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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강변어탕국수삼계’ 이범섭
‘강변어탕국수삼계’. 도대체 저 음식이 뭐지? 다들 아리송해 한다. 어탕이야 국수야 삼계탕이야. 세 음식이 다 섞여 있다. 어탕국수란 간단한 음식이 아니다. 추어탕 만드는 조리법보다 훨씬 까다롭고 어렵다. 칼국수와 매운탕을 혼합한 스타일인데 이게 잘 섞이게 하려면 고도의 요리기술을 동원시켜야 된다. 지난달 지인의 소개로 성당못 대성사 근처 기사식당거리 중간에 있는 그 어탕집을 찾았다. 주인 이범섭씨. 올해 54세인 그는 요리에 일가견이 있어야 성공적인 식당을 만들 수 있다는 통념을 깨트린 자수성가형 오너셰프. 툭하면 미소를 연발하지만 나름 울음 가득한 근육을 속으로 질박하게 다져왔다. 아버지(이동명)는 5남매를 위해 안동시 임동면 간고등어길 중간 지점인 챗거리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아버지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으로 무장한 분이다. 자식한테 살가운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장남인 그에겐 그게 한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세파에 시달리다보니 아버지의 그 무심함이 결국 ‘가족 먹여살리기의 고단함’이란 걸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고향 안동서 유학 ‘주경야독’ 치열한 삶 30대 중반 시작한 섬유무역업 내리막길 45세때 ‘고향·추억의 맛’ 어탕식당 창업 두류공원 주변 터잡고 꿈 따라 상호 작명 10년간‘어탕·국수·삼계탕’ 다양한 시도 잡어류 대신 잉어·붕어·가물치 등 사용 두 약초로 잡내 제거…‘어탕 명가’ 눈앞 안동에서 살다가 경북대 농과대에 입학해 대구로 나온다. 대학시절은 집 형편이 바닥이었다. 학비 및 생활비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상황. 재학 중 섬유회사에 몰래 들어간다. 주경야독의 시절이다. 오후 4시30분에는 어김없이 이현공단으로 갔다. 당시 공단은 대학생 출입금지 공간이었다. 그는 위장취업을 해서 겨우 생계비를 벌었다. 30대 중반에 독립해서 섬유 무역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산 기계로 인해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섬유업은 사양길. 45세 때 식당의 꿈을 향해 걸어간다. ◆타고난 미각…사업에 활용 어탕전문점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학창시절 그는 무척 약골이었다. 툭하면 병치레였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손자에게 가장 잘 해먹였던 음식이 ‘어탕삼계’였다. 덕분에 건강을 좀 찾을 수 있었다. 어탕삼계는 경상도 하절기 별미 보양식의 하나였다. 언뜻 ‘매운삼계탕’ 같다. 삼계탕의 느끼함은 매콤한 어탕을 만나면서 새로운 맛을 형성한다. 조리사자격증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남다른 미각 때문이다. 멀어지는 고향, 그리고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어탕삼계가 생각났다. 고향의 맛을 직접 대구 도심에서 재현해보고 싶었다. 창업 전 짬을 내 경남 거창과 산청, 충북 옥천 등 전국 유명 어탕집을 벤치마킹하러 다녔다. 팔공산·비슬산 올라가는 길, 들안길 등 대구에서 어탕 잘하는 업소를 찾아다녔다. 어탕삼계, 어탕국수, 어탕수제비, 어탕국밥 등을 하나씩 섭렵해갔다. 통상 어탕은 어르신들이 젊은이보다 더 좋아한다. 자칫 젊은 층과 소통을 못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승산이 적다고 봤다. 어르신 못지않게 젊은 층 공략에도 소홀할 수 없었다. 어탕이 어르신의 음식이란 고정관념을 깨야만 했다. 민물생선 국물에 밥·수제비·국수가 합쳐지는 게 어탕. 전분과의 싸움이 승부처다. 전분이 과도하면 뻑뻑해져서 식감을 극도로 추락시킨다. 국물과 전분과의 황금비율을 연구해야만 했다. 국물이 빨간 어탕집들이 드물었다. 대다수 추어탕처럼 무채색인 경우가 많았다. 보기 좋은 게 먹기도 좋다고 했다. 회색 계열은 상대적으로 식감이 떨어져서 거기에 고춧가루를 적당량 첨가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그 고춧가루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아버지가 전량 조달해준다. ◆적당한 고기 골라내기의 어려움 장소를 물색했다. 두류공원 대성사 주변 도로는 기사식당 밀집구역. 현재 6개가 몰려 있다. 두류공원 주변 어르신도 많아 어탕을 즐겨 찾을 것 같았다. 오픈하기 전 선몽이 있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니 강이 되고, 그 물이 바다가 되었다. 철학관에 가서 꿈얘기를 했다. 길조다. 상호에는 반드시 ‘강’ 자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래서 정해진 상호가 바로 강변어탕국수삼계. 처음에는 메뉴가 꽤 많았다. 어탕전골, 피리조림, 매운탕, 어탕만두 등 13가지 정도가 됐다. 당시 지역에서 어탕만 파는 전문 식당으로선 가장 메뉴가 많았다. 초창기 단골들은 너도나도 이 집 어탕에 대해 입을 댔다. 그건 가게에 대한 ‘관심’이었다. 어탕에 약초를 넣는다는 건 평소 생각도 못했다. 어느 날 ‘옛날에 그걸 넣고 끓여봤는데 정말 맛있다’란 단골의 말에 움찔했다. 당장 그 약초를 넣었다. 약초 덕분에 잡내가 사라졌다. 점심 때는 너무 바빠서 대기를 해야 한다. 혼자 오는 손님도 많다. 어떤 손님이 테이블을 반으로 자르면 더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장 절단했다. 그래서 테이블 수가 늘어났다. 벽 한쪽 ‘덕분에’란 문구가 눈길을 끈다. 사연이 있다. 도인처럼 생긴 한 단골이 이 문구를 권했다. ‘손님 덕분에 지금의 우리 가족이 살고 있다’는 일종의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손님이 많아지자 메뉴관리를 효율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요리 시간은 10~15분. 메뉴를 확 줄여 5개로 간추렸다. 현재 어탕국수와 수제비가 제일 많이 팔린다. 여름철에는 어탕삼계가 많이 나간다. 여긴 반주를 안 판다. 테이블 회전을 원활케 하고 식사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밀가루 반죽이 문제였다. 어탕에는 중력분이어야 한다. 강력분을 사용하면 면이 딱딱해지고 박력분은 너무 물러 내려버린다. 냉면처럼 밀가루에 탄력을 주기 위해 감자전분을 일정한 비율로 넣어봤다. 더 졸깃했다. 수제비는 끓는 물에 한번 넣어 전분을 제거한 뒤 국물에 넣어 한소끔 끓여낸다. 안 그러면 뻑뻑해진다. 동절기와 하절기, 조건이 너무 다르다. 그때마다 비율을 조정해야만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덜 퍼지는 그만의 황금 반죽비율을 갖게 된다. ◆기본육수 내기 현재 사용하는 물고기는 잉어, 붕어, 메기, 가물치, 빠가사리 등 10여종. 다른 집에도 보통 하천에서 잡아온 잡어류가 주전멤버인데 여기는 다르다. 잉어, 붕어, 가물치 등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잉어는 민물어종의 왕자. 잉어 옆에 붕어가 붙으면 매우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그냥 일반 잡어류만으로 깔면 맛이 얇다. 메기도 감칠맛을 내는 데 매우 요긴하다. 이 놈이 안 들어가면 씁쓸한 맛이 스며나온다. 모든 내장은 반드시 없애야 된다. 내장은 비린맛의 원천이다. 딱 두 종류의 약초를 사용한다. 비린맛을 잡고 구수한 맛을 더해준다. 고기를 끓이기 전에 피를 최대한 빼야 한다. 내일 사용할 건 오늘 잡아서 핏물을 빼야 한다. 대형압력밥솥에 모든 고기를 비율대로 약초와 함께 넣고 3시간 고아 진액으로 만든다. 그걸 큰 찜통에 넣고 다시 1시간 고아낸다. 뼈를 걸러낸 육수를 적당량의 양념(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 12가지 정도를 넣어서 만듦)을 넣고 1시간 끓인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 육수에 국수를 넣는데 대구에 있는 신갈산막국수로부터 사리를 받아서 사용한다. 수제비는 감자전분을 섞어 매일 50인 분량을 미리 만들어 하루 숙성시킨다. 끓이는 시간이 부족해도 넘쳐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나오면 국물은 멀겋고 싱겁다. 너무 오래되면 국물은 빡빡하고 짭짤해진다. 요즘은 국물 표정만 봐도 된 건지 안 된 건지 다 안다. 오픈한 지 4년 만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놓았다. 2015년 어느 날 무뚝뚝한 아버지가 그를 보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아내가 고추밭에 나란히 선 부자를 촬영해줬다. 어탕의 종착역은? 90% 정도 온 것 같고 아직 갈 길이 10%로 정도 남았단다. 체인점은 극구 사양하고 직영점은 한두 곳 더 차리고 싶단다. 그는 가족 중심 어탕명가를 향해 진군한다. 국물이 식자 식욕이 더 올라갔다. 그릇에 남은 국물이 한 점도 없다. 휴일은 매월 둘째·넷째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영업. 달서구 성당동 459-5. (053)627-8891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11.0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핫플레이스 - 식물원카페 ‘시크릿가든’
팔공산 자락에 앉아 있는 식물원카페 ‘시크릿가든’. 요즘 팔공산 자락에서 가장 핫한 곳이다. 일단 현장부터 확인해보자. 칠곡군 동명면 기성삼거리에서 한티재 쪽으로 올라가다가 새로 확장·포장된 득명리 쪽으로 우회전. 도로변에 잡풀처럼 앉아 있는 이정표가 보였다. 산 아래로 50m 내려갔다. 피노키오처럼 생긴 빈티지 고철인형이 주차장에 장승처럼 앉아 있다. 차를 세워놓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첫인상은 일단 합격. 산중 식물원이 하나의 나무 같다. 숲은 이파리, 카페는 한 덩어리 꽃 같다. 무지개다리 같은 작은 돌다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 바로 오른쪽 구석자리엔 적당한 폭의 왕대나무숲이 수직본능을 뽐내고 있었다. 대나무 숲과 한 호흡 거리에 있는 동쪽 산자락엔 은사시나무 수십 그루가 차렷 자세를 하고 있다. 그 밑동을 붉게 감고 있는 담쟁이덩굴은 은사시나무에게 주는 빨간 머플러 같다. 은사시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카페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S자형 작은 개천, 그 옆에 미니축구장만 한 잔디밭광장, 그 언덕 너머에 별별 꽃들이 존별로 구획관리되고 있었다. 가능한 한 콘크리트를 덜 입히고 막돌과 흙만으로 공간을 치장한 것 같다. 좋은 햇살을 무릎에 앉힌 비치파라솔 아래 연인들이 수제 꽃차를 마신다. 한 잔에 9천원. 칠곡 동명 득명리의 9천900㎡ 식물원 하영섭 원장, 20년前 착공후 우여곡절 꽃값만도 수억원 들여 350여 樹種 안착 부족한 운영비에 2년前 카페부터 오픈 직접 만든 맨드라미·이슬차 등 인기몰이 꽃밥·갖은 열매 웰빙주스도 만들 계획 지난 5월 경북도 민간정원 1호 지정 경사 ◆원장이 아니라 난 머슴 이 일 저 일 쳐내느라 너무 바빠 보이는 하영섭 원장(63). 그는 이곳의 으뜸머슴. 도무지 원장 같지 않다. 그게 감동적이다. 그가 카페 앞 감나무에서 감을 하나 따서 접시에 먹기 좋게 깎아 내온다. 솔직히 난 그가 식물원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인사를 하면서 내미는 풋풋한 미소의 격조가 남달랐다. 9천900㎡(3천평) 식물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억하고 있는 듯한 검은색 장화, 그리고 군복 바지, 빛바랜 감청색 티셔츠, 구릿빛으로 내려앉은 표정…. 20여년 숲속에 시달린 끝에 체득한 잘 구운 호밀빵 같은 미소랄까. 그에게 이 공간은 꿈이지만 실은 ‘일투성이’의 공간이다. 일에서 일어나 일 속에서 잠이 든다. 주변인들은 꿈속에서 일어나 꿈속에서 잠들 거라고 믿는다. 세상사란 보기에 따라 극과 극의 틈을 보여준다. 여유로운 차 한 잔? 오직 여길 찾은 단골만의 전유물이다. 솔직히 그는 취재를 위해 잠시 차를 한 잔 마시는 것도 불편해했다. 그가 꽃차를 타주면서 고단했던 지난 시절을 풀어낸다. 경주 골굴사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대구로 왔다. 대륜중·고를 나오고 영남대에서 조경학을 전공했지만 엉뚱하게도 이동통신사업 외길을 걷는다. 초창기 벽돌만 한 모토로라 휴대전화, 삐삐 등을 유통시키며 한국텔레폰을 통해 적잖은 돈을 벌었다. 이 업종에선 선두권이었다. 하지만 IMF외환위기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갑자기 어릴 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 마당에 심긴 꽃과 나무가 그리웠다. 부모는 7세 된 그에게 자기 몫의 정원을 내주었다. 잠재의식 속에 식물원장의 유전자가 그때 형성된다. 파산의 절망이 오히려 전원행의 간절함으로 커간다. 사업할 때도 틈만 나면 괜찮은 식물원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다들 1%가 부족했다. 너무 꾸몄거나 너무 빈약했다. 급기야 제대로 된 식물원 만들기에 나선다. ◆사라진 손금 식물원,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어야 할 것, 개발이 덜 된 곳, 주위에 묘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데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후배가 팔공산에서 카페 오픈할 때 우연히 지금 이 땅을 봤다. 찾아다닌 지 5년 만이다. 당시만 해도 득명리는 오지 중 오지였다. 1998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축대를 쌓고 잡목을 베어내고 기본 토목공사에만 6~7년 걸렸다. 그는 꽃이 없는 겨울이 늘 불만이었다. 자기 식물원만은 겨울꽃이 가능토록 하고 싶었다. 궁합이 맞는 꽃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괜찮다 싶어 심어놓으면 한여름에는 녹아내리고 한겨울에는 얼어죽었다. 어떤 수종이 잘 어울리는지 채종을 하고 재파종을 하면서 생태를 정밀하게 관찰했다. 귀한 식물인 크리핑타임도 착근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겨울 영하 15℃ 혹한에 반 이상 동사해버렸다. 15년간 꽃값으로만 수억 원이 들어갔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아까워 언덕에 식물연구동을 겸한 임시 움막집을 만들었다. 10년은 시내에서 오갔고 그다음 10년은 거기서 먹고 잤다. 매일 돌과의 전쟁이었다. 지게로 크고 작은 돌멩이를 져 날랐다. 무른 습지는 돌로 다지고 허물어진 길은 자갈로 단단하게 엮고 축대를 쌓았다. 대숲도 인위적으로 조성해 수분공급이 원활토록 스프링클러를 설치했다. 기존의 개천은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그것과 짝이 될 만한 실개천을 여기저기에 파놓았다. 잔디밭은 ‘골병밭’이었다. 하절기엔 돌아서면 잡초였다. 그걸 제거하느라 온몸은 파김치가 됐다. 어느 5월 언덕 한쪽이 크리핑타임꽃으로 물들었다. 감격이란 그런 것이다. 꽃잔디, 무늬쑥부쟁이, 청화쑥부쟁이, 능수느릅나무, 아스카국화 등을 차례로 심었다. 잔디밭도 하트형으로 만들었다. 그네를 달았다. 전망대도 만들었다. 사슴 모양으로 마삭줄을 키워냈다. 가을이 되니 미국산딸나무의 단풍이 너무나 고혹했다. 사진을 찍어 지인한테 보내주었다. 하지만 다들 시큰둥했다. ‘정신 나간 친구’로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길흉사도 등졌다. 개인의 일상은 완전 반납이었다. 꽃과 나무의 삶을 살기로 한 자만의 혹독한 통과의례랄까. 태풍 매미·루사 때 이 식물원은 급살을 맞았다. 보험도 들어놓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게 날아갔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다시 끊어진 길을 잇고 허물어진 축대를 쌓았다. 어느 날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으러 갔을 때였다. 담당자는 너무 과도한 노동 탓에 손금이 지워진 그의 손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 시크릿가든 경북도 1호 민간정원 좋은 일이 있었다. 시크릿가든은 지난 5월 수목원 정원 조성 및 진흥법에 의거해 경북도 민간정원 1호로 지정됐다. 원예학, 조경학, 건축학, 식물학, 이 네 가지를 동시에 핸들링했기에 가능했다. 500여종을 실험한 끝에 이 땅에 맞는 수종 350여종을 찾았다. 문제는 운영비였다. 근처 84세 어르신이 그와 파트너가 돼 도와주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식물원카페다. 카페 건물은 원래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일단 꽃차 전문 카페로 가고 싶었다. 맨드라미와 목련차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식물학은 알아도 차를 만드는 걸 다시 공부해야 했다. 처음에는 식물원만 만들 계획이었는데 계획이 수정됐다. 일단 2년 전 카페부터 열었다. 사계절 꽃을 볼 수 있는 명품 식물원이 완성되면 입장료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페부터 먼저 열게 돼 입장료를 포함시켜 찻값을 좀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목련꽃은 저온에서 전처리를 해야 한다. 일반 목련차는 모양은 좋아도 향이 센 게 흠이다. 저온에서 갈무리하면 향도 은은해진다는 걸 알았다. 고혹적인 붉은색이 인상적인 맨드라미차는 꽃을 7~8번 덖어서 수분을 갈무리한 뒤 건조해서 병에 보관해 사용한다. 이 밖에 국화차, 이슬차, 생강차, 우엉차, 매화차 등도 판다. 여건이 된다면 이 가든의 꽃과 열매로 꽃밥도 만들고 갖은 열매로 웰빙주스도 만들고 싶단다. 고생만 한 아내의 얼굴에도 점점 봄이 찾아오고 있다. 한때는 남편의 ‘식물원 타령’이 그렇게 야속했단다. 2년 전 현장을 둘러본 뒤부터 남편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이젠 그의 선택이 더 현명했다고 인정해준다. TV도 없다. 오전 5시에 가든에 나와 밤 10시에 잔다. 지금은 내년에 피워낼 꽃을 설계한다. 패션디자이너처럼 한 계절을 서둘러 산다. 어쩜 이 가든 자체가 눈으로 먹는 차 한 잔 아닐까 싶다. 그는 폭설의 날을 기다린다. 손님도 끊어질 것이다. 이때 꽃차의 향을 거머쥐고 잠시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으리’란 하이네의 시를 음송할 수 있을 것이다. 칠곡군 동명면 득명2길 97-21. (054)975-0588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10.2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갱시기 이야기
비빔밥과 국밥의 경계에 놓인 달구벌음식의 원형 같은 게 있다. 지금은 거의 망각된 ‘갱시기’다. 10년전 대구십미 선정위원회가 대구대표 10가지 음식을 골라낼 때 중요한 갱시기는 빠트리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대구가 종주권을 갖고 있는 갱시기가 ‘대구별식의 원형’으로 재조명됐으면 좋겠다. 일단 ‘갱(羹)’의 어원을 분석해보자. 3세기경 중국의 시모음집인 ‘초사(楚辭)’ 속에 이 단어가 나타난다. 갱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 이와 비슷한 ‘확’이란 탕국이 있는데 곰탕처럼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이다. 갱시기는 쌀알을 넣어 끓이는 죽과 달리 한번 밥이 된 걸 다시 넣어 끓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갱시기를 ‘갱식(更食)’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갱시기는 확보다 갱에 가깝다. 이름하여 ‘갱식(羹食)’, 이게 연음되면 갱시기. 궁핍한 시절 온식구 허기 달래주던 음식 형편 나아진 70년대엔 주식서 별식으로 경상도 대표식으로 재료 따라 변주 다양 묵전골·모리국수 등 닮은꼴 음식 주목 25년 前엔 대구 ‘라면갱시기’까지 개발 김천 부항면선 감자·고구마 넣어 속 푸짐 최근 수성구 ‘곰비곰비’ 갱시기 붐 주도 ◆갱시기는 추억의 대구별식 갱시기는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식구들의 끼니를 쉽게 해결해 줬던 고마운 별식이었다. 양식을 조금이나마 절약하기 위해 식은 밥을 활용할 때 갱시기만 한 게 없었다. 소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국밥은 잔치 때나 만날 수 있었다. 평소 채소를 중심으로 한 국밥 중 아녀자들에겐 갱시기가 가장 만만했다. 갱시기를 먹을 때는 따로 반찬을 준비하지 않는다. 형편이 나아진 70년대 이후 농번기 새참으로 갱시기를 먹기 시작했다. 쌀 소출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주식이 아닌 별식으로 자릴 잡는다. 갱시기 맛의 원천은 ‘묵은지’다. 겉절이 김치로는 맛이 안 난다. 김장 김치가 1~2년 푹 삭아 시큼한 맛이 절정을 이룰 때 갱시기 맛도 최상급이 된다. 별다른 냉장시설이 없던 그때는 곰팡이 핀 군둥내 나는 묵은지도 솥에 들어가기 전 전처리를 받아야만 했다. 한번 씻어 고춧가루 등을 제거한 뒤 쫑쫑 썰어 사용했다. 갱시기 용 고춧가루는 묵은지에 묻은 것보다 별도 고춧가루를 넣어야 제맛이 난다. 이 밖에 썬 가래떡, 거기에 콩나물, 멸치 육수 등이 섞여야 진미가 된다. 사골로 육수를 내면 맛이 절대 나질 않았다. 꼭 멸치 육수를 사용해야 된다. 물론 하절기보다 동절기가 적기다. 아침과 저녁은 아니고 점심때 먹어야 제대로 된 울림이 난다. 갱시기 전문식당에선 식감 때문에 찬밥을 사용하지 않는다. 죽 끓일 때처럼 불린 쌀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느 가정에선 식은 밥이 선호된다. 물론 김가루, 라면, 소면, 칼국수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밥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죽맛으로 변질된다. 국물이 부족하면 비빔밥이 돼버린다. 콩나물 비중이 늘어나면 꼭 전주 콩나물국밥 같은 느낌이다. 육수량과 묵은지, 여타 채소류의 안배, 이것이 갱시기 맛의 승부처. 김영삼 대통령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8년 10월까지 청와대 주방을 책임졌던 이근배씨. 그가 여성조선을 통해 ‘대통령들의 식단’을 공개했다. 노태우 대통령도 입맛이 없는 점심때 무척 즐긴 음식이 바로 갱시기였다고 한다. ◆대구는 갱시기 고장 갱시기는 별칭이 많다. 밥시기, 국시기, 갱죽, 콩나물김치죽, 갱싱이죽, 밥구족, 김치죽, 밥쑤게…. 대구를 축으로 한 경상도 대표식이기도 하지만 실은 레시피와 식재료만 조금씩 다를 뿐 대동소이한 지역별 갱시기가 많다. 어촌의 어죽과 어탕국수도 비슷한 포스를 갖고 있다. 김천에서는 ‘개양죽’ 또는 ‘개양시기’라 했다. 칠곡군에서는 ‘갱죽’으로 불린다. 경주의 대표적 해장국인 팔우정 해장국은 일견 ‘묵갱시기’처럼 보인다. 25년전 전국 최초의 라면 전문점이란 기치를 내건 중구 남일동 중앙시네마 맞은편 골목에 자리잡은 ‘청춘라면’은 라면에 콩나물이 들어간 ‘라면 갱시기’ 시대를 열었다. 5년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한 집에서 포항식 갱시기를 맛봤다. 정말 단출했다. 묵은지, 콩나물, 쌀, 멸치 육수 등은 같았지만 가래떡 대신 감자를 넣었다. 가마솥에서 끓이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상옥리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멸치 육수와 묵은지가 제일 중요한 식재료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는 갱시기를 모른다. 최소 7080세대가 되어야 이 음식의 울림을 제대로 이해한다. 갱시기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접경에서 피어난 ‘경계의 음식’. 언뜻 50년대 미군이 먹다 남긴 음식물로 만든 ‘꿀꿀이죽’의 변형 같기도 하다. 대구는 한국 육개장의 발상지. 1929년 종합잡지 ‘별건곤’이 이를 알려준다. 대구의 육개장 문화가 갱시기 문화와 무관할 리 없다. 또한 따로국밥, 묵전골(일명 태평초) 등도 갱시기 인프라를 풍성하게 해줬다. 갱시기는 밥도 아니고 국도 아니다. 남은 반찬이 뒤섞여 새로운 하모니를 파생시키는 ‘합창의 음식’. 배달음식도 부재하고 근처에 식당도 거의 없던 시절, 아낙네들은 남편 출근시켜놓고 품 넓은 이웃집으로 몰려갔다. 남은 반찬을 하나씩 들고서. 늦은 오후까지 수다를 떨면서 갱시기를 끓여먹었다. 일종의 한국식 ‘포트럭 파티(Potluck party)’의 주메뉴였다. 라면과 소시지류가 첨가되면 대구식 부대찌개, 주당 남편의 쓰린 아침 속을 달래주는 ‘패스트 해장국’이었다. ◆갱시기 부활 알린 ‘곰비곰비’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대구 시내 곳곳에 포진했던 갱시기 전문식당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수성교 방향으로 있는 우리은행과 대구은행 중간도로 300m 지점에 있는 ‘곰비곰비’가 잊혀가던 갱시기를 되살려 낸다. 여긴 밥과 국수로 갱시기를 만든다. 육수는 멸치, 디포리, 다시마, 무, 대파, 생강, 고추씨, 명태대가리, 양파 등으로 추출한다. 맛의 포인트는 물론 묵은지. 육젓은 쓰지 않고 6개월 이상 숙성된 멸치와 새우액젓만 갖고 김치를 만든다. 갱시기와 무척 닮은 음식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건 포항 구룡포의 명물 해물칼국수인 ‘모리국수’. 이 음식의 탄생지는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957-3 ‘까꾸네’이다. ‘모리’란 ‘한꺼번에’ ‘잡탕’ 등의 의미다. 아귀, 홍합 등 온갖 해산물에 콩나물과 칼국수를 넣고 끓인다. 꼭 구룡포식 갱시기 같다. 이 맛이 얼마전 대구에 상륙했다. 시내 종로의 중식당 천안성 옆 ‘상상속에 국수에서’도 자기만의 모리국수를 판다. 매일 홍합, 미더덕, 파, 건새우 등으로 한꺼번에 50인분 기본 육수를 마련한다. 까꾸네의 맛을 좀 편곡했다. 대구 갱시기는 멸치로 육수를 만드는데 여긴 어패류로 만든다. 육수도 초탕·재탕을 통해 완성된다. 그 과정에 아귀 내장이 큰 구실을 한다. 아귀 대신 대구·명태를 사용하면 비린내가 풍겨 맛을 망친다.콩나물도 맛의 중요한 원천이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이 들어가도 맛이 확 달라진다. 콩나물도 국수를 넣고 3분의 1 정도 끓을 때 집어넣는다. 까꾸네는 건면이지만 여긴 생면을 사용한다. 이 집은 묵은지와 달리 마늘과 고춧가루로 끝맛을 잡아준다. ◆김천 갱시기 이야기 갱시기는 직지사 산채한정식, 지례흑돼지와 함께 김천의 대표 향토음식. 특히 부항면은 ‘김천갱시기의 본가’로 알려져 있다. 개발의 바람이 늦게 찾아와 최근까지도 갱시기를 즐긴다. 부항면의 갱시기는 뻑뻑한 느낌이 날 정도로 속이 푸짐하다. 얼핏 김칫국과 비슷하지만 콩나물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를 굵직하게 썰어 넣은 게 특징이다. 현재 김천부항댐 위치인 옛 부항천 주변은 산촌임에도 불구하고 꽤 너른 논이 있었지만 평야지대에 비해 넉넉한 삶을 꾸려가기가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만든 음식이 갱시기였다. 육수를 내는 동안 콩나물과 묵은지를 준비한다. 갱시기의 국물은 멸치로 우려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맹물에다 끓여먹었다. 육수가 마련되면 멸치를 건져낸 후 콩나물과 묵은지를 넣는다. 여기에선 감자나 고구마를 넣고 쌀이나 찬밥까지 함께 넣고 끓인다. 부항면 갱시기의 백미는 감자나 고구마를 건져먹는 것. ‘감자갱시기’는 어르신들이 좋아했고, 달콤한 ‘고구마갱시기’는 여성들이 즐겼다. 형편이 좋은 집은 국수나 가래떡을 넣어 먹었다. 여기 갱시기에는 절대 참기름 같은 게 안 들어간다. 그래야 맛이 깔끔하다. 부항면 일부는 2013년 준공한 부항댐의 수면 아래로 사라졌지만 갱시기 추억은 더 짙어만 간다. 대항면 황악로 김천직지사 입구에 있는 ‘기찻길옆오막살이’도 20년 이상 구력의 갱시기 전문점이다. 한약재를 멸치 육수에 섞는 게 특징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10.20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대구 봉덕동 ‘후포회수산’ 장동철
그의 아버지는 어부였다. 통통배 동성호는 울진군 후포항에 정박해 있었다. 오전 3시에 기상했고 계란 푼 라면으로 해장했다. 밥보다 물회를 좋아했다. 동성호가 부두에 정박하면 가족들이 매달려 고기를 선별했다. 경매 안 된 건 어머니가 직접 머리에 이고 안동 등지로 팔러다녔다. 남구 봉덕1동 영남대병원 네거리 근처에 있는 ‘후포회수산’ 오너셰프 장동철씨(45). 아버지 덕분에 생선은 원없이 먹으면서 자라났다. 누구보다 생선에 대한 안목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유년시절 타계했다. 형은 일찍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자릴 잡았다. 그도 뱃일보다는 공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금오공대에 가고 싶어 대구로 유학왔다. 유신학원에서 재수를 했다. 하지만 자기 길이 아닌 것 같아 접었다. 금형공장을 하고 있던 형 곁으로 간다. 한동안 부산에서 쇠를 만지면서 살았다. 더 좋은 조건의 자릴 보장받았지만 기능장 자격증 때문에 좌절한다. 부산 폴리텍대학까지 다녔지만 결국 경력 부족으로 진로가 막혀버린다. 자신도 모르게 ‘후포 뱃사람의 아들답게 횟집이나 차릴까’ 하는 독백을 여러 번 했다.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아내도 남편의 고뇌에서 시아버지의 운명을 읽게 된다. 어부이던 아버지 덕에 생선 안목 풍부 한때 금형기능장 꿈꾸다 불쑥 횟집 오픈 “대구서 가장 다양한 어종 선뵌다” 각오 사촌형이 잡은 30∼40종 직송받아 영업 ‘뱃사람이 와도 만족할 횟집’ 소문 자자 태풍 등 바다 상황 따라 여러날 휴업도 누루시볼락 등 흔치 않은 별미에 주력 수십여 어종 옥돌판 올려낼 땐 ‘이름표’ 유독 두툼하게 썰어 ‘씹힘성’으로 승부 아버지가 좋아하던 맑은 매운탕도 별미 “아버지한테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결국 안 되더군요. 생선 만지며 사는 게 제 팔자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겁도 없이 횟집 오픈 준비에 나선다. 어촌에서 잔뼈가 굵으면 다들 즉석 해물요리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기 마련. 요리학원에서 배운 초보 조리사보다 맛을 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본 반찬도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았다. 횟집 경영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야심만 갖고 오픈했다. 금상첨화, 그의 사촌형이 고향에서 뱃일을 하고 있었다. 형의 배는 성화호다. 잡힌 고기 중 일부는 대구로 직송된다. 식당 상호는 후포회수산으로 정했다. 외식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를 일단 주방장으로 영입했다. 횟집에 관련된 자잘한 테크닉은 그를 도와주면서 눈치껏 등 뒤에서 배울 심산이었다. 그런데 친구는 1년도 안 돼 야반도주해버렸다. 비상이었다. 물러설 길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해보자고 다짐한다. 졸지에 오너셰프가 된 것이다.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게 없었다. 기본 반찬을 만들어내야 하는 아내는 동작이 너무 굼떴다. 그도 아내 못지않았다. 조각하듯 고기를 썰었다. 기다리는 손님은 빨리빨리를 연발한다. 등에선 식은땀이 돋아난다. 돈 버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향 바닷가에서 삐뚤빼뚤 대충 썰었던 그런 얼치기 회로는 손님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밥보다 욕을 더 많이 먹었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에겐 한없는 진지함과 진실됨이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어촌 출신이란 사실도 위기극복에 일조했다. 음식이 중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변수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곁반찬이 아니었다. 일단 ‘대구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산 어종을 다 보여주자’란 오기가 발동했다. 다른 횟집에선 고작 10여 종인데 그는 30~40종을 핸들링했다. 화려한 반찬보다 손 덜 댄 싱싱한 해산물 반찬을 푸짐하게 내고 싶었다. 요리는 거칠었다. 그는 늘 ‘횟집에선 갯가의 비린네가 흘러다녀야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이 딱인 제철해산물 조달에 만전을 다했다. 조개류도 미리 삶아 두지 않았다. 주문받는 즉시 삶아냈다. 욕 먹기 싫어서 회도 한 등급 더 좋은 걸 냈다. 점차 ‘선원들이 와도 만족할 만한 횟집’이란 소문이 퍼진다. 그에게 스승은 ‘시행착오’였다. ◆회에 이름표를 붙여주다 물차를 몰고 주 1회 울진을 다녀온다. 포항 죽도시장은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계절이 머무는 횟집’으로 갈무리하고 싶었다. 도시인은 알 도리가 없는 숱한 자연산 어종들. 마니아가 아니면 그런 걸 다 맛볼 수 없다. 특히 대구는 더 그렇다. 먹는 어종만 먹는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횟집들. 비록 일식의 고수는 아니지만 고기에서만은 밀리지 않고 싶었다. 그가 가져온 수십 종의 고기 앞에서 손님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사장님, 이 고기 이름이 뭐냐’는 질문공세에 시달렸다. 자신이 어떤 어종을 먹게 되는지 단번에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 연유로 생선 이름표가 생겨난다. 흑백 고기 사진을 모두 배지만 하게 복사해서 회 위에 올려놓았다. 사진 밑에 이름이 있으니 더 쉽게 이해될 수밖에. “사시미((刺身)는 ‘몸을 찌르다’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전 한 일본 성주가 이름이 궁금할 때마다 조리사를 불렀다고 해요. 성주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생선 이름이 적힌 자그마한 깃발을 꽂아둔 게 사시미의 유래죠.” 이 집에는 양식이 없다. 오직 자연산. 그래서 더 비쌀 수밖에 없다. “다들 양식과 자연산 가격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걸 먹으려면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해야죠. 그래야 음식문화가 한 단계 발전됩니다.” 여긴 바다가 닫히면 장사를 안 한다. 태풍이 오면 길게는 일주일 정도 휴업한다. 바다 사정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내일 어떤 어종이 팔릴지 그도 모른다. 본질에 충실하려고 한다. 회를 담아낼 때도 요란하게 장식하지 않는다. 그냥 옥돌판 위에 회만 담는다. 다른 집에선 쉽게 볼 수 있는 걸 여기선 볼 수 없다. 그 흔한 전어는 물론 영덕의 별미 물가자미(미주구리), 오징어, 아나고 등도 너무 흔해 내지 않는단다. 수족관을 들여다봤다. 별미 어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개도라치(점복치), 강당돔(범돔), 쏨뱅이, 황점볼락(황우럭), 누루시볼락 등이다. 특히 누루시볼락은 지역에선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데 맛이 압권이다. 단골 만들 때 동원시키는 어종이다. 그는 ‘두툼’을 유달리 강조한다. “회의 맛은 향이 아닙니다. ‘씹힘성’에서 옵니다. 대신 참치, 고등어 등 붉은살 생선은 씹힘성보다 풍미로운 맛이 더 짙죠. 단연 흰살 생선의 씹힘성이 승부처라고 봅니다. 와인도 처음에는 달달한 걸 좋아하다가 고수가 되면 질박한 걸 좋아하잖아요.” 1인분 2만5천원짜리 회를 시켰다. 문치가자미, 쥐노래미 등 모두 6종의 고기가 썰려나왔다. 열빙어, 아귀, 피조개, 새우, 전복, 홍합, 개불, 멍개, 각종 구이류 등 쓰키다시류가 주위를 에워싼다. 주재료와 부재료 사이에 신경이 통하는 것 같았다. 흉내만 내는 반찬이 아니었다. ◆대방어 이야기 그는 가을을 알리는 냉랭한 바람을 고대한다. ‘대방어’ 때문이다. 매년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시즌. 그가 대방어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방어는 크기에 따라 소·중·대로 나뉘죠. 원래 동해안권에서 사는데 이게 겨울철로 접어들면 제주도 마라도권으로 모여듭니다. 방어의 일본어는 ‘부리’, 이와 비슷한 어종으로 ‘부시리’라는 게 있는데 일본어로 ‘히라스’죠. 방어와 부시리를 동일 어종으로 보는 주인도 많을 겁니다.” 10㎏ 이하의 대방어는 횟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보통 12~14㎏급. 이걸 먹으려면 1인분 3만5천원은 각오해야 된다. 잡을 때 특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참치 잡을 때처럼 몽둥이로 기절시키는데 그러면 육질이 비정상적으로 경직돼 맛을 버리게 됩니다. 살점도 푸석해지는데 심할 경우 조직이 스펀지처럼 변질돼요.” 그는 ‘이케시메’라고 불리는 생선 기절용 침을 사용한다. 방어의 미간선보다 조금 내린 포인트에 침을 집어넣는다. 피도 적군이다. 그래서 잘 갈무리해야 된다. 그는 칼을 사용하지 않고 아가미 중심부에 침을 찔러둔 채 해수에 담가둔다. 그럼 자연스럽게 피가 말끔하게 스며나온다. 이 집에는 정말 다양한 가자미류가 있다. “고기마다 표준어·속명(방언)이 있습니다. 게르치, 노래미, 돌삼치 등으로 불리는 어종의 표준어는 ‘쥐노래미’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실은 같은 어종인데 그로 인해 명칭을 둘러싼 시비가 빈발하죠.” 동해안 어종만 취급한다. 동해의 대표 어종은 ‘가자미’랄 수 있는데 그 종류만 무려 500종이 넘는다. 가자미도 세 종류로 나뉜다. ‘가자미·광어(넙치)·도다리’다. 도다리도 가자미의 일종인데 표준어로는 ‘문치가자미’. 가자미도 돌밭에서 자라는 놈과 모래밭에서 자라는 놈의 가격이 다르다. 돌밭가자미가 더 비싸다. 현재 횟집 가자미 중 가장 비싼 건 ‘시메가레이’로 불리는 ‘줄가자미’. 이걸 ‘이시가리’로 잘못 알고 있는 주인들이 적잖다. 이시가리는 ‘돌가자미’의 일본어, 셋째로 비싼 건 참가자미로 일명 ‘용가자미’. 먹어보면 알겠지만 ‘고기밥국’ 같은 포스의 매운탕이 꽤 별미다. 고추장,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아 언뜻 비지처럼 걸쭉하다. 마산권의 통장어탕 같다.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던 탕이란다. 청양고추로 매운맛을 낸다. 갑자기 그 탕에 어울리는 별명이 떠올랐다. ‘후포탕’. 남구 봉덕1동 729-3. (053)474-9494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9.29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커피축제
1999년. 한국 커피산업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다. 다국적 커피브랜드의 대명사인 ‘스타벅스’, 그 1호점이 서울 이화여대 앞에 등장한다. 7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 동창생 3명이 의기투합해 미국 시애틀의 수산시장이었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출발한 스타벅스. 28년 만인 99년 7월27일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이놈은 2016년 세계 73개국에 모두 2만4천142개의 매장을 냈고 한국은 서열 5위로 지난해 매출액이 1조원을 넘어섰다. 이들은 830개의 전국 지하철역별 상권은 물론 전국 4만여개의 정류장 상권을 손금처럼 들여다본다. 그리고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 1호점을 경주 보문호에 냈다. 대박이 났다. 경주에 몰려드는 연 800여만명의 관광객의 동선을 노린 것이다. 스타벅스는 직원이란 말 대신 파트너를 사용하고, 그 흔한 광고를 하지 않았다. 남들은 진동벨을 사용할 때 그들은 고객의 닉네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황당한 주문에 직원들이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비상대처 생큐 쿠폰’까지 운용했다. 스타벅스는 식품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충격’. 이들의 운용방식은 여행문화는 물론 새로운 핫플레이스 해변관광지, 가령 속초~강릉~양양~동해~삼척권을 졸지에 커피벨트로 바꿔놓아버린다. 정동진과 맞물린 안목해수욕장은 부산 광안리 커피타운을 비웃을 정도의 ‘커피해수욕장’이 된다. 최근 파산에 몰려 자살로 삶을 마감한 망고식스의 강훈. 그는 김선권 카페베네 회장, 김도균 탐앤탐스 대표와 의기투합해 한국커피프랜차이즈업계에 돌풍을 일으킨다. 이들을 보고 새롭게 커피산업으로 진입한 사업가가 부지기수다. 길목이 좋은 곳과 풍광이 좋은 곳, 사람이 들끓는 곳이면 어김없이 다국적 커피브랜드는 물론 국내 파워 커피브랜드 체인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다들 흥분했다. 커피산업이 황금알인 것 같아서다. 국내 커피계엔 ‘1서3박’이란 말이 나돈다. 1서는 바리스타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80년대를 풍미했던 고(故) 서정달씨, 3박은 박상홍·박원준·박이추씨를 말한다. 80대인 박상홍은 오사카에서 유학을 하고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고, 작고한 박원준은 한때 다도원을 경영했고, 박이추는 80년대 서울에 있다가 2000년 강릉 바닷가에서 ‘보헤미안’이란 커피숍을 통해 강릉을 일약 커피도시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물론 90년에 등장한 커피명가의 안명규씨도 대구의 커피문화를 정착시킨 리더격 바리스타. 올 12월7∼10일 대구커피위크로 정해 EXCO서 열리는 커피박람회와 함께 ‘핫플레이스 커피존’ 수성못서 축제 월드 핸드드립 챔피언십 등으로 특화 ‘박람회 산파역’ 전중하 문화뱅크 대표 “수도권 빼곤 最多인 3100여 커피 업소 전국서 가장 많은 토종브랜드 보유 강점 ‘韓 커피산업의 메카’ 자리매김 계기로” ◆대구는 왜 커피도시를 선점 못했나 대구는 오는 12월7일부터 10일까지 대구 엑스코에서 커피박람회를 연다. 그 산파역은 대구 커피산업의 인프라 구축에 올인해왔던 문화뱅크의 전중하 대표. 그는 영주 출신으로 미8군 카투사에서 근무할 때부터 뛰어난 어학실력을 인정받아 미국방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관광 관련 사업 공부를 하였으며 전시컨벤션 공부를 더 하기 위하여 전시컨벤션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올해 행사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는 “왜 대구가 이렇게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커피 1번지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를 늘 속상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스타는 물론 커피숍 수, 특히 국제급 감각을 가진 스페셜 티 고수까지 도처에 숨어 있다. 대구발 토종 커피 프랜차이즈까지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이걸 묶어 보석으로 가공하지 못한 관계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크다. 지역의 커피 관련 업소는 3천100개 정도. 서울과 경기권을 제외하고는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수다. 이 중 커피숍은 2천400여개, 다방은 600여개 된다. 커피거리의 경우 남구 대명9동, 팔공산 파계사권, 수성못, 동성로, 김광석벽화길, 약전골목 등지가 커피타운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구의 토종 커피브랜드는 커피명가, 다빈치, 슬립리스인시애틀, 핸즈커피, 안 에스프레소커피, 모캄보, 봄봄, 바리스타 B 등이다. 최근에는 커피맛을 좀 아는 남자, 30㎖ 에스프레소 등 ‘대구스페셜티협회’까지 결성됐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박람회는 ‘서울카페쇼’. 올해 17회로 오는 11월9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다. 그다음으로 오래된 커피 축제는 오는 10월6일부터 9일까지 강릉에서 열리는 ‘강릉커피축제’로 9회를 맞았다. 대구보다 앞섰다. 이 밖에 부산의 부산커피&디저트쇼, 서울커피엑스포, 부산카페쇼, 서울 SETEC에서 열리는 카페&베이커리페어 등이 있다. 국내에 여러 식품박람회가 있지만 커피만 단일 주제로 박람회를 연 건 강릉이 처음이다. 강릉은 원래 경포대로 유명하고 그 옆에 있는 국내 연두부의 대명사로 불리는 초당순두부가 유명했다. 그리고 동절기 복어축제을 곁들였다. 그런데 이제는 강릉 하면 커피축제를 먼저 떠올린다. 이종덕 강릉문화재단 문화사업국장(강릉커피축제 사무국장)은 강릉커피축제를 일궈온 핵심 인물 중 한 명. 그는 2011년 강릉문화재단에 합류해 7년째 강릉커피축제를 이끌고 있다. 강릉에는 많은 커피 집이 있지만 그중 안목해변과 강릉항(옛 안목항)을 따라 조성된 커피거리는 커피 마니아라면 한 번쯤 둘러본다. 2016년 한국관광의 별 음식 테마 거리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7년 대구커피박람회 미리 엿보기 정식 명칭은 ‘대구커피&카페박람회’인데 올해부터 이 행사의 별칭을 ‘대구커피위크’로 정했다. 제7회 대구커피&카페박람회·제3회 대구커피포럼·제1회 수성못 대구커피축제가 동시에 열린다. ‘대구가 커피도시’라는 사실을 홍보하고 커피를 관광문화상품으로 특화시키겠다는 전략이 숨어 있다. 또한 바리스타, 커피 기기, 커피 마니아, 골목에 숨어 있는 커피 로스터, 그리고 색다른 커피 용품을 가진 커피맨, 커피 관련 학과, 커피숍 인테리어 관계자의 디자인 감각은 물론 커피를 응용한 수제맥주 등이 하나로 묶여 돌아가게 만들 계획이다. 전시, 체험, 판매, 세미나, 퍼포먼스, 홍보 등을 실내와 야외로 나눠 개최한다. 실내전시장(엑스코)에서는 주로 커피 비즈니스 산업관, 디저트 전시관, 커피역사관, 인테리어 전시관, 학생바리스타 대회, 커피 전문가 초청 시연 및 세미나, 창업컨설팅 등을 연다. 월드 핸드드립 챔피언십대회(한국커피바리스타협회 주관)는 올해 처음 열린다. 전 대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대구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많고 토종브랜드도 많은 특수성을 감안해 대구를 우리나라 커피산업의 메카로 발전시키는 게 이번 박람회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박람회는 커피의 도시, 커피의 메카답게 국내 대표적인 커피전문 전시회로 자리매김하고 비즈니스와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사 기간 중 8만여명이 다녀갔다. 특히 총 관람객 중 50% 이상이 외래 관람객. 대구 도시브랜드 이미지 홍보와 외래관광객 유치에도 크게 기여했다. 몇 년 전 ‘대구커피투어’ 상품도 론칭했다. 관람객들이 커피투어버스를 무료로 이용하면서 커피박람회와 함께 시내 유명 커피숍을 체험하도록 했다. 행사를 커피향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연말로 정한 것도 대구커피 띄우기 전략 중 하나다. 이 박람회는 별다른 도움을 못 받은 채 민간기업인 문화뱅크가 독자적으로 주최해 왔다. 모험이었다. 금년부터 대구음식문화포럼과 공동주관한다. 특히 한강 이남에서 가장 핫플레이스 커피존으로 부각한 수성못 일원에서 처음으로 ‘대구커피축제’(영남일보 주최)도 연다. ◆관계자들의 동참 절실 지역 커피업계, 관련 단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전 대표는 “비즈니스 차원을 뛰어넘어 커피 및 카페업계 종사자들이 이 행사 기간만큼은 시민들이 커피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마음껏 즐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야 대구와 비교할 수 없었던 커피 불모지인 강릉이 커피의 도시 대구보다 더 어필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커피의 도시 대구의 명성을 되찾아야 된다”고 말한다. 관 주도보다 철저하게 개별 커피 사업자가 이 박람회를 주도해야만이 성공할 수 있다. 현재 상당수 토종 커피 체인점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박람회가 그들의 사업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특히 박람회 인프라는 아직 부족하다. 문화뱅크와 같이 전시컨벤션을 직접 주최할 수 있는 민간 전시기획사(PEO)와 컨벤션기획사(PCO)의 육성도 시급하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9.22
가족 빼곤 다 바꾼 40여년 전통의 식당
동화사 서쪽에 있는 팔공산 케이블카로 가는 초입. 거기에 ‘곤드레밥’으로 꽤 유명한 한식 레스토랑이 있다. 바로 ‘산중(山中)’이다. 한때 등산객이 많이 찾아 ‘팔공산 산꾼식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들은 이 식당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잘 모른다. 우여곡절의 산중의 변천사. 변화무쌍한 한국 외식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77년 동화사 근처에서 문을 열어 지금의 포스를 갖기까지 산중은 무려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리모델링을 감행했다. 여든의 초대 사장 김태락씨는 95년쯤 장남 경환씨(50)한테 가업을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평생 ‘산꾼의 맘’으로 살았다. 15세 때 고향 영천을 떠나 동화사 자락에 정착한다. 한때 동화사 입구에서 ‘석굴암’이라는 기념품가게, 76년에는 동화사 동화천 인근에서 중국집을 차렸다. 이 식당은 이후 산중이라는 상호를 단 한식당이 된다. 그때는 산채비빔밥, 산채정식, 버섯전골, 닭백숙 등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였다. 그러나 거기가 86년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현 부지로 확장 이전하게 된다. 장남은 아버지와 마인드가 너무 달랐다. 그는 식당장사에 만족하지 못했다. 최강의 외식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일반 사업과 달리 식당업은 종합예술이 아닌가. 요리는 기본. 요리를 둘러싼 수십 가지의 변수를 동시에 핸들링할 수 있는 종합적인 마인드를 가져야만 했다. 식재료에서부터 레스토랑 인테리어, 디자인, 음악, 심지어 세제학까지 학구적으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곧이곧대로 구식 마인드’가 맘에 들 리 없었다. 툭하면 가게를 성형수술해댔다. 1977년 아버지 김태락씨가 연 한식당 86년 동화사 인근서 케이블카 초입으로 95년 장남 경환씨 家業 이으며 대혁신 10여차례 리모델링…메뉴·분위기 쇄신 최강의 외식사업가 되려 박사과정 공부 12년前부터 곤드레밥으로 웰빙식 특화 최고 재료에 맛은 기본…세팅 미학까지 세트 메뉴와 벽면 가족 캐리커처도 매력 ◆20년간 산중은 연일 리모델링 중 지난 세월, 산중은 연일 공사 중이었다. 일단 민속식당 같은 산중을 전원카페식으로 왕창 바꿔버렸다. 급기야 2014년 대공사 때 아버지는 작정한 듯 공사장에 드러누워버렸다. 20일간 공사가 중단됐다. 간판, 유니폼 등 20여 항목에 걸쳐 이미지 개선작업을 완료했다. 지난 3년5개월간은 공사가 없다. 부모는 그게 신기하면서도 늘 ‘불안’한 모양이다. 그는 스스로를 ‘식당쟁이’라 부른다. 식당이 성공하기 위해선 음식 못지않게 그 외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5성급 호텔 특급 조리사가 독립해서 식당을 오픈하지만 거의 망하고 떠나온 자리로 다시 가는 이유가 뭔 줄 아세요? 바로 요리만 알기 때문이죠. 예전엔 요리만 알면 그만이었는데 이젠 요리 외적인 요소가 너무 중요합니다. 어느 순간 식당이 외식업소로 변했습니다. 조리사가 경영마인드를 가진 사업가적 오너셰프로 진화해간 거죠. 저도 그 흐름을 조금 타고 있다고 보면 될 겁니다.” 맞다. 식당이 어느 규모 이상 커지게 되고 종업원 수가 폭증하게 되면 셰프는 경영자로 변신해야 된다.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나와 식당을 지휘해야 된다. ‘외식 CEO’로 격상되는 것이다. 그는 식당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여러 근육을 거의 다 갖고 있다. “식당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오너셰프가 자기 좋아하는 메뉴만 고집하는 ‘작품형’, 그리고 손님의 입맛 변화를 반영하는 ‘상품형’이죠. 둘 다 장단점이 있어요. 저는 전자보다 후자의 흐름을 더 중시합니다. 물론 기본은 지켜야죠. 그 기본은 바로 친절과 청결, 그리고 쾌적함입니다.” 그런데 손님의 입맛을 안다는 것, 그게 너무 어려웠다. 입맛을 안다는 건 사람을 안다는 것, 사람을 알기 위해선 세상사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그걸 요리학원이 가르쳐주는 건 아니었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경계를 알기 위해 그는 2000년부터 경북대, 계명대, 대구가톨릭대, 경북과학대 등 지역 네 군데 대학교의 외식최고경영자과정을 다녔고 현재는 대구가톨릭대 외식산업학과 박사과정에 몸담고 있다. ◆유채색 산중으로 변신시키기 “일단 초창기 산중은 너무 우중충했어요. 세상은 밝고 발랄하게 변해가는데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과감하게 리모델링을 시작합니다.” 판박이 관광지형 음식과 작별하기 시작한다. 메뉴 수를 팍 줄였다. 그리고 주메뉴를 버섯차돌박이, 오리훈제, 들깨수제비, 오리정식 등으로 끊임없이 바꾼다. 현재는 곤드레밥 전문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학창시절 돈만 쓰고 다니는 사고뭉치였다. 그런데 한 지인의 도움으로 외식업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엔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강사가 던진 말에 몸이 움찔했다. ‘외식도 잘만 하면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큰 부를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식업이 사회변화에 일조할 것’이란 요지의 강의였다. 외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아버지는 일단 변화를 두려워했다. 메뉴와 시설변경은 무조건 반대였다. 그가 설득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꾸지람. 하지만 그의 고집도 아버지 이상이었다. 부자의 관계는 마주 보며 달려오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하지만 그는 강행했다. 기존 20여 가지의 메뉴를 5가지로 팍 줄였다. 반찬도 20~30가지에서 5~6가지 정도로 줄였다. “아버지는 ‘관광지는 다양한 메뉴를 내놔야 한다’고 고집하셨습니다. 물론 그분 나름대로 직감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직감에 도전한 거죠. 결국 제 뜻대로 되었습니다.” 급격하게 메뉴를 바꾸는 바람에 극심한 매출하락도 경험했다. 재정까지 바닥났다. 한때는 산채 전문식당이었다. 팔공산과 비슬산 자락의 산골마을 주민들이 채취한 산나물을 수집했다. 울릉도 부지깽이나물은 배로, 제주도산 나물은 비행기로 공수해 왔다. 어느날부터 산중식당은 산나물로 널리 알려진다. 90년대 후반까지 국내 TV는 물론 일본 교토신문에서도 취재해갔다. 하지만 팔공산 주변 식당은 투자 여력 부족 등으로 인해 변신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아직까지는 닭, 오리, 산채비빔밥이 주력입니다. 일부업소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과감한 결단 없이 조금씩 변화 주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6년 전 번영회장을 맡아 국비를 따내어 외식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대다수 생계형 상인들이라 동참을 이끌어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케팅 성공 포인트 산중은 한때 과도한 공사로 인해 도산 직전에 달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김 대표는 전통주 개발 등 여러 식품사업에 손을 댔지만 모두 여의치 않았다. 회심의 일격은 ‘곤드레밥정식’이었다. 12년 전부터 곤드레밥을 냈다. 맛보다 건강을 생각하는 웰빙세상을 감지한 것이다. 일단 매일 직접 만든 묵으로 ‘묵사발’을 여느 한정식 죽처럼 냈다. 판박이 밀가루전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메밀과 도토리가루를 주재료로 한 웰빙전을 전채 요리로 깔았다. 담는 모양새도 중요했다. 접시 대신 대나무접시 같은 용기에 가오리무침, 보쌈김치, 돼지수육, 곤드레장아찌를 세트로 묶었다. 담을 때도 과일처럼 봉긋하게 모양을 냈다. “일반 한식당의 차림새를 보면 푸짐하긴 하지만 접시의 배열은 한 마디로 중구난방이죠. 저는 집중과 분산, 그리고 테이블세팅 미학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정말 먹기도 좋은 세상입니다. 덜 차리고도 더 많이 차린 밥상보다 더 주목받는 세상이 된 겁니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제 맛은 기본이고 비법보다는 조합, 즉 구성력이 관건인지도 모른다. 메뉴 이름도 맛있게 짰다. 도토리보쌈세트는 ‘사랑담다’, 수제비보쌈세트는 ‘아름담다’, 불주꾸미세트는 ‘불맛담다’, 패밀리메뉴는 ‘가득담다’로 작명했다. 그는 사이드 메뉴를 반찬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요리로 간주한다. 게다가 세트 메뉴에는 커피와 차를 포함시켜 식사를 마친 손님은 매장 한쪽 카페 공간에서 후식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이게 요즘 핫한 한식 레스토랑의 트렌드다. 곤드레는 강원도 정선의 조합에서 1년 단위로 계약해 받아 쓰고 있다. 특히 조리에 쓰는 물은 주방에 설치한 조리용 정수 필터로 거른 후 사용한다. 음악도 중시한다. 월 2만원을 투자해 음악 서비스 전문 웹 사이트에서 낮과 저녁, 기후별로 앤티크, 세미클래식, 뉴에이지 등 장르를 선정해 틀고 있다. 직원의 쾌적한 근무 환경 조성을 위해 주방에 ‘인덕션레인지’를 설치했다. 가스로 인한 유독 물질 발생을 줄이고 주방 전체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다. 또 직원이 서서 근무하는 포인트 위쪽 천장에 에어컨을 설치해 틀어주고 있다. 김 대표는 아버지의 맘을 헤아려 가게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무궁화도 많이 심었다. 아내는 회계업무쪽으로 치중하면서 주말에는 카운터를 도와준다. 솔직히 음식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1층에서 2층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려 있는 가족의 캐리커처 액자였다. 이 액자의 울림은 크다. 업소의 이야깃거리, 즉 스토리텔링의 접목이 식당업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하고 있다. 동구 팔공산로 185길 55. (053)982-0077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9.1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대구 평리동 ‘복들어온날’ 김지현
이번 주에는 복어(鰒魚)에 청춘을 다 건 대구 서구청 맞은편 복어 전문점 ‘복들어온날’ 김지현 오너셰프의 눈물 겨운 요리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서구청 입구 육교 남쪽 계단 바로 맞은편 골목에 있어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에겐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대구의 이런저런 식당 중에 가장 열악한 곳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벽엔 2015년 대구음식박람회 요리경기대회 최우수상 기념 현수막이 붙어 있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맹물 대신 노루궁뎅이버섯 달인 물을 준다. 한 그릇 1만4천원짜리 밀복매운탕을 시켰다. 적당한 식초 맛, 그리고 육중한 육수의 보디감. 주당 해장국으로 딱일 것 같다. 오후 2시30분. 손님이 다 빠질 시각이다. 여긴 오후 4시부터 1시간 브레이크타임이다. 주방 정리를 마친 김 셰프가 조리복 차림으로 앉는다. 구두닦이 등 알바로 근근이 학업·생활 평생 業 찾다 운명적 재료 ‘복어’서 발견 “복어라는 이름의 복이 福자로 보여…” 30代 요리 문외한서 오너셰프 삶 준비 5년간 복어전문 20여곳서 기본기 습득 쓰레기통 뒤지며 육수 레시피 분석도 반년 만에 복어요리 등 6개 자격증 취득 2012년 개업…‘흰밀복’ 등 특화된 메뉴 ◆난 알바를 위해 태어났던가 그녀의 인생 1막은 알바에서 시작해 알바로 저물었다. 대구 도심지 동성로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식당은 가난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규한 끝에 거머쥔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알바로 학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구두닦이, 신문배달, 방문판매, 화장품 영업, 의류숍 매니저, 식당, 다단계 사업 등을 경험했다. 오전 5시에 나가서 알바 4개를 뛰기도 했다. 고교 2학년부터 25세까지 계속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알바로는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 그럼 한 단계 올라가 영업인생을 살자고 다짐한다. 10여년간의 영업사원 시절을 보낸다. 한때 ‘보험왕 ’소리도 들어봤다. 하지만 영업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여자가 영업 말고 평생 할 수 있는 사업은 뭘까. 고민 결과, 바로 ‘식당’이란 답이 나왔다. 목돈이 없었다. 그 이전에 요리가 뭔지에 대한 기본기도 전혀 없는 처지였다.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녀가 찾은 운명의 식재료는 ‘복어’. 그녀는 이미 30대로 접어들었다. 청국장집, 국숫집, 찜집, 일식집 등 얼추 20군데의 식당을 돌았다. 식당일, 이건 노가다 판 저리 가랄 정도다. 하지만 이미 20대 때 단련된 ‘깡’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복어로 정한 이유는 뭘까? “이상하게 복어집 주인은 하나같이 푸짐하고 넉넉해 보이고 복이 있어 보였어요. 복어의 복(鰒) 자가 복 복(福) 자로 보였습니다.” ‘복집 사장은 다들 60대 정도였는데 30대 여사장의 출현이라면 자못 손님들한테 어필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건 세상 물정을 모른 나만의 ‘몽상’이었다. ◆기술 배우기 위해 복집 순례 일단 복어요리를 경험해 보고자 청해복어, 성당복어 등 5년간 지역 복어 전문점만 20여 업소를 다녔다. 설거지에서 시작해서 정직원, 홀 매니저까지 거쳤다. 그런데 기술의 세계란 이론만 갖고는 어림없었다. 일단 요리에 대한 기본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늘 적자의 나날이라 전문대학 조리학과는커녕 요리학원도 언감생심이었다. 문제는 레시피인데 공짜로 가르쳐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쓰레기통을 뒤지면 답이 나올 거야.’ 모 복어식당의 경우 육수 만들 때 갖은 재료를 넣을 수 있는 큼지막한 망이 있었다. 어느 날 사장이 그녀더러 망에 들어있는 찌꺼기를 버리고 오라고 했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몸을 통 안으로 집어넣고 손으로 재료를 헤집어가면서 재료 이름을 다 외워버렸다. 그날 육수량과 재료의 비율을 유추해서 수첩에 몰래 적어두었다. 퇴근해 집에 오면서 외워 둔 재료를 사와서 망에 넣고 육수를 뺐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식당의 육수 맛이 아니었다. 뭐가 부족한 거지?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불면증이 닥쳤다. 항상 잠이 부족했고 식당에 오면 약에 취한 것처럼, 구름처럼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죠. 식당마다 맛의 비결을 식당주만이 독점하고 있다는 걸요. 복어 국물의 원천인 육수의 맛은 망 안에 들어 있는 재료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장의 머릿속에만 있었어요. 때론 극미량의 화학조미료일 경우도 있고. 직원들이 알까 걱정돼 사장은 모두 퇴근한 뒤 자신의 비법을 그 육수에 섞죠.” 수차례 연습하고 버리고, 그런 과정을 반복해가면서 끝내 복어 기본 육수의 패턴을 알게 된다. 집집마다 다 분석해보니 비슷했다. 대충 무, 다시마, 대파 등이 필수였다. 복잡하게 많이 들어가면 육수는 정체불명이 된다. 양파·생강·건새우 등은 선택, 멸치와 한약재도 안 넣는 집이 더 많았다. “그런데 정말 바보같이 나중에 그걸 알았어요. 정말 좋은 식재료는 아무런 육수, 아무런 양념이 필요 없다는 것. 정말 하늘이 준 미인은 화장을 안 해도 예쁘잖아요. 복어왕으로 불리는 고가의 참복 같은 경우에는 정말 육수가 필요 없습니다. 워낙 진한 즙이 스며나와 맹물로 끓여도 감칠맛이 나죠. 그런데 1만원 미만의 대중적인 복어탕은 어쩔 수 없이 중국산 냉동 은복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퍽퍽한 고기 맛을 가리기 위해선 반들거리는 육수와 갖은 양념이 첨가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참복을 매운탕으로 먹는다는 것, 그건 고급 벤츠 차량을 허접한 스티커로 도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바보짓이죠. 세상 이치가 다 그렇죠.” ◆단기간 최다 자격증 취득 육수 레시피는 어느 정도 정리됐다. 복어는 위험한 요리. 이참에 조리사자격증은 따놓아야겠다 싶어 나라에서 무료로 지원해주는 기술교육학원과 시내 요리학원 등을 찾았다. 집에 가면 공부가 안될 것 같아 툭하면 밤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있었다. 관계자들도 그녀의 독한 근성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복어 전문점 오픈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매일 복어와 사투를 벌였다. 퇴근길에 칠성시장 가서 복어 10여 마리를 사 들고 집에 와선 밤샘 연습. 몸엔 항상 비린내가 고여 있었다. 덕분에 6개월이란 초단기간에 한식·양식·중식·일식·복어요리·아동요리지도교사 자격증을 모두 따버렸다. 학원에선 초유의 사태, 다들 난리가 났다. “시험을 준비할 땐 초능력자인 것 같았습니다. 하루 2~3시간 자고 오직 자격증에만 미쳐 있었어요. 구름 위로 떠다닌 반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손가락 마디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워낙 일 때문에 시달려 손관절이 조금씩 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난관을 붙들고 2012년 8월1일 생애 첫 식당을 연다. 그날 참 많이도 울먹거렸다. 일단 복어 전문점이라서 참복, 밀복, 청복, 까치복, 은복, 졸복 등 7가지를 내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상권에 맞아야 된다. 참복국을 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내놓았는데 서구에선 그것도 비싸게 받아들였다. 고급노선을 수정했다. 특별한 마니아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복어라인을 찾고 싶었다. 예약인 경우를 제외하곤 참복, 까치복 등은 뒤로 밀리고 대신 밀복, 청복, 흰밀복 등이 전면으로 나선다. 특히 리모컨 크기만 한 ‘흰밀복’은 여느 복어집에선 보기 힘든 이 집만의 메뉴다. 은복보다 두 단계 높은 가격인데 한 그릇에 8천원이다. 초창기엔 몸에 가시가 있는 청복으로 불고기도 만들었다. 가끔 영덕 강구항에서 활복을 가져올 때면 단골에게 연락한다. 활복일 경우는 1천원이 추가된다. ◆이색 메뉴 이야기 밥에 정성이 담겨 있다. 병아리콩 세 개를 고명으로 올린 ‘미나리밥’도 건강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미나리를 세척해 말리고 그걸 강황가루처럼 갈아 넣는다. 이 집은 특이하게 버섯전문점보다 더 많은 버섯을 사용한다. 복어샤부샤부를 개발할 때 웰빙버섯구이를 선별해 올렸다. 노루궁뎅이, 동충하초, 만가닥, 백만송이, 숫총각버섯, 은이버섯 등 12종이다. 버섯은 10월부터 동절기에만 예약 손님에 한해 낸다. 그녀가 좋아하는 복라면. 라면이 복과 잘 어울린다는 걸 식당일을 하면서 알게 됐다. 손님도 없고 출출하면 곧잘 혼자 끓여 먹던 것이다. 어느 날 그 광경을 엿보던 단골의 성화에 못 이겨 메뉴라인에 가세하게 된다. 대다수 복집은 하절기 메뉴가 취약하다. 그녀도 그래서 하절기 특별메뉴를 짰다. 그게 ‘복껍질물국수’. 식후에 나온 단호박감주는 삼대가 다 좋아하고 하트 모양의 계란찜은 너무 예쁘게 생겨 인증샷 1순위 메뉴다. 매주 일요일 휴무. (053)561-1255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9.0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단팥빵 패밀리 이야기- 대구근대골목단팥빵
대구 중앙파출소 앞 광장. 거기는 ‘버스커의 고향’이기도 한 젊은이존이다. 북쪽은 대구백화점 가는 길, 동쪽은 통신패션골목. 정말 빛나는 ‘유채색존’이다. 하지만 길건너편 약전골목은 갑자기 ‘무채색톤’으로 변하는 실버존의 초입. 10~20대는 좀처럼 길건너 약전골목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어느 날부터 그 룰이 깨졌다. 젊은이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 무슨 이유일까. 약전골목 동문 입구 초입에 자릴 잡은 약전골목 첫 단팥빵집 때문이었다. 대구에 태곤이단팥, 팥장수, 아리랑 등 여러 단팥빵집이 있다. 솔직히 어느 집이 가장 맛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단팥빵 맛, 거기서 거기다. 자기 기호가 중요하다. 요즘 소비자는 맛보다 ‘욕망’에 더 솔깃한다. 그 욕망은 특히 재밌는 ‘푸드스토리’가 곁들여지면 만족감이 커진다. 팔도빵지순례족이 꼽은 대구3대 명물빵집 2013년, 빵에 청춘 바친 어머니 배인숙씨 남편 정봉원 교수와 대구 관광빵 개발 결의 ‘가장 쉽고 싸며 이야기 담긴’ 단팥빵 결론 ‘직접 끓인 팥’‘무방부제’등 원칙 2년 연구 유학파 아들 성휘·딸 재원씨 합류로 결실 녹차생크림단팥빵 등 5종 新舊 입맛 공략 ‘근대’ 뜻하는 영어발음서 ‘모단빵’ 별칭도 빵 이름과 상호는 일치했다. ‘대구근대골목단팥빵’(이하 근대단팥빵). 그런데 이 근대단팥빵은 대구보다 SNS에서 더 먼저 유명해진다. 2015년 무렵 팔도명물빵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빵지순례족’이 일조한다. 순례족은 서울의 ‘나폴레옹 과자점’, 군산의 ‘이성당’, 대전의 ‘성심당’, 안동의 ‘맘모스제과’, 광주의 ‘궁전제과’, 경주 ‘황남빵’, 통영 ‘오미사꿀빵’, 진주 ‘수복찐빵’, 목포의 ‘코롬방’, 천안의 ‘학화호두과자’ 등을 찍고 다녔다. 아무튼 어느 날 대구로 오는 순례족이 부쩍 늘어난다. 대구에 3대 빵집이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시내 삼송빵집의 ‘마약빵’(옥수수 크로켓)이 리더격이었다. 이어 근대단팥빵, 마지막엔 대구도시철도 반월당역 내에 위치한 ‘반월당고로케’가 편대를 형성한다. 근대단팥빵은 ‘모단빵’이라 명명됐다. ‘모단’은 근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Modern(모던)’의 옛날식 발음이다. ◆ 가족의 합작품인 근대단팥빵 이 단팥빵은 가족의 합작품이다. 아버지 정봉원(영진전문대 국제관광조리계열 교수), 어머니 배인숙, 아들 성휘, 딸 재원. 넷이 단팥빵에 대한 지분을 4분의 1씩 갖고 있다. 누구의 빵이 아니라 모두의 빵. 약속이나 한 것처럼 네가족은 모두 외식업에 취해 있다. 근대단팥빵의 역사는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는 빵에 청춘을 바쳤다. 대구 파리바게트 2호 지산점을 운영했다. 어머니는 대구에서 이름을 대면 다 아는 유명 건설회사 회장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빵집이 좋았다. 한때 전국 최고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2007년에는 직접 ‘하와이 코나 라이언커피’를 국내에서 처음 수입해 ‘커피인(COFFEE IN)’이란 커피숍 프랜차이즈를 펼쳐나갔다. 동시에 파리바게트의 경험을 갖고 샌드위치 전문점 ‘서브웨이’(미국 체인점)까지 롯데백화점 대구점에 입점시켰다. 다들 국제적 커피 브랜드 본사가 서울이 아닌 대구란 사실에 의아해 한다. 현재도 근대단팥빵 2층에 어머니의 체취가 묻은 커피숍이 있다. 빵과 커피에 대한 오랜 경험을 토대로 푸디야를 창업하고 현재 거기 대표로 있다. 하지만 스타벅스, 카페베네, 빽다방 등 온갖 커피숍이 무한경쟁을 펼치고 기존 빵사업도 예전 같지 않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가 등장한다. 2013년부터 대구만의 먹거리관광상품 개발의 필요성을 외치고 다녔다. 부부는 ‘우리 가족이 직접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빵 개발에 나서자’고 결의한다. 부부는 가장 쉽고 값싸면서 이야기가 담긴 빵, 그게 추억의 단팥빵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1950~60년대 전국 최대급 단팥빵 공장이 대구에 있었다. 바로 중구 교동시장 내에 있었던 ‘수형당’이다. 단팥빵은 일본에서 왔다. 일본 최초의 단팥빵집은 1874년 긴자의 ‘기무라야(木村屋)’. 아직도 영업 중이다. 당시 빵 위에는 겨자씨와 참깨를 뿌려놓았다. 겨자씨는 안에 통단팥, 참깨는 팥앙금이 들어가 있다는 표시. 단팥빵 중심부는 조금 함몰돼 있다. 그 이유는 기무라가 벚꽃철 왕실로부터 주문을 받았을 때 오목한 부분에 벚나무 열매를 얹어서 공급한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단팥빵은 모두 중심이 우묵하고 가장자리가 조금 불룩한 형태를 갖게 된다. ◆ 기존 빵기술자를 영입하다 새로운 단팥빵 개발은 어머니가 주도했다. 맘모스 등 예전 1급 빵집 출신 제빵사를 영입했다. 원칙을 정했다. 힘들어도 팥은 반드시 직접 끓여 마련한다는 것. 방부제는 안 넣는다는 것. 추억만 너무 고집하지 말자는 것. 현재 수성구 만촌동에 사는 할머니(노영식·86)까지 동원시켰다. 할머니는 늘 “사골육수 뺄 때처럼 초벌 팥물은 자칫 아린맛을 낼 수 있어 버려야 된다”고 했다. 그냥 끓여 사용할 경우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생목 올라오는 맛’이 되고 결국 빵맛을 버리게 된다는 귀띔이었다. 다음은 당분 핸들링. 당분이 과도하게 들어가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팥이 갯벌처럼 녹아버린다. 통팥이 살아있어야 된다. 2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신제품 준비를 했다. 밀가루도 강·중·박력분을 무수히 많은 형태로 혼합비율을 달리해서 만들었다. 빵 한 개의 밀가루 양은 50g 안팎, 팥은 60g, 생크림은 80g을 넣어 옛날세대와 젊은세대가 공히 공감할 만한 크림단팥앙금 시스템을 구비하게 된다. 모양도 중요했다. 일본 단팥빵은 둥글납작하다. 예전 빵은 너무 납작해서 폼이 나지 않았다. 젊은층이 주고객이 되게 하려면 빵이 반달처럼 봉긋하게 부풀어 올라야 되었다. 표준빵이 개발됐지만 문제가 있었다. 수십년 구력의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빵에 대해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자꾸 예전 스타일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지시했다. “예전 건 다 잊어주세요.” 이때 어머니를 지켜보던 딸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녀는 2004년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파. 존스홉킨스대 경영대학원 석사에 이어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마케팅이 뭔가를 알고 있었다. 딸은 그렇게 주장했다. “우리 빵은 추억의 빵이지만 결코 추억스러워선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젊은이들이 일단 많이 찾아야 해요. 어르신을 타깃으로 하면 실패합니다. 젊은이가 와서 어르신 선물을 사갖게 만드는 게 정석입니다. 그러려면 요즘 대세인 녹차생크림을 전면으로 내세워야 합니다.” 딸은 녹차생크림단팥빵에 목을 맸다. 그렇게 해서 기본형, 생크림, 녹차생크림, 딸기생크림, 소보루 등 모두 5종의 단팥빵이 출시된다. 포장감각도 중요했다. 자칫 말라버릴 수 있어 기존 종이 포장 대신 공기가 덜 들어가게 비닐포장을 사용했다. 포장 위에 색다른 글씨를 올려야 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친구인 대한바른글씨쓰기협회장이며 훈민정필 대표로 있는 서예가 손병훈에게 글씨를 부탁했다. 손씨는 대구, 근대, 골목, 단팥빵에 각각 어울리는 서체를 혼용해 손병훈체 캘리그래피를 완성했다. 선물용 세트빵을 담을 수 있는 가방과 상자도 별도 디자인했다. 처음에는 롯데백화점 대구점에 입점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역시 약전골목점이 ‘명당’이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그 건물은 비어있었다. 50년대 지어진 건물이었다. 리모델링할 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본 따 화려한 샹들리에, 고풍스러운 가구와 소품 등을 갖다놓았다. 옛 나무 골조는 그대로 살려뒀다. 대구근대를 강조하기 위해 54년 영화배우 최은희와 함께 대구에 온 메릴린 먼로, 50년대 계산성당 사진도 액자로 걸어뒀다. 직원은 하얀 중절모를 쓰게 했다. 티셔츠 뒤에도 상호를 찍었다. ◆화룡점정은 아들의 몫 아들이 호출을 받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서울에서 잔뼈가 굵은 마케터. 경기대 관광전문대학원을 거쳐 미시간주립대에서 외식산업경영을 전공했다. 현재 시내 곽병원 근처에서 근대단팥빵용 생지를 대량공급하는 홍두당의 대표다. 그의 첫 사업은 길거리 음식인 씨앗호떡과 부산어묵을 판매하는 전문점 ‘호오탕탕’(호떡, 오뎅, 커피의 합성어). 부모님의 지원과 은행 대출로 자금을 마련하고 2012년 10월 부산 KTX 역사에 플래그숍 스토어 콘셉트의 1호점을 오픈했다. 때마침 씨앗호떡과 부산어묵 붐이 불어 장사가 잘됐다. 덕분에 순식간에 매장이 10호점까지 늘었다. 하지만 경험이 전무하고 의욕만 앞선 20대 청년에게 가맹사업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결국 가맹점 관리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빵 때문에 이젠 살맛이 난다. 대구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단팥빵 옆에 종소리를 매칭시킨다. 옛날 ‘학교종이 땡땡땡’ 버전을 역이용한 건데 하루 15~20번 갓 구운 빵이 나오면 가게 입구에 달린 종을 쳤다. 동생이 기획한 녹차크림빵은 기대 이상으로 젊은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됐다. 젊은 고객은 부모를 위해 추억의 단팥빵을 선물로 사갔다. 동생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모객을 위해 1만원어치를 사면 2층 커피숍에서 무료커피를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역의 색과 맛이 담긴 음식 개발에 전념하는 ‘투어 푸드 크리에이터(Tour food creator)’라 칭한다. 덕분에 빵집은 ‘기획형 로컬 베이커리’로 떴고 전국 유명 호텔 푸드코트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2015년 롯데백화점 대구점에 첫 매장을 연 이후 포항·울산·창원·부산 등지에 14개의 직영점을 냈다. 최근에는 신세계 스타필드하남과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에 입점했고, 현대시티아울렛 가든파이브점에 매장을 오픈하는 등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시장 공략에도 주력하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8.2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닭요리 변천사 - 닭도리탕에서 안동찜닭까지
달구벌. 이젠 국제적 ‘치킨시티(Chicken city)’. 2013년발 ‘대구치맥페스티벌’ 덕분에 대구는 동북아에서 가장 다양한 닭 관련 음식라인을 갖게 됐다. 하지만 닭은 우리닭보다 외국닭 세상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닭은 거의 외래종. 미국에서 들어온 종자다. 미국은 엄청난 치킨 강국이다. 치킨이란 말이 그들 삶에 녹아들어가 있다. ‘모든 냄비에 치킨을(Chicken in every pot)’, 1928년 미국 공화당 슬로건이다. ‘까기도 전에 병아리부터 세지 말라’(Don’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 are hatched)’란 속담에도 닭이 들어가 있다. 아무튼 닭세상이 ‘치킨세상’으로 변한 건 1977년 무렵이다. 84년 한국에 들어온 KFC 전신인 ‘림스치킨’. 그게 국내 첫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로 등장한 것이다. 그건 대구통닭~맥시칸양념치킨~교촌 등이 촉발시킨 대구발 프라이드치킨과 레시피나 맛이 사뭇 다르다. 사실 백숙시대는 삼계탕으로 번졌고 그게 궁중닭백숙으로 진화된다. 그런데 어느날 ‘튀김닭’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프라이드치킨’이란 말이 보편화된다. 다시 말해 삶은 건 닭, 튀긴 건 치킨이란 등식이 성립된 것. 그런데 옛날통닭만은 흥미롭게도 튀겼음에도 여전히 ‘닭’이란 말이라야 더 맛있어 보인다. 지금 별별 닭요리가 대구에서 대박을 칠 수 있었던 건 일제강점기 구축됐던 강력한 양계산업의 영향 아닌지 모르겠다. ◆전국 최강 대구양계벨트 양계산업에서 입지조건학적으로 볼 때 대구 이상의 적지도 없다. 그시절 대구는 서울 다음으로 돈이 많이 나돌았다. 또한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을 양대산맥으로 한 숱한 전통시장이 포진하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망도 대구권과 잘 맞아들어갔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근대양계산업의 주요 인프라는 일제강점기에 대거 대구로 몰려든다.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부화장은 북구 산격동에 있었던 ‘신기부화장’이다. 그 때만 해도 한국 토종닭이 단절되진 않았다. 하지만 61년쯤 미국계 닭인 하바드 종자가 대량 국내로 밀려들면서 치명타를 맞는다. 일제 땐 양계·지금은 치맥의 메카 대구 60∼70년대엔 범어동이 최고 양계특구 80년대 아파트시대 맞물려 외곽 이전 ‘禮書’에 적힌 ‘편적’ 중 하나인 鷄炙 온마리 닭 삶아 간장을 발라 조린 제물 남성이 만들고 간장조림닭 닮은 게 특징 간장 활용따라 닭볶음탕·안동찜닭으로 박정희 대통령 주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양계산업도 본격화된다. 6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양계산업’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68년에 ‘대한양계협회’가 결성되고 첫 양계 전문잡지인 ‘현대양계’도 창간된다. 계란산업 특수로 인해 산란닭 수요가 폭증한다. 대구 전역에서 양계장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그 시절 대구양계산업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대구 양계1·2세대가 있다. 박세탁씨(영천에서 ‘흥생농장’ 운영), 권진택씨(성주군에서 ‘오성농장’ 운영), 송인환씨(칠곡에서 ‘성진양계장’ 운영)와 이들의 뒤를 이은 배신국씨(고령에서 토종닭인 ‘우리품닭’ 집단 사육) 등이다. 박씨를 비롯한 몇 명의 양계인이 60년대초 현재 범어네거리 동쪽 언덕배기에서 ‘농장형 양계장 시대’를 연다. 건너편 현재 동도초등학교권까지 양계장권이었다. 범어동과 그 옆 황금동권 야산은 순식간에 ‘양계장특구’로 자리를 잡게 된다. 양계장은 부화장과 맞물려 돌아갔다. 75년 기준해 대구 시내에는 48개의 부화장이 있었다. 수성교 근처에는 대구·신성부화장이 있었다. 지금은 수만, 수십만 수를 하지만 그때는 다들 200·300수 정도만 키울 정도로 영세했다. 병아리를 5개월 정도 키우면 산란계가 되고 그때부터 1년 남짓 계란을 낳은 뒤 기능을 다하면 ‘폐계(노계)’가 된다. 닭은 삼복철 등 특별한 날에만 보양식으로 잡아먹었다. 평소에는 계란이 요긴한 시절이었다. 아낙네들은 양계장에서 계란을 받아와 부산 재첩국아줌마처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아파트 시대가 도래했다. 범어·황금동이 매머드급 아파트촌으로 변하자 도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성구 시지동과 매호동, 나중엔 경산·성주·영천·청도권으로 이전한다. 현재 대구 도심에는 양계장이 단 한 곳도 없다. ◆문둥병닭 이야기 13년 서구 내당동 반고개 북쪽 언덕배기에 대구 첫 대구나환자병원이 생긴다. 24년 오픈한 ‘애락원(愛樂園)’이다. 95년 나병전문병동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애락원은 칠곡군 신동면 신동재 언저리 ‘애생원(愛生園)’과 함께 지역 양계산업의 한 축을 담당한다. 62년 5월 보사부의 새로운 복지정책 때문이다. 나병환자의 사회적응을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것. 80년 10월30일 기준 전국에는 무려 98개 나환자 정착촌이 있었다. 칠곡 애생원 산하에는 낙산농장과 칠곡농장이 있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대구역 한편에선 시도때도 없이 ‘꼬끼요~’ 소리가 들렸다. ‘닭장열차’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대구권 양계사업이 서울과 원활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서울역에 농축산물 진흥관이 설립된다. 그 시절 대구에선 닭똥도 돈이었다. 양계장 등을 돌면서 닭똥만 수거해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도 적잖았다. 시대가 또 변한다. 80년대 후반부터 도심 양계시설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양계산업 인프라는 점차 비교적 지가가 싸고 공해와 연료문제가 적은 전라도 등지로 옮겨간다. 대표적인 게 익산에 둥지를 튼 ‘하림’이다. 대구 양계업계는 가공산업이 아닌 유통산업으로 유턴하게 된다. 이때부터 대구에선 닭 대신 ‘치킨’이란 말이 더 보편화된다. ◆계적은 대구닭의 자존심 대구는 ‘육개장’의 발상지. 육개장의 선조는 보신탕. 그 보신탕 고기와 육질이 비슷한 게 바로 닭이다.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 갖은 채소류와 섞어 국을 끓이면 그게 ‘닭개장’이다. 대구만큼 닭개장을 즐기는 데도 없다. 닭개장은 ‘닭으로 만든 육개장’이란 뜻이다. 요즘 메뉴판에 ‘닭계장’이라 적어놓은 데가 많은데 틀린 표기다. 지역에서 닭개장을 제대로 하는 식당은 북구 고성동 ‘진국육개장’, 동구 불로시장 입구에 있는 ‘경주보양탕’ 등이다. 경상도 반가에선 유달리 ‘계적(鷄炙)’을 선호한다. 계적은 일명 ‘도적’. 대구는 안동권과 비슷하게 도적을 주된 제물로 여긴다. 도적도 세 종류가 있다. 예서(禮書)에는 ‘편적(片炙)’이라고 하여 ‘계적(닭)·육적(소고기)·어적(생선)’, 이 세 가지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이들 3적을 모아서 적틀(炙臺)에 고임 형태로 높이 쌓는 걸 도적이라고 부른다. 무려 40㎝ 높이의 도적도 있다. 다른 제물과 달리 도적은 남성들이 직접 마련한다. 특히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세거지는 기제사 때 계적을 빠트리지 않는다. 온 마리 닭을 가볍게 삶은 뒤 토간장을 네 차례 발라 연거푸 조려낸다. 간이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언뜻 ‘간장조림닭’ 같다. 이 흐름과 관련된 세 업소가 있다. 소피국으로 유명한 ‘대덕식당’과 남구 대명6동 한정식 ‘솔내음’, 그리고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돈마을’이다. 특히 호남음식 대구화의 리더격인 솔내음의 박진숙 사장은 대구식 닭요리의 무한한 변신을 보여준다. 대덕식당과 달리 통마리를 조리지 않고 반 마리씩으로 토막내고 더 걸쭉한 소스로 40분 정도의 더 짧은 시간에 조려내는 게 특징이다. 최근 문어·전복을 넣은 퓨전 궁중닭백숙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해계탕(海鷄湯)’까지 개발했다. 이런 계적이 근대화 과정에서 다양하게 분화하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닭도리탕(닭볶음탕)’과 ‘안동찜닭’이다. ◆닭도리탕과 찜닭의 함수관계 요즘 안동찜닭 위세가 대단하다. 어떤 이는 안동을 찜닭의 고향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다. 연원을 파고들면 안동찜닭 훨씬 이전에 ‘대구발 닭도리탕(닭볶음탕)’이 있었다. 안동시 서부동 안동구시장에 가면 골목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찜닭골목’이 나온다. 70년대만 해도 생닭과 튀김통닭이 있는 통닭골목이었다. 튀긴 통닭에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버무려 맵고 칼칼한 맛을 내는 ‘마늘통닭’이 대세였다. 80년대 초반까지 상승세를 탔지만 대형 프라이드치킨한테 밀린다. 통닭식당주들은 신메뉴가 절실했다. 기존 닭볶음탕을 응용해 갈비찜 양념에 채소와 당면을 넣어 간장을 베이스로 한 새로운 ‘야채찜닭’을 개발한다. 현재 마늘통닭은 안동에서는 명맥이 끊어진 상태. 대신 의성군 단촌면사무소 근처에 가면 볼 수 있다. 20년 역사의 ‘주영자마늘닭(옛 삼미통닭)’이다. 안동찜닭의 신화를 만든 브랜드는 2000년 서울 홍대 앞에 등장한 ‘봉추’. 안동찜닭의 역사는 채 20년도 안 된다. 그 배후를 알려고 하면 대구에서 처음으로 매콤한 닭도리탕이 등장한 70년으로 거슬러 가야 된다. 앞산 안지랑계곡은 매콤한 닭도리탕의 발상지다. 당시 거기엔 무허가 닭도리탕집이 즐비했다. 닭도리탕은 동촌·강창·청천·화원·옥포용연사권의 ‘매운탕’, 도심의 ‘불고기’와 함께 ‘그시절 회식 메뉴 1번’이었다. 안지랑계곡 입구에 앉아 있는 대덕식당. 그 이전에는 북한 출신의 포수가 경영하는 ‘맹산옻닭집’이 있었다. 이 식당이 지역 첫 옻닭 전문점이다. 현재 그 전통은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토담집’이 잇고 있다. 닭도리탕은 달달한 갈비찜을 매콤하게 변화시킨 동인동찜갈비와 비슷한 스타일이다. 기존 고춧가루와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밍밍한 닭백숙은 주당들의 안주로는 뭔가 부족했다. 새로운 닭요리가 필요했다. 토막낸 절육에 청양고추와 큼직하게 썬 감자, 마늘과 고추장, 양배추 등을 넣고 닭볶음탕으로 변용시킨 것이다. 현재 앞산 닭도리탕 전통은 안지랑계곡이 공원화되면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그 시절 메뉴를 팔고 있는 데가 한 곳 있는데 상인동 ‘과수원집’이다. 닭도리탕은 간장을 베이스로 하지 않는다. 안동찜닭은 매콤하지 않고 간장이 베이스다. 그런데 닭도리탕과 안동찜닭을 절충한 ‘대구식 찜닭’이 있는데 그게 바로 91년 계명대 대명캠퍼스 남문 근처에서 문을 연 매콤찜닭의 리더격인 ‘또이스’다. 최근 남구 대명9동 주민센터 옆에 등장한 ‘앞산철판찜닭’(사장 김성규)은 퓨전 대구식 닭도리탕으로 주목받는다. 김 사장은 “할머니가 해주던 간장이 들어가지 않은 추억의 대구식 닭도리탕을 부활시키고 싶었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존 찜닭처럼 미리 요리해 쟁반에 담아내지 않고 오목한 무쇠철판에 손님이 직접 끓여 먹도록 했다. 감자 대신 가래떡을 넣고 기존 닭도리탕보다 국물이 많다. 꼭 ‘닭전골’ 같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8.18
古宅 안 ‘곳간카페’…마음속 더위까지 싹
음력 오뉴월 염천하. 절정으로 치닫는 햇볕. 음양의 이치가 그렇듯 자연 그늘도 덩달아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무렵 절정의 그늘은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을까. 고가의 대청마루만 한 데도 없을 것 같다. 지난 3일 폭염을 뚫고 일두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오담고택 등 한옥 60여채가 모여있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한옥마을로 향했다. 지리산 북쪽 자락에 깔린 광막한 녹음. 이 계절에는 그 무르익은 녹음이 너무 두꺼워 다소 위압적이다. 쉼표처럼 도열한 백일홍 무더기에 잠시 무거워진 시선을 걸어본다. 60여채로 이룬 지곡면 개평한옥마을 심장부엔 정여창의 생가인 일두고택 447년 옛 공간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班家의 감주맛에 절로 미소 돋는 카페 경남 함양(咸陽). 요즘 주목받는 관광상품 두 종이 있다. 하나는 ‘선비’, 또 하나는 ‘산삼’이다. 물 좋고 정자 좋은 데가 없다지만 ‘한국 정자문화의 백미’로 불리는 화림동 계곡라인에 서면 그 말이 틀린 것 같다. 거연정~군자정~동호정~농월정으로 연결된 총 6㎞의 선비문화탐방로를 숙독하고 일두고택을 성찰하면 현대판 선비의 신지평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함양은 맘은 물론 몸도 챙겨주겠단다. 현대인의 몸은 갈수록 사지로 내몰린다. 이 대목에서 함양이 죽염을 내민다. 한국 죽염산업의 종가격인 ‘인산죽염’. 함양을 본거지로 30여년 성장해 왔다. 1992년 작고한 한의사 인산 김일훈의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 김윤세씨. 그가 인산가 회장으로 함양읍 죽림리 일대를 축으로 인산죽염 항노화 특화농공단지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선비·산삼·죽염이 삼위일체로 붙어다녀도 될 것 같다. 개평한옥마을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의 고택.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을 했다. 살인적 지열이 난동질친다. 하지만 한옥촌으로 진입하고나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날 깨운다. 선비의 기운 때문일까. 안동과 함께 함양은 누가 뭐랄 수 없는 ‘유향(儒鄕)’. 일두 때문에 함양은 우리 유학사에서 좌안동과 짝을 이뤄 ‘우함양’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두, ‘한 마리 좀벌레’란 뜻이다. 북송 중기 유학자인 정이천이 스스로를 ‘천지간 일두’라 언급한 것에 감명받아 일두를 평생 자호(自號)로 정해버린다. 그가 원한 건 입신양명이 아니다. 군자를 위한 ‘지행일치(知行一致)’였다. 영남사림파의 종조 김종직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돼 ‘장형 100대, 유배 9년’ 형벌을 받았다.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서 생을 마감했고 저작물도 이때 거의 소멸된다. 함양군청 맞은편에 정자 하나가 있다. ‘학사루(學士樓)’다. 김종직은 함양군수 시절 전임 군수였던 훈구파 거두 유자광의 시가 그 누각에 걸려 있는 걸 봤다. 불쾌하게 여겨 떼버렸다. 이 사실을 안 유자광. 독을 품고 훗날 무오사화를 촉발시킨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때문에 일어났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 일두가 죽자 1570년 후손들이 현재 자리에 일두고택을 짓는다.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6호가 된다. 17동 99칸 규모였지만 현재는 문간채, 사랑채 등 12동 72칸이 남아 있다. 유학자의 품격에 따라 고택의 급수도 정해지는 법. 특히 고택은 알록달록하면 ‘천격(賤格)’. 고아(高雅)하고 유현(幽玄)하고 그러면서도 기품이 느껴져야 한다. 일두의 고택은 어디로 둘러봐도 너저분한 수식어가 없다. 단도직입적이다. 일두 스타일이다. 마을 입구 ‘일두 정여창 홍보관’ 옆에 있는 정려문을 지나 사랑채로 향했다. 낭인시절 흥선대원군이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나게 큰 네 글자, ‘충존절의(忠存節義)’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하지만 그 글귀보다 돌과 나무로 산처럼 꾸민 석가산(石假山)에 심겨진 황룡 같은 낙랑장송과 바로 옆 우람하면서도 꼿꼿한 전나무를 동시에 차경(借景)할 수 있는 누마루 탁청재(濯靑齋)의 현판 글씨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서체가 꼭 소나무 옹이 같다. 양해를 구하고 탁청재로 올라갔다. 말문을 닫게 만드는 공간이다. 삼면이 밖으로 다 뚫려 있다. 마당은 펄펄 끓는 가마솥, 마루는 동굴 안인 듯 서늘했다. 볕과 그늘 사이에 족히 10℃ 이상의 온도차가 형성된 것 같다. 개울물 같은 바람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순간 밀려드는 커피향이 졸음을 깨운다. 고택에 웬 커피.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봤다. ‘곳간카페’가 보였다. 한눈팔면 잘 모르고 스쳐갈 수 있는 공간. 웃음을 돋게 만드는 곳간카페였다. 간판도 상호도 없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색 카페인데 반가의 겸양지덕이 살포시 묻어 있다. 아메리카노는 물론 감주, 오미자주스 등 전통음청류 등도 판다. 생각해 보니 무척 조심스럽게 오픈했을 것 같다. ‘그래도 일두고택인데, 어찌 대놓고 상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고뇌를 간직한 것 같다. 안동의 농암종택처럼 이곳도 고택스테이를 운영한다. 테이크아웃잔에 담겨져 나온 감주 한 잔을 4천원 주고 마셨다. 뭔가 달랐다. 당분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반가의 감주맛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8.1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명물 먹자골목- 칠성시장 닭곱창거리
며칠 전 신선하게 다가온 별미 닭요리가 있었다. 칠성시장에서 40년간 한 자리를 지켜온 ‘진주식당’의 명물인 ‘닭곱창볶음’. 다른 도시에는 없다. 오직 칠성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다. 1946년에 시장공영화 정책에 따라 ‘북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칠성시장. 일제강점기 그 언저리엔 ‘도수원(刀水園)’이란 유원지형 요정이 있었다. 나중엔 매립된다. 현재 칠성시장, 경명시장, 대성시장, 칠성꽃시장, 대구청과시장, 삼성시장, 북문시장, 능금시장, 가구시장 등 9개 시장을 합쳐 칠성시장이라 한다. 시장 동쪽 끝에는 문짝골목, 서쪽 끝에는 전자상가와 중고 주방용품거리가 있다. 대구의 다양한 음식문화가 낳은 별미 70년대 전국 최강 닭시장 역사도 한몫 닭볶음탕 영향받아 닭곱창탕으로 탄생 안주 겸 반찬으로 인기…볶음 형태 정착 능금시장 맞은편 40년 전통 진주식당 바로 옆 거창·예천식당이 맛 역사 이어 ◆ 70년대 최강 칠성시장 닭집들 닭곱창. 이걸 갖고 별미를 만든 아줌마들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대구니깐 가능한 스토리. 소와 돼지 막창·곱창이야 대구에선 상식, 하지만 타지에선 아직 낯설고 닭곱창은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들다. 닭곱창볶음은 대구의 다양한 음식문화와 맞물려 탄생한 것이다. 이 요리는 70년대 전국 최강이었던 시내 여러 재래시장 닭전골목에서 태어났다. 특히 칠성시장 닭거리에서 가장 영롱하게 피어난다. 칠성시장은 서문시장, 남문시장 등과 함께 대구의 대표적 닭시장이었다. 족발골목, 어물전과 맞물려 닭전골목이 형성된다. 칠성시장 닭곱창볶음의 리더격인 ‘진주식당’. 거기로 가기 전 닭 부산물을 파는 골목부터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닭 취급 업소는 의성, 성일, 칠성, 이화 등 10여 군데였다. 한창때는 30집 이상이 몰려있었다. 근처에 백숙용 한약재를 파는 곳도 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닭을 향한 사람들의 입맛도 급변했다. 껍질을 꺼리는 사람이 있고 정육만 원하는 이가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 앞가슴살만 찾는 이도 있다. 예전엔 없던 흐름. 상인들도 그 수요를 좇을 수밖에 없다. 닭도리탕(볶음탕)용으로는 폐계(알 낳는 기능을 다한 늙은 산란계로 노란 빛깔이 돌아 일명 ‘노란닭(노계)’으로도 불린다), 2천원 정도 하는 삼계탕용 닭으로는 ‘백세미’로 불리는 영계, 졸깃한 원형의 우리 닭맛을 원하는 이는 토종닭, 별미 안주를 원하는 이는 염통·닭똥집(닭모이집)·닭곱창·닭발 등을 사간다. 70년대만 해도 가게마다 전용 닭장이 있었다. 주문이 밀리면 수시로 닭을 잡았다. 뜨거운 물에 담가 직접 털까지 뽑았다. 아내는 팔고 남편은 닭을 손질했다. 이젠 분업세상. 도계업자가 깨끗하게 장만해서 닭집에 갖다준다. 그땐 입맛이 세밀하지 못해 ‘부분육’이란 개념도 없었다. 그냥 통째로 팔렸다. 내장은 근처 닭곱창볶음 전문 주인들의 차지였다. ◆ 닭곱창거리를 찾아서 진주식당은 능금시장 맞은편에 있다. 바로 옆에도 같은 음식을 파는 ‘거창식당’과 ‘예천식당’이 있어 현재 이 시장에서 닭곱창볶음을 취급하는 곳은 3군데. 한창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만큼 먹거리가 다양해졌다. 소와 돼지를 제외한 가금류의 내장 유통이 엄격히 규제된 탓도 있다. 진주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33㎡(10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식당. 식탁은 딱 6개다. 식당이라기보다 분식점 같다. 돼지껍데기, 두루치기 등도 팔지만 대표 메뉴는 단연 닭곱창볶음. 1층도 모자라 천장방을 뚫어 옥탑방까지 증설해 놓았다. 개업 초기의 산물이다. 손님이 밀려들어서 할 수 없이 그 공간을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철제 계단 8개를 딛고 천장으로 올라섰다. 3개 정도의 식탁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다. 이제 그 공간을 사용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시절 운동권 대학생들이 밀담을 주고받던 공간이기도 했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주인은 귀가도 못하고 거기서 잠을 청할 때가 많았다. 추억의 아날로그 TV가 아직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입구 왼쪽에 떡볶이집 같은 규모의 자그마한 요리 공간이 있다. 닭곱창볶음. 처음에는 ‘닭곱창탕’으로 불렸다. 안주 겸 반찬으로 인기가 좋은 덕분이다. 어떤 단골은 ‘탕’처럼, 어떤 이는 ‘찌개’처럼, 또 어떤 이는 ‘볶음’식으로 해달라고 주문한다. 내장맛이 스며든 양념은 밥을 비벼먹기에 딱이었다. 볶음을 할 때 물을 넉넉하게 부으면 찌개도 되고 탕도 된다. 워낙 한 손맛 하던 주인들이라서 가능했다. 한 음식이 순식간에 여러 형태로 변해서 ‘고무줄탕’이라고도 했다. 닭곱창탕. 이건 1970년대 무렵 앞산 안지랑계곡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매운 닭도리탕(볶음탕)의 영향을 받아서 태어난다. 60년대 폭발적 인기를 얻은 대구식 불고기는 닭도리탕과 동인동찜갈비 등에 영향을 준다. 이 흐름을 잘 파고든 게 닭곱창탕이다. 고기향과 화학조미료, 그리고 고추장과 설탕·고춧가루가 한몸이 되면서 더욱 중독성을 갖게 된다. 고춧가루와 마늘을 축으로 한 ‘대구탕(代狗湯·대구식 육개장)’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한다. 닭곱창탕은 나중엔 국물이 바짝 졸아들어 볶음톤으로 변한다. 그 시절 시장 아낙들은 다들 ‘사생결단’이었다. 법과 규칙이 제대로 발동되지 않아 법보다 주먹, 설득보다는 욕이 더 앞섰다. 절벽에서 진일보하는 맘이 아니면 장터로 나오지 말아야 했다. 주인 오순일씨는 영주에서 청송으로 시집을 갔다. 77년쯤 5남매를 먹여살리기 위해 칠성시장으로 홀로 나왔다. 여러 메뉴를 살펴보다가 닭곱창에 승부수를 던졌다. 진주식당은 진주 출신 주인 권후분한테 가게를 인수받았다. 당시는 별다른 술안주가 없었다. 자연 소·돼지·닭의 부산물을 응용한 특미가 골목마다 흘러넘쳤다. 특히 대구는 타지에서는 손도 대지 않았던 내장 응용 요리가 특출했다. ◆ 달달했다가 이젠 매콤한 닭곱창 칠성시장의 닭집이 폭발적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전국 최대 규모의 부화장과 양계장이 대구 전역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60년대 중후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범어동 양계타운은 전국 최고였다. 그랜드호텔, 동도초등, 범어시장, 대구어린이회관까지 길게 형성된 구릉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양계장이 들어왔다. 가장 만만한 게 닭요리였다. 특히 요즘 같은 복철에는 너나없이 큼지막한 토종닭으로 백숙, 닭개장 등을 해먹는 게 대구만의 하절기 보양식 풍습이었다. 얼큰하고 화끈한 육개장 문화는 결국 백숙을 닭도리탕, 뒤에는 안동찜닭과 매칭된 대구식 찜닭으로 변용시켰다. 이런 저력은 80년대 삼계탕 신드롬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 한국 양념프라이드치킨 프랜차이즈의 선구자인 윤종계씨의 멕시칸치킨, 그리고 간장튀김닭의 선구인 대구통닭과 이를 토대로 다국적 프라이드치킨 시대를 연 교촌치킨 등이 2013년부터 대구를 ‘치맥시티’로 만든다. 엄청난 닭이 매일 칠성시장 닭전에서 거래됐다. 주인 오씨도 새벽같이 부산물을 갖고와 세척하고 1m 남짓한 곱창을 다듬어 먹기 좋게 10㎝ 정도 크기로 잘라 볶았다. 동절기와 하절기엔 콩나물국과 오이냉국을 곁들였다. 새로운 술안주의 등장, 맛에 반한 단골이 조석으로 몰려들었다. 진주를 비롯해 칠성, 북문, 경남 등 10여 곳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사용할 닭곱창만 전문으로 장만해 주는 이들까지 장터 한켠에 생겨난다. 단골층은 다양했다. 근처 2군사령부 장교, 휴가 나온 군인, 칠성카바레 춤꾼, 아파트 건설현장 막노동꾼 등이 어울렸다. 특히 장마철엔 막노동꾼의 출입이 부쩍 잦았다. 곧 프로야구 붐이 일어났다. 삼성이 이기는 날이면 광팬 단골들이 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경북대학생들에겐 닭곱창과 불로동 무침회가 양대 술안주였다. 일반 육계의 닭곱창은 너무 물러서 씹힘성이 전혀 없었다. 반드시 폐계 곱창이어야만 했다. 폐계 곱창은 육계에 비해 졸깃해 씹힘성이 좋았다. 1년에 딱 이틀, 설·추석만 쉬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일을 더 할 수 없어 7년전 영어 강사 출신의 며느리 김윤주씨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사이 맛이 조금 진화했다. 초창기엔 매운맛보다 단맛이 강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매운맛이 강세를 보인다. 주문을 하면 맵기를 강약으로 조절해준다. 이젠 닭곱창도 수난시대를 맞았다. 조류독감 등으로 인해 닭곱창 유통이 금지된 탓이다. 그래서 곱창의 끄트머리에 조금 붙은 ‘꼬타리’ 부위만 사용한다. 그 꼬타리에 염통, 알집, 닭똥집 등을 함께 섞어 볶는다. 처음 온 손님은 다들 알집을 가장 궁금해한다. 이 알집은 내장에 포도송이처럼 달려 있는 계란 직전의 일종의 유란이다. 닭곱창도 초창기와 다른 스타일로 변형됐다. 이젠 닭곱창이라기보다 ‘닭내장볶음’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단골은 닭내장이라고 하면 맛이 덜 날 것 같다면서 여전히 닭곱창이 좋단다. 입구 유리 문에 붙여져 있는 닭곱창이란 문구가 종일 군침을 흘리고 있다. 생각해 보니 닭곱창, 딱 ‘대구기질’이다. 40년 전에는 한 접시 1천원, 이젠 1만~2만원. 북구 칠성시장로 35-1. (053)427-1364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7.2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커피 레드’ 로스터 서재일
대구 수성구 지산동 충현교회 골목길로 접어들면 오른편에 접시꽃처럼 피어 있는 커피집이 보인다. ‘커피 레드(COFFEE RED)’. ‘커피는 붉다’는 뜻의 상호. 광대뼈가 발달돼 유달리 강팔라 보이는 로스터 서재일(54). 아파 드러눕지 않는 다음에야 종일 33㎡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12시간 커피 향에 사로잡혀 산다. 그는 정주형 커피족, ‘정중동(靜中動)’의 커피라인을 추구한다. 주인장 서씨. 커피인문학자 같았다. 한 잔에 2만원 하는 파나마 게이샤 등 10여종의 커피 중 세 종을 맛봤다. 생산지 토질의 질감과 향의 윤곽이 고화질 TV 화면처럼 또렷하게 피어올랐다. 골목 한 귀퉁이에 자리한 파스텔톤의 컨테이너하우스 같다. 채 10명도 앉기 힘들 정도로 좁디좁은 커피숍. 에어컨도 없다. 그냥 선풍기에만 의존한다. 여긴 불편해서 더 운치 있다. 마니아들은 그 불편함을 은근하게 즐기면서 서재일표 커피에 엄지 척 한다. ◆ 한문학자와 커피 사이 2014년 12월. 그는 교수의 삶을 접고 ‘커피 볶는 남자’로 변신했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그는 1992년부터 7년간 중국 베이징대로 유학을 간다. 시문학으로 석사학위, 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보이차 등 중국 명차를 체크해가면서 마셨다.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 명품 찻잔인 자사호(紫砂壺)의 세계에 푹 빠진다. 얼추 1천여 종의 자사호를 접했다. 파고들어갈수록 무변광대한 중국차의 복잡다단함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그에게 커피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런데 14년 전 당뇨병에 걸린다. 그때 커피를 마시게 됐다. 커피가 당뇨병 완화에 도움을 줄 것 같아서다. 中 베이징대 7년 유학 중 茶문화 심취 보이차뿐 아니라 1천여 명품찻잔 섭렵 시·한문학 석·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 중국어학과 교수 근무중 폐교로 轉職 14년前 당뇨 완화 기대하며 마신 커피 전국 150여 커피숍 답사·관련 원서 독파 로스팅기계 제작공장 경험도 큰 도움 원두별 고유의 맛 선뵈는 커피숍 도전 대구로 돌아와 경북외국어대 중국어학과 교수로 근무하게 됐다. 중국 유학 때 용돈이라도 벌 수 있게 제자를 대상으로 커피공부를 시켜줬다. 하지만 대학이 폐교된다. 미래는 더 불투명해졌지만 그의 천직은 더욱 분명해졌다. 커피인생을 살자고 다짐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과 그걸 손님한테 파는 일은 천양지차. 배워야 될 게 너무 많았다. 일단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명커피숍의 본질부터 해부하기 시작한다. 1년간 전국 150여곳의 유명 커피숍을 유람한다. 적잖은 커피 원서를 독파했다. ◆ 나만의 로스팅 행간 읽기 참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입문기에 맞다고 생각한 게 뒤에는 틀리기 일쑤였다. 그린빈, 그러니까 생콩이 고온에서 볶이다 보면 여러 가지 변형이 일어난다. 커피공학자들이 그걸 분류해놓았다. 121℃ 즈음에서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난다. 생콩이 갈변되고 향이 오른다. 171℃ 근처에서 ‘캐러멜 반응’이 일어난다. 커피 성분이 당화되면서 달달한 기운이 솟구치게 된다. 온도가 더 올라가면서 생콩을 둘러싼 흰 막인 ‘실버스킨’이 타면서 분리된다. 단맛이 줄고 쓴맛이 증가하게 된다. 생콩이 원두가 되는 과정에 두 번 타닥거리면서 균열이 일어난다. 그 균열을 ‘팝(POP)’이라고 한다. 1차 팝 때는 콩이 열을 흡수하는 단계. 온도가 더 올라가면 콩 안의 이산화탄소가 팽창하면서 2차 팝이 일어나고 이때 오일이 스며나온다. 그는 처음엔 된장인지 똥인지도 모르고 그냥 겉멋에 취해 먹어댔다. 그런데 차츰 산패한 커피와 갓 볶은 커피의 차이를 알게 됐다. 보통 열흘 정도 지난 원두는 산패되는데 이는 커피 내부의 이산화탄소가 산소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상당수 산패된 커피 맛을 묵직하고 숙성된 맛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런 감각은 숱한 시행착오에서 터득되는 것이지 교육으로 가르치기 어려운 대목이다. 갈수록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7~8년 뒤 본격적으로 동호회 활동 등을 하면서 그동안 알았던 로스팅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여러 마니아를 만나면서 제대로 된 로스팅 기법을 알게 된다. “로스팅, 참 중요한 절차죠. 이건 물과 불의 싸움입니다. 생두에 들어 있는 수분 함유율은 11~12%, 커피를 볶고 나면 1% 남짓하게 줄어들죠. 만약 수분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건 숯입니다. 생콩이 완전한 형태의 원두가 될 때까지 단계별 여러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를 ‘디벨롭먼트(Development)’라고 하는데 과정별 대응방법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진정한 로스터가 되는 겁니다. 프로 기타리스트가 되려면 동일한 코드 안에서도 묘한 분위기를 주는 변형코드를 구사할 줄 알아야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마추어 단계에서는 아는 것만 보이지만 프로로 접어들면 하는 것마다 벽이고 좌절입니다. 한 경지를 아무나 개척할 수 없는 거겠죠.” 자꾸 파고들면서 커피기계를 탐구하게 된다. 4년 전 대학에서 물러난 뒤 한 선배가 운영하는 커피기계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로스팅기기 제작과정을 알게 됐다. 거기서 엄청나게 중요한 비밀을 마주했다. 커피를 볶을 때 발생하는 훈열을 어떻게 배기할 건가 하는 문제와 열을 어떤 방식으로 생두에 전할 건가 하는 고난도의 테크닉이다. 조건의 다양성, 그것에 따라 표변하는 커피의 맛. 고차방정식, 아니 미적분방정식의 해를 찾는 과정이었다. 저마다의 안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판소리도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는 것처럼. 그는 커피집을 오픈하기 전 전국투어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상당수 커피집이 정상의 커피를 추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수 로부스타 커피고 강배전 일색이고 다들 남이 볶아 놓은 걸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수년째 로스팅 일지를 만드는 고수도 있었다. 기승전결, 전 과정을 자기 손으로 핸들링하는 곳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주인도 문제지만 손님의 수준도 심각할 정도로 낮았다. 다들 커피를 맛으로 먹는 게 아니고 하나의 유행과 멋으로, 커피를 액세서리로 걸치고 있는 수준이었다. 유명한 브랜드라서, 그곳에서 노닥대기 좋아서, 그래서 조건반사적으로 먹는 게 커피였다. 커피를 먹는 게 아니라 커피와 ‘놀고’ 있었다. 친구가 그립고 대화가 그리운 거지 진정한 커피 맛을 갈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1% 마니아를 위한 수제커피숍에 도전한 것이다. ◆ 커피는 기호식품…강요는 금물 마지막 깨달음이 있었다. 가게를 하면서부터다. ‘사람은 누구나 입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커피는 기호식품이죠. 자기 맛만 고집할 수도 없고 남의 맛을 폄훼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가장 흉측한 커피는 인격이 없는 로봇 같은 커피죠. 자기 고유의 주장, 성격이 담긴 커피에는 쓴·단·신맛이 공유돼 있고 실제 먹는 과정에서 그게 다 전해져야 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런 맛을 한국에서 즐기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면 할수록 갈 길은 더 먼 것 같아요.” 그가 가장 인정하는 커피는 게이샤도 블루마운틴도 루왁도 아니다. 쿠바에서 나오는 ‘크리스탈 마운틴’이다. 대문호 톨스토이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평생 먹은 커피도 크리스탈 마운틴이다. “쌉쌀한 쓴맛, 사포닌이 들어간 듯 인삼향 같은 기운이 감돕니다. 혀끝에 남는 맛이 마치 면도칼에 베인 것처럼 군더더기가 없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한국에선 맛볼 수가 없습니다. 소비자가 거의 없어 수입이 안 되기 때문이죠.” 그는 블렌딩커피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절정의 콩은 서로 섞을 필요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이 즐기는 블렌딩커피는 콜롬비아(4)·브라질(3)·에티오피아(2)·과테말라(1) 비율입니다. 브라질과 콜롬비아는 보디감을 잡기 위해, 에티오피아는 향을 잡고 과테말라는 맛을 잡는 기능을 하죠. 커피에서 맵고 짠 맛이 나오는 건 배기가 안 좋아서, 떫은맛은 덜 볶여서 그런 것입니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미국인들이 먹기 좋게 물로 희석시킨 스타일이죠. 초창기 좋은 커피가 유통되지 않아 저급한 맛을 보강하기 위해 여러 종의 커피를 섞는 과정에서 탄생한 겁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커피를 주제로 한 한시를 적어 보내왔다. “春雨落英無踵跡/ 橫街小店焙煎香/ 言歡自若在窓口/ 相與飮茶幽興長(봄비에 꽃잎 지고 인적은 없는데/ 좁은 골목 작은 상점 커피볶는 향기/ 도란도란 창가에서 담소를 나누며/ 함께 차를 마시니 그윽한 흥취가 오래가네).” 수성구 용학로 246. 010-8577-5027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7.2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블루오션 개척자들 - 차효훈 낙샌(NAKSAN) 대표
지난달 23일 밤 9시 대구 동성로 중앙파출소에서 대구백화점 중간의 한 빌딩 앞. 20여명의 젊은이가 모두 고개를 치켜들고 빌딩 5층 테라스 창문을 응시 중이다.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보던 한 남자는 부부젤라(요란한 소리를 내는 트럼펫 모양의 플라스틱 악기)를 길게 분 뒤 샌드위치 포장백을 매단 낙하산을 아래로 휙 내던졌다. 낙하산은 3초 정도 공중에서 빙글빙글 원무를 그렸다. 밑에선 탄성이 연발됐다. 그 궤적을 설레는 맘으로 지켜보던 주문자 김홍락씨(27·대구 동구 신천동)는 예상 낙하지점에 정확하게 다가가서 애인과 함께 낙하산을 낚아챈다. 둘은 맛보다는 재미에 푹 젖어 있었다. 1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이런 ‘펀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흡족해했다. 지켜보던 이들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행인들도 희한한 광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낙하산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한 직원이 자판기를 통해 자동주문하는 방법을 소상히 알려준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면 그 주문 내용은 5층 주방으로 막바로 전송된다. 내용지가 출력되면 5분여간의 즉석 조리에 들어간다. 빌딩 5층에 자그마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낙샌’. 지난 5월16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동성로 중심부에 등장한 ‘낙하산샌드위치’의 준말이다. 오픈하는 날, 낙샌을 알 리 없는 행인을 위해 인형을 달아 날렸다. 그걸 받으면 음료수도 공짜로 주었다. ◆멜버른의 명물 제플슈츠 현재 대구의 1급 마케터도 두 부류로 나뉠 것 같다. 낙샌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낙샌은 호주 멜버른의 명물 낙하산샌드위치 레스토랑인 ‘제플슈츠(Jefflechutes)’를 한국 사정에 맞게 벤치마킹한 것. 제플슈츠는 샌드위치의 호주식 명칭인 ‘제플(Jeffle)’과 ‘낙하산(Parachute)’의 합성어다. 상호만으로도 익살스러움이 느껴진다. 제플슈츠는 일반적인 레스토랑의 형태가 아니다. 테이블이나 의자는 고사하고 가구나 인테리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고객이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창구조차 없다. 낙하물이 떨어지는 바닥에는 고객들이 인식하기 좋게 X자 표시가 돼 있다. 낙하물을 받은 고객은 골목길과 대로변에 앉아 편하게 먹거나 인근 공원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최근 인터넷서 본 濠 ‘제플슈츠’ 영상 ‘낙하산 샌드위치’ 보곤 “이거다” 확신 핵심상권이지만 임차료 싼 고층 물색 5월 국내 최초로 벤치마킹 동성로 오픈 거리 자판기서 주문·결제→5층 주방 전송 5분 뒤 낙하산 매단 샌드위치가 아래로 차돌박이 등 좋은 재료와 받는 재미 쏠쏠 접근성이 핵심인 샌드위치 가게는 1층에 위치하는 게 불문율. 하지만 이 가게는 7층이라는 악조건을 기회로 활용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랜트, 맥도날드, 파킨슨 등 3명의 사업가는 멜버른 도심에서 샌드위치 사업을 구상한다. 그런데 천정부지의 건물 임차료가 문제였다. 1층은 워낙 고가라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7층 매장을 찜한다. 문제는 손님이 그 높은 곳까지 올라와 줄 것 같지 않았다. ‘발상의 전환’이 절실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낙하산이다. 낙하산에 달린 상품 못지않게 그걸 받아보는 과정이 워낙 독창적이고 재밌어 금세 전세계로 입소문이 난 것이다. 이 샌드위치는 개업과 동시에 SNS 소문망을 탔다. 많은 마케터가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로 활용 중이다. ◆낙샌 마케터 차효훈 기자도 연초까지만 해도 제플슈츠를 몰랐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동성로에 식사하러 나왔다가 우연찮게 낙샌을 목격했다. 낙샌이란 ‘한국식 제플슈츠’를 론칭한 차세대 마케터인 차효훈 사장. 그를 지난 4일 낙샌 매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은둔형 스타일이라 언론에 노출되는 걸 무척 꺼렸다. “유튜브나 다른 방송을 통해 제플슈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이 국내에 480만명쯤 된다고 믿습니다. 저도 최근 온라인을 통해 제플슈츠를 알게 됐는데 갑자기 감전된 듯 ‘이거다’ 싶었죠. 다들 괜찮은 아이템이라고 생각만 하고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저는 생각나면 저지르는 스타일입니다. 결국 그 아이디어를 국내에서 맨 처음 실천한 사람이 된 거죠. 돈이 되든 안 되든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생각한 걸 남보다 빨리 실천했고 그 색다른 아이디어에 적잖은 소비자가 맞장구쳐주는 대목에서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낍니다.” 개업한 지 두 달도 안 된 시점에 이미 4개의 굵직한 방송에 노출됐다. 입맛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농구선수 출신 방송인 서장훈도 한 방송을 통해 낙샌의 샌드위치 맛에 엄지척을 해줬다. 30대 중반의 차 사장. 그는 또래보다 더 격심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살아왔다. 속된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학창시절에는 툭하면 결석이고 툭하면 싸움이었다. 아버지와 형은 공무원이었다. 다들 그의 맘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사업의 생리를 현실과 부딪혀가면서 알아냈다. ◆별별 직종 전전 학창시절은 온통 ‘호작질’ 투성이였다. 그는 천재들은 원래 공교육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대학 가서 실컷 놀자 싶어 대구공전 식품영양학과에 간다. 역시 이론 공부는 자기 분과가 아니란 걸 절감한다. 급기야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골프캐디에 도전한다. 7만원만 들고 부모 몰래 강원도로 간다. 경기도권 골프장에 이어 다시 안동에 있는 떼제베골프장으로 간다. 거기는 팔도의 골퍼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일부 서울권 감각파 캐디 중에는 문신을 한 이들이 있었다. 문신에 빠져든다. 2009년 즈음이었다. 문신은 문화아이콘 중 하나였다. 그는 문신을 어떻게 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궁리한다. 시장조사를 해봤다. 대구에는 아직 유행되지 않았고 발전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문신사업을 위해 지긋지긋했던 고향, 대구로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2010~2013년 지역에 문신 사업가로 나름 입지를 다진다. 2014년 중구 염매시장 내에서 ‘염매생선구이’를 시작한다. 이어 삼겹살 전문점에 도전한다. 1년 정도 상권을 분석했다. 목이 좋은 데는 권리금, 임차료, 보증금, 월세 등 모두 강세였다. 반대로 생각해봤다. 핵심 상권인데도 돈이 별로 없어도 입점할 수 있는 사각지대를 찾아다녔다. 그때 제플슈츠를 봤다. 호주처럼 비용이 덜 드는 고층 사무실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후배 김성국씨와 손을 잡았다. 동성로 1층과 4층의 임차료는 무려 10~30배 차이가 났다. ◆꽃무늬남방과 자작 낙하산 현재 4명의 직원과 함께 이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의 인상적인 꽃무늬 남방도 서울 동대문시장, 인터넷 등을 뒤져 직접 구했다. 그는 이 가게 분위기를 발리섬 여행지에 온 것처럼 꾸미고 싶었다. 낙샌모자도 통일시켰다. 매니저 김바다(21)는 맥도날드에서 잔뼈가 굵었다. 채소 손질과 빵을 다루는 스킬이 그보다 나았다. 낙샌 상호와 이미지 등도 특허출원했다. 하늘색 톤에 흰색 글자로 ‘샌드위치에 날개를 달다’란 카피도 직접 고안했다. 공을 들인 대목은 높이와 샌드위치 무게에 맞는 낙하산 제작이었다. 일단 서문시장 비닐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서문시장 비닐공장에 가서 그가 원하는 재질의 줄도 골랐다. 줄은 면이 아니라 나일론이어야만 했다. 비닐은 너무 두꺼워도 안되고 얇아도 안됐다. 횟집 식탁을 덮는 얇은 비닐을 사용해보니 잘 내려가지만 잘 찢어졌다. 적당한 두께를 골라내기 위해 동분서주.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에 있는 한 젊은 비닐공장 사장과 인연을 맺는다. 낙하산 지름은 90㎝가 맞았다. 사각 비닐의 네 모서리를 다 자르면 8각이 된다. 60㎝의 줄을 8개 마련했다. 낙하산 원가만 1천원이었다. 진짜불고기, 하와이안비프스테이크, 트리플치즈, 핫스파이스치킨, 새우크림, 수제햄버거 등 6종 샌드위치를 메뉴로 정했다. 샌드위치는 무조건 재료가 좋아야만 했다. 자기만의 불고기샌드위치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햄버거용 수제패티가 맘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곳은 패티에다가 불고기 양념만 뿌리는데 그는 돼지 후지 대신 기름기가 많은 차돌박이를 사용했다. 다들 좋아라 했다. 보통 샌드위치용 빵은 좀 딱딱하고 질긴 편이다. 한 수제빵집과 계약을 했다. 그는 빵의 질감이 폭신한 걸 원했다. 당일 재료는 당일 모두 소진시키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의 요즘 생각은 이렇다. “남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 남밖에 못 되죠. 다른 길을 걸어야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망함의 미학. 승부사적 기질을 가져야 해요.”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7.0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육식주의 vs 채식주의 - ‘국민음식헌장’을 만들자
‘고기는 일절 안 먹고 채식만 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가?’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음식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추 20년이 돼가고 식품 관련 이런저런 전문가를 숱하게 만나봤지만 그들의 생각 역시 가지각색이고 공통분모도 찾기 어렵다. 올챙이 음식기자 시절. 그때는 별스럽고 유명한 식당, 그다음에는 맛있는 식당을 주로 찾아다녔다. 요즘은 동선이 좀 달라졌다. 제대로 된 ‘힐링식당’을 중점적으로 찾아다닌다. 꿈의 레시피를 찾는 셰프보다 ‘꿈의 제철 로컬푸드’를 찾는 셰프를 더 중시하고 싶다. 이제 우리의 식당은 대박식당에서 벗어나 ‘힐링식당’으로 진화돼야 한다. 맞벌이 세상, 부엌이 죽고 다들 밖에서 식사를 하는 외식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 채식이냐 육식이냐! 채식과 육식. 보수와 진보 갈등보다 더 심한 것 같다. 타협하기 어려운 핫이슈가 됐다. ‘통합 암 치료 로드맵’의 저자인 부산대병원 통합의학과 김진목 교수는 “채식을 하든지 육식을 하든지 제대로 먹는다면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제대로’란 대목에 딴죽을 걸고 싶다. 정말 제대로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반문해 보고 싶다. 채식과 육식 식습관에 대한 날선 공방 “20년간 극단적 비건 생활이 몸 망쳤다” “고기 먹기 시작하면서 문명 위기 초래” ‘채식의 배신’-‘육식의 종말’로 대립 대구 2만6천 식당…채식전문 10곳 미만 조미료와 설탕 등에 길들여진 고객 입맛 적잖은 제약조건과 경영난에 폐업 빈번 ‘ 제대로 된 먹거리’ 국가적 고민 절실해 현재 우리의 식문화를 감안한다면 채식주의자는 좀 심하게 말해 ‘이기주의자’로 눈총 받는다. ‘채식한다’고 하면 쌍심지부터 켜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다. 그걸 왜 하냐,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 등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일삼는다. 전문가도 채식파와 반채식파로 대립된다. 그걸 단적으로 알려주는 두 저서가 있다. ‘채식의 배신’을 쓴 리어 키스. 그녀는 “20년간 동물성 식품을 입에 전혀 대지 않는 극단적인 비건 생활을 실천하다가 몸을 망쳤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지금 육식으로 몸을 회복했단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은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식생활이고 특히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파생되기 시작한 문제가 여러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주장한다. 채식의 이면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도 하나씩 등장한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연구진은 음식이 식탁 위에 오기까지 1㎉당 에너지와 물 소비량, 온실가스 배출량을 조사했다. 연구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같은 양의 칼로리를 채소 중심 식단으로 채웠을 경우 육류가 포함된 평균적인 식단에 비해 에너지 소비량은 43% 증가, 물 소비량은 16% 증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11%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단다. ◆ 채식주의자의 이면 우리의 현실에서 만나는 채식담론에서도 모순적인 흐름이 발견된다. 암을 이겨낸 주인공의 성공담은 거의 ‘채식중심적’이다. 그런 흐름 때문에 우린 ‘채식=암 치유식’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숱한 암 주치의들의 주장은 이와 상충된다. 대부분의 암 주치의들은 항암치료 중에는 특히 고기와 생선 등 고단백식사를 강조한다. 허정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육식예찬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엔도르핀 돌풍을 일으킨 이상구 박사는 요즘 강원도 속초에서 힐링캠프를 운영하고 있는데 예전과 달리 채식주의를 무조건 찬성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대구의료원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현미채식운동가’로 변신한 의사 황성수씨는 김치까지 발암식품으로 규정할 정도의 반육식주의자다. 채식은 선택 방법에 따라 11단계로 나눌 수 있다. ‘세미채식(육류는 먹지 않고 조류나 해산물을 섭취)’ ‘페스코채식(조류를 포함한 육류를 먹지 않고 회 등 해산물은 섭취)’ ‘락토오보채식(조류를 포함한 육류와 해물을 먹지 않는 상태로 우유 등 유제품은 섭취)’ ‘비건채식(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음)’ ‘프루트채식(과일·곡물·잎사귀만 섭취)’ ‘생채식(채소를 요리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섭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안재홍 전 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은 10년 전부터 채식을 실천했고 6년 전 제주도 애월 앞바다로 망명을 갔다. 현재 귤농사를 지으며 제주녹색당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비건(Vegan)’.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임재양 외과의원을 꾸려가는 임재양 원장도 채식주의자로 산다. 외식도 거의 안 하고 병원 옆 별채 식당에서 통밀빵, 하루분의 채식 식단 등을 짜고 관련 채소도 직접 기른다. 난 두 명의 식습관을 주시하고 있다. 그래서 수시로 이들의 체력과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육식을 하던 사람이 채식만 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까, 그게 너무 궁금했다. 솔직히 가끔 즐기는 나의 육식욕의 장점을 합리화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다. 둘에겐 채식으로 인한 부작용은 거의 없었다. 체질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튼 현재 이들에게 채식은 실보다 득이 많은 것이었다. 둘의 일상은 평소 엄격함과 엄정함이 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웬만한 용기로는 결코 채식을 실천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성찰과 안목, 일반 식당에서의 회식문화와도 일정 거리를 둘 수 있는 강단과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채식은 단지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 채식전문식당의 어려움 집에서 채식을 직접 챙겨 먹는다는 것, 직장인에겐 너무 어렵다. 자연 채식 전문식당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런 곳을 발견하기가 대구 같은 곳에서는 무척 어렵다. 채식전문식당에 적잖은 제약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큰나무집밥’에서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수행에 방해를 주는 식재료로 분류된 ‘오신채(五辛菜, 파·마늘·부추·달래·흥거)’를 뺀 채식위주 밥상이기 때문이다. 여사장 조갑연씨. 그녀는 “고기 없는 밥상이 좋아 보여도 식당 경영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고백했다. 고기를 찾는 단골 때문에 할 수 없이 축산물 대신 생선을 대체품으로 냈고 최근 전남 해안권의 명물인 민어구이를 별미로 내고 있다. 2013년 수성구 욱수동에서 드물게 채식 전문 밥집인 ‘이밥’을 오픈한 여사장 이명희씨. 그녀는 유기농 식재료를 직접 조달하고 양념류까지 직접 만들다 보니 남는 게 없었다. 설상가상 채식밥상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결국 2년을 버티다가 폐업하고 서울로 가버렸다. 채식전문점은 분명 매력적인 식당이다. 하지만 아직 지역에선 요원한 것 같다. 상당수 사람들은 화학조미료, 설탕 등이 가미된 자극적이고 맛있는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 현재 대구에는 각종 식당이 2만6천여개 포진해 있다. 이 중 고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채식전문점은 유기농뷔페 이플 등 10개 안 된다. ◆ 정부 차원의 국민음식헌장 만들자 지구가 태어나고부터 지금만큼 식품 종류가 무궁무진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대형마트에 전시된 각종 먹거리. 자기가 제일 착한 먹거리라고 고함친다. 그 뒷면에 적힌 정체불명의 화학첨가물들의 정체는 뭔가. 그 글자는 왜 그렇게 읽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가. 천연식품은 폭감, 가공식품은 폭증하고 있다. 배가 고파서 아사했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전이었는데 이젠 너무 포식해 각종 성인병에 걸려 병사할 운명이다. 마음의 평화, 안분자족, 인문학적 성찰 등을 운운하지만 제일 중요한 민주시민의 실천강령 1호는 이젠 ‘먹거리’다. 맛있는 게 아니라 잘 먹는 게 아니라 제대로 먹는 일이다. 이건 본인은 물론 가족, 지역사회, 멀게는 지구촌의 건강을 위해서다. 그게 안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될 수 있다. 이젠 민주주의가 아니다. 안목 있는 사람들은 ‘식주주의(食主主義)’를 요구한다. 녹색당이 그런 흐름을 붙들고 있다. 제대로 된 음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죽음도 없다.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 가정의학자와 식품의학자, 임상영양사 등이 관심 가져야 할 국가적 핵심이슈다. 이 밖에 의사, 약선전문가, 자유치유 전문가, 암 극복 시민 등도 원탁회의에 나와야 한다. 요즘 백가쟁명식으로 터져나오는 종합편성TV 식품의학 관련 담론은 너무 주관적이고 상업적이다.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검증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주요 이슈가 된 우유 유해론의 진실, 유전자변형식품의 진실, 식품첨가제의 진실, 육식과 채식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관련 정보 및 연구의 한계 등을 국민적 프로젝트를 통해 확인해봐야 된다. 갈수록 ‘가공식품천국’이 되고 있다. 불량식품도 핵폭탄·조류독감·슈퍼바이러스만큼 무섭다. 우린 현행 먹거리문화 속에서 자연사(自然死)할 가능성이 없다. 잘못된 식생활 때문일 수도 있다. 속히 국민교육헌장이 아니라 ‘국민음식헌장’이 제정돼야 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7.06.2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세프를 찾아서- 레스토랑 ‘셀리우’ 김정한
7년간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돌아온 해군 장교 출신인 김정한 셰프(35). 그는 2년 전 수성구에서 ‘자니스토리’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었지만 망했다. 대구에서 사라진다. 그런 그가 올해 다시 더 다져진 포스로 대구에 나타났다. 후배 셰프 3명이 곁에 모여들었다. 한·양·중·일식을 퓨전스타일로 핸들링하는 크로스오버 콘셉트의 레스토랑 ‘셀리우(Ce Lieu·이 장소)’. 중구 교동 전자상가 뒷골목에 피어 있다. 김 오너셰프가 3명(이병태·성미영·정은석)에게 월급을 주고 있지만 실은 모두 사장이라고 여긴다. 매니저 겸 예약 및 매장 관리를 하는 이 셰프는 빵·디저트·커피, 성 셰프는 코스요리에서 메인 음식 전의 모든 애피타이저, 정 셰프는 식재료 준비 및 메인 요리 보조를 한다. 이렇게 넷은 ‘도원결의(桃園結義)’한 상태. 한식·양식·중식·일식 융합 퓨전스타일 ‘크로스오버 콘셉트’ 대구 교동에 위치 호주서 대구 돌아와 2년前 첫 레스토랑 실패 후 서울 등서 내공 다져 올 재도전 후배 셰프 셋 ‘전채∼디저트’ 역할 분담 미슐랭 2스타 ‘아테라’ 차용한 인테리어 黑白 도자 식기 등 오감 자극 ‘맛 시너지' ◆ 난 뭘 잘못했지 그는 코스 전문 ‘다이닝 레스토랑’을 꿈꾸었다. 하지만 열정은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스스로 무력해지고 결국 식당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상경한다. 지난 2년 서울에서 요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자니스토리가 왜 실패했는지 분석에 들어갔다. 일단 식자재 구매, 매장 운영, 고객 관리 등 주방과 매장을 같이 운영한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충분하지 못했던 오픈 준비, 식당 콘셉트의 모호함 등으로 운영하면 할수록 더 절벽으로 내몰렸다. “내 주관 없이 그냥 주위 친구, 가족, 지인 등의 지적에 너무 휘둘렸습니다. 잦은 수정으로 인해 저만의 개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어요.” 서울은 좀 달랐다.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레스토랑 및 서비스업이 발달된 도시가 아닌가. 그가 꿈꾸었던 다이닝 레스토랑이 수십여 개 있는 수준 높은 미식의 도시였다. 호주 시드니 유명 레스토랑 시절, 많이 체험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다. 산 넘어 또 산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서울 도산공원 쪽에 있는 이탈리안 다이닝 레스토랑 ‘수쉐프’의 주방 서열 둘째 관리자로 취직된다. 거기서 손님접대 방법, 커틀러리와 유리잔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테이블 세팅 및 고객 관리까지 새로 배웠다. 이미 한국 톱 셰프로 등극한 임정식 셰프가 운영하는 강남 신사동 ‘정식당’을 비롯해 ‘밍글스’ ‘스와니예’ ‘톡톡’ 등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역시 잘되는 유명식당은 모든 요소가 효율·합리적이었다. 동선도 유기적으로 흘렀다. 매니저의 미소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실내의 디자인 컬러가 식기와 화병, 조명 등의 색깔과 밝기의 세기와도 잘 맞아들어갔다. 마지막엔 실내 곳곳을 파고드는 음악과도 매치될 수 있게 고도의 감각을 쏟아부었다. ◆ 구원투수…이병태 셰프 메뉴라인을 결정할 때 이병태 셰프가 일조했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치밀하고 그러면서도 성실한 이 셰프. 그는 재즈뮤지션 같은 심성을 갖고 있다. 자니스토리 시절, 스테이크가 포함된 코스요리를 예약제로 했다. 그러나 메인 못지않게 중요한 빵이나 디저트, 커피, 와인 등은 상당히 부실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이 셰프를 만나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셰프에게 대구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도 좋다고 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이 셰프는 서울의 큰 커피숍에 입사해 자기 전공이 아닌 커피를 더 배운다. 김 셰프도 시너지효과를 올리기 위해 와인에 대해 공부했다. 이 셰프는 돈보다도 일을 더 사랑한다. 자기가 구워낸 빵이 잘 안 나오고 마음에 안 들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음에 들게 한다. 현재 이 셰프가 ‘롸우겐’이라고 하는 독일 전통빵을 수제로 만든다. 그 빵에 말린 무화과와 레드와인으로 만든 잼을 곁들인다. ◆ 공들인 실내인테리어 하나의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건 ‘개국(開國)’과 맞먹는 험로. 블랙톤의 인테리어라인은 그 전에 그가 깔았던 디자인과 사뭇 달랐다. 내부 조명도 참으로 중요하다. 코스요리의 경우 식사 시간이 1시간 이상이기 때문에 조도를 밝게 하기보다는 조금 낮추는 게 좋다. 대화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광등 불빛은 금물. 셀리우는 ‘극장식 레스토랑’ 같다. 홀에 앉아서 요리하는 과정은 물론 요리를 접시에 담는 과정도 다 지켜볼 수 있다. 무대가 주방이다. 넷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면이 공연 같다. 홀 중앙에는 예전 스탠드바의 ㅁ자 구조의 고급스러운 바가 있다. ‘혼밥족’을 배려한 것이다. 인테리어 라인을 정할 때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아테라(Atera)’스타일을 차용했다. 직접 미국 현지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인터넷에 있는 아테라 사진을 참조했다. 서울에 아테라와 비슷한 콘셉트의 레스토랑인 ‘스와니예’ ‘알라 프리마’ 등이 있어 직접 방문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 명의 지원군이 있다. 절친 마승범씨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석사를 마친 후 현재 뉴욕에서 건축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작년 10월쯤, 너무나 고맙게도 셀리우의 인테리어를 맡아줬다. 바닥 타일, 조명, 천연석 테이블 상판, 바 테이블 의자 등을 직접 챙겨줬다. 예전에는 메인요리에만 올인했다. 요리는, 특히 스테이크를 축으로 한 풀코스 양식 메뉴라인은 메인 못지않게 전채와 디저트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스테이크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은 코스도 만들었다. 지금 쓰는 한우 고기를 스테이크용으로 손질하면 코스 1인당 식자재 원가만 9천~1만원. 그렇지만 기본 코스가 4만원이 넘지 않게 짰다. 제한된 가격에서 야무진 메뉴 라인을 짜는 게 큰 고민이었다. 일단 인건비를 최소화했다. 다들 1인3역이다. 이렇게 절약한 인건비를 식자재 원가에 반영했다. 가격 대비 만족도 높은 메뉴가 만들어졌다. 다른 레스토랑들은 저녁에 고가의 디너코스만을 파는데 여긴 점심·저녁 구별 없이 항상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게 배려했다. 좋은 요리는 제대로 된 식기에 담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의 식감은 추락하게 된다. 현재 한국식 도자기 접시를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광주요’ 제품을 사용한다. 특히 광택이 없는 백과 흑의 도자기 재질은 다양한 색채의 음식을 담아내기에 딱이었다. ◆ 풀코스 요리 엿보기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메뉴가 있다. ‘회덮밥’이다. 다들 ‘레스토랑에 웬 회덮밥?’이라는 반응이다. 직접 손질한 활어(주로 광어)를 가지고 회를 뜨고 일식 초밥 레시피에 참기름·참깨·검은깨, 그리고 고수 씨 가루를 살짝 넣어 밥을 준비한다. 여기에 사과와 깻잎, 생선회를 얹고 생선회에 라임과 가다랑어 포를 넣은 간장소스와 다진 다시마를 얹는다. 와사비와 아보카도를 갈아서 만든 퓌레를 같이 곁들인다. 김치는 김 셰프의 어머니가 만든 작품. 요리 과정이 꽤 까다롭지만 셀리우식 발상의 전환이 빛난 메뉴다. 스테이크를 보다 빛나게 하는 게 레드와인소스다.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고기는 주로 안심과 채끝을 사용한다. 스테이크는 ‘수비드’(Sousvide·밀폐된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물을 미지근한 물 속에 오랫동안 데우는 조리법) 방식으로 마련된다. 소스는 소뼈를 오븐에서 갈색으로 구워 육수를 진하게 만든 다음 낮은 불에서 원래 육수 양을 1/4 정도로 졸인다. 여기에 5ℓ 정도의 레드와인도 1/4 정도 졸인 다음 이 둘을 합쳐 고운 체에 거른다. 얼마나 많은 셰프가 이렇게 수제식으로 소스를 장만할까? ‘카다이프새우’도 인상적. ‘카다이프’는 실타래처럼 길고 가는 밀가루 반죽이다. 그 모양 때문에 유럽에서 특히 인기다. 간장과 마늘로 양념한 새우를 카다이프로 감아서 튀긴 것을 레몬 드레싱과 함께 곁들여 낸다. ‘토마토샐러드’는 껍질을 깐 대저토마토와 대추토마토를 기본으로 레몬크림, 레몬유자드레싱, 자두오일 등으로 산뜻함을 더한다. 진하게 뽑아낸 바질오일을 더해 풍미를 더하고 염소젖 페타치즈로 약간의 짠맛을 낸 뒤 사과젤리로 단맛을 돋운다. 마지막으로 헤이즐넛을 갈아 얹어 고소함을 더한다. 블루베리에 레몬즙이 가미된 셔벗, 화이트 초콜릿과 코코아 크럼블, 치커리 뿌리 가루로 만든 케이크 조각으로 디저트라인을 짠다. 메뉴 하나하나에 ‘상상력’ 같은 게 묻어 있다. A코스는 5만8천원, B코스는 3만9천원. 매주 월요일 휴무. 중구 교동2길 43-9. (053)260-9999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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