만 따지면서부터 비롯된 것 같다. “가치는 무시하고 양적 가성비만을 따지다보니 성의있는 다이닝들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라 봅니다. 인정받을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해 보는 수밖에요.” 조만간 별채를 만들고 거기서 커피를 주로 마시게 하고 슬로우 버전의 브런치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해 베이커리샐러드, 치즈샐러드, 치킨샐러드 등을 파생시키고 싶단다. 한끼도 아니고 간식도 아닌 대구식 브런치 같은 것. 단품 메뉴마다 아메리카노가 딸려 나온다. 매주 화요일 휴무.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옥분리 613. (053)768-0369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3.1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용지봉’ 변미자 대표
25년 지기 최정민 ‘뜰안’ 대표와 합심 경북의 고조리서 요리·班家음식 재현 TV프로그램 ‘한식대첩 시즌4’서 大賞 '無味의 생선’ 개복치 온갖 요리로 주목 외환위기 때 한우숯불갈비로 식당 열어 코스한정식 이어 최근 퓨전 한정식까지 명이장아찌·수란채 등 다양한 시도 선봬 근처 ‘소풍가’‘따뜻한 한 그릇’도 운영 지난해 지역 외식업계의 빅뉴스는 뭘까? tvN과 올리브TV에서 동시에 방영된 12주간의 한식 경연 서바이벌 프로그램 ‘한식대첩 시즌4’인 것 같다. 거기에서 경북팀이 전국의 9개 팀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다. 수성구 들안길 한정식 전문 ‘용지봉’ 변미자 대표(60). 그녀는 이 대회에 출전하면서 최강의 파트너와 손을 잡았다. 바로 경주 최부자 집안 사람으로 현재 영남대 근처에서 한식당 ‘뜰안’을 운영하고 있는 최정민 대표. 25년 친구 사이인 둘은 지난해 7월 출연 제의를 받았다. 이후 방송 녹화를 위해 무려 12번이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스튜디오를 오갔다. 이들이 내건 팀명은 ‘고조리서 연구팀’. 자신이 있었다. 경북은 ‘고조리서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영양의 ‘음식디미방’, 안동의 ‘수운잡방’, 상주의 ‘시의전서’ 등을 충분히 활용했다. 이 밖에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 궁중요리연구원에서 펴낸 ‘잡지’ 등 여러 고조리서를 품고 다녔다. 1시간짜리 프로를 위해 무박2일 강행군을 감내했다. 녹화를 마치면 졸음을 참고 영업을 위해 식당으로 바로 출근했다. 경북팀은 ‘전통의 식감을 제대로 살렸고 동시에 이론에도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출전했던 경북팀은 성적이 저조했다. 그랬기 때문에 경북팀의 대상은 하나의 ‘이변’이자 ‘충격’이었다. 맨 처음 방송이 시작될 때 다들 ‘전라도 잔치’로 끝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아니었다. 경북팀 덕분에 대구음식의 위상도 더 올라가게 됐다. ◆한식대첩 대상 수상 한식대첩에 소개된 경북팀의 레시피가 가장 궁금했다. 결승전의 주제는 ‘삼시세끼’. 30분 만에 아침상, 30분 만에 점심상, 1시간 만에 저녁상 메뉴를 만들어야만 했다. 경북팀은 아침상에는 대게의 껍질을 벗겨 말린 것으로 쑨 죽인 ‘해각포죽’을 비롯해 ‘대구맑은탕’과 ‘무숙무침’, 점심상에선 수삼을 넣은 ‘장어조림’과 ‘인삼김치’ 그리고 전분 묻힌 닭가슴살로 만든 진주처럼 생긴 ‘진주면’, 저녁상에는 ‘방어탕’과 ‘톳홍합밥’ ‘닭갈납’ ‘가괄운’ ‘국화채’ 등을 선보였다. 술안주인 가괄운은 고조리서 ‘요록’에 등장하는 요리로 시래기, 소고기, 막걸리, 식초 등을 이용한 일종의 찜 요리다. 요리 때 몇 가지 제약조건이 주어졌다. 제일 큰 조건은 자기 고장 제철 식재료 적극 활용하기였다. 음식 선정은 물론이고 재료를 구하는 것도 팀의 몫. 경연마다 선보일 음식 연구를 위해 각종 고서를 뒤졌고 자문도 많이 했다. 경북 지역의 여러 반가를 찾아다니며 내림음식 재현에 힘썼다. 덕분에 고조리서 수운잡방에 등장하는 ‘황탕밥’, 400년 전통 경주최씨 내림음식인 ‘수란채’ 등 경북 반가만의 자랑스러운 내림음식을 소개할 수 있었다. 경북만의 일품 재료를 찾기 위해 포항, 경주, 영덕, 봉화 등 곳곳을 동분서주했다. 해발 1천m 이상 고지에서 나는 석이버섯을 이용한 ‘석이편’을 위해 전문가를 따라 봉화의 험준한 산을 올랐다. 절벽에 매달려 줄 하나에 의지해서 채취해야 하는 석이버섯은 너무 귀했다. 1년에 1~2㎜밖에 자라지 않아 10년 이상 자란 것만 채취할 수 있었다. 경북팀은 차근히 상승세를 타다 5회차에 확실히 기선을 제압한다. 5회 주제는 ‘지역의 해산물로 차려내는 최고의 바다진미’. 변 대표는 과감하게 ‘개복치’를 내밀었다.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개복치, 다른 지역에선 존재감이 없는 식재료다. 변 대표는 남편의 고향이 포항이라 일찍부터 그 생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포항 죽도시장은 개복치의 고향이다. 다 자란 개복치는 2m가 넘고 가격도 수백만 원대다. 방송을 위해 죽도시장 개복치 전문점에 가서 직접 토막 내 스튜디오로 갖고 왔다. 하지만 최현석 심사위원은 개복치에 대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그는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는 ‘무미(無味)의 생선’으로 저평가했다. 그래서 맛을 내는 데 더 신경 써야만 했다. 대회 때는 개복치를 갖고 껍질, 수육, 맑은탕 그리고 대창구이를 만들었다. 장어수삼요리도 예상치 못한 메뉴다. 장어를 포를 떠서 구웠다. 자연적으로 끝이 말려 올라가서 둥그런 모양이 되었다. 그대로 플레이팅 하자니 모양이 영 아니었다. 잘 펴지게 수삼을 끼우는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8회 촬영 하루 전날에는 ‘베도라치’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가 대구 달서구 상인동의 한 횟집에서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다. ◆용지봉의 변신 스토리 변 대표를 지난달 25일 용지봉에서 만났다. 아직 대상 수상의 흥분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내걸렸다. 경북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상패와 대회 때 입은 조리복도 홀 입구에 진열해 놓았다. 그녀는 만족을 모른다. 끝없이 배우겠다는 ‘침묵의 승부사’다. 남편 김수진씨의 사업이 순조롭게만 흘러갔다면 그녀는 결코 식당업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IMF 외환위기를 건너오면서 남편은 비단유통, 예식장 식당 등 손을 댄 사업 세 개가 연이어 부도를 맞는다. 절체절명의 순간, 변 대표는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남편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건 ‘모성(母性)’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게 바로 지금의 용지봉이다. 용지봉의 시작은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들안길로 옮겨오기까지 숱한 변신을 해야만 했다. 대구에서 식당으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용지봉의 변신사를 보면 제대로 실감할 수 있다. 초창기 용지봉은 수성구 지산성당 근처 너무 구석진 곳에 있었다. 입지는 C급이었다. 처음엔 한우 숯불갈비 전문점이었다. 일단 대구에서 가장 큰 간판을 갖고 싶었다. 합판 50장을 붙이고 소가 뛰노는 그림을 그렸다. 황토통나무집 식당이었다. 지역에선 맨 처음으로 명이장아찌를 특화시켰다. 4년 정도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복병’이 나타났다. 2002년 광우병 파동이 터진 것이다. 요리만 잘하고 맛만 있으면 될 것 같았는데 그것만으로는 결코 롱런할 수 없었다. 작전을 수정했다. 숯불갈비집에서 1인분 9천원짜리 한정식 스타일로 바꾼다. 이때 개발한 ‘버섯탕수’가 꽤 사랑을 받는다. 각종 장아찌도 특화해서 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장아찌에 대한 호감은 갈수록 떨어져 지금은 명이만 활성화시키고 있다. 2003년에는 소고기숯불갈비에 코스한정식을 결합시켰다. 가격은 1인분 2만원대. 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구석진 곳에 위치하다 보니 다들 찾아오기가 너무 어렵다고 투덜댔다. 2010년 안되겠다 싶어 들안길로 이전한다. 들안길로 오면서 젊은 층과 어르신, 3대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양식·일식·중식까지도 수렴한 ‘퓨전 한정식 메뉴라인’을 제시했다. 젊은 층의 새콤달콤한 입맛까지도 동시에 잡고 싶었다. 하지만 초창기 숯불갈비집으로 시작했기에 코스 중간에 숯불화로 위에 한우를 올렸다. 원칙만 고집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홍어도 냈지만 특유의 냄새가 다른 메뉴의 식감에 영향을 주어서 결국 뺐다. 강된장도 자작하게 내면 좋을 것 같았는데 그걸 싫어하는 이가 월등하게 많았다. 집된장과 공장된장을 적절하게 섞을 수밖에 없었다. 변 대표는 지역에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학구파 오너셰프다. 프로는 배움에 끝이 없다는 걸 안다. 구미대 식품조리학과와 경북과학대를 졸업한 그녀는 영진전문대·경북과학대 외식 CEO과정, 핀외식연구소가 개설한 소스과정을 챙겼다. 월간식당이 마련한 외식CEO심화과정과 주방리더과정, 한의대 약선글로벌리더과정도 거쳤다. 남편은 그만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아내는 만족하지 못한다. 현재도 서울 궁중요리연구원에서 한식 과정을 공부 중이다. ◆한식대첩 대상 메뉴도 팔아 용지봉 메뉴 가격대는 1만3천원대부터 10만원까지 모두 8가지. 특히 1인분 6만~10만원짜리 고가 코스에는 지난 한식대첩 중에 선보였던 수란채, 게찜, 개복치껍질과 개복치대창구이 등을 낸다. 개복치껍질이 문어숙회와 함께 나왔다. 언뜻 투명한 곤약처럼 보였다. 초장에 찍지 않고 그냥 먹어봤다. 정말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가의 동치미 국물 같은 포스다. 하지만 씹을수록 맛이 났다. 용지봉 대표 전채 중 하나인 ‘수란채’는 경주 최부자 내림음식인데 찌고 데친 각종 채소와 문어, 게살 등에 수란(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달걀)을 얹고 잣즙을 뿌린 것이다. 손님상에 낼 때는 식감을 위해 달걀은 뺀다. 근처에 식당 두 개를 더 냈다. 2014년에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보쌈 한우불고기세트 전문인 ‘소풍가’를 차려 지역 조리학과 학생을 고용했다. 지난해는 30여 명 직원 식사를 위한 공간 ‘따뜻한 한 그릇’이란 집밥식당을 차렸다. 용지봉에서 사용하고 남은 갈비뼈를 갖고 곰탕을 끓여 냈는데 이젠 점심때 직장인들이 더 많이 찾는 백반집이 돼버렸다. 직원들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여기 와서 두 끼를 해결한다. 현재 한국외식산업협회 대구경북지회장이기도 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신선한 식재료 확보를 위해 새벽같이 칠성·매천시장 등을 훑고 다닌다. 한식의 길은 입구만 있고 나오는 문은 없다고 한다. 그만큼 배울 게 무진장하다. 변 대표는 본메뉴 못지않게 전채와 디저트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전통 병과(떡류)와 한과(과자류)에 파고들고 있다. 언뜻 우뭇가사리로 만든 콩국 같은 ‘녹두나화’도 하절기에 낼 계획으로 있다. ‘나화’란 칼국수·수제비를 일컫는 고조리어다. 녹두 전분을 빚어서 얇게 썬 면을 오미자즙에 띄운 화채 같은 음청류인 ‘창면(昌麵)’도 준비 중이다.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3.0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쿠사(CUSA)18’ 김성민 대표
북적되는 방천시장 김광석길에서 서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릴 잡은 ‘쿠사(CUSA)18’. LP 전문 라이브 뮤직바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각에 거기에 도착했다. 뉴욕 맨해튼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앤티크하고 그러면서도 모던하고 아방가르드한 분위기. 김성민 대표(47). ‘바텐더’란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첫인상은 가게 입구처럼 꽤 깔끔하고 무채색이다. 적당하게 벗겨진 이마, 조금 야윈 듯한 얼굴선, 거기에 가세한 콧수염과 턱수염, 성악가처럼 뒤로 젖힌 파마 스타일. 언뜻 블록버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암흑가의 보스 같은 포스다. 옷매무새도 사치스러운 건 아니지만 한 치의 틈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멋스럽다. 청바지에 콤비 상의를 즐긴다. 패션모델 같다. 그가 묵직한 표정을 잡으면 손님도 쉬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한때 대구에서 수성못 근처 스쿨(SCHOOL)과 함께 LP 전문 뮤직바의 붐을 일으켰던 수성구 상동의 ‘스윙바나나’의 초대 주인이다. 2010년 오픈한 거기를 단골에게 넘겨주고 그는 얼마 전 여기로 거처를 옮겼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그날 여기선 꽤 근사한 밴드 공연이 자정 넘어까지 이뤄졌다. ‘사자’란 닉네임으로 인디뮤지션 사이에선 꽤 유명한 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최우준 밴드가 광란에 가까운 연주를 선사했다. 1부와 2부 사이 몽환적 애드리브를 위해 기꺼이 고급 양주를 밴드 멤버에게 쾌척했다. 사실 여긴 협소해 공연이 불가능하다. 20명이 들어서면 만석이다. 쿠사는 그게 오히려 더 강점이라고 봤다. 1m도 안 되는 바로 눈앞에서 절정의 연주 광경을 만끽할 수 있는 특혜를 단골에게 준 것이다. LP음반에 매몰돼 있지만 국내 뮤지션 최신 동향은 지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체크를 한다. 좋은 공연을 위해 기타와 고가 엠프도 샀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쿠사 출입 조건이 까다롭다. 주인이 왕이다. 손님도 가려서 받는다. 일단 4인 이상은 출입을 못한다. 만취손님은 물론 운동복과 슬리퍼 차림도 출입금지. 신청곡도 주인장 맘대로다. 10곡 신청해서 한 곡만 나와도 감지덕지하는 이들만 단골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매출이 오를 수 없다. 적자가 날 경우를 생각해 낮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한다. 마치면 쉴 틈도 없이 여기로 직행한다. 불금에 죽이 맞는 단골이 오면 날을 새운다. 단골도 결국 제2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대구 LP전문바 붐 ‘스윙바나나’ 첫 주인 5년 하다 단골에 넘겨…작년‘쿠사’ 오픈 김광석길서 서쪽으로 한 블록 떨어진 곳 클래식서 가요까지 全장르 망라 뮤직바 4인 이상 금지 등 까다로운 출입 조건 좁은 공간에 LP 1만여장·CD 9천여장 30여종 칵테일·‘코로나리타’ 대표음료 25일 밤 재즈뮤지션 찰리정 무료 공연 “가장 고독할 때, 가장 취해 있을 때, 조금 어눌하고 실수할 때, 그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아요.” 바텐용 의자 9개가 있다. 손님이 없는데도 꼭 누가 앉아 있는 것 같다.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수 배호가 아시아레코드사 시절 그곳의 영업부장. 음악적 자양분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협성고 시절 록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타리스트 꿈도 꾼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음악에 대한 귀가 열렸다. 가수의 꿈까지 꾸지만 그 꿈은 거기까지였다. 음악다방에서 DJ 생활을 했다. 음악을 들려주는 게 더 적성에 맞고 더 짜릿한 것 같았다. K2 공군 시절 틈만 나면 이어폰을 꽂고 살았다. 지구에 등장했던 모든 음악을 다 듣고 싶었다. 제대 후엔 음반 사모으기에 올인한다. 서울 향레코드, 명동의 회현상가 등지를 돌며 명반을 구입해 왔다. 한때 대구과학대 방송연예학과를 다니기도 했다. 졸업 후 대구MBC에서 FD로 활동한다. 그동안 축적한 음악지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2009년에 달서구 상인동에서 조그만한 커피숍인 ‘하드 보일드’를 차렸다. ◆기분 좋으면 김민기 노래도 튼다 그때 바리스타의 유전자를 키웠다. 1년 하다가 수성구 상동천주교회 근처에서 ‘스윙바나나’란 뮤직라운지바를 오픈한다. 거기서는 커피를 빼고 맥주와 칵테일만 팔았다. 커피를 안 판 이유는 커피가 자칫 분위기를 수다스럽게 만들기 때문. 당시 단골 대다수는 음악에만 심취한 과묵파였다. 전용 음악감상실이 아니다 보니 단골 사이에서도 볼륨을 놓고 갈등을 많이 빚었다. 여기선 낮춰라, 저기선 높여라. 원치 않는 손님이 오면 영업 끝났다고 둘러댔다. 음악에도 원칙이 있었다. 일단 주인의 취향을 고집한다는 것. 너무 올드한 곡, 방금 튼 곡은 절대 안 틀었다. 손님의 표정을 보면서 다음 곡은 뭐로 해야 될지가 단번에 결정이 났다. 그냥 표정만 보면 무슨 곡을 좋아하는지 감이 온단다. 참 까칠한 사장이었다. 5년 정도 스윙바나나 시절이 계속된다. 다른 집보다 사운드 퀄리티가 좋다. LP 제작연도에 따라 음질이 각기 다르다. 그걸 모르고 노래만 고려하면 감상에 방해를 줄 수 있다. 현재 LP는 1만여장, CD는 9천여장이 있다. 돈만 생기면 음반을 산다. 최근에는 1970년대 나왔다가 2014년에 리메이크한 레드 재플린 음반을 새로 구입했다. 국내 대표적 여성 재즈보컬리스트 웅산과 강허달림 LP음반을 얼른 구입했다. 가장 좋아하면서 틀기 싫어하는 음반이 있다. 이글스 곡이 그렇다. 음악카페에서 가장 많이 트는 곡일 것이다. 곡은 좋지만 너무 노출돼 식상해졌다. 하지만 1994년 그들이 재결성할 때 어쿠스틱 버전으로 낸 LP음반은 너무 좋다. 이젠 수십만원을 줘야 구할 수 있다. 노래를 독점적으로 틀어주려고 하면 가수, 음반 상태, 오디오 사정, 단골의 맘 상태 등을 모두 고려해 기절할 것 같은 곡만 깔아줘야 된다. 그동안 엠프만 60여개 바꿨다. 스윙바나나 시절에는 JBL4344라는 버전을 두 조를 사용했다. 쿠사에서는 18인치 우퍼를 가진 JBL4345를 사용한다. ◆작년 가을 쿠사 오픈 작년 9월 좋아하는 곡을 내 스타일로 깔기 위해 다시 쿠사를 오픈했다. 여기서는 클래식부터 전 장르를 다 튼다. 스윙바나나 시절에는 클래식은 안 틀었다. 재즈도 정통 재즈는 안 틀었다. 그런데 지금은 흐름만 맞으면 가요까지 모두 튼다. 김추자와 임희숙, 심지어 일반인은 거의 모르는 1985년 발표된 명혜원의 ‘청량리블루스’, 박인희, 이문세, 이연실, 심지어 7080 운동권 시절이 그리운 단골에겐 김민기의 ‘기지촌’을 편지처럼 보내준다. 그날 송창식의 초창기 곡 ‘밤눈’을 놀랍게도 강허달림 버전으로 들을 수 있어 개인적으론 무척 좋았다. 나름 셰프적 본능을 발휘해야 된다. 맥주라인에는 10가지 수입맥주, 5가지의 패일맥주가 있다. 칵테일에 비중을 둔다. 나름 공부를 했다. 30여종의 칵테일을 내는데 대표격은 쿠사버전으로 변형시킨 ‘코로나리타’. 코로나리타는 최근 레스토랑이나 바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칵테일 맥주’의 대명사다. 맥주를 병째로 놓고 빨대를 꽂아 마시다 보면 코로나가 천천히 흘러나와 상큼하면서도 톡쏘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코로나는 1925년 멕시코 ‘그루포 모델로(GurupoModelo)’사에서 처음 생산된 멕시코 내에서 최고 판매율을 보인 국민맥주. 코로나는 라임이나 레몬 조각을 병 입구에 끼워 마시는 음용법으로 유명하다. 코로나에 라임을 넣는 이유는 고산지대가 많고 날씨가 매우 더운 멕시코의 날씨 특성 때문에 갈증 해소를 위해 술을 마실 때 라임이나 레몬, 소금을 쳐서 마시는 멕시코의 음용 습관이 자연스럽게 코로나에 연결된 것이다. 병 입구에 라임을 끼워 마시면 탄산이 줄어들어 맥주 맛이 한결 부드럽고 깔끔해지며 상쾌한 맛을 더해준다. 긴 목의 투명한 병은 여타의 짙은 갈색 맥주병 사이에서 코로나를 차별화시킨다. 코로나의 축소판인 ‘코로니타’는 코로나와 나란히 놓고 보면 마치 커플인 듯한 느낌을 주어 성별을 가진 유일한 맥주로 주목 받는다. 무더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맥주를 마시는 짧은 시간에도 맥주의 온도가 쉽게 손실되어 더욱 시원하게 마시고자 코로나를 작은 병으로 제작했다. 이후 병이 작아 여성 맥주로 사랑받는다. 원래 코로나리타를 만들 때는 코라나, 데킬라, 트리플 섹, 마가리타 등이 묶여진다. 스페인어인 ‘마가리타(Margarita)’는 데킬라 칵테일의 한 가지로 글라스 주위에 소금을 두르는 것이 특징이다. ‘트리플 섹’은 세 번 증류한 오렌지향이 감도는 증류주다. 쿠사는 코로나리타를 여성이 좀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레시피를 변형시켰다. 양도 많게 하고 새콤달콤한 맛을 가미했다. 특히 데킬라향을 누그러뜨려주는 솔트림(Saltrim·림에 발라놓은 소금)을 없앤 게 특징이다. 한 잔 1만3천원. 그는 30세부터 커피에 손을 댔다. 여기 커피는 모두 스페셜티. 주문하면 주인이 알아서 드립해준다. 운이 좋으면 고가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파나마 게이샤까지 저렴하게 마실 수 있다. 가격은 7천원. 향을 위해 100만원대 핸드그라인더를 사용한다. 25일 밤 국내 수준급 재즈뮤지션 찰리정의 무대가 오른다. 피아니스트 성기문, 드러머 이도헌, 객원보컬 박재홍이 세션으로 참여한다. 입장료는 없고 25명까지만 입장 가능하다. 스탠딩 댄스 정도는 할 수 있다. 중구 대봉동 19-27. (053)422-941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2.2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돼지국밥 전문 ‘돌삐’ 이경남 사장
식당 입구. 그 식당주만의 ‘색깔’을 액면 그대로 드러낸다. 그 색깔이 고집스러움과 우직함 쪽으로 넘어서면 그 오너셰프는 본질적인 것에 더 치중하게 된다. 이목을 끌만한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등에 들어갈 돈은 최대한 아낀다. 더 좋은 식재료 구입에 치중한다. 갈수록 그런 식당주를 만나기가 어렵다. 운명이 아니고 ‘어쩌다 식당’인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TBC대구방송 남쪽 골목 초입에 있는 돼지국밥 전문점 ‘돌삐’. 그는 상호처럼 살려고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렸다. 우연찮게 길을 지나가다가 식당 첫인상이 꽤 괜찮다 싶어 차를 세우고 식당 안에 들어가봤다. 묵직한 느낌이 왔다. 오너셰프 이경남씨의 별명은 ‘똘삐’. 좋다. 그 이름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지난 정월보름날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너무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돌삐란 동일한 상호를 가진 식당 둘을 동시에 꾸려가야 된다. 돼지국밥집과 횟집이다. 지난 30여 년 그가 올인한 영역은 횟집. 하지만 그의 식당인생 2부는 돼지국밥에 승부를 걸었다. 그는 지금 그로기 상태다. 수십 년간 누적된 피로가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그가 두 손을 내민다. 류머티스 환자처럼 뼈 마디가 다 휘어져버렸다. 툭하면 물리치료를 받아야 된다. 식당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말에는 찬모가 없어 아들 일을 돕고 있는 노모(박봉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그가 등장했다. 씩 웃는다. 그 표정이 꼭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빼닮았다. 터프한 표정 속에서 돋아난 ‘돌삐표 살인미소’가 좋아 단골이 된 손님도 많다. ◆돌삐의 인생역전 학창 시절 그는 한 주먹했다. 공부보다 운동이 화두였다. 승부사 기질 탓에 이런저런 다툼이 잦았다. 한창 때는 누구와 싸움을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식당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쌈꾼이 바로 ‘손님’이란 걸 알게 됐다. 가장 친절하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진실해야만 단골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야만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있다. 이보다 무서운 적수가 있을까. 젊은날 날센 주먹은 이제 요리하는 손으로 변해 버렸다. 두산동 TBC 대구방송 인근 골목 초입 30여년 횟집 내공 주먹깨나 쓴 주인장 고교 때 야반도주한 서울서 요리 입문 80년대 창녕횟집 차리며 본격 셰프의 길 이따금 손님 위해 끓여낸 탕·국밥 인기 그 참에 전국 국밥집 1년여 순례후 개업 가마솥 지키며 정성들인 돼지국밥만큼 콩물·배추속 어우러진 돼비지탕도 인기 남으로 내려오기 전 이북에서 선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대구로 온다. 서구 내당동에서 살았다. 북한 음식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는 해외 근로자로 일을 하다가 말년에는 개인택시를 몰다 돌아가셨다. 그는 한때 주목받는 운동선수였다. 필드하키, 마라톤, 육상 등에 강했다. 정이 많은 술고래였다. 친구 퍼먹이기가 특기였다. 부모한테 배운 북한식 만두를 많이 빚었다. 결혼만 덜컥 안 했다면 세계를 떠도는 여행가가 되고 싶었단다. 고교 때 벌써 셰프 팔자가 확인된다. 동대구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도망쳤다. 종로5가에 있던 중화요리집 ‘선일각’에 팔려가서 죽을 고생을 했다. 동구 신암동 옛 영신고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차려 고갈비·닭똥집 등을 구워팔았다. 군을 제대했다. 기술이 없어 공사장을 전전했다. 눈썰미가 있어 학원에 안가고도 조적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루에 무려 8천장을 쌓았다. 하지만 목돈은 잡지 못했다. 1980년대 초중반 남구 대명동 즉결재판소 맞은편에 형성된 한 향어 횟집에서 처음 요리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기술을 그대로 가르쳐주는 이는 없었다. 눈치껏 배워야만 했다. 대명동 복개도로 회타운에 있었던 ‘창녕횟집’에서 본격적으로 셰프 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회를 제대로 써는 법을 알기 위해 근처 선어를 취급하는 아줌마에게 매달렸다. 기술자만큼 회를 쳐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0여개 이상의 횟집을 열었다 닫았다를 거듭했다. 달서구 신당동 신당시장 안에서 ‘창녕횟집’을 열었을 때는 수족관 살 돈이 없어 벽돌로 대충 만들었다. 하지만 콜레라 파동 때문에 손님이 끊겨버렸다. ‘장사는 내가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흐름을 타야 되고 굴곡변수가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걸 절감했다. 동대구역 앞에서 ‘다도횟집’을 할 때는 심야손님을 겨냥한 소고기스키야키, 복어탕, 동태탕, 우럭탕 등을 꽤 잘 끓였다. 그는 가능하면 고춧가루가 덜 들어간 이북식 탕을 고집했다. 생선과 고기 요리, 이걸 통합시키고 싶었다. 횟집 시절에도 툭하면 단골, 종업원, 이웃 식당주 등을 위해 소머리국밥을 잘 끓여냈다. 다들 회보다 국밥이 더 낫다면서 국밥집을 한 번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도 넣었다. 그런 반응이 그를 국밥집 사장으로 만든 셈이다. ◆돌삐표 돼지국밥 국물 레시피 처음엔 제대로 된 소머리국밥집을 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국밥집을 가봤는데 원재료에 충실한 데를 찾기 어려웠다. 수입고기가 국내산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대로 된 국물맛을 내는 건 정성밖에 없었다. 주인이 가마솥 앞을 지키지 않으면 국물도 주인을 속였다. 봉덕, 목련, 범어, 명덕 등 지역의 유명 장터 돼지국밥집에 이어 전국구 국밥집도 1년여 순례해봤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국물맛을 찾지 못했다. ‘돌삐표 국물’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그는 기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돈을 주지 않고선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의 탕 요리 노하우를 기본으로 시행착오를 겪었다. 실패가 결국 ‘실력’이 되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이 오면 국물 제대로 빚는 법을 공짜로 가르쳐주겠단다. 셰프에 따라 같은 레시피도 맛은 제각각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돼지와 소 뼈부터 공부했다. 그리고 대전의 삼성주물을 통해서 특제 가마솥 둘을 구입했다. 하나는 고기 삶고 또 하나는 뼈를 우려내기 위한 용도였다. 고기도 현금 박치기여야 제대로 된 걸 얻을 수 있다. 그게 오히려 단가를 낮출 수 있다. 사용하는 고기는 돼지 부위 중 삼겹살, 목살, 아롱사태, 전지 등이고 후지는 퍽퍽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내장은 오소리감투, 창자, 암뽕 등을 넣는다. 일단 돼지와 소뼈를 다 넣고 삶는 게 특징. 처음에는 장장 12시간을 한 타임으로 삶아봤다. 초벌 때 숨은 핏물이 많이 발생했다. 국물이 갈변해버렸다. 그 초벌 국물은 역한 냄새 때문에 먹기 힘들었다. 불 조절이 정말 중요했다. 강한 불로 계속 가면 잘 우려지지만 마지막에 불을 낮춰 뭉근하게 고아내면 국물은 뽀얀 데서 불그죽죽해진다. 돼지국밥이라고 해서 돼지뼈만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소뼈를 아웃소싱했다. 각종 돼지뼈 중에서도 선별했다. 대퇴부·족발 등을 축으로 하고 그 곁에 소뼈(엉치뼈·갈비뼈·사골)를 섞었다. 맞다. 핏물 제거가 정말 중요하다. 수돗물을 갈아주며 하루 이상 핏물을 뺀다. 다시 그 뼈를 20~30분 뜨거운 물에서 데쳐내듯 삶아 내버린다. 뼈의 표면을 자세히 보면 굳어버린 선지 덩어리 같은 게 묻어 있다. 미지근한 물에 다 씻어줘야 한다. 그렇게 장만한 뼈를 찬물에 넣고 뚜껑을 덮는다. 강불에 3시간 정도 고아내면 뽀얀색이 드러난다. 거기서 한 단 불을 낮춰 5시간 더 우려낸다. 그 물을 받아낸다. 정수기에서 빼낸 알칼리수를 남은 뼈에 붓고 센불로 8시간 정도 끓인다. 그럼 국물이 3분의 1 정도 확 줄어든다. 그걸 받아낸다. 이때 돼지뼈는 흐물거려 버려야 된다. 초탕 국물 색은 탁도가 있다. 재탕 국물은 흰색에 가깝다. 특유의 뽀얀색이다. 또 물을 소뼈에 넣고 센불에 6시간 정도 끓인다. 그렇게 장만한 국물 세 가지를 1대 1대 1로 섞는다. 고기는 따로 삶아야 된다. 고기 삶은 물은 맑은 갈색이고 단맛이 나면서 천연조미료 구실을 한다. 그걸 기존 국물에 15분의 1 정도 섞는다. 너무 많이 섞으면 본연의 맛이 감퇴된다. ◆북한식 돼비지탕 두부집도 아닌데 삶은 콩이 보였다. 그 콩은 그가 부모로부터 배운 북한식 돼지음식인 ‘돼비지탕’(9천800원)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재료다. 원래 돼지등뼈와 믹서에 간 콩물이 연한 배추 속과 잘 어울리게 끓여내는 것이다. 예전에는 배추 속 대신 시래기도 사용했다. 식성대로 소금만 넣고 먹는 이도 있고 대구식 칼국수처럼 양념장을 넣고 먹기도 한다. 돼비지탕은 콩국수에 돼지삼겹살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기자도 대구에선 처음 먹어본 메뉴다. 돌삐 사장은 “아직 대구 사람들은 이 음식을 잘 모르고 속초 아바이마을 같은 북한에서 내려온 강원도권 실향민은 대구에서 돼비지탕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다”고 말했다. 아직 이 음식을 크게 홍보하지 않고 있다. 마니아가 원할 경우만 끓여낸다. 횟집 잡어탕에서 시작된 그의 요리 탐구는 결국 돼지국밥을 넘어 돼비지탕으로 영역을 넓힌 것 같다. 원산지란에 주인과 종업원을 국내산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의 요리 사부는 연습과 시행착오란다. 직접 담근 깍두기와 매운 배추김치. 이 둘도 국물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남해군 미조항 멸치로 만든 젓갈과 액젓만 고집한다. 액젓은 멸치젓갈을 3년 묵혀야 얻을 수 있다. 디저트로 주는 칡즙. 여느 식당의 희석한 매실액보다 훨씬 투실투실해 보였다. 수성구 두산동 185-4 (053)768-799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2.1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블루오션 개척자들-나홀로족 겨냥 대구식 일식당
제일 만만한 게 식당인 세상. 그러면서도 가장 잘 망하는 게 식당인 세상이다. 무슨 아이템을 띄우면 돈 벌까, 다들 고심한다. 각종 푸드매거진은 앞다퉈 2017년 푸드트렌드를 밀도 있게 전망한다. 기자한테도 정유년 식당가 운세를 묻는 전화가 자주 걸려 온다. 이번 주엔 지역 외식업주가 명심해두면 도움이 될 만한 푸드 트렌드 정보를 정리해본다. 물론 ‘정답’은 아니겠지만. ◆ 나의 욕망을 소비한다 ‘나의 욕망을 소비한다.’ 최근 2~3년 새 소비자의 기본 성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예전엔 아무래도 남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압도했다. 친구가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갔다. 이제는 아니다. 무슨 장에 갈 건지, 그 장에 가서 무엇을 소비할 건지 사전에 꼼꼼하게 비교분석한 뒤 결행한다. 스마트폰이 있어 온갖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결행은 예전보다 더 효율적이고 수월할 수밖에 없다. ‘1인세대 520만시대’ 넷 중 1가구 싱글 쿡방 열풍 이어 가정간편식 상품 주목 작년 문 연 대명9동 카페골목 키햐아 중학교 동기 김도관·송시현 의기투합 홀로족 공간 구성·日 가정식으로 대박 대구 18곳 등 전국 23개 가맹점 확보 이런 흐름에 불을 지핀 건 바로 ‘나홀로족’. 이들이 2010년을 기점으로 대표적 소비층으로 등장한 때문이다. 나홀로족은 타인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에 더 민감하다. 가족이 소비 단위로 움직이던 지난 시절엔 부모의 욕망이 아이의 욕망을 앞섰다. 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남편의 식욕보다 아내의 식욕이 더 중시된다. ‘여존남비세상’인 덕이다. 하지만 아내의 식욕도 결국 아이의 식욕에 밀린다. 이런 제약조건이 결국 대한민국 외식업체 지형도를 새로운 스타일로 바꿔놓을 수밖에 없다. ◆ 혼밥·혼술족 권하는 사회 혼자가 더 편한 세상이다. 1인과 이코노미의 합성어로 ‘일인가구시대의 경제’를 의미하는 ‘일코노미’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예전엔 ‘나홀로족’은 소수자였다. 이젠 ‘소비 리더’로 당당하게 존중받는다. 그러다 보니 혼밥(혼자 밥을 먹음)·혼술(혼자 술을 마심)에 이어 혼영(영화 관람)·혼공(공연 관람)·혼행(여행)·혼쇼(쇼핑)족이 새로운 외식 소비층으로 등극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최근 성인 남녀 1천884명에게 ‘나홀로족 트렌드’에 대해 조사를 해봤다. 실제 전체 응답자의 대부분인 96.4%는 ‘혼자 무언가 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 성인 남녀 10명 중 2명은 스스로를 ‘나홀로족’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절반 이상인 68.9%는 ‘매번은 아니지만 혼밥·혼술·혼행 등은 좋아하는 취미’라고 응답했다. 그중에는 ‘혼밥을 해 봤다’는 응답자가 94.0%로 가장 많았고 혼영(73.4%)과 혼술(72.6%)을 해 봤다는 응답자가 다음으로 많았다. 이어 혼행을 해 봤다는 응답자도 61.8%로 과반수였고 혼공을 해봤다는 응답자도 38.2%에 달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지난해 12월 말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 4분의 1가량(22.3%)이 1~2인 가구, 4가구 중 1곳이 싱글족인 셈이다. 2030년에는 1~2인 가구가 전체 인구의 32%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가족문화는 위축되고 독신문화는 활성화되고 있다. 청년들의 결혼 적령기가 평균 30세로 많이 늦춰졌다. 결혼 전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의 혼자 식사를 하게 된다. 이혼하는 사람들의 수도 폭증하고 있다. 독거노인도 큰 폭으로 늘고 있다. 결국 1인세대 520만명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 HMR 신드롬 대형식품회사들은 다들 ‘HMR(Home Meal Replacement·가정간편식)’를 미래 신성장동력사업으로 꼽는다. NH투자증권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HMR를 블루오션으로 지목했다. 2010년 간편식시장은 업계 추산 7천700억원이었으나 지난해는 1조3천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올해도 2조원을 충분히 넘어설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왜 HMR가 급부상하는 걸까? 우리의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맞벌이 세상. 집에서 요리를 해 먹을 시간도 여유도 없다. 다들 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장을 봐서 요리를 하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거나 비슷한 HMR를 먹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특히 맞벌이 직장 여성은 요리에 집중할 여유가 없어 갈수록 HMR에 의존하고 있다. HMR는 예전 인스턴트·패스트푸드의 간편함에 집밥의 영양을 결합해 놓은 것이다. 이건 백종원이 진행한 쿡방, ‘집밥 백선생’의 영향이 지대했다. HMR는 1인용 도시락과 웰빙 컵밥 특수를 몰고 왔다. 2010년 여름에는 ‘삼각김밥’이 편의점의 존재이유랄 정도로 선풍을 일으켰다. 홀로족을 위한 CJ제일제당의 ‘햇반’도 1997년 등장해 국내 인스턴트 밥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그래도 밥은 집밥이라고 고집했다. 만만치 않은 고슬고슬한 맛 때문에 햇반은 20년 롱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외식과 내식을 절충한 HMR. 이건 가격·속도·영양 등 세 가지 요소를 다 만족시켜주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간식이었던 라면까지 HMR에 밀리고 있음을 농심 측이 시인할 정도다. 실제로 밥으로 만든 가정 간편식 시장은 매년 커지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2014년 양곡소비량 조사 결과를 보면 쌀을 활용한 식사용 조리식품의 소비량은 2012년 7만4천495t에서 2014년 9만8천369t으로 약 32% 증가했다. 대형마트와 온라인몰에서도 컵밥과 볶음밥 등의 매출이 증가세다. 지난해 롯데마트의 컵밥류 매출은 전년보다 36.8% 신장했다. 특히 국밥류(99.4%)와 비빔밥(50.0%)의 매출 신장폭이 컸다. 가정간편식 시장에서 가장 핫한 분야가 ‘즉석밥’이다. ‘진화된 햇반’으로 보면 된다. 현재 즉석밥시장에 뛰어든 기업은 CJ제일제당과 대상(청정원), 풀무원, 비락 등이다. 햇반으로 즉석밥시장을 주도하는 CJ제일제당은 2013년부터 볶음밥류 위주로 가정간편식을 판매하고 있다. 이 중 ‘프레시안 볶음밥’은 월 매출 5억원 이상을 기록했다. 2012년 업계 최초로 컵밥 제품을 출시했던 비락도 지난해 ‘비락 컵밥’ 3종을 리뉴얼해 새롭게 선보였다. 청정원은 나물밥으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청정원은 지난해 녹차 곤드레나물밥, 둥굴레 취나물밥, 메밀 무청나물밥 등을 내놨다. 지난해 말 선보인 냉동볶음밥 3종에 이은 후속제품이다. 나물밥은 집에서 다듬기 힘든 생나물을 듬뿍 넣어 지은 밥이다. 나물과 잘 어우러지는 녹차·둥굴레·메밀 우린 물로 밥을 지어 맛은 물론 건강까지 잡았다는 평가다. ◆ 키햐아 현재 대구에서 HMR 현상과 맞물려 대박을 치고 있는 핫 플레이스는 남구 대명9동 카페골목에 있는 ‘키햐아’다. 지난해 등장해서 대구 18개 업소 등 전국에 23개의 가맹점을 확보해 일본 가정식의 선두주자가 된 키햐아. 1~2명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 바텐석에 앉는 홀로족이 적잖다. 여기에 앉으면 요즘 일본 중년 남성한테 인기 짱인 만화와 드라마인 ‘고독한 미식가’가 된 기분이다. 여느 식당과 달리 단체식이 어울리지 않고 나홀로 식탁 같은 분위기다. 주메뉴는 연어샐러드·돈부리(덮밥)·라멘·우동류. 일단 상호가 개그맨 전유성이 청도에 처음 와서 차린 짬뽕집 ‘니가 쏘다쩨’처럼 독특하고 재밌다. 키햐아는 ‘탄산이 식도를 넘어갈 때 간질거림을 긁어주는 소리’를 의미한다. 현재 송시현·김도관씨가 동업으로 식당을 꾸려가는데 둘 다 ‘청년장사꾼 유전자’가 다분하다. 둘은 대구 평리중학교 동기. 푸드트럭을 타고 버스킹하듯 거리에서 음식을 팔아도 성공할 열정을 갖고 있다. 송씨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때 한 일식당에서 감각을 익혔다. 처음에는 주류를 앞세운 퍼브(pub)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승산이 없었다. 실내인테리어 전문가인 동기 김씨의 도움을 받아 요즘 대세인 대구식 일본 간편식을 내자고 맘을 먹는다. 지역의 경우 2년 전 시내 동성로에 상륙한 ‘토끼정’, 방천시장 내 ‘또바기키친바’ 등이 일본 가정식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식재료의 식감보다 국물 맛에 더 승부수를 띄웠다. 고독한 자에겐 자극적이고 깊은 페이소스의 육수가 더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게 해서 대구식 일식 HMR가 론칭된다. 본토의 담백한 감미로움에 대구 육개장 특유의 얼큰하고 화끈한 맛을 섞었다. 남구 이천동의 유명 짬뽕집인 ‘진흥반점’의 걸쭉하고 육중한, 짬뽕육수 같은 맛을 키햐아는 자랑스럽게 성공시켰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2.03
김정휘 셰프에게 듣는 ‘맛있는 복어’
사실 같은 동해안 해역에서 잡히지만 고기는 잡는 배에 따라 중국산, 국내산 등으로 갈라진다. 물론 고기는 다 같다. 이곳에선 밀복, 그리고 아귀를 취급을 한다. 복어는 경주 감포수협을 통해 갖고 온다. 지난해 12월 말에 10㎏짜리 200상자를 구입해 냉동 창고에 보관 중이다. 1주일에 한 번 경주 양포로 간다. 활아귀를 경매받기 위해서다. 복어는 활복, 생복, 냉동복 등 세 종류가 있다. 경매장 바닥에 선어 상태로 죽어있는 걸 받아서 요리하면 생복, 활복은 살아 있는 걸 그대로 잡아 요리한 것이다. 임진강 황복이 가장 비싼데 일반적으로는 참복어(자주복)가 최고가다. 양식 말고 자연산은 40㎝ 기준으로 마리당 20여만원 선. 양식 참복어는 제주도, 서해, 중국산 등이 있다. 양식은 25~30㎝에서 팔아야 된다. 더 크면 사료 값이 더 들기 때문이다. 참복은 회, 탕, 복껍질, 수육 등을 부위별로 먹어야 효율적이다. 이런 경우에는 복어자격증이 있어야 된다. 나머지 일반 복은 한식조리사가 다룰 수 있다. 참복탕도 1인분 3만5천원 정도 받아야 타산이 맞다. 그래서 대구에선 가격 때문에 쉽게 내지 못한다. 다들 활복을 하고 싶지만 서민의 주머니 사정, 원가관리 등 때문에 대중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복어에는 식초를 넣어 먹는 것을 정석으로 아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식초 사용법도 일본식과 한국식이 있다. 일본식은 간을 하지 않은 맑은 육수에 복어를 넣고 끓여 지리로 해 먹는다. 개인별로 익힌 수육을 찍어 먹는 몇 종의 소스가 따라 나온다. 절대 식초를 국에 넣지 않는다. 비싼 복어의 진미를 제대로 맛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어라면 무조건 맹독성이 있는 줄 착각한다. 현재 국내 업소용 식용복은 거의 독이 없다. 맹독이 문제가 되는 건 황복, 참복, 까치복 정도고 밀복과 은복은 독이 없다. 낚시로 잡은 복어는 어종을 모르니 특히 조심해야 된다. 졸복, 복섬, 흰점복, 까치복 등은 내장 등을 잘 제거해야 되는데 대충 장만해 먹다가 응급실로 실려간다. 대구탕 같은 건 맹물로 끓여도 되지만 복어는 기본 육수를 이용하는 게 낫다. 이때 국물을 진하게 만드는 건새우, 북어 대가리 등은 절대 넣지 말아야 된다. 콩나물무침용 고춧가루는 영양 태양초로 만든다. 두절 콩나물은 비린내가 안 나기 때문에 뚜껑을 열어놓고 삶는다. 센 불에 6분30초 정도면 다 익는다. 제철 최고의 복어는 그 자체로 맛의 완성이다. 솔직히 별다른 레시피도 필요 없다. 식재료가 저급할수록 여러 양념이 동원된다. 다시 말해 식재료가 요리를 만드는 거지 요리가 식재료를 좌우하는 건 아니다. 특히 복어 요리의 경우는.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1.1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대구 대명동 ‘용궁복어’ 김정휘 사장
2년간 키운 阿 콩고 민물 사는 ‘음부복어’ 식당내 8개 수족관엔 세상 온갖 복어들 한쪽엔 직접 만든 복어박제 등 별난 취미 패션마케터 삶 살던 그를 ‘미치게’한 대상 경주서 횟집한 父…93년 현 자리서 복어집 작년엔 서울 유명 일식 경험살린 아들이… 제대후 아버지‘꾐’에 딴 복어자격증 요긴 3년 복어·아귀 경매현장 다니며 공부도 ‘복어에 미쳤구나.’ 대구 남구 대명동 용궁복어 김정휘 사장(37)을 만나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니 복어를 쏙 빼닮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홀에 앉으니 사방에서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가 에워싼다. 군데군데 수족관이 놓여 있다. 모두 8개였다. 북쪽 벽 발치에 놓인 수족관에 황금빛이 나는 큼지막한 복어 한 마리가 점잖게 유영을 한다. 아프리카 콩고의 한 민물에서 잡힌 ‘음부복어(일명 MBU복어)’였다. 처음 분양받았을 때는 28㎝ 정도였는데 2년 만에 45㎝로 컸다고 한다. 언뜻 임진강 황복 같다. ‘마스크푸퍼(마스크복어)’는 꼭 마스크를 쓴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밖에 ‘블랙스팟푸퍼’ ‘골든도그페이스’는 강아지 얼굴 같은 모습이다. 한때 상어도 두 마리 키웠는데 현재 빨판상어 한 마리만 살고 있다. 그는 복어로 박제를 만든다. 그게 취미다. 그가 만든 박제는 다른 집의 것보다 왠지 더 포스가 있고 퀄리티도 높아 보였다. 그가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일단 복어가 오면 배를 갈라서 내장은 물론 살점까지 죄다 발라내야 한다. 그럼 껍질만 남게 되는데 이걸 바늘로 일일이 꿰매야 한다. 그런 다음 주둥이를 통해 좁쌀이나 쌀가루 등 충전재를 충분히 넣어 모양을 잡는다. 이후 1주일 정도 그늘에서 말리면 된다. 박제작업은 겨울에만 진행된다. 여름에는 벌레가 생겨 부패되고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복어 껍질의 표면을 더 고급스럽고 생동감 넘치게 하기 위해 자동차용 코팅스프레이를 뿌린다. 현재 박제진열장 안에는 원양황복, 물밀복, 까칠복, 까치복, 밀복, 졸복, 복섬, 철갑복어, 참복, 흰밀복, 가시복어 등 15종류가 있다. 수족관에서 키우던 복어가 죽으면 복어와의 인연을 오래 가져가기 위해 일부러 박제를 한다. 복어 외길을 살다 보니 복어인형, 복어 피겨, 복어 밥그릇, 복어술, 복어 머플러, 복어 액세서리 등 별별 복어 관련 물건까지 취미로 모으고 있다. ◆ 패션 마케터를 꿈꿨다 그의 부모는 경주법원 옆 성모병원 근처에서 횟집을 했다. 40여 년 전이었다. 아버지(김동춘)는 회는 물론 회국수와 해물탕을 잘 요리해 꽤 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는 예술적 감각 때문에 계명문화대 패션마케팅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오너셰프의 꿈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부모는 자식 공부 때문에 횟집을 정리하고 1989년쯤 대구로 온다. 처음에는 현재 자리에서 ‘앞산 한식 뷔페’를 오픈했다. 그러다가 93년부터 복어집을 연다. 제대하고 집에 오니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가업을 잇게 할 요량으로 복어자격증을 따오면 RV차량을 한 대 사준다고 했다. 그 유혹에 넘어가 덜컥 자격증을 따게 됐다. 횟집 일이 바쁘면 부모 일손을 많이 덜어줬다. 복어 요리가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뒤에서 봐왔다. 하지만 그는 솔직히 식당일이 천해 보였다. 부모가 그 일로 너무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서울의 유명 의류회사 등에서 능력을 발휘해 볼 심산이었다. 틈틈이 그림과 사진도 배웠다. 마침내 서울 모 아웃도어 의류 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상명하복의 문화는 그에겐 맞지 않았고 늘 비슷하게 돌아가는 업무 패턴도 맘에 들지 않았다. 길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 2년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둔다. 얼떨결에 지인의 소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모 유명 일식점에 들어가게 된다. 꽤 유명한 식당인데 생각했던 것만큼 신비롭지 않았다. 남이 만들어 놓은 반제품을 이리저리 섞어 냈다. 고결한 레시피 같은 건 없었다. 일식당 선배들은 하나같이 자기 밥줄이라 여겼던지, 요리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요리술을 무슨 경지나 되는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앞날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국내 일본식 1호 복어집으로 유명한 ‘현복집’으로 적을 옮겼다. 거기도 전에 있던 업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단지 백주환 실장만이 감동적이었다. 백 실장은 ‘복어로 끝을 보려면 복어만 배워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실장은 틈만 나면 여러 요리학원에 가게 해주었다. 서울에서 요리 본질을 배우려 했지만 둔해서인지 훅 하며 들어오는 시크릿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가업을 잇기 전에 베트남 호찌민에서 새로운 사업을 벌여 보기도 하고 한때 식품유통업에도 손을 댔지만 다 그의 길이 아니었다. 대구로 내려왔다. 서른 즈음이었다. 마지막 남은 카드는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는 것. 용궁복어의 2대 사장이 된 건 지난해부터다. ◆ 대중적인 복어집 대구로 내려온 그는 내심 조금 건방에 취해 있었다. 서울 유명 복어집 출신이란 자만심이었다. 인건비, 재료비 등의 고려도 없이 무조건 고급 복어집으로 갈 심산이었다. 부모는 ‘맛있게 먹고 가는데 고급과 저급이 어딨냐’면서 난색을 표명했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복어를 저렴하게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버전으로 정했다. 복어 요리 습득 이전에 좋은 복어와 아귀를 경매해서 갖고 오는 절차부터 익혀야만 했다. 처음 경매 현장에 갔는데 어느 게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경매참여 방법도 제대로 몰랐다. 아귀의 경우 가격차가 복어보다 훨씬 들쭉날쭉했다. 구매에서 잘못되면 장사에 지장이 있다. 경매 현장을 3년 정도 따라다녔다. 복어철은 매년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축제는 강원도 강릉항에서 열리지만 실제 복어 소비권은 거의 부산~감포, 남해 마산·진해권에 집중된다. 그는 손님이 갑이고 주인이 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지 갑을이 만나는 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 일이 솔직히 너무 힘들다. 평생 장사하려고 여기 있는데 몇몇 유별스러운 진상 손님하고 진을 빼버리면 단골이 좋은 기운을 못 받을 것 같아 막돼먹은 손님에겐 할 말은 하고 산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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