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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부터 청도소싸움 재개"…청도지역 싸움소로 출전 제한
지난 11일 충북 청주에서 발생한 구제역으로 3주간 중단됐던 경북 청도 소싸움경기가 내달 3일부터 재개된다. 청도소싸움경기사업 운영자인 청도공영사업공사는 "구제역 발생과 관련한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6월 첫째 주부터 소싸움 경기를 재개장하기로 결정했다"고 30일 밝혔다. 다만, 공영공사는 "구제역이 종식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당분간 출전 싸움소를 청도지역으로 제한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재개 결정은 지난 20일까지 전국적으로 실시된 우제류 백신 접종이 끝나고 2주가 지나면 항체가 형성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또 청도가 구제역 미발생지역으로 위기 단계가 '주의'가 되면서 우제류 가축 반출입 금지 등 특별한 제재가 없는 점도 고려됐다. 특히 경기 중단으로 소싸움 종사자들의 생계는 물론 관광객 감소로 인한 지역경제 위축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공영공사는 구제역 방역대책 상황실을 구성해 경기 운영 중단 기간에 방역 장비를 총동원해 경기장 내·외부와 우사동 등을 방역·소독하는 등 재개장 준비를 해왔다. 또 출전싸움소 전담직원을 지정해 싸움소의 건강상태 등을 매일 점검하고 싸움소 축산시설 소독과 관리지도에도 힘을 쏟았다. 공영공사 관계자는 "소싸움장 출입 운반차량에 대해 방역과 소독을 실시하고 경기장을 찾는 모든 관람객을 대상으로 발판 소독 및 손 소독기를 운영해 구제역 방역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성우기자 parksw@yeongnam.com청도소싸움 청도소싸움경기장에서 두마리 싸움소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2023.05.30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전 칼국수…쑥갓, 들깻가루, 오징어 조합…깔끔·얼큰·매콤한 맛으로 반세기 역사
대전은 이렇다 할만한 먹거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작 1954년부터 장사를 하기 시작한 대전역 근처 성심당 빵집이 제 목소리를 내는 정도다. 81년부터 '튀김소보로'로 천하평정을 했다. 성심당문화원까지 생겼으니 이제 빵이 아니라 '문화'로 자릴 잡았다. 그다음으로 강력한 먹거리는 단연 국수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대전의 국수파워를 실감하지 못했다. 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만 대선, 경동, 신도, 공주 등 얼추 500곳, 대를 이어가는 집도 20곳이 넘는다. 2019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칼국수 축제'를 개최한다. 대전 '칼국수 축제 평가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칼국수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부터라 한다. 대전 칼국수는 1900년대 대전의 근대화가 맞물려 탄생하게 된다. 과거 대전은 근대 철도 물류의 거점이었다. 대전역 주변으로 제분공장들이 속속 생겨난다. 더욱이 당시 서해안 간척사업 노동자의 노임으로 밀가루가 지급되며 환전을 목적으로 밀가루가 모여들어 대전이 칼국수 집산지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아무튼, 한국 국수지형도가 대구~부산~대전권으로 균분된 것 같다.◆가장 오래된 대선칼국수최근에 유명 유튜버인 쯔양이 다녀갔는데 조회 수가 200만건이 나왔고 이후 젊은 손님들이 제법 많아진 대선칼국수. 대전 출신 배우 송중기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칼국수로만 보면 종가격인 식당이다. 1954년 대전역 앞에서 시작했다. 외손자 목인성(52) 대표의 외조부 고(故)오영환 대표가 대전역 앞에서 포장마차 형태의 건물에 나무 의자와 탁자를 놓고 시작했다. 60년대 옛 아카데미 극장 앞으로 옮겨 운영했고 1990년 어머니인 오세정(75) 전 대표가 당시 대전 칼국수 본거지였던 대흥동에서 문을 열었다. 현재의 대전시청점은 2001년 원도심에서 관공서들이 이전함에 따라 함께 옮겨왔다. 어머니가 2대 운영자로 나선다. 딸 오세정 전 대표에 이어 목 대표가 3대 사장으로 자릴 잡는다.특히 어슷하게 썬 돼지 수육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최단 시간 내 숙성시킨 묵은지가 절정의 하모니를 이룬다. 수육 한 점을 묵은지에 싸 먹었다. 무릎을 쳤다. 어떤 이는 국수보다 이 수육과 김치 맛 때문에 여기를 찾는다고도 한다. 여기에는 대구와 달리 된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초고추장이 있다. 수육용이다.1954년 부터 70년 세월 대선칼국수송중기 단골집·쯔양 먹방 유명세 오징어 두부두루치기 별미도 인기사골·멸치육수 소문난 신도칼국수푸짐하게 내어주는 경동오징어국수육개장에 칼국수·만두 담은 '육칼두' 집밥같은 정성 담은 유성할매국수국수는 칼국수 스타일은 아니다. 대구의 금와식당처럼 공장표 국수인데 쫄면 굵기다. 멸치 육수가 숭늉처럼 나온다. 냉면집 온육수 같다. 수육부터 먹을 때 탕국물처럼 먹으면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전에서는 칼국수 고명으로 쑥갓을 많이 사용한다. 또 한 가지 별미가 있다. 오징어를 이용한 별미가 꽤 성행한다. 대표적인 게 오징어가 들어간 두부두루치기. 이 집에도 그게 인기다. 비빔국수는 함께 나오는 칼국수 국물을 넣어 가며 양념장과 함께 살살 비비면 된다. 비빔국수 양념은 붉은 편이지만 맵지 않고, 고소한 참기름 맛이 느껴진다.◆기타 대전 국수 명가정동 '신도칼국수'도 한목소리를 낸다. 1961년에 개업한 소문난 칼국수 맛집. 진한 사골육수 베이스의 칼국수가 카리스마 가득하다. 꼭 참깨를 뿌려놓은 콩국수 같다. 사골육수와 멸치육수의 조합으로 탄생한 국물이 인상적이다. 별다른 고명 없이 고소한 들깻가루만 뿌려져 있다. 면을 맛보기 전 국물을 먼저 떠먹어 봐야 한다. 과음한 다음 날 해장용으로도 딱이다. 벽에 연대별 국수 그릇을 전시해놓았다.동구 성남동에 위치한 '경동오징어국수'는 허영만의 백반기행에도 소개된 명소다. 포스가 정말 강렬하다. 오징어짬뽕 같기도 하고 대구의 중앙반점의 오징어를 섞어놓은 야키우동으로도 보인다. 1979년 창업한 김종숙 사장의 뒤를 이은 아들 변용훈 부부가 운영한다. 이 국수는 커다란 시골양푼에 멸치육수에 삶은 면을 두부오징어두루치기와 섞어 손님상에 낸다. 양도 푸짐하고 큼직하게 썬 대파와 간이 적당히 밴 면발이 두부두루치기와 어우러져 시원하면서 매콤하지만 깔끔한 맛을 준다.대전역 부근 '소나무집'은 반세기 역사의 오징어국수 명가다. 재료는 총각김치묵은지, 오징어, 국수사리 세 가지. 매년 가을 총각김치를 담아 1년 정도 묵힌다. 총각김치묵은지를 꺼내 무를 얇게 썬다. 오징어와 국수사리는 그때그때 준비한다. 당시 오징어국수가 먹고 싶다는 한 단골손님의 요구에 김장김치를 꺼내 오징어와 함께 끓여줬더니 호평이 쏟아졌단다. 반찬도 총각무 하나가 달랑. 더 이상의 반찬은 필요하지 않다. 대전 유성구 '유성할매국수'는 음식에 집밥의 정성이 스며있는 곳이다. 겨울에는 육개장, 칼국수, 만두가 어우러진 '육칼두'가 인기다. 칼칼한 육개장에 수제 칼국수와 만두를 푸짐하게 담아준다. 육칼두의 기본은 맛있는 육개장이다. 사골과 잡뼈를 진하게 우려내다가 양지와 사태를 넣고 함께 끓인다. 대파와 고사리도 푸짐하게 넣는다. 손수 만든 향신 기름은 국물을 칼칼하고도 깔끔하며 매콤하고 잡내가 없도록 만든다. 유성구 봉명동 도안6단지 센트럴시티 610동 앞에 있는 '진월당'은 죽 전문점으로 여름별미 콩국수로 명성을 얻는 집이다. 2008년 한국인 첫 우주인이 된 이소연 박사가 우주에서 돌아오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엄마 표 콩국수'를 꼽아서 화제가 됐다.서구 탄방동 '대복국수'는 제주식 고기국수 같은 '쫄데기 비빔국수'가 유명하다. '쫄데기'는 돼지 앞다리 사태 부위로 충청도 방언. 속까지 간이 쏙 배어든 쫄데기 수육이 완성되면 잘 삶아진 소면에 올려 대복국수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양념장을 넣고 비비면 된다. 이 양념장의 비법 재료는 시원하고 개운한 맛을 내는 동치미에 있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대선칼국수신도칼국수경동오징어국수대선칼국수 입구 모습.신도칼국수 벽면에는 역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시대별 그릇이 전시돼 있다.이춘호 전문기자
2023.01.13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복어...콩나물 무침 별도로 내는 대구권 복어탕, 종잇장처럼 얇게 포 뜨는 복어회
2300년 전의 중국 전국시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고서는 복어를 '적해' 또는 '패패어'라고 기록하고 이 생선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했다. 민물 복어를 가리켜 하돈(河豚)이라고 돼지 돈 자를 쓴 것은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복어는 전 세계에 100여 종이 서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 연안에는 복어목 참복과에는 청복, 수지복, 줄무늬복, 흑밀복, 민밀복, 은민밀복, 밀복, 은띠복, 은밀복, 불룩복, 황해흰점복, 참복, 두점박이복, 황점복, 복섬, 황복, 졸복, 흰점복, 검복, 자주복, 매리복, 까칠복, 까치국매리복, 국매리복, 까치복, 가시복, 개복치 등 약 27종류가 서식하고 있다.서울·경기권서 즐겨먹는 맑은 복국일본식 조리법 알려진 경남권 식당日 이토히로부미 극찬 고급요리 성장복어회 폰즈…한국은 신맛 더 강해대구 60~70년대 최강 복어집 대하림복어불고기 시대 연 미성복어 명맥◆복어에 대한 다양한 기록우리의 복어 식용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복백탕(鰒白湯)'이라 불리는 맑은 복국은 서울·경기 지방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다. 임진왜란을 준비 중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복어 독으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이유로 복어의 취식을 금지하게 했고 이후 1888년까지 공식적으로 복어는 먹어선 안 되는 생선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결코 '복어 식용 금지령'이 발포되지 않았다. 야마구치현의 어부들은 식민지 조선의 동해와 남해에서 복어를 잡았고, 그것을 부산이나 마산 항구에 풀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복어요리법을 배워 부산과 마산 사람들도 복국을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복지리'로 알려진 복어국이다. 복지리의 '지리'는 일본어 지리(ちり)이다. 알다시피 '지리'는 냄비 요리를 가리킨다. 일본인들이 주로 복어를 요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산시사에서는 마산에서 복국이 유명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옛날 마산의 해안은 낙동강 물이 섞이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복이 서식하기에 좋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어시장에서는 복을 경매하여 전국 일식집으로 보내었다. 때문에 마산의 복요리가 유명해졌을 것이다. 사실 1960년 이전의 마산만은 청정해역으로 복어의 서식지였으며, 마산 어시장은 복어 집하장이어서 복요리가 개발되고 전수되어 전국의 유명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251-8의 '남성식당'을 1945년에 처음 개업했던 최달옥은 식민지시기에 일본에서 복어 조리법을 배웠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본래 복국은 일본식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비록 조선 시대에도 복국을 먹었지만 지금의 마산 복국은 일본식에서 진화한 것이다. 새나라가정요리학원장 왕준련은 동아일보 1967년 11월23일 자에 복어국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왕준련이 소개한 조리법은 일본식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당시 새롭게 등장한 고추장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 중반이 되면 복어 식용이 증가하면서 그 조리법이 거의 처음으로 신문에 등장했다. 최달옥의 딸 박복련도 1962년 3월 '특수식품취급자' 증명서를 경남도지사로부터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와 복어일본은 복어의 식용이 위험이 따르는 데도 꾼들은 여전히 이 고기의 진기한 맛과 더불어 '조절된' 분량의 독이 가져다주는 느긋한 행복감과 열이 확 올랐다가 식는 느낌, 얼얼한 맛 등을 즐긴다. '복어취식금지령'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서 풀리게 되었다. 혼슈(本州)의 남쪽 끝자락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의 제법 규모가 있던 료칸인 '春帆樓'에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묵었던 날은 며칠간 풍랑이 불어 총리 일행을 먹일 만한 음식이 변변치 않았다. 평소 시모노세키 앞바다의 생선을 잡아 요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 료칸의 주인은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일행이 처음 보는 생선 요리를 바쳤고 이 요리의 맛을 본 이토 히로부미는 감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주인을 불러 생선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풍랑으로 온 마을에 생선이 씨가 말라 요리 할 생선이 없기에 국가에서 금지한 것을 알면서도 풍랑에 떠밀려 온 복어를 잡아 요리를 했노라고 실토하고 죽여달라 읍소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독을 제거하는 기술을 보급하고 복어를 요리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이 식당을 위해 '국가 인정 복어 요릿집 1호점'의 명예를 내렸다. 이후 복어는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의 재료로 부각되면서 순식간에 고급 요리로 자리 잡아 1920년대에 이미 일본 전체에 복어 요릿집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일본 복요리 코스일본의 복요리 코스는 크게 회(사시미), 껍질무침, 튀김, 수육, 맑은탕, 죽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복어회는 복요리의 백미라고 부른다. 복어의 꾸밈없는 '살맛'을 고스란히 전해 주며 살이 워낙 단단한 생선이기 때문에 종잇장처럼 얇게 포를 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생선회 접시와 달리 복어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한 접시를 사용한다. 일반적인 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하면 시선이 분산되어 생선회가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게 되므로 무늬를 최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복어회는 얇게 포를 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화려한 무늬가 회를 통해 투과되어 보이도록 색상도 강렬하고 화려한 무늬의 접시를 사용한다. 일본의 복어회는 보통 석 점을 한입에 먹을 만큼 크기가 작다. 한점의 크기가 보통 폭 1㎝ 정도에 길이가 4~5㎝가 일반적이다. 그렇게 작은 회 석 장을 깔고 가느다란 재래종 쪽파나 미나리 줄기를 한두 개 얹고 돌돌 말아서 폰즈 소스(이하 폰즈)를 찍어서 먹는다. 일본의 찍어 먹는 소스의 변화도 흥미롭다. 복어회는 다른 생선회에 비교하면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지만 사실상 별다른 맛은 없다. 예민한 사람들은 특유의 향이 있고 맛도 거론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무미(無味)에 가깝다. 결국 맛은 소스의 맛일 수밖에 없다. ◆폰즈전통적으로 복어회에 곁들이는 소스는 폰즈이고 이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폰즈는 가쓰오부시 다시 물에 간장을 혼합한 기본 베이스에 식초와 청주, 레몬즙을 혼합한 것으로 원래는 레몬즙이 아니고 유자즙을 사용하는 소스였다. 유자보다 레몬이 흔해지면서 지금은 레몬이 일반화된 것인데 식초, 청주, 레몬(유자) 등은 식중독에 대항하여 살균력이 있는 식재료라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이 폰즈도 한국과 일본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폰즈는 레몬즙과 식초를 비교적 부드럽게 사용하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신맛을 강화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샤브샤브가 일품요리로 한국에 많이 보급되면서 폰즈는 신맛이 더 강해지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폰즈에 무즙과 실파 등을 더해서 색다른 맛을 낼 수 있도록 변형시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 오직 폰즈만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곳에 따라서 폰즈에 고추냉이를 곁들여 내는 식당도 있다. 이는 회는 무조건 고추냉이를 곁들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조리사들의 일방적인 실수라 하겠다. 폰즈는 한국에서는 복어튀김에도 찍어 먹는 소스로 주어지는데 이 또한 일본의 복어튀김과의 차이라 하겠다. 일본식 튀김은 원래 '덴다시'라는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이 정석이다. 순하고 부드러운 소스인 덴다시는 맑은 간장 국물처럼 만드는데 다시마의 감칠맛을 잘 우려낸 소스로 짜지 않기 때문에 튀김을 푹 담갔다가 먹는다. 갓 튀긴 튀김의 바삭한 질감은 살아있고 겉에 맺혀있는 덴다시의 감칠맛이 튀김의 풍미를 더 좋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진간장을 베이스로 양념간장을 곁들이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음식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빈대떡'이나 '전'에 곁들이는 양념간장이 조금씩 바뀐 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하겠다. 결국 동일한 간장 문화이지만 그 사용 방법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대구 복어 명가역시 60~70년대 대구의 최강 복어집은 '대하림'이었다. 뒤를 이어 시청옆 둥굴관· 송림, 계산동 거창식당, 반월당 네거리 광성식당, 범어동 감포은정복어, 동구와 중구에 직영점을 가진 해금강, 서구의 경우 원대오거리 근처 자갈마당, 그리고 달서구는 성당복어, 본동복어와 월성복어, 대명동은 용궁복어 등이 인기몰이를 한다. '복어를 잡는사람들'은 가맹점 시대로 기반을 잡았다.부산~마산~진해~통영권 복어집에는 대구처럼 복어탕이라 하지 않고 '복국'이라 한다. 대구 토박이가 너무 좋아하는 고춧가루와 참기름이 환상적으로 버무려진 콩나물무침을 별도로 내지 않는다. 복어를 갖고 불고기 시대를 연 미성복어는 원래 예천의 한국관의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지리형 복어불고기를 벤치마킹해 자신의 창법을 승화시켰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대구는 부산경남권과 달리 복국이라 하지 않고 '복어탕'이라고 부른다. 특히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무친 콩나물무침은 대구권 복어탕에 없어서는 안 될 으뜸 반찬이다.복어회는 복요리의 백미라고 부른다. 복어의 꾸밈없는 '살맛'을 고스란히 전해 주며 살이 워낙 단단한 생선이기 때문에 종잇장처럼 얇게 포를 떠야 한다. 그래서 다른 생선회 접시와 달리 복어회 접시는 무늬가 화려한 접시를 사용한다. 사진은 수성구 범어동 감포은정복어의 복어회.대구권 복어탕
2022.12.02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2) 소갈비 돌풍 일으킨 수원·포천名家…대구는 진갈비·동인동 찜갈비로 진화
1939년경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 주인이 전남(지금의 광주시) 송정리에 갔다가 그곳의 술집에서 가리를 대로 구워 파는 것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 손님들에게 냉면과 함께 가리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당시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 갈비 한대가 20전이었다. 냉면 보통 한 그릇과 갈비 두 대를 시켜 먹으면 60전으로 종로의 극장이나 요릿집, 카페, 바 등에서 파하고 술도 깰 겸 출출한 속을 채우는 야참으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 인기가 대단했다.냉면 한 그릇 가격과 같은 갈비 한대1930년대 평양냉면집 손님 몰려들어갈비찜은 신선로 다음으로 고급요리뼈길이 2~4인치 따라 이동·수원갈비1961년 대신동 진갈비로 갈비신드롬 서울 마장동 구입 갈비절단기 첫 사용봉덕동 갈비골목 퍼진 안동마늘양념 ◆최고 선물 갈비평양냉면집에 손님이 몰려들었고,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를 달라고 하면 복잡했다.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 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1930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갈비찜의 성황은 계속 이어졌다.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연회에서나 요정에서나 명절 가정 요리로 갈비구이보다는 갈비찜이 인기를 누렸다. 이로 인해서 소갈비는 명절 선물로 가장 으뜸에 들었다. 전후의 황폐했던 경제가 제법 안정 상태로 들어선 1960년대가 되면 명절을 앞두고 각 수육 상가에는 소갈비 판매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팔도 갈비 명가들대구보다 훨씬 앞서 소갈비 돌풍을 일으킨 고장은 어딜까. 수원, 포천, 안의, 예산 등이다.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한다. 이동갈비는 1960년대 초 피란 내려온 김정민 할머니가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 처음 시작하다가 문을 닫고 70년대 김정민 할머니 집에서 주방을 맡았던 주방 아주머니와 조카가 김 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아 '장암갈비집'이라는 상호로 시작했다. 몇 년 전 '김미자 갈비집'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미자 갈비집'은 조선간장과 조청을 넣고 끓인 후 양념에 사과나 배 등 과일을 넣어 갈비를 재워 그 맛이 독특하다.갈비의 길이가 4인치면 '수원갈비'로 불리는데,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이 원조집. 화춘옥은 수원 팔달구에서 형 이춘명과 1930년부터 화춘제과점을 하던 이귀성이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밀가루 공급이 끊기자 1945년 광복되던 해 수원 영동시장 내 싸전거리에서 소갈비를 듬뿍 넣은 해장국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며 번창했다. 이 과정에 양념갈비를 재웠다가 구워 파는 수원의 독특한 갈비를 탄생시켰다. 화춘옥에서 41년 동안 갈비를 다루었던 문이근은 갈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원길을 배출했고 이원길은 갈비 조리업계의 대부로 후진을 배출했다. 지금은 수원 본갈비, 명성옥, 삼부자갈비집 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빗집이 많이 생겨났다.해운대갈비의 경우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 사장 이귀성이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주면서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집이 어느 집인지 확실치 않고 다만 해운대에서 암소 갈비 맛이 좋고 30여 년간 갈빗집을 해 온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집'이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전통을 지키고 있다. ◆대구 갈비의 뒤안길50년대 말 대구에서 불고기 돌풍을 일으킨 계산동 '땅집'의 흐름을 역이용, 1961년 대신동 타월골목에서 진갈비를 시작해 대구 갈비신드롬을 일으킨 진홍렬. 그는 대구에서 맨 처음 서울 마장동에서 구입한 갈비 절단기를 사용한다. 이후 이 골목에는 우후죽순 갈빗집이 생겨나고 그래서 진갈비가 있는 동산약국 뒷골목을 '갈비골목'이라 했다. 2000년대까지 롱런하다가 지금은 재개발 구역이 돼 휴업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새로운 진갈비 시대를 열 모양이다. 그 골목의 마지막 주인공 중 한 곳이 '성주갈비식당(현재 서성로로 이전)'이다. 진갈비 길 건너 '국일생갈비'도 갈비 명가라 할 수 있다. 진갈비의 전통은 마늘과 고춧가루를 만나면서 대구식 동인동찜갈비로 진화를 한다. 또한 참기름과 마늘향이 일품인 안동갈비 스타일은 안동 '서울식당'에서 발원, 남구 봉덕동 갈비골목에도 영향을 주고 그리고 수성구 '혜성식당',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옆 '참한우소갈비'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성구 프리미엄 한정식당인 '안압정'은 초창기 비원이란 이름으로 기존 등심 중심의 대구에서 갈빗살 붐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고성동 대창가든, 수성구 신성가든, 서구 한국가든, 남구 앞산가든, 수성구 제주가든 등도 대구를 숯불구이 고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이 밖에 경산 자인 남산식육식당도 전국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1961년 계산동 '땅집' 불고기 돌풍을 이용, 대구에서 '진갈비'를 통해 소갈비시대를 보여주었던 주인 진홍렬씨. 진씨 덕분에 이 골목은 갈비골목으로 롱런했지만 지금은 재개발 중이고 공사가 끝나면 진갈비와 성주숯불갈비 등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모양이다.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2022.11.11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1) 수백년 이어온 팔도 별식 '가리구이'
◆갈비 이야기갈비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고문헌을 살펴보면 소갈비는 협(脅), 돼지갈비는 박(拍)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갈비는 1600년대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도 '돈박(豚拍)'이 나오는데, '박(拍)을 박(膊)으로 삼으니, 갈비(脅)를 이름이다'란 구절이 나온다.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였던 홍만선은 '산림경제'란 책을 통해 양갈비구이(灸羊脇骨)를 소개했는데, '껍질 붙은 양갈비 한 대를 두 토막씩 내어 망사 가루 한 움큼을 팔팔 끓는 물에 담가 따뜻하게 두었다가 구이를 잠갔다가 급히 뒤적여 익지 말게 하고, 다시 잠갔다가 다시 굽기를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좋은 술에 슬쩍 담갔다가 한 번 뒤적이면 바로 먹을 만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럼 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숙종실록 숙종 1년(1675) 9월24일에 사헌부(司憲府) 상소 내용에도 갈비가 등장한다. 인조 때는 소갈비나 돼비갈비를 연희 때 빠지지 않고 썼던 것으로 승정원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정조 19년(1795) 6월18일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 갈비찜(乫非蒸)이 올라갔다.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불을 피워 놓고 소갈비를 큰 쇠꼬챙이에 꿰어 구워 먹었다. 다산은 자신의 저서인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소고기의 맛있는 부위로 소 밥통, 양지머리, 갈비 등을 꼽았다. 특히 소갈비인 우협(牛脇)을 갈비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 색임'이라 하였으며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 하였다. 쇠가리를 푹 고아서 끓인 가리탕이 1890년 궁중연회상 차림에 보이나 갈비는 고려 시대 전부터 먹어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그러나 19세기 말 이후 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는 '가리(乫飛)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을 튀한(털을 뽑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낸) 것과 부아·곱창·통무·다시마를 함께 넣고 무르게 삶아 건진다'라고 요리방법을 적시했다. 송만갑의 판소리 수제자 박봉술의 춘향가에도 '갈비찜'이 나온다. 춘향전의 이본(異本)인 남원고사(南原古詞)에서도 '귀신 같은 아이놈이 상 하나를 들어다가 놓으니, 어사(御使)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모조라진 상소반(床小盤)에 뜯어먹던 갈비 한 대'라는 대목이다.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교육자이자 요리연구가 방신영 교수가 쓴 '조선조리제법'에도 '가리구이'라는 조리법이 나와 있다. 1924년 위관(韋觀) 이용기가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워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언론인·수필가·동화작가였던 조풍연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 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으며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고 적었다. 그는 광주시에 들어간 송정리에서 만난 갈비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송정리에는 술집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가리구이를 시키면, 우선 풍로가 들어오고 자배기로 하나 가득 갈비 잰 것이 들어온다. 조그맣지만 한 대에 5전이었으니까 무척 쌌었다. 주객들 옆에서 작부가 가리를 연방 구워서 상에 올려놓는다. 다 먹은 뒤에 셈을 치를 때 남은 가리의 대수를 세어서 돈을 청구한다.'그런데 이 갈비는 수원갈비나 이동갈비와 달리 떡갈비였을 것 같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도 송정리 일대에는 떡갈비집이 많았다. 지금은 해남과 담양에 있는 식당이 더 소문이 났지만, 당시만 해도 송정리가 으뜸이었다.주지하듯이 갈빗살을 발라내 여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다시 갈비뼈에 붙인 후 석쇠에 구워내는 떡갈비. 비록 뜯어 먹는 재미는 덜 하지만 입에서 씹히는 갈빗살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떡갈비는 갈비에서 살코기를 다 뜯어내고 버려야 마땅한 것에서 고기를 발라내서 마치 살이 많이 붙은 갈비처럼 만들어 먹은 것이니,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갈비 연대기(2)에서 계속됩니다.갈비(乫非)란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했는가. 그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 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迎接都監) 소선상(小膳床) 편이다. 조선 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가리 등으로 불린 것 같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1) 肉과 火의 향연
'불고기'라는 단어는 옛 문헌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불(火)'과 '고기(肉)'는 한글 창제 초기와 그 뒤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으나 불과 고기의 복합어인 불고기는 중세어, 근대어의 어느 문헌에서도 볼 수가 없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온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에 의해 1880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불사전, 1911년 선교사 게일에 의해 출판된 한영사전은 물론 1938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에서도 불고기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불고기란 단어가 제시된 첫 사전은 1950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제3권)이었다.김기림 시인이 1947년 잡지 학풍(2권 5호)에 발표한 '새말의 이모저모'란 글에 불고기의 전파력에 대한 글이 나온다. '물론 간혹 그중에는 대중의 필요와 입맛에 맞는 것이 있어서 국어 속에 채용될 적도 있으나 그것은 실로 어쩌다 있는 일이다. 초밥과 같이 비교적 잘 되어 보이는 순수주의자의 새말조차가 얼른 남을 성싶지도 않다. 거기에 대하여 불고기라는 말이 한번 평양에서 올라오자 얼마나 삽시간에 널리 퍼지고 말았는가'라는 대목이다. 북한의 3대 불고기. 평양의 순안 불고기·강원도의 송도원 불고기·황해도의 사리원 불고기를 꼽는다. 평양의 별미인 순안 불고기는 남한의 일반 불고기만큼 자극적인 맛은 아니다. 소 등심을 칼등으로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 후 파와 마늘은 다지고, 배는 갈아서 즙을 짜 간장에 다진 파, 마늘, 설탕, 식초, 배즙, 참기름, 후춧가루, 깨소금을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소 등심을 얇게 저미어 양념장에 30분간 재운 다음 육수를 자박하게 붓는다. 재운 고기는 석쇠에 펴놓고 숯불에 구워 간장과 식초를 섞은 초간장에 찍어 먹는다.송도원 불고기는 검은 돌판에 구워 먹고 사리원 불고기는 사리원 특산물인 포도주와 과일을 이용한 양념으로 재운 후 먹는 양념 불고기다. 달콤한 양념이 밴 불고기와 심심한 국물까지 함께 먹는 사리원 불고기는 구이보다는 전골에 가까운 느낌이다. 어쩌면 짐승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불고기는 평안도 지방의 방언으로 시작되어 평양에 올라오자 평양의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고, 이 불고기가 광복과 함께 평안도 피란민들에 의해 서울 장안에 진출한 것이다.실제 1947년까지도 서울에는 불고기라는 음식명을 쓰지 않았다. 다만 남대문 시장 같은 데서 평안도 피란민들이 하는 허술한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결국 1950년 큰 사전에 불고기라는 단어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불고기'라는 단어가 1940년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습속이 1900년 중반부터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선사시대의 원시인들은 짐승을 잡으면 날고기를 그냥 뜯어 먹다가, 점차 고기를 말려서 오래 두고 먹는 법을 알게 되었고 인류가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요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모닥불에 직접 굽다가, 돌판 위에 올려놓고 굽게 되었고, 석쇠에 올려놓고 굽는 과정을 거쳐 번철이나 불판을 이용하는 오늘날의 요리법이 나오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우리 민족의 고기를 구워 먹는 요리법은 오랜 세월 동안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해 오던 대륙의 북방민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3호분을 보면 고기를 굽는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중앙의 푸줏간에는 4개의 거대한 쇠스랑 고리에 노루, 돼지 등 짐승고기가 통째로 매달려 있다. 고구려는 사냥기술이 발달해 상대적으로 육식을 많이 했고,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인은 사냥한 짐승고기를 된장, 간장 같은 저장음식으로 간을 한 뒤 훈제해 구워 먹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식 불고기 문화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멱적(覓炙)이 설하멱적(雪下覓炙)·설리적(雪裏炙)·설야적(雪夜炙)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지고 있다.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인인 이응희(1579~1651)가 쓴 옥담시집(玉潭詩集) 만물편(萬物篇) 음식류에 '적(炙)'이라는 불고기에 대한 시가 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이자 실학자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 '우육(牛肉)을 썰어서 편(片)을 만들고 이것을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편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유염(油鹽·전통간장)으로 조미해 기름이 충분히 스며들게 한 다음 숯불에 굽는다'라고 불고기 굽는 법이 나온다. 거기서 설야멱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불고기 이야기(2)에서 계속됩니다.고려의 수도 개경에서는 멱적(覓炙)이 설하멱적(雪下覓炙)· 설리적(雪裏炙)· 설야적(雪夜炙)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지고 있다. 불고기란 단어가 제시된 첫 사전은 1950년 한글학회의 큰 사전(제3권)이었다. 사진은 대구 별미인 연탄석쇠돼지불고기.칠성시장 내 연탄석쇠돼지불고기의 양대 산맥인 함남과 단골식당 골목 전경.
2022.10.14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젓갈과 식해(1)…빨간 밥 도둑
'곰삭는다' 이 말은 한국의 젓갈과 식해의 물성을 단적으로 지적한 표현이다. 원 물성이 산소와 당분의 침공을 역이용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게 바로 삭은 음식인 젓갈과 식해랄 수 있다. 음식 고수들은 잘 안다. 서해는 젓갈, 그리고 동해는 식해문화권이라는 것을. 서해의 젓새우, 이것의 최대 공급처는 전남 신안군 전장포였다. 오월과 유월에 잡힌 새우를 갖고 오젓과 육젓을 담근다. 이게 논산 강경, 부안 곰소 등지에서 전국으로 널리 팔려나간다. 동해안의 속초와 영덕 등지는 가자미식해로 유명하다. 멸치젓갈은 경주 감포항이 유명한데 전라도에서는 젓갈이라고 하면 제1은 밤젓(전어 내장젓), 두 번째는 황석어젓, 세 번째는 토하젓이다. 이 삼종 젓갈이 남도밥상의 백미랄 수 있다. 경상도에서는 멸치, 꽁치젓갈을 운운하지만 전라도에서는 그걸 젓갈로 보지 않는다. 동해안은 역시 젓갈보다는 식해가 강하다.동해안 속초·영덕에서 유명한 가자미식해신안군 젓새우·경주 감포항은 멸치 젓갈남도밥상 백미 '밤젓' '황석어젓' '토하젓'젓갈(salted fermented food)은 물고기, 육류, 채소 등을 소금으로 절여 만드는 '염장법(鹽藏法)'의 하나로 태생된 음식이다. 소금을 이용한 염장법은 중국은 물론 일본, 인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방글라데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유럽까지 즐겨 먹던 전통음식 중에 하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양고기를 소금에 절여 먹었고, 로마에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먹었다. 고대 서양 문명의 뿌리였던 로마인들은 항아리 안에 생선들을 넣고 소금을 뿌린 후에 두 달 정도 발효시켜서 '가룸(garum)'이라는 젓갈을 만들어 먹었다. 968년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의 대사로 동로마에 파견된 주교인 리우트프란드는 동로마 황제 니케포루스한테 영접받는 자리에 나온 음식들마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생선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도저히 먹지 못했다고 기록을 남긴 바 있다. 1453년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터키)에 멸망 당하고 나서 가룸은 그 제조법이 끊겨 오랫동안 잊혔으나, 20세기에 들어서 로마 문화의 애호가들이 다시 가룸의 제조법을 연구하여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주식은 죽 형태의 '브로스(broth)'인데, 생선으로 담근 젓갈을 조금씩 브로스에 넣어 먹으면 풍미가 좋아져서 당시 젓갈은 인기 있는 교역 상품이었고, 이 무역의 중심지가 바로 마르세유였다. 이탈리아는 지중해에서 잡은 멸치류의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머리와 뼈를 제거하고 돌돌 말아 올리브유에 저장한 젓갈인 '앤초비(anchovy)'와 세계 최강의 악취음식 스웨덴의 청어 젓갈 '스루스트뢰밍'(surstromming·중국판 마파두부)을 만들어 먹고 알래스카에서는 연어 알이나 연어 머리를 따로 모아 젓갈 '스팅크 헤드(stink heads)'를 만든다.고조선 시대부터 소금 사용…젓갈 만들어어패류 살·알·창자 절여 2~3개월간 숙성6~12개월 뒤엔 형태가 분해된 '젓국' 얻어이렇듯 젓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적을 불문하고 즐겨 먹던 전통음식 중에 하나이다.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다양한 어류를 잡아 오래 저장해 두고 먹으려면 당연히 오래전부터 염장법의 하나인 젓갈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조선 시대부터 소금을 사용했다. 고조선에는 지금의 랴오허(遼河) 강 서쪽 상류에 염수(鹽水)라는 소금강이 있었다. 이곳의 '소금우물(井鹽)'에서 퍼 올린 소금물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했다. 한서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생선과 소금, 대추, 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는 것으로 보아 해안가에서 어업과 제염이 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젓갈은 소금의 예술이다. 주로 어패류의 살, 알, 창자를 소금 20%에 절여 만드는데, 상온에서 2~3개월 숙성시키면 생선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젓갈을 얻을 수 있으며 6~12개월 숙성시키면 형태가 완전히 분해된 '젓국'을 얻을 수 있다.6세기 전반 중국 북위(北魏)의 가사협이 지은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 보면 한나라 무제가 동이족을 쫓아서 산둥반도에 이르렀을 때 어디서인지 코에 와 닿는 좋은 냄새가 있어 찾아보니 어부들이 항아리 속에 물고기 창자와 소금을 넣고 흙 속에 덮어 두었다가 향기가 생기면 조미료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오랑캐를 쫓다가 얻은 음식이라 하여 '축이(逐夷)'라 했는데 지금의 잘 삭힌 젓국과 같은 것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젓갈과 식해(2)에서 계속됩니다.
2022.09.16
"소멸 가능성 높은 108가지 음식 재현"…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책 발간
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겸 요리연구가 6명이 큰일을 해냈다. '대한민국 맛의 방주-향토편'(백산출판사)을 어렵사리 출간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요리책이 아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멸종 가능성이 많은 팔도의 해묵은 음식 108가지(제주도 25, 전라도 27개, 경상도 20개, 충청도 10, 강원도 15, 경기도 11)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방주에 걸맞은 식재료를 구입해서 방주음식을 재현한 것이다. 자신들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지원 한 푼 받지 않았다.대한민국 조리장이며 한식대첩4 때 들안길 한식당 용지봉(변미자)과 손을 잡고 최종우승을 차지했고 현재 경산에서 한식당 '뜰안'을 운영하는 최정민, 푸드아트아카데미 조은미 대표, 한국자연음식협회장 겸 이지사찰음식학교 원장인 전효원, 세종 신라 외식전문학교 조리 부원장인 엄희순, 마음찬 도시락 대표 서경희, 대구경북음식문화발전소 수석연구원인 강나윤. 이들 중 전효원씨를 빼고 나머지는 대구가톨릭대 외식산업학과 출신. 당연히 출간을 가장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은 이들의 스승이기도 한 임현철 교수. 임 교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구현한 책"이라고 호평을 했다. "요리연구가에게 자극이 되고 일반인에게는 전통음식의 신지평을 느끼게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했다. 슬로푸드 한국협회 김종덕 회장도 이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빛나는 저작물을 내준 것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이들은 방주 목록과 기타 한국 전통음식 중 국민과 반드시 호흡해야 될 음식을 중심으로 재현해 냈다. 사흘이 멀다 하고 푸드스튜디오에서 만나 레시피를 정리하고 관련 요리 과정에 꼭 필요한 팁도 소상하게 덧붙였다. 반찬과 양념, 소스 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고수의 팁'을 삽입했다. '자연양념'의 선두에 꼽히는 채수도 5가지(기본·진한·칼칼한·달달한·구수한 맛)로 세분해 놓았다. 이 책을 보면서 요리를 따라 하려는 사람을 배려한 것이다.우리 식재료와 멸종위기에 처한 토종 씨앗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통분모가 생긴 셈. 연구자들은 마음을 모아, 요리의 전문분야는 다르지만, '맛의 방주'에 등재된 식자재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활용한 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방주에 등재된 식자재를 알아보는 중, 천연기념물로 등재된 것도 있고 구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오로지 맛의 방주에 등재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동분서주했다. 구하지 못한 식자재는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했다. 또한 음식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오류도 많이 경험하면서 고민도 깊었다. 지방마다 개인마다 요리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바람은 이렇다."이 책을 시발점으로 많은 분이 맛의 방주에 실린 귀하고 소중한 우리의 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더 맛있고 더 유익한 레시피가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위기에 처한 우리의 토종 씨앗이나 음식이 사라지기 전에 '맛의 방주'에 승선시키는 노력도 쉼 없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방주 음식이 사라지면 한국의 맛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최근 출간된 '대한민국 맛의 방주'.
2022.09.09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사라져가는 향토음식 지키기 '맛의 방주' 프로젝트
일단 구약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인 노아의 홍수 이야기부터 해보자.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고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40일 밤낮 동안 세계를 물로 가득 차게 하였으나, 노아와 그의 가족과 지상의 동물 한 쌍씩만이 이를 피하였다고 한다. '방주(方舟)', 노아가 하나님의 계시로 만든 네모진 잣나무 배이다. 그의 가족과 짐승들을 이 배에 태워 모두 대홍수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맛의 방주& 슬로푸드음식계에도 방주 프로젝트가 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이하 방주)다. 1996년부터 시작된 국제슬로푸드협회 생물종다양성재단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종자, 품목을 찾아서 기록한다. 주요 선정대상은 동물 종, 식물 종, 치즈 등 생산자들이 만든 식품들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음식과 음식 문화자원을 재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해 지역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맛의 방주는 슬로푸드 운동에서 특정 식자재를 다루는 유일한 프로젝트이기에 소비자가 맛의 방주 등재 식품을 찾고 그것을 먹게 되면 소멸 위기에 처한 종자나 식재료를 지킬 수 있다. 방주 목록은 국제슬로푸드협회 홈페이지(www.slowfood.com)의 'Ark of Taste' 카테고리에서 나라별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협회는 2013년 '제주푸른콩장'을 방주에 처음 등재했다. 우리나라는 슬로푸드 운동을 하는 160개국 중 방주 관련 100종 이상을 올린 11개 나라 중 하나다. 올해 등재된 국내 품목은 모두 105개, 이 중 지역은 9개로 울릉도가 6개(섬말나리, 칡소, 옥수수엿청주, 홍감자, 울릉 손꽁치, 물엉겅퀴)로 가장 많고 이 밖에 경북 전역에서 먹는 팥장, 울진의 갯방풍, 영덕의 가자미밥식해가 뽑혔다.슬로푸드가 잉태한 개념은 '슬로시티'. 슬로시티의 슬로푸드가 결국 맛의 방주가 되는 것이다. 슬로시티의 역사는 이탈리아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매장을 오픈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지역 고유의 전통 음식을 지키려는 모임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세가 확장되어 99년 10월,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 시장인 고(故)파올로 사투르니니가 주위 여러 시장을 불러 모아 의기투합을 한다. 음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도시의 삶 전체에 느림을 도입하자고 맘을 모은다. 이들이 내건 운동명칭이 이탈리아어로 '치따 렌타(Citta Lenta)'나 '치따슬로(Cittaslow)', 이게 '슬로시티 운동의 기원이 된다. 슬로시티는 한마디로 정체성 없는 획일적인 대도시를 반대하는 운동이다. '슬로(Slow)'는 상당히 인문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단순히 패스트(Fast)의 반대 의미로 '느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재인식하고, 여유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찾아보자는 의미다. 이는 결코 현대 문명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위해 현대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지향한다.◆맛의 방주 선택 기준은어떤 음식이 방주의 맛일까? 일단 지역 고유의 맛을 가진 식재료와 식품, 지역 고유 토종 또는 야생종, 지역생산물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만든 가공식품, 지역사회문화와 지식이 연관된 품목이어야 한다. 지역전통의 조리방법과 가공법 및 독창적인 맛과 특성을 가진 식품이어야 한다. 좋은 예로 안동식혜나 홍어를 들 수 있다.지역 토양(territory)의 특성과 지역사회의 기억, 정체성, 전통지식과 관련 있는 식품, 일정한 양만 생산되는 식품도 대상이다. 맛의 방주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품목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 맛의 방주에 있는 품목들은 특정 지역과 지역사회 지식과의 연관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식품도 해당된다. 만약 이 품목을 생산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생산자가 매우 적을 경우, 고령자 어르신일 때는 더더욱 그 품목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볼 수 있다. 전통가공법은 장인의 기술이며 그 기술은 단기간에 습득되지 않는다. 또한 말이나 글로는 알 수 없는 특유의 감각을 길러야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자가소비를 위해 생산하는 수준이라면 이 또한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신호다. 소비추세의 변화, 더 이상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품목을 소비하지 않는 시장, 지역인구 감소, 장인들의 생계를 위한 지역이주, 기술 대물림 중단, 지역생태계 변화, 국내외 농업정책지원자금 중단, 관계 당국의 관심 부족 등 소멸위기 원인은 여러 가지라 할 수 있다.현재 제주도가 맛의 방주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다.현재 방주 품목에 등재된 것은 제주푸른콩장, 강술, 꿩엿, 댕유자, 순다리, 재래감, 재래돼지, 골감주, 산물, 다금바리, 오분자기, 자리돔, 우뭇가사리, 옥돔, 톳, 구억배추, 제주재래닭, 참몸, 제주전복, 제주 홍해삼, 제주고소리술, 붉바리 등 22개이다. 제주도는 옛 향토음식을 육성하기 위해 '2022년도 제주향토음식 육성 시행계획'이 수립된다. 시행계획에는 향토음식 도록(圖錄) 제작, 창업 및 요리교실 운영, 향토음식 품평회 및 경진대회, 향토음식 관광 콘텐츠화 지원, 향토음식점 표지판 제작 등 총 3개 분야에 12개 사업이 마련됐다. 이 과정에 제주의 7대 지정 향토음식이 태어난다. 자리물회, 갈치국, 구살국(성게국), 한치물회, 옥돔구이, 빙떡, 궤기국수(고기국수) 등이다. 남도 최초의 맛의 방주는 2013년 등재된 장흥돈차이다. 돈차는 서민과 상류층을 아우르며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차다. 고려 때에는 진상품으로 오르기도 했다.2014년에는 남양주시가 '맛의 방주 전시관'을 유기농테마파크 내에 개관했다. 전시관은 224㎡ 규모로, 전 세계의 사라져가는 204개 품목의 음식과 종자, 130여 종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사진=김철성 사진작가글=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세상이 너무 가공식품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거기서 인간을 살려 낼 음식이 바로 맛의 방주다. 음식계에도 방주 프로젝트가 있다. '맛의 방주'(Ark of Taste·이하 방주)다. 1996년부터 시작된 국제슬로푸드협회 생물종다양성재단의 프로젝트로,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종자, 품목을 찾아서 기록한다. 주요 선정대상은 동물 종, 식물 종, 치즈 등 생산자들이 만든 식품들이다.최근 6명의 대구경북 슬로푸드 회원 겸 요리연구가가 한국의 토종 식재료를 찾아 어렵사리 '대한민국 맛의 방주 향토편'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108가지 가장 한국스러운 방주음식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오른쪽 부터 최정민, 조은미, 서경희, 전효원, 엄희순, 강나윤.
[시대별 변화하는 선어골목] 좌판형→포차→초밥집→전문점 진화…대형선어로 부위별 저며 낸 모둠형태 인기
선어집도 진화를 거듭한다. 어시장에서 태어난 '회무침선어집', 다음은 규모를 가진 횟집에서 전문적으로 선어만 파는 형태, 이어 부산국제영화제 등으로 관광객이 몰려들자 이들을 겨냥한 다양한 바닷가 '선어포장마차', 일본 영향을 받은 '초밥집 선어', 그리고 고급스러운 대형 선어 전문점, 이젠 선어와 활어를 절충한 신개념 선어집도 생겨나고 있다. 생선회 전문강좌를 만든 조영제 부경대 교수는 활어와 선어회의 절충식인 '생생회'란 개념을 제시한다. 활어는 식감은 좋은 반면 감칠맛이 부족하고 대신 선어회는 감칠맛은 좋은 데 씹힘성이 부족한 걸 감안, 둘의 장점을 고루 맛보게 만든 것이다. 보통 활어를 그날 6~8시간 숙성시켜 내는 형태이다.요즘 가장 비싸고 핫한 충무동 '선어마을'은 돗돔 같은 대형 선어만 부위별로 저며 모둠 선어회 형태로 낸다. 제대로 먹으려면 한 접시 10만원을 내야 한다. 그리고 부산 서구청 근처 '용광횟집'도 부산의 대표적 선어집이다. 거기서 '오징어통찜'이 개발됐다고 한다. 밤에 그 집을 찾았다. 흰살 생선인 도다리·농어·광어가 나왔다. 그날 충분히 숙성시킨 탓인지 즉석 활어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미가 전달됐다. '이래서 다들 선어 선어 하는구나'라고 독백했다. 자갈치 시장 여인숙 골목도 선어골목으로 유명하다. 20~30년 전 원양어선 등 장기 출항을 하던 선원들이 임시로 머물던 여인숙이 지금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들의 까다로운 식성을 알아서 잘 챙겨주는 선어집이 하나둘 생겨난다. 거제선어, 남이네, 포항, 삼천포, 김해, 순자네 등이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도 '달뜨네'는 후발주자로 시메사바(고등어초회) 전문점으로 유명해졌다. 이밖에 자갈치시장 내 '명물횟집' 등도 핫하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부산 선어문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충무동 새벽시장 내 어물전 중심부. 거기에 동환할매집 등 몇몇 선어집이 이마를 맞대고 앉아 있다.
2022.08.12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선어 이야기, 숙성한 감칠맛 즐기는 선어회…대구는 미주구리 무침회가 별미 술안주 인기
세계에서 가장 회(膾)를 좋아하는 두 국가가 있다. 단연 한국과 일본이다. 중국은 그걸 좋아할 것 같은데 전혀 반응이 없다. 한국은 활어권, 일본은 선어권이다. 일반인은 활어와 선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건 '활어', 그 대척점에 있는 죽은 상태의 생선이 바로 '선어(鮮魚)' 다. 어종 크기 따라 숙성 일수도 차이 여수 선어문화 부산 생선가게 영향초장으로 버무린 회무침·회국수 먼 항해 지친 선원 입맛 사로잡아식감보다 특유의 풍미·꼬린내 선호 부산서 40년 구력의 '동환할매집'단골 입맛 꿰고있는 1세대 선어집낮술 한잔에 선어 한 접시로 발길활어와 선어 사이에 놓인 게 '빙장어(氷藏魚)'이다. 선어와 빙장어를 혼동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선어는 잡는 즉시 죽여 피를 완전하게 제거한 뒤 냉장숙성한 것이다. 빙장어는 죽은 상태에서 유통되는 것이라서 쉬 부패할 가능성이 높다. 선어는 당일치기의 경우 즉석에서 피를 제거해야 된다. 한국에서는 아가미 중앙(심장)을 찔러 흐르는 물에 씻거나 해수에 담가놓는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케시메'라고 해서 생선의 양미간에 송곳을 깊숙하게 찔러 넣고 그 구멍 속에 철사를 넣어 사방으로 돌려 척수를 관통해 신경을 마비시키면서 핏물을 제거한다. 당연히 일본에는 활어를 위해 수족관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 선어회는 숙성이 핵심이다. 숙성 일수가 어종마다 차이가 많이 난다. 삼치, 병어, 다랑어 등 푸른 생선과 몸집이 작은 생선은 숙성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광어, 다금바리, 돗돔 등 흰살 생선과 대형 어종은 기간이 길다. 삼치와 병어 등은 대략 반나절, 심해어인 돗돔은 열흘까지도 숙성시킨다.◆선어, 제2의 풍미지금 우리나라는 죽은 생선은 똥값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민 횟감인 참치는 오직 선어로만 존재한다. 4~10일 저온 숙성을 시킨다. 싱싱한 생선은 즉살해 잘 숙성시켜 제2의 풍미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일본의 스시 집에는 수족관이 필요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필수인 장거리 이동하는 수조차도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다. 얼음과 냉장고, 수족관, 수조차 등이 없었던 시절에는 살아 있는 생선을 즉석에서 먹는다는 건 선원 이외의 사람에겐 언감생심. 대구, 조기, 갈치, 삼치, 꽁치, 청어, 명태, 돔배기, 홍어, 고래고기, 고등어, 문어, 아귀, 참돔…. 70년대만 해도 대다수 생선은 선어류였다. 묵나물처럼 죽은 생선을 좀 더 오래 두고 먹기 위해서 별별 아이디어를 다 동원했다. 그중 하나가 소금 간독에 생선을 묵혀놓는 것이다. 소금·된장·고추장·간장독은 그 시절 괜찮은 냉장고였다. 그 과정에 염장 된 다양한 젓갈과 자반 생선류가 태어난다. 당화되는 쌀 등의 전분류를 이용해 식해류도 해 먹었다. 대표적인 게 가자미식해, 영덕 강구항의 밥식해(홍치 식해) 등이다. 그런 식해의 연장에서 태어난 게 일본 '후나(붕어)스시'다. 내장과 피를 말끔히 제거한 뒤 해풍에 말려 건어물로 판매하기도 했다.전남 여수에도 진남루 바로 인근 골목에 선어회 골목이 있다. '희망선어'가 터줏대감 격이랄 수 있다. 이 문화가 부산 선어회에 영향을 미친다. 부산의 웬만한 생선 가게마다 사각형 유리함에 얼음과 생선을 채워놨다. 대구의 경우 미주구리(물가자미)가 선어회 형태로 강구항부터 대구권으로 확산했다. 불로동과 반고개 무침회 그리고 도심 곳곳에 있는 미주구리 무침회가 별미 술안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목포~신안권은 민어와 병어 그리고 흑산도~나주권은 단연 홍어가 대표적인 선어다.◆수족관이 변곡점이었다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최첨단 냉동 운반기술 덕분에 활어를 원거리로 이동할 수도 있었고 횟집 수족관에 풀어놓고 활어 회로 팔 수도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 초부터 '선어시대'에서 활어 시대로 건너온다. 선어시대 때는 항상 식중독이 문제였다. 꾼들 사이에 나돌던 그 '아다리'에 잘못 걸리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특히 요즘 같은 하절기에는 비브리오 패혈증 등이 생선 마니아를 노린다. 부둣가 뒷골목 식당가. 초입에 들어서면 초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주인들은 상비약처럼 식초에 고추장을 섞은 초장을 갖고 당일 어판장에서 헐값에 사 온 선어로 회무침을 해준다. 여느 포구의 식당가에는 초장문화가 짙게 스며들어 가 있다. 가장 활성화된 항구는 부산이다. 자갈치시장 속을 파고들면 올망졸망 따개비처럼 박혀 있는 묵은지 같은 선어식당 군을 만나게 된다. 먼 항해에 지친 선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술안주 같은, 때론 한 끼 반찬이 되는 선어가 메인 메뉴로 등장한다. 광복동 회국수의 명가로 발돋움한 '할매집'의 유명 고명인 가오리도 부산 선어문화의 한 흐름을 장식한다. 그 회국수 때문에 비빔당면도 파생된다. ◆저마다 창법이 다른 선어들목포, 여수, 통영, 삼천포, 부산, 포항 등 국내 큰 항구마다 선창 토박이들은 저마다 선어를 맛있고 안전하게 먹는 비법을 지니고 있다. 선어의 경우 된장과 초장을 적절하게 잘 섞을 줄 안다. 하지만 왜간장과 고추냉이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본바닥의 기운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양념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특이하게 당일 잡은 싱싱한 활어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씹힘성이 중요하지 않다. 선어 특유의 풍미, 그리고 '꼬린내'를 갈구한다. 기자는 지난주 부산 자갈치시장 주변 '선어문화벨트'를 살펴보고 왔다. 부산 전역은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점차 활어문화권으로 건너가고 있지만 여전히 심층부에는 선어꾼들의 이야기가 맥동 치고 있다. 지하철 자갈치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연결되는 충무동 해안시장, 새벽시장, 그리고 여인숙 골목, 그 심장부에 도열해 있는 별별 생선가게, 다 냉동된 걸 해동 시켜 선어 상태로 판다. 바로 거기에 40년 구력의 '동환할매집'이 있다. 동환집 좌우로 수야집과 할매손맛이 있다. 올해 86세의 김영자 사장. 손자 이름을 가게 상호로 정했다. 그날 빙장 되고 있는 어종은 딱 하나, 병어였다. 한창때는 수십 가지 그날 선어를 초장에 무쳐 냈다. 얼음 위에 올린 이 선어를 이 바닥에서는 '빙장회'로 부른다. 어떤 경우는 경매사, 선원 등이 가져온 생선을 바로 장만해 그들이 원하는 형태로 안주를 만들어낸다. 주문자 생산방식의 선어집이었다. 이게 초창기 회무침 형태의 선어시절이었다.그런 집이 하나둘 늘어났다. 관광객은 그런 데를 알 수 없었다. 설령 온다 해도 분위기가 너무 꼬릿하고 폐쇄적이고 우중충해서 다들 기겁하고 핫플 횟집으로 갈 것이다. 오직 뱃사람만의 '선어공동체'였다. 가게 주인들은 단골의 입맛을 훤하게 꿰고 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바로 그 선창의 분위기였다. 이젠 새로운 스타일의 선어집이 많이 생겼다. 겨우 자리만 지키고 있는 정도다. 동환 할매도 돈이 목적이 아니다. 그냥, 소일 삼아 여기로 나온다. 그래도 아직 이 바닥 뱃사람들에게는 '낮술 한잔에 선어 한 접시'로 유명한 1세대 선어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충무동 '선어마을'과 함께 부산의 선어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는 수족관 없는 서구 보수동 '용광횟집'의 선어.동환할매집의 대표 메뉴인 병어 선어.40여 년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환할매집의 김영자 사장.부산 만의 고등어 선어문화의 결정판인 시메사바(고등어초회). 영도의 '달뜨네'가 대표주자.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진주냉면 재현기... 해산물·육전 푸짐한 고명 '1999 진주냉면' 되살리다
진주냉면을 찾아서기생 많은 진주 옥봉동 냉면집 성행배달 많아 남자 하인 3~4명 두기도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그는 진주냉면의 연대기를 현지 조사를 통해 치밀하게 엮어나갔다. 1999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한 바로는 1800년 말에 진주목의 숙수(熟手) 한 분이 관영(官營)에서 나와 옥봉동 개울가에서 진주냉면을 뽑기 시작했다고 한다.당시 진주 시내에는 미색과 재색이 뛰어난 관아 소속 진주 기생이 적잖았다. 그들과 맞물려 돌아갔던 숙수(요리사)들은 조선이 망하면서 권번과 요정으로 나와 그들만의 기생문화를 발달시킨다. 이들은 돈 많은 왜인이나 지주 등 한량들과 함께 기생놀이를 하고 야심한 밤에 냉면집을 찾아 냉면을 밤참으로 먹었다고 한다.특히 요정이 많고 기생이 많이 살던 진주시 옥봉동과 가까운 냉면집들이 장사가 잘됐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기생문화와 냉면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당시 기생뿐만 아니라 일반 부유한 가정집에서도 냉면을 배달시켜 먹어 냉면집에는 배달을 주로 하는 남자 하인들이 서너 명씩 있었다고 한다.1939년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에는 진주냉면을 좋아하는 일본인 교사 구사마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메밀국수에 볶은 고기를 가늘게 썰어 넣어 배와 생강으로 맛을 여민 육수로 된 이른바 진주냉면이 구사마의 호물(好物)이었다. "이 냉면 기가 막혀!" 구사마는 냉면 두 그릇을 먹곤 "진주를 떠나면 영영 이 맛있는 냉면을 못 먹게 될 텐데…"하고 숙연히 한숨을 지었다'는 구절이다.김 원장이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민속전통'을 읽고 진주냉면을 찾아 나선 것은 1999년이다. 이 책에 '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란 기록 때문이다.'조선의 민속전통'은 해방 이전의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 평양에서 1994년에 발행한 책이다. 한양대 고 이성우 교수가 쓴 '한국의 조리문화사'에는 '옛날부터 찡하다는 표현의 평양냉면이 유명하였지만 이 평양냉면에 견줄 만한 진주냉면은 남국적인 맛으로 유명했다'는 구절이 있다.옥봉동 냉면촌60년대 중반까지 7~8개 업소 성업큰 화재로 점포 소실, 점차 사라져60년대 중반까지 옥봉동을 중심으로 수정식당, 평화식당, 은하식당 등 7~8개 업소가 성업 중이었다. 옛날에는 이러한 식당들이 하인을 두고 직접 배달을 했다고 한다.1961년 1월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두 군인이 옥신각신타 살인'이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 기사에 진주시 장백동 '은하 냉면옥'이 등장한다. 이 식당 장남 배두선 일병이 살해된 내용이다. 60년대 초까지 진주에서 진주냉면 장사를 했다는 근거다.그러나 1884년 진주상무사로 개설된 이래 1966년 2월6일 밤 9시쯤 진주 시내 중앙공설시장 4구 일광상회와 대동지업사 부근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하여 순식간에 수백 점포가 맹렬한 불길 속에 휩싸여 버렸다. 약 3시간에 걸쳐 때마침 불어오는 강한 서북풍과 동북풍으로 47동 447개의 점포가 전소된다. 그 이후 진주냉면은 1960년대 중반 진주지역에서 사라졌다.진주냉면 자료를 보고 진주냉면의 흔적을 찾아 김 원장은 진주, 사천, 의령 등 냉면집을 다니며 하루에 5~6그릇을 먹어 봤으나 '진주냉면'이라고 특정할 만한 집은 한 집도 없었다.그러던 중 중앙시장 나무전거리 '평화식당(당시 냉면집)'에서 마지막으로 일했던 김점순(당시 61세)을 만난다. 사라진 진주냉면을 찾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1928년부터 자기의 어머니가 진주냉면 집을 했다는 상봉동 거주 김양훈(당시 81세) 할머니, 수정식당 주방에서 일했던 정태호(당시 71세)씨 등을 만나게 된다. 강수영(1909년 출생)씨는 1900년도 초 어머니인 순흥 안씨인 안장금 할머니가 수영이네 집으로 불리는 진주냉면집을 운영하다 '수영식당'으로 상호를 변경해 운영해 왔다고 진주시 상봉동 거주 강대백(당시 83세)씨가 증언했다.진주냉면 재현동치미 국물 대신 멸치장국으로 육수쇠고기 편육 무친 후 삶아 국물 내기도당시 부산방송(현 KNN)과 함께 평화식당의 김점순 아주머니·강수영 할머니·정태호 할아버지를 모시고 각자가 아는 '진주냉면'을 만들어 보라고 부탁한 후 공통점을 정리해 사라진 '진주냉면'을 재현해 냈다.평양냉면이 동치미국물을 사용했다면 진주냉면은 동치미국물 대신 거제, 남해, 사천 등지에서 잡히는 죽방멸치를 이용한 '멸치장국'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멸치장국을 끓일 때, 멸치의 잡내를 없애기 위해 동이나 무쇠를 불에 벌겋게 달궜다가 끓는 장국에 넣었다. 순간적으로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멸치의 잡내를 없애는 '순간가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멸치장국을 기본으로 하여 각 집마다 첨가하는 재료와 육수의 맛이 조금씩 달랐다.예를 들어 평화식당 계열의 김점순은 멸치장국을 만들 때 멸치, 개발(바지락), 건홍합, 마른명태, 표고버섯 등을 넣고, 재래식 간장으로 간을 맞추며 만들었다. 수영식당 계열인 정태호는 멸치와 재래식 간장을, 1928년부터 자기의 어머니가 진주냉면을 했다는 상봉동 거주 김양훈은 멸치와 양파를 넣고 재래식 간장으로 간을 했다. 한편 이 사람들 모두 쇠고기의 사태살 또는 정강이 살을 푹 고아 기름을 건져 내며 육수를 내 멸치장국으로 빛깔과 맛을 맞추었다.그런데 여기서 김점순·정태호는 쇠고기 덩어리 살을 넣어 삶는데, 김양훈은 쇠고기를 잘게 편육으로 하여 마늘을 빻아 재래식 간장으로 양념한 후 쇠고기 편육을 무쳐 두었다가 이것을 삶아 육수를 만들었다. 김점순은 꾸미로 김장배추김치를 그대로 잘게 썰어 얹고 배·오이를 채 썰어 얹고, 계란 황백 지단과 깨소금을 얹어 내놓았다. 진주냉면의 특징순 메밀·고구마 전분 물에 개어 반죽꾸미에 김장김치·전복·해삼·석이버섯김 원장은 이 과정에 진주냉면의 공통된 특징을 알게 되었다. 첫째 순 메밀에 고구마 전분을 물에 개어 이 전분 물로 메밀 반죽을 하여 면발을 뽑는다는 것이다. 둘째 쇠고기 육수에 멸치장국으로 육수의 빛깔과 맛을 낸다는 것이다. 셋째 김장배추김치를 채 썰어 꾸미로 얹는다는 것이다. 넷째 진주지방의 제사음식으로 만들어 먹던 쇠고기 육전이 꾸미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복·해삼·석이버섯을 데쳐 채를 썰어 냉면 꾸미로 올렸다고도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특징이 진주냉면의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형이 훼손된 냉면은 진주냉면이라 할 수가 없으며, 이 원형을 중심으로 맛이나 모양을 내기 위해 추가되어 조리된 냉면은 모두 진주냉면이라 할 수가 있다.그는 이 내용을 가지고 2000년 6월쯤 신안동에 있는 '갑을가든'에서 진주냉면을 재현했고 그 사실이 KBS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뒤이어 '하연옥 진주냉면'이 등장한다. 하연옥의 친정 아버지(고 하거홍)는 고아로 자라 진주 중앙시장의 식당 종업원으로 전전하다 1945년 하거홍(당시 24세)과 황덕이(당시 17세)는 '부산식육식당'을 창업 하여 소국밥, 비빔밥, 돼지수육 등의 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2000년 김 원장이 진주냉면을 찾아다닐 때는 현 하연옥은 진주 서부시장에서 부산식육식당이라는 상호로 국밥, 수육, 평양냉면을 팔고 있었다. 2005년 서부시장의 부산식육식당을 '진주냉면'으로 상호 변경을 하라는 권고와 함께 그가 재현한 레시피를 주고 함께 메뉴 개발을 한 것이 지금의 하연옥 진주냉면이다. 그 외 오빠나 언니들이 하는 진주냉면은 하연옥으로부터 전수한 것이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지난 23년간 명맥이 끊어졌던 진주냉면을 찾아 다닌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그가 식당 관계자 증언, 자료 조사 등을 통해 재현한 '1999진주냉면'.진주냉면은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 몇 년 전 닭 앞가슴살 가루를 섞어 만든 '닭살냉면'을 대구에서 론칭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김 원장은 그때 연구한 면발을 계승한 더 진화된 형태의 1999 진주냉면을 재현하기에 이른다.
2022.06.17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나물전문점 '양가네가든'…전국 15곳서 공수한 나물거리 '산천을 담은 밥상'
채소와 나물. 묘한 차이가 있다. 채소는 '트로트', 나물은 '포크송' 같다. 채소는 '개', 나물은 '고양이' 같다. 채소는 이미 인간의 품에서 일심동체가 되어버렸다. 상추, 쑥갓, 열무, 무, 배추…. 매년 파종 시기가 되면 꽃집, 종묘 가게 앞에는 별별 모종이 다 진열된다. 채소는 이미 '국민표'랄 정도로 대중적이 돼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야성(野性)'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봄을 주름잡는 달래·냉이·씀바귀·쑥·두릅·가죽나물·고사리·머위·곰취·참나물 등은 왠지 모르게 부족한 원기를 채워줄 것 같다. ◆나물줌마를 찾아서언젠가부터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꽃, 방가지똥, 광대나물, 곰보배추, 소루쟁이 등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잡초 같은 숨은 나물의 명칭과 캐는 법, 요리하는 법, 독초와 구별하는 법 등을 알려주는 들판 심마니 버전의 유튜버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인간과의 관계망이 척박해지는 걸 야생초·산야초·반려식물 공부로 돌파하는 이들이 많다. 전국에 이런저런 나물 전문점이 적잖게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무늬만 나물집인 경우가 상당수다. 나물 종류도 일천하고 상당히 상투적이다. 나물의 물성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 산하에 종횡무진 피어나는 나물을 체계적으로 확보, 그 물성에 맞는 저장법과 요리법을 간직한 그런 고수식당이 정말 찾기 힘들어졌다. 나물도 철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영업을 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봄이 여름으로 건너가는 이즈음, 나물쟁이 같은 식당을 찾아봤다.그런데 우연찮게 팔공산 자락을 품은 대구와 경산과의 경계에 있는 '양가네가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물줌마'로 불리는 양수조(59) 사장은 남편 김충원, 아들 김동률(31), 딸 김나영(24), 양사장의 동생, 바쁠 때는 조카까지 알바로 나서 가업을 지키고 있다.양 여사의 친정 조모가 전주에서는 꽤 유명한 약방집 딸이었는데 그분을 통해 남도음식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28세에 결혼을 했다. 1991년 7월 동구 불로동에서 '양씨네식당'을 오픈했다. 처음부터 나물 외길의 삶은 아니었다. 돼지갈비 전문점이었다. 3년 정도 하다가 나름 장사가 괜찮아 가게를 좀 더 키운다. '양가네가든'이 된다. 소, 오리, 닭도 키웠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시절, 광우병에 이어 설상가상 조류인플루엔자까지, 2개의 대형태풍에 식당은 쑥대밭이 돼버린다. 망연자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모의 신의 한수그런데 친정 조모가 '신의 한 수'를 알려준다. 이후 그런 파동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나물밥집'이 괜찮을 것 같으니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해서 2008년 처음으로 '산채정식'을 개발해 낸다. 다행히 동구 진인동 팔공산 자락에 괜찮은 문중 땅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꽤 풍족한 나물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이 부족해 전국에 수소문해서 제대로 된 나물 구매 시스템을 갖춰야만 했다. 영양 일월산, 영천 보현산, 영주 소백산, 팔공산 일원 등 전국의 15군데에서 다양한 나물 매입루트를 형성한다.수급 시기는 3월 말~6월 말.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생나물거리와 말린 뒤 해를 넘겨서도 먹을 수 있는 묵나물(17종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법도 알게 된다. 식당 앞에도 나물군락지를 조성했다. 화살촉나물(일명 훈잎), 고추나물(일명 절춘잎), 다래순, 뽕잎, 단풍취, 병풍취, 우산나물, 이팝나물, 대나물, 호래비꽃대(일명 젓가락나물), 비비추…. 집단 재배를 위해 울릉도 취나물(참취), 오가피나무, 원추리, 두릅과 엄나무 등도 심었다. ◆나물의 향연양 여사가 진두지휘, 직접 황홀하기까지 한 나물밥상을 차렸다. 기자도 이런 밥상은 처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물의 향연이었다. 얼추 30여 종의 나물이 총출동했다. 처음 온 손님들은 일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먹어보지도 못한 별스러운 나물에 탄성을 연발한다. '평생 이렇게 많은 밥상이 올라온 식당은 처음이다. 이 나물은 잡초인 줄 알았는데 식용이라니…', 나물에 대한 다양한 예찬과 호기심을 연발한다. 그런 반응이 이 식당을 반석에 올려놓게 된 건지도 모른다.가죽나물, 미나리, 이팝나무, 아주까리, 비름나물, 산취, 고사리, 부지깽이, 참나물, 다래, 갯방풍, 땅두릅, 어수리, 엄나무, 분재나물, 명이나물, 참취, 오가피, 두릅, 거리대, 곤달비….방풍나물, 감자, 비트, 김, 아까시꽃, 고추, 냉이, 연근 등 10가지 재료로 부각을 만들기도 한다. 장류는 당연히 직접 담그는 걸 원칙으로 한다. 단골이 탐을 내는 게 이 집 묵은 김치다. 김장철에는 사들인 배추가 작은 언덕을 이룬다. 고추장, 된장, 간장 그리고 김치, 이건 이 집의 수호신이나 마찬가지다. 그게 흔들리면 나물맛도 흔들리기 마련. 9년 된 된장은 세월을 품은 탓인지 중식당 춘장처럼 거무튀튀하다. 밥과 쌍으로 붙어 다니는 국도 절기마다 다르다. 봄철에는 '산나물어수리나물국과 쑥국', 여름에는 '참나물국', 가을에는 특히 단골로부터 인기 짱인 '송이무국'이 특미로 올라온다. 특히 가을철에는 버섯나라로 돌변한다. 송이, 능이, 싸리, 국더덕이, 망태버섯…. 정말 귀한 송이 장아찌도 비장의 무기다. 송이향 스며든 간장에 참기름 한 방울 넣어 밥을 비벼 먹어도 좋을 것 같다.2월만 한숨 돌릴 수 있다. 식구는 이 식당에서 숙식한다. 양 여사는 오전 5시에 기상. 그래도 신이 난다. 장남이 가업을 잇겠다고 선뜻 나선 것. 경주 위덕대 호텔조리학과를 나와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근처 JW 메리어트 호텔 주방부에서 재직 중 어머니 부름을 받고 바로 짐을 쌌다. 딸은 동아대 화학과 출신, 약대생의 길로 가다가 식당일로 유턴을 해 버렸다 아버지는 주방, 어머니는 홀, 아들은 홀과 주방 사이, 동생은 카운터를 맞고 있다. 최강 '패밀리 파워'를 자랑한다. 양 여사 파이팅! 경산시 와촌로 팔공로 2길11. 낮 12시~ 밤 10시30분. 매월 둘째·넷째 수요일 휴무. 산채정식 1만원. (053)851-6127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1991년 7월 동구 불로동에서 '양씨네식당'을 오픈했다가 광우병, 조류인플루엔자 파동 때문에 나물전문점으로 터닝한 팔공산 양가네가든. 이 집은 이 땅에서 나오는 웬만한 나물 30여 종을 생채, 묵나물, 국 등 다양한 요리를 통해 새로운 식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물박사가 된 양수조 사장이 남편 김충원과 가업을 이은 아들 김동률 사이에서 양가네 나물 엄지척을 하고 있다.죽나물, 미나리, 이팝나무, 아주까리, 비름나물, 산취, 고사리, 부지깽이, 참나물, 다래, 갯방풍, 땅두릅, 어수리, 엄나무, 분재나물, 명이나물, 참취, 오가피, 두릅, 거리대, 곤달비…. 게다가 별미로 등장하는 10가지 부각류(방풍나물, 감자, 비트, 김, 아까시꽃, 고추, 냉이, 연근 등), 장아찌류 등도 맛볼 수 있다.
2022.06.03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2)...경북 바닷가 5개 시군 어촌계가 품은 해조류…밥상에 올라온 '푸른 생명의 맛'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편에도 미역이 등장한다. 연오가 따던 해초 부분 원문은 '一日延烏歸海採藻(일일연오귀해채조)'이다. '海採藻(해채조)'는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현장이라고 추정되는 포항시 동해면 임곡리의 바닷가 미역으로 특정할 수 있다. 미역은 각종 고문헌에서는 해채(海菜), 감곽(甘藿), 조곽(早藿), 해곽(海藿), 해대(海帶)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해조류를 최초로 기록한 책인 정약전의 자산어보 해초 부분에는 해조, 미역, 토의채(土衣菜), 김, 감태, 청각채(靑角菜)를 포함하여 총 35종의 다양한 해조류가 기록돼 있다. 과거에는 해초와 해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해초와 해조를 혼용하고 있다. ◆해초와 해조류의 차이해중식물, 바다에 사는 식물 중 해초(海草·Seagrasses)와 해조(海藻·Sea algae)는 보통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분류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식물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역, 다시마, 김, 우뭇가사리, 감태 등은 모두 해조류다. 해조류는 바다의 먹이사슬에서 기초단위로 초식성 패류의 먹이가 되며, 소형어류는 다시 이들을 포식한다. 소형어류는 먹이사슬로 대형어류로 연결된다. 해초는 '바다풀'이다. 바다 식물 중 종자를 통해 번식하는 고등 식물이다. 잘 알려진 해초로 '잘피(거머리말)'가 있다. 잘피는 꽃이 피는 일반 풀과 같다. 다만 서식지가 얕은 바다라는 것이 다르다. 육지에서 바다로 간 동물이 고래라면 육지에서 바다로 간 식물이 잘피다. 우리나라 연안에 사는 잘피 종류로는 거머리말(잘피)이 가장 흔하며, 이를 포함하여 애기거머리말, 포기거머리말, 왕거머리말, 수거머리말, 새우말, 게바다말(말잘피), 줄말 등 모두 8종이 알려져 있었으나, 기후 온난화로 바닷물 온도가 올라가면서 아열대성 잘피인 해호말이 2009년 발견되어 모두 9종으로 늘었다.1990년 이래 매년 약 7%씩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잘피를 2016년 5월 이달의 해양생물로 지정하고, 매년 5월 10일 바다식목일에 잘피를 심는 등 해양생태계 보전 및 보호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수산자원공단(FIRA)에서 해중숲 조성 등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해조류 대표주자 미역미역이 속하는 해조류는 바닷말이라고 하는 녹조류·갈조류·홍조류를 일컫는 말이다. 전 세계에 1만 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500종 이상이 밝혀져 있는데, 식품으로 섭취가 가능한 것은 50여 종이다. 일반적으로 표층으로부터 깊은 수심으로 내려가면서 바다 깊이에 따라 녹조류, 갈조류, 홍조류의 순으로 나타난다. '녹조류'는 가장 얕은 곳에 서식하며 녹색이다. 파래, 매생이, 청각, 청대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갈색 또는 흑갈색이며 중간 깊이에 많이 분포하는 '갈조류'에는 미역, 대황, 다시마, 톳, 감태, 모자반, 곰피 등이 있다. 붉은색을 띠고 가장 깊은 곳까지 서식하는 홍조류는 김, 꼬시래기, 우뭇가사리(한천), 갈래곰보, 세모가사리 등이다.이에 대한 내용을 총괄하는 아카이빙 센터가 있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 해양생명자원통합정보시스템 (MBRIS)의 유용 해조류도감이다. 2015~2019년 해양국립공원 내 26개 주요 섬 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해조류 출현종의 수는 총 241종으로 녹조류 24종, 갈조류 54종 그리고 홍조류 163종이 확인되었다.홍조류인 김과 달리 세계적인 희귀종인 민물에 서식하는 민물김은 녹조류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민물김은 현재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삼척과 일본의 일부 지역(큐슈 지방)에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월 지역(막골 계곡)에서도 서식했으나 탄광 개발 이후 완전히 멸종됐고, 삼척 지역(초당굴 하류)의 수확량도 급격히 줄었다. 강원도는 삼척시 등과 함께 민물김 복원 사업을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2012년 10월에는 민물김 서식지인 삼척 소한계곡을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국내 해조류 생산을 보면 미역, 김, 다시마, 톳, 파래의 순으로 미역이 1위이다. 1990년 대비 2008년 생산량의 증감 비율을 보면, 미역은 41%, 김은 120%, 다시마는 263% 증가한 반면, 톳은 15%, 파래는 20% 감소하였다. 특히 다시마 생산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2000년대부터 전복 양식이 성공하면서 사료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미역인문학 집필을 위해 숱하게 경북 동해안 미역 채취 현장을 누빈 김남일(오른쪽) 본부장.
2022.04.29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1)...1970년대 양식 성공…가공식품에 첨가하며 수요 급증
한국인의 탄생과정에 가장 곡진하게 개입하는 음식은 뭘까? '미역'이다. 아이를 낳은 며느리를 위해 시어머니가 손수 미역국을 끓여준다. 미역국이 끓는 동안 시어머니는 연신 양 손바닥을 비비며 삼신 할매를 향해 치성을 드린다. 해산용 미역을 살 때는 가격을 깎지 않고 최상품만을 엄선한다. 그 미역이 바로 '산모곽'이다. 이 미역은 오직 산모만 먹을 수 있다. 시어머니는 삼칠일(21일간) 동안 외부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 앞에 금줄을 매단다. 부정(不淨) 타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첫 미역 국물과 며느리의 초유를 반드시 굴뚝 안에 뿌려준다. 천지 기운을 선순환시켜보려는 그 시절만의 특별한 통과의례다. 이제 그 전통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미역은 건재하다. 현재 김과 함께 한국인의 밥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얼마 전 각별한 책 한 권이 우송돼 왔다. 지은이는 김남일 환동해지역본부장. '공무원이 이렇게 전문적이고 디테일 있는 책을 내도 되나'란 독백을 해봤다. 직접 경북 동해안 어촌계 해녀와 동행하면서 미역 채취 현장에서 체험한 바와 미역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적었다. 한국인은 미역의 민족. 수천 년 동안 섭취해왔다.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미역 양식이 성공하면서부터. 특히 남해안을 중심으로 전복 양식이 보급되고 라면과 같은 가공식품에 미역을 첨가하면서 수요가 급증한다.현재 한국의 해양은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실은 점차 고사 중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동해안의 해초와 해조류는 그 희소성 때문에 체계적으로 관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수도권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경관과 전망 등이 좋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리조트나 소규모 풀빌라와 브런치 카페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전통 어촌문화 환경을 해치고 있다. 대규모 화력발전소나 항만개발로 연안 침식 또한 심각해지고 있으며, 기후변화의 지표인 해조류나 해초류가 사라지는 백화현상으로 인해 바다 사막화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이참에 동해의 미역문화를 비롯한 해양유산을 재조명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의 일단을 환동해지역본부가 감당하고 있다. 경북동해안 해녀인문학, 경북동해안 포구역사 및 바지게꾼들의 삶 등을 총서 형식으로 펴내고 있다. 경북 동해안에는 해양생태계와 어촌문화 공동체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 특히 울릉도·독도에는 국제보호종인 '넓미역'과 동해특산종인 '대황'의 군락지가 있다. 울릉도의 연안 전체가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해마도 서식하고 있다. 독도까지 포함하면 세계적인 생태섬이자 해초류와 해조류의 생태적 보고이기도 하다.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미역을 먹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 이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다. 8세기 당나라에서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초학기(初學記)'에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뜯어 먹은 뒤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초학기는 8세기 초 중국 당나라의 서견 등이 편찬한 유서(類書·일종의 백과사전)로 30권으로 구성돼 있다. 정작 우린 미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미역의 어원은 뭘까?고구려에서는 우리 말 '물'을 '매(買)'라고 한자로 표현했다. 미역을 '여뀌'라는 풀과 비슷하다고 해서 '물여뀌'라는 의미로 '매여뀌'라고 불렀다. '매여뀌'에서 'ㄲ' 아래 모음이 탈락하면 '매역'이 되고 '매역'에서 모음변이가 일어나 오늘날 '미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고문헌과 제주 방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미역을 '메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메역'이라 부르고 있으며, 미역이 많은 '바당'(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을 '메역바당'이라 부르고, 우뭇가사리가 많은 바당을 '우미바당'이라 부른다. 이를 종합하여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매여뀌 → 매역 → 미역.미역의 연대기를 따라가면 한민족의 생활문화, 그걸 넘어 한식의 원류와도 상통하는 걸 알 수 있다. 지금도 미역을 생산하는 어촌마을마다 미역을 위한 다양한 민속문화가 멸실 되지 않고 현대인과 소통하고 있다. 그 흐름 속으로 들어가 본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한국인의 '소울푸드' 미역(2)에서 계속됩니다.전남 진도, 부산 기장과 함께 한국 3대 미역 특산지로 유명한 울진군 북면 나곡3리 어민들이 채취한 미역을 건조장에서 말리고 있다.울진군 북면 나곡3리 미역 채취 광경. 〈환동해지역본부 제공〉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료개혁특위 "의료개혁 시기상 미룰 수 없는 과업…소통 통해 의견 좁힐 것"
경북대,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155명' 조정에 대구경북 타 대학 결정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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