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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젓갈 장인 김명수·김헌목 父子…동해안 '멸치젓갈' 반세기 가업…아버지와 아들이 지킨 경상도 젓갈 자존심
한국 젓갈 문화는 서·남·동해안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서해안부터 전남 여수까지는 '젓갈권', 동남해안은 '식혜권'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서해안의 '새우젓', 서·남해안의 '밤젓(전어 내장 젓갈)과 토하(민물새우)젓', 그리고 동해안 감포를 축으로 한 '멸치젓갈'로 갈라진다. 서해안 젓갈은 반찬용, 동해안 멸치젓갈은 김장용과 액젓으로 나눠진다. 액젓의 경우 백령도 까나리액젓이 명 성을 갖고 있는데 이에 필적할 수 있는 동해안 액젓이 바로 경주시 감포읍에 있는 김명수 젓갈이다. 지난 20년간 해양수산명인은 모두 10명, 경북도 수산 명인은 단 한 명. 반세기 가업을 잇고 있는 김명수(84)·김헌목(49) 부자이다. 2020년 해양수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젓갈 명인'에 선정된다. 김경용-김종호-김명수-김헌목으로 이어지는 이들 젓갈 명가는 한때 한국 멸치젓갈의 본산격인 감포읍 전촌리에서 경상도 젓갈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다. 22세때 부친에 제조 기술 이어 받아 父는 경주 감포 본점, 子는 천북공장 국산 정제염 사용 600여t 액젓 담가 염도 측량 정확지 않으면 쉽게 부패 경상도서 선호 저염도식 꼬리한 액젓 멸치 잡는 겨울에 제조, 3년이상 숙성'K피시 소스 감포앤초비' 세계화 시동 ◆감포의 젓갈 명인아버지는 감포읍 본점, 아들 헌목씨는 17년 전에 증설된 천북 공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96년 22세의 나이에 부친으로부터 멸치액젓 제조 기술을 전수해 왔다. 천북 공장은 '와이너리' 같다. 50t 숙성조 20여 개가 땅속에 묻혀 있다. 3~10년 묵힌 액젓을 보니 붉고 투명하다. 와인 빛깔이다. 취급하는 어종은 멸치·꽁치·정어리·고등어. 멸치는 매년 12월 초부터 2월 말에 매입하고 나머지는 5월에 모아들인다. 예전에는 천일염을 사용했는데 35년 전부터는 국내산 정제염을 사용한다. 지난해 600여t의 액젓을 만들었다. 정제염 4천 포가 사용됐다. 사용하는 멸치는 대멸이다. 일제강점기 감포 앞바다에서 잡힌 대멸을 일본 어부들은 '와다리'라고 했다. 이때 '감포멸치'는 프리미엄 급이었다.헌목씨의 증조부(김경용)는 일본인으로부터 '후리'라는 멸치 어획법을 배운다. 광복을 맞아 일본인 젓갈 공장을 인수하면서 가업이 시작된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대고모의 부탁에 못 이겨 1961년 부친(김명수)이 제2의 젓갈인생을 시작한다.◆염도 인문학젓갈은 '염도예술'의 산물이다. 특유의 꼬리한 맛이 나도록 젓갈을 만들려면 염도를 정확하게 측량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부패해 버리기 때문에 염도의 정확한 측정이 매우 중요하다.김명수젓갈에서는 염도 10과 염도 14, 이 두 가지 염도의 멸치액젓을 생산하고 있다. 염도 10, 저염도 젓갈은 어떤 배경을 안고 태어났는가? 6·25전쟁 무렵 일부 가정에서 담그는 멸치젓갈만 저염도였다. 공장표 멸치젓갈의 염도는 대부분 염도 14를 훨씬 웃돌았다. 10도 염도의 꼬리한 저염도 멸치액젓은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좋아한다. 염도 14.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 멸치액젓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한다.김명수젓갈은 브랜드 파워를 가지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명칭이 바로 '감포앤초비'. 세계적인 멸치가공식품 중에 이탈리아, 노르웨이의 앤초비와 태국의 피시소스가 있다. 태국의 피시소스는 아미노산질소 2 이상이 되면 최고의 품질로 인정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1이 넘으면 멸치액젓으로는 합격을 받을 수 있는데 김명수의 멸치액젓은 2.2~2.3. 특히 뻑뻑이액젓은 2.4가 나오는데 국내 최고의 수치로 평가받는다.이렇게 치열하게 염도 관리를 하는 이유는 뭘까? 사건이 있었다. 어느 해 문제가 생겨 5t이나 되는 멸치젓갈을 다 버렸다. 염도 측정 시스템이 탄생한 계기가 된다. 감이 없으면 멸치 장사를 못 한다. 그래서 부친 성격은 유달리 까탈스럽고 치밀하다. 탱크에 젓갈과 소금을 넣는 일을 손수 감내한다. 로스터가 매일 로스팅 포인트를 체크 하는 것과 같다.젓갈 농사는 가장 맛있는 멸치가 잡히는 겨울철에 이뤄진다. 3년 이상 숙성이 원칙이다.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멸치에서 액이 나오는데, 살과 뼈를 분리해서 액젓을 생산하게 된다. ◆액젓 국제화를 향해제품을 다양화했다. 분말젓갈, 다시마어간장, 미역어간장, 뻑뻑이액젓, 고등어액적, 갈치뻑뻑이액젓….히트작은 '뻑뻑이액젓'. 멸치 40 꽁치 20 소금 20의 황금비율. 생선의 머리부터 뼈까지 통째로 갈아 만들었다.이젠 액젓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액션을 취하고 있다. 그들이 그려낸 브랜드는 'K-피시소스 감포앤초비'."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면서 올리브오일에 절인 서양식 멸치젓갈인 앤초비를 빵에 올려 먹거나 샐러드와 함께 먹는 것을 보는 순간, 유레카, 바로 이거라면서 탄성을 질렀어요."빵에 올려 먹거나, 스테이크와 함께 먹어도 맛있는 앤초비, 올리브 절임을 다진 올리브빠데 등 글로벌 테이블에 어울리는 근사한 멸치젓갈을 활용한 상품을 곧 출시할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지난 20년간 해양수산명인은 모두 10명, 경북도 수산 명인은 단 한 명. 반세기 가업을 잇고 있는 김명수(84)·김헌목(49) 부자이다. 2020년 해양수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젓갈 명인'에 선정된다. 김경영-김종호-김명수-김헌목으로 이어지는 이들 젓갈 명가는 한때 한국 멸치젓갈의 본산격인 감포읍 전촌리에서 경상도 젓갈의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다. 〈사진=김명수 젓갈 제공〉헌목씨가 천북공장 젓갈 숙성조에 담긴 액젓을 떠 보이고 있다.액젓용 대멸
2022.04.22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2)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북 별미 '등겨장'…이른봄 담가 비빔·쌈·찌개 즐겨
집장과 즙장여러 재료로 만든 '집장' 단기간 발효 '즙장'두개 醬 모두 여름에 담가…메줏가루 사용'집장(集醬)'은 여러 재료를 모아서(集) 만든 장(醬)이다. '즙장(汁醬)'은 간장, 된장, 고추장 등과 같은 기본장과는 달리 일부 지역에서 단기간에 별미로 담가 먹었던 장으로 액체가 많은 장이다. 또 즙장은 장기간 발효시키는 된장과 달리 담가서 단기간 발효 시켜 먹는 속성장으로 독특한 풍미가 있고, 지방마다 원료의 종류, 발효 및 숙성 조건 등이 달라 그 형태 및 품질이 매우 다양하다. 또 보릿가루가 주원료여서 단맛이 강하고 그대로 밑반찬으로 이용되는 특징이 있다.즙장이란 말은 '규합총서(閨閤叢書)' '시의전서(是議全書)' '부인필지(婦人必知)' 등 많은 문헌에 나타나 있으며, 고문헌에서는 '콩과 밀기울과 메주를 만들고 야채류를 넣어 말똥 속에서 숙성시킨 것'이라고 했다. 즙장은 밀기울과 콩을 물에 불려 시루에 쪄서 절구에 찧은 뒤에 밤톨만큼씩 덩어리를 만들어 메주처럼 띄운 후 건조하여 가루를 만들어 누룩 가루와 물을 섞고 소금을 넣어 밀봉하여 두었다가 십여일 후 설탕을 타서 먹는 음식이다. 막장과 비슷하게 담되 수분이 줄줄 흐를 정도로 많고, 무나 고추, 배춧잎을 넣고 숙성시킨다. 산미도 약간 있다. 밀과 콩으로 쑨 메주를 띄워 초가을 채소를 많이 넣어 담근 것이다. 경상도·충청도 지방에서 많이 담그는 장으로 두엄 속에서 삭히도록 되어 있다.경북 성주 한개마을 이원조가의 즙장 담는 법은 이렇다. 누룩과 채소(박, 가지, 고추, 부추 등)를 준비하고, 찰밥을 해서 뜨거운 상태로 준비한 누룩과 채소를 섞으면서 국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쌀엿이나 조청을 추가해 만든다. 채소 중에는 박을 가장 많이 넣는다. 왕겨를 많이 쌓아두고, 항아리에 채소하고 재료를 버무려 담아 뚜껑을 덮은 후 왕겨 불로 중탕을 한다. 다만 부추는 중탕할 때 넣기도 한다. 즙장과 집장은 모두 여름에 제조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메줏가루를 사용하거나 두엄 속에서 삭히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집장을 경북에서는 '거름장', 경남에서는 '보리겨장'이라고 한다. 거름장이란 명칭은 이렇게 '퇴비 속에 파묻어 익힌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우선 경북의 거름장은 콩을 삶다가 보리를 섞어 익힌 뒤 메주를 만들어 뽕나무나 닥나무 잎을 덮어 띄운다. 이것을 말려 가루로 만든 다음 오이, 가지 등을 섞어 퇴비 속에 묻어 익힌다. 경북 예천 춘우재 권진 종가는 집장으로 유명하다. 메줏가루에 쪄서 삭힌 찹쌀을 버무린 후 가마솥에 다시마, 찐 오징어, 호박오가리, 가지, 대파, 버섯, 고춧잎, 무, 마늘 등 아홉 가지 재료와 함께 넣고 오랫동안 타지 않게 정성 들여 불을 때 끓인다. 다 끓인 집장을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 숙성시킨 다음 먹는다.청국장(靑麴醬)병자호란 당시 국내 유래한 설은 근거 희박청나라 장이 아닌 '푸른 곰팡이'란 뜻의 장청국장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존재한 음식으로 408년 백제 영토였던 전남 나주 흥덕리 고분에서 발굴된 묵서명(墨書銘)에 '염시(鹽시)'가 나오는데 '시'는 메주를 뜻하는 한자로 염시는 된장이나 청국장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전국장(戰國醬)'이 네 번 등장한다. 청국장은 전시장, 전국장, 청국장(靑局醬), 청국장(靑麴醬) 등으로 쓰다가 청국장(淸麴醬)으로 통일됐다. 청국장(淸國醬)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들이 말안장에 삶은 콩을 싣고 다니다 발효시켜 먹은 데서 유래됐다고 하고 있으며 중국 청나라 장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병자호란은 1636년부터 1년간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전쟁이다. 그러나 이런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병자호란보다 100여 년 앞서 발간된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를 보면 '시'를 '쳔국'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간이 1766년에 쓴 시문집 '후재집(厚齋集)'에서 '전국장(戰國醬)은 칠웅전쟁(七雄戰爭) 때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알지 못한다'라고 적었다. 청국장이 전쟁용 음식이란 속설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조선 숙종 때 김창업이 펴낸 '연행일기(燕行日記)' 계사년(1713·숙종 39) 1월26일을 보면 '북경에 사는 박득인의 집 주안상에 청국장도 맛이 역시 좋은데 대개 우리나라의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때가 청나라 때인데 북경에서 먹은 청국장이 우리나라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병사에 의해 전해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그야말로 설에 불과하다. 조선 초와 중기에는 '시'를 주로 며주·메조·며조·메주라고 했고 조선 후기 무렵에는 전국장·쳔국장·청국장이라고 했다. 즉 '시'에서 메주와 청국장이 분화돼 현재까지 발달해 온 것으로 보인다. '훈몽자회'의 '쳔국'과 '사류박해'에 나오는 '청국장', '전국장' 등의 연관 관계이면 청국장이 '靑麴醬' 이어야 하지 '淸國醬'은 아니다. 즉 청국장은 청나라(淸國) 장(醬)이 아니라 '푸른곰팡이'란 뜻의 청국장(靑麴醬)이다.빠금장동지~봄에 먹어… '빠개장'이라 부르기도부뚜막서 띄워 먹는 된장, 세월따라 사라져장(醬)도 제철에 맞게 담가 먹어야 맛이 있다. '가을 청국장, 겨울 빠금장'이라 했다. 청국장은 가을 콩을 발효시켜 동지 전까지, 동지 이후부터 봄까지는 빠금장을 만들어 먹는다. 이 빠금장을 '빠개장'이라고도 부른다.'빠금장'은 동지 전에 메주를 쑤고서 몇 개 정도를 장 담그기 전에 여분으로 남겨두었다가 만들어 먹는다. 부엌 개량화로 인해 발효시킬 부뚜막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토속음식인 빠금장도 함께 사라진 게 아쉽다. 빠금장은 부뚜막에서 띄워 먹는 된장으로 된장이 떨어질 무렵인 봄에 된장을 만들기 위해 소금물에 담고 남은 메주를 절구에 거칠게 빻아서 동치미 국물에 걸쭉하게 개어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올려 따뜻하게 둔다. 2~3일 후 항아리 위로 떠올라 오면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고 간을 한 속성장이다. 예전에는 화롯불에 뚝배기를 올려놓고 바글바글 끓는 채로 먹기도 하고 나물 무치는 데도 쓰고 봄 채소 쌈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상도 대표주자 등겨장보리 찧은 당가루에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늘한 온도에 삭혀야 제맛, 한여름은 피해가장 경상도스러운 장이 있다. 바로 '등겨장'이다.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북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우리 지역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는 '등겨'의 지역 토속어이다. 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 하는 식으로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오면 쌀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오는 등겨는 '쌀겨'라고 한다. 처음은 거칠고 누런 겨지만, 나중에는 '싸라기'라 하여 쌀알 부스러기까지 나온다.보리를 찧을 때 나오는 등겨는 벼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벼는 껍질을 벗기는 게 가능하지만 보리는 아니다. 낟알의 가장자리를 갈아내 보리쌀을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거칠고 누런 겨가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는 점점 부드러워진다. 보리쌀 모양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겨를 토박이 업자들은 '당가루'라고 한다. 이 당가루에 직전의 조금 거친 겨와 섞어서 등겨장을 담근다.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불에 그슬린 백말순표 등겨장 메주.모 방송국 제작진에게 등겨장 레시피를 설명 중인 백말순.메주는 된장과 간장의 원천이 된다. 메주 한 덩이. 그건 '한식의 맛'이란 건축물을 만드는 '벽돌'과 같다.백말순 등겨장의 주재료가 한자리에 모였다. 보리메줏가루, 콩, 보리, 콩물, 고춧가루, 천일염 등 9가지.60여 년 역사의 백말순 등겨장 상품들.
2022.04.15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1) 메주 빠갠 가루로 담근 속성장 '막장'
메주와 물, 그리고 소금이 만나면 간장과 된장이 탄생한다. 한식의 출발선이랄 수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그리고 젓갈, 식혜, 장아찌…. 최소한 이 스펙트럼을 알아야 한식의 연대기를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장류 문화는 서양발 소스문화에 지배된 듯하다. 마치 서양음악이 국악을 호령하는 모양새랄까.지난 회에서는 '간장 인문학'에 대해 알아봤는데 이번 회에서는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팔색조 된장의 연대기에 대해 알아본다.콩(豆)을 가르(支)면 메주란 의미의 '시(시)'가 된다. 시란 용어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도 등장한다. 신문왕 3년에 왕이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할 때 납채(納采) 품목으로 장(醬)과 시가 포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된장 중 특별한 스펙트럼을 가진 '별미장'이 있다. 바로 '속성장(速成醬)'이다. 지역별로 만드는 방법이나 명칭 등이 약간씩 다르다. 크게 나누어 보면 청국장, 막장, 담북장, 빰장, 빠개장, 가루장, 보리장(등겨·시금장) 등으로 나뉜다. '막장'은 날 메주를 가루로 빻아 소금물에 말아 숙성시킨 것, '담북장'은 메줏가루에 고춧가루를 섞고 물에 풀어서 하룻밤 재웠다가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된장이다. '빰장'은 굵게 빻은 메주에 소금물을 부어 담근 것, '빠개장'으로도 불리는 '빠금장'은 메줏가루를 콩 삶은 물로 버무리고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어 담근다. 또 '가루장'은 보리쌀을 빻아서 찐 것에 메줏가루를 버무려 소금물로 간을 맞춘 것, '보리장'은 보리쌀을 삶아 띄운 다음 가루로 빻아서 메줏가루와 반반씩 섞어 소금물로 버무려서 만든 걸 말한다.메주에서 된장으로 변주되는 과정의 첫 관문은 뭘까? '막된장(막장)'이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시킨 후 간장을 빼고 난 부산물이다. 그다음 주자는 '토장(土醬)'이다. 막장에 메줏가루와 소금물을 섞거나, 막장을 넣지 않고 메줏가루에 소금물만을 넣고 담가 2~3개월 숙성시킨 된장이다. 일반적으로 간장을 뜨지 않은 된장을 '토장'이라 한다.막장은 장을 담근 지 15일 정도 지나면 먹을 수 있는 속성장으로 메주를 빠개어 가루로 만들어 담갔다고 하여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달라진다. 강원도를 비롯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주로 보리 생산이 많은 남부지역에서 먹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빰장', 충청도 지역에서는 '빠개장'이라 하였다. 메줏덩이로 간장을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가루장'이라고도 부른다. 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엮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별미장인 '담수장(淡水醬)'이 소개된다.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만든 메주를 초봄에 부숴서 햇볕에 6~7일 숙성시켰다가 햇채소와 함께 먹으면 맛이 새롭다'라는 대목이다. 막장의 원형으로 보인다.막장은 봄·가을철에 만든다. 재료는 메줏가루 5홉·찹쌀 2홉·물 6홉·소금 1홉.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찹쌀 4공기에 메줏가루를 섞어서 덮어 1일 동안 지낸 후 물에다가 소금이나 간장을 섞어서 반죽한 것에 섞어서 잘 덮어 주면 한 10여 일 후부터 익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에 된장 대용으로 사용한 속성장이다. 막장은 처음부터 메줏가루로 된장을 만들기 때문에 간장을 빼고 남은 건더기로 만든 재래식 된장보다 맛이 좋고 영양가도 높은 편으로 주로 쌈장이나 양념으로 쓰인다. 막장은 일반 메줏가루로 만들기도 하지만 콩, 밀, 멥쌀, 보리 등의 전분을 섞어 막장용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기 때문에 콩으로만 메주를 쑨 재래식 된장과 달리 소금을 조금 넣고 오래 숙성시키지 않아도 된다. 이는 메주에 전분이 들어가면서 당분이 분해되어 발효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장은 다른 된장에 비해 단맛이 강하다. 막장용 메주는 멥쌀가루로 찐 떡이나 삶은 보리쌀을 전분질 재료로 하고 콩은 무르게 삶아 사용한다. 이들 재료를 절구에 찧어 주먹만 하게 메주를 빚은 뒤 속이 노랗게 되도록 잘 띄운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보릿가루와 엿기름을 섞어 죽을 쑨 다음 여기에 고춧가루(또는 고추씨 가루), 메줏가루, 소금 등을 섞어 따뜻한 곳에서 한 달 정도 숙성시켜 먹기도 한다. 쌈장, 수육이나 편육을 찍어 먹는 양념장, 생선회로 물회를 만들 때의 양념,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데 사용한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팔색조 매력의 맛 '된장 이야기' (2)에서 계속됩니다.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봄맞이 음식…봄 알리는 1호 음식 '도다리 쑥국'…봄 밥상에 꽃처럼 핀 '부지깽이밥' '톳밥'
봄이 오는 구절도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볼 수 있다. 초반전의 봄(初春), 중반전의 봄(中春), 그리고 종반전의 봄(終春). 초·중·종장으로 구성된 시조와 비슷한 구도다. 일반인들은 진해 군항제가 열릴 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서 '아 봄이 왔구나!' 한다. 중반전의 봄은 개나리와 목련, 진달래와 산수유 등이 주도한다. 하지만 1~2월 초반전의 봄은 심미안을 가진 자에게만 겨우 보일 정도로 빼꼼하게 존재한다. 바람의 계절인 음력 2월, 봄과 겨울 사이에 놓인 '연골' 같다. 태풍보다 더 거센 바람이 꽃샘추위와 함께 몰려온다. 어쩜 이 변곡점이 봄의 시작이랄 수 있다. 이때 추위를 '영등 할매 추위'라고 한다. 영등 할매는 음력 2월 초부터 보름 동안 지상에 머물며 비바람을 관장한다. 제주도는 물론 해안가 해녀와 어부들에게는 섬겨야 하고 빌어야 하고 의지해야 할 존재다. 그래서 음력 보름쯤 다들 용왕제와 비슷한 영등제를 봉헌한다.통영지역 섬 곳곳서 고개 내미는 쑥산란 직후 잡은 도다리와 만나 봄맛된장 풀어 끓인 보리싹홍어애국 별미강구안에서 즐기는 해초 멍게비빔밥 부산 청사포 광어쑥국도 입맛 돋워성주댐 봄 건강식 고로쇠수액 닭백숙 대구 한식당 '산내향' 힐링밥상취나물·숙주·봄동 등 제철나물 한상홍합밥으로 유명한 주인장 내공 담아 ◆봄의 전령사역시 봄꽃이 가장 만만하고 익숙하다. 꽃이 피면 봄이 온 것이다. 대한민국 봄의 전령사 1호. 세월 따라 그 주인공이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제주도 유채꽃, 섬진강 매화, 남해안 동백꽃, 복수초…. 하지만 2000년 들어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 때문에 유명해진 수선화가 봄의 전령사로 등극했다. 추사의 유배지가 있는 대정읍은 남도 봄꽃 1번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너무나 많은 군락지를 갖고 있는 별별 동백꽃이 빛을 발한다. 여기에 설중매가 합세하면 초반전 봄을 장식하는 '삼정승(영·좌·우의정)'이 완비된다.신년이 펼쳐지게 무섭게 제주도 한림공원에는 수선화가 핀다. 보통 1월1일이면 꽃잎이 달리기 시작한다. 수선화의 꽃향기는 제주도와 남해안의 동백꽃과 맞물린다. 수선화와 동백꽃의 꽃향기는 유채꽃을 불러들이고 이걸 신호탄으로 육지에선 수양버들과 산수유가 노란 화맥(花脈)을 열기 시작한다. 울릉도에서는 전호나물과 명이나물, 부지깽이나물이 싹을 피워문다. 남부지방의 고로쇠가 수액을 팽팽하게 밀어 올린다. 물론 이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북극성처럼 멀리 떨어져 봄의 전령사의 고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꽃이 있으니 바로 '고매(古梅)'다. 섬진강의 매화는 설중매보다 너무 흐드러져 꼭 4월의 벚꽃 같아 갈수록 상춘객 버전으로 추락하는 것 같다.제주도의 동백은 애기동백과 토종동백으로 분류된다. 두껍고 풍성한 육지의 겹동백에 비해 제주도 동백은 비단처럼 하늘거리고 화사하다. 색도 연분홍에서 담적색까지. 애기동백은 벚꽃처럼 난분분하게 지지만 토종동백은 꽃은 뚜 둑~, 불두(佛頭)처럼 떨어져 땅에 나뒹군다. 사진작가에겐 가지에 매달린 동백보다 바닥에 져버린 꽃에 더 혹한다. 부산 동백섬과 여수 오동도는 동백꽃으로 유명했지만 이젠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워낙 쟁쟁한 랜드마크가 많기 때문이다. 제주도 동백꽃 명소는 크게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서귀포 남원읍 위미리 동백수목원, 그리고 서귀포시 안덕면 카멜리아힐으로 정리된다. 동백꽃은 겨울과 봄에 걸쳐져 있다. 보리는 겨울과 봄을 품고 이른 여름까지 전개된다. 제주 동백꽃은 매년 11월부터 전개되어 육지에선 겨울이 한창인 2월에 동백꽃 퍼레이드를 마감하고 육지 동백꽃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충남 서천 마량포구 동백정, 통영 욕지도와 지심도…. 특히 570여 개의 통영 섬 가운데 남동쪽의 외딴섬 장사도 '해상공원 카멜리아'에는 동백나무가 10만 그루 퍼져 있다. 1월부터 애기동백과 참동백이 차례로 꽃을 피우는데 3월 중·하순이 절정. 거제도의 이름난 외도 보타니아처럼 섬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꾸몄다. ◆봄맞이 음식봄맞이 음식에도 계열이 있다. 2000년을 변곡점으로 국내에도 식도락 미식가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봄맞이 음식 1호는 뭘까, 단연 통영을 축으로 확산된 도다리쑥국이다. 2월 중순이면 한산도·소매물도·욕지도, 추봉도 등 통영 섬 곳곳에서 쑥이 고개를 내민다. 그게 20년 전부터 도다리를 만나 상춘객의 맘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런데 봄 도다리(문치가자미)가 최고라는 건 매스컴 보도용 멘트인 것 같다. 이맘때 잡힌 도다리는 산란 직후여서 살도 적고 식감도 무른 편이다. 남해안의 봄맞이 음식이라면 서남해안권, 그러니까 목포·나주권은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홍어 애에 된장을 풀고 거기에 보리싹을 넣어 끓인 '보리싹홍어애국'을 추천한다.이맘때 잡히는 어종이면 굳이 도다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 미더덕과 멍게가 제철인데 통영 강구안에 가면 이상희 음식연구가가 운영하는 '멍개가'에서 해초가 가세한 봄맞이 멍게비빔밥을 맛볼 수 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인근에 '광어쑥국' 전문 횟집 '해림이네'도 매스컴을 타고 있다. 통영에서 도다리쑥국을 몇 번 먹어봤는데 솔직히 내 입에는 별로였다. 그러다가 통영권보다 더 괜찮은 맛을 보여주는 식당을 고령대가야시장 안에서 찾았다. 바로 '미주식당'이다. 올해는 2월10일쯤 첫 개시를 했다. 1만5천원인데 육수와 쑥, 그리고 도다리 살점이 너무나 잘 섞여 있다. 여느 식당은 솔직히 식재료가 제각각 따로 논다. 쑥을 먹는 건지 도다리를 먹는 건지, 육수를 마시는 건지 헷갈린다. 미주식당은 각 식재료가 잘 혼융돼 있다. 도다리쑥 진액을 먹는 것 같다.울릉도는 눈을 뚫고 나온 전호나물, 그 뒤를 잇는 명이나물과 부지깽이나물로 겨우내 답답했던 위장을 풀어낸다. 주당에겐 이게 봄맞이 해장국인 셈이다. 물론 울릉도와 전남 광양시 백운산 고로쇠수액도 토박이들에겐 봄맞이 음식이다. 지난주 방문했던 성주군 수륜면 성주댐 상류에 있는 '넉바우식당'의 고로쇠수액으로 요리한 닭백숙이 아직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산내향의 봄나물봄나물이 듬뿍 올려진 봄꽃 같은 한식당을 찾아봤다. 달서구 도원동 '산내향'의 봄밥상을 맛보고 왔다. 여사장 강민지씨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제철음식에 집착한다. 한때 수성구에서 홍합밥의 신지평을 넓힌 '청아람'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왜 1인분 1만원, 가성비 높은 제철 힐링밥상을 내밀었을까?33세에 처음 외식업계에 들어왔다. 서구 아리랑호텔 2층에서 3년쯤 한정식을 차렸다. 어머니는 종부의 삶을 살았다. 내림음식이 어떻게 완성되는 가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살림의 연장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싶었다. 1천원짜리 김밥 전문 '돌풍김밥'에 이어 '김밥 25시'를 차렸다. 여기서 지역에서 처음으로 '멸치땡초김밥'을 출시한다. 마요네즈소스 같은 인공감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기본기는 갖춰진 것 같았는데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냥 식당 주인의 범주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2년 정도 짬을 낸다. 대구한의대 김미림 교수를 만나 약선요리, 그리고 묵신 스님을 통해 사찰 음식를 배웠다. 너무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음식은 대중성이 떨어졌다. 대중적인 맛을 위해 서울의 요리 고수한테 원포인트 레슨도 받았다. 몸에 좋고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는 제철 힐링푸드. 그게 자기가 갈 길이라 다짐한다.14년 전 수성구 범어네거리 근처에서 청아람 한식당을 차린다. 홍합밥에 도전했다. 울릉도에서 우연찮게 만난 홍합밥에 매료됐다. 한 펜션 주인 모친한테 홍합밥 레시피를 전수했다. 당시 계산동 서영, 범어동 울릉도 성인봉, 동성로 왕건이집 등이 홍합밥 3인방으로 유명했다. 홍합밥은 너무 담백해 두끼를 먹으면 금세 질려버렸다. 이를 보완해야만 했다. 흑산도에 있는 지인을 통해 마른 톳을 공수받았다. 홍합에 톳을 섞어봤다. 느끼한 맛이 많이 제거됐다. 밥의 질감도 중요했다. 시행착오 끝에 찹쌀과 멥쌀을 3 대 7 비율로 섞으니 원하던 식감이 형성됐다.홍합밥에 이어 '톳전복밥'도 파생 메뉴로 올렸다. 조미료는 멀리했다. 현미찹쌀가루를 천연 향신료로 활용했다. 청아람은 홍합밥의 강자로 자릴 잡았다. 하지만 몸이 말이 아니었다. 갑상선암에 걸린 것이다. 투병하는 과정에 식당도 지쳤다. 일상에서 한발 물러났다. 항암치료 직후 다시 일어선다. 식당주 대상 요리교실, 그리고 반찬 전문점 '더 찬'을 병행한다. 그동안 내공을 이용해 바지락쑥국 등 무려 200여 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지난해 풍광 빼어난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옆에 계절밥상 힐링푸드레스토랑 '산내향'을 오픈한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한식이 뭔가를 아는 중년 단골이 늘어났다. 가성비 탓이다.밥상을 받았다. 부지깽이밥과 톳밥이 꽃처럼 피어 있다. 울릉도 취나물, 숙주나물, 봄동, 세발나물, 달래, 방풍나물, 냉이, 마라황과(오이로 만든 중식 짜샤이 스타일의 짠지), 백김치, 우엉, 멸치볶음, 가지구이, 부지깽이나물과 톳까지. 청아람의 홍합밥 내공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렇게 차리고도 1만원. 전복과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정식은 1만3천원. 매주 월요일 휴무. 달서구 도원동 수밭동길 14. (053)635-5838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봄맞이 음식 1호는 뭘까. 단연 통영을 축으로 확산 된 도다리쑥국이다. 2월 중순이면 한산도·소매물도·욕지도·추봉도 등 통영 섬 곳곳에서 해쑥이 고개를 내민다. 그게 20년 전부터 도다리를 만나 상춘객의 맘을 설레게 하고 있다. 통영 강구안의 한 식당에서 만난 도다리쑥국.달서구 도원동 산내향의 제철 나물이 합세한 봄밥상 .겨울과 봄을 동시에 만끽하는 포항 호미곶 대보면 포항초(포항 시금치).올해 2월초 첫 하우스 미나리를 출하하기 시작한 달성군 가창면 정대미나리 작목반의 김정복씨(75).보리싹홍어애국
2022.03.25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부산 자갈치시장 연탄 별미 (하) 양곱창
대구만큼이나 내장(소양·막창·곱창류) 요리에 사족을 못 쓰는 고장이 부산이다. 대구는 곱창·대창·소양이 따로 놀지만 부산은 한 세트로 붙어 다닌다. 그래서 붙여진 '양곱창'. 소의 첫 번째 위장인 '양'과 작은 창자인 '곱창'을 붙여 양곱창이라 한다. 소의 위는 네 개인데 제1 위는 양, 제2 위는 벌집, 제3 위는 천엽, 제4 위는 홍창(막창). 특히 소의 막창은 위의 일부분인데 이는 대창과 소창(곱창)과 헷갈리게 만든다. 미식가는 네 장르로 구역 지어진 소양이 갈빗살, 안심, 등심보다 더 열광한다. 특유의 쫄깃한 식감 때문이다. 특히 제1 위의 앞쪽 두툼한 부위를 '양깃머리'라 한다. 구워놓으면 꼭 조개관자 구이 맛이다. 이밖에 삶아 놓은 갑오징어 같은 질감인 오드레기(대동맥)와 차돌박이(양지머리뼈의 한복판에 붙은 기름진 고기)까지 가세하면 별미 중 별미가 완성될 듯하다.아무튼 부산 남포동은 양곱창 총사령부다. 자갈치농협 뒷골목을 시작으로 자갈치로 59번길 350여m 세 블록에 걸친 골목 50여 업소가 집단을 이루며 개별로 영업하는 '코너'까지 합치면 250~300곳. 양곱창 '단일 품목' 식당가로는 전국 최고다. 지금은 서면, 문현동, 해운대, 대연동 등 부산 전역을 찍고 서울 등으로도 진출했다. 하지만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은 이 메뉴가 무척 낯설기만 하다. 대신 부산·경남권, 인천, 울산 등 광역시급 도시인에겐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술안주로 공유되고 있다. 대구의 경우 수성구 '봉희가든' '봉이돌양곱창', 2001년 범어네거리로 입성한 '부산양곱창' 들안길 '양곱화' 등이 세몰이를 하고 있다.◆원양 선원의 유토피아자갈치 뒷골목은 한때 '마도로스 골목'으로 유명하다. 원양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공간이었다. 맥줏집과 작부 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만선의 배에서 내릴 때 선원들의 씀씀이는 대기업 임원 못지 않았다. 그 돈이 온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긴 쉽지 않았다. 다들 양곱창 골목에 있던 유흥가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래서 '원양어선 호주머니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란 말이 생겨났다. 망망대해를 돌아들던 선원들은 생선요리에 질려 있다. 양곱창은 싸고 맛있는 단백질. 하선하기 무섭게 먼저 이곳에서 짠물에 절은 목젖을 씻었다. 바다로 떠날 때도 바다에서 육지로 돌아올 때도 어김없이 양곱창에 젖어 들었다. 세상 시름을 잊게 해준 위안과 위로의 안주였던 것이다. 선원들은 물론 인근 관공서 공무원들도 단골이었다. 대구 사내들이 소주 한 잔에 뭉티기 한 점으로 활력소를 찾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쩜 부산의 '아지매 기질', 대구의 '단디 정신'도 일반 음식보다 어둑한 뒷골목에서 낚아 올리는 안주에서 기인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인 기생관광1990년대 들어 엔고(円高) 시대가 무르익자 난데없이 일본인들의 부산 방문이 잦아진다. 이른바 '기생관광'이라는 음성적 관광이 맞물려 돌아가던 시절이다. 이때 일본인들이 빠지지 않고 들르던 곳 또한 양곱창집이었다. 그 음식은 일본에서는 '호르몬야키'라 한다. 당시 일본 남성들에게는 '정력식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동행한 부산의 대표적 음식칼럼니스트인 최원준 시인이 부연 설명을 해준다. "이 속설의 시작은 일본 관동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굶어 죽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통통하니 살이 올랐다는 목격담이 돌았다. 전후 일본 식품학자들이 연구해보니 당시 일본인은 먹지 않았던 양곱창에 우수한 영양 성분이 다양하게 함유돼 있었고 그래서 양곱창은 재일동포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 된다."자갈치 뒷골목 일대 250~300곳 영업양곱창 단일품목 식당가로 전국 최고육지 내린 원양 선원들 위로의 안주70년 세월 터줏대감 장사 백화양곱창양 씹히는 맛·곱창 기름맛 조화 '환상'마늘양념 소스 버무려 굽는 소금구이 고추장 버무려 돌판 올리는 양념구이먹고 남은 양곱창에 밥·양파 넣고 볶아그 뒤 일본의 규슈와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일본인도 양곱창 요리를 보양식으로 널리 먹는다. 그런데 일본에 비해 부산 현지 양곱창은 가성비가 너무 좋았다. 자연 일본인의 필수 관광코스가 될 수밖에. 그런데 1980년대 전후 수산업 경기가 안 좋아졌고 이 골목은 양곱창집으로 하나둘 업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른다. 2000년대 접어 들어 부산국제영화축제, 먹방과 쿡방 덕분에 대중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양곱창골목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남녀노소 즐겨 먹는 부산의 대표 음식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남구 문현동의 곱창 골목에 있는 '칠성식당'은 2001년 영화 '친구' 때 알려져 핫플레이스가 된다.◆터줏대감 백화양곱창을 찾아서가장 오래된 곳은 1952년 영업을 시작한 백화양곱창. 주인이 여럿이 있다. 흡사 스탠드바처럼 모두 11개 업소가 코너 장사를 하고 있다. 여긴 손님을 모시는 원칙이 있다. 호객 행위가 비효율적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일단 단골은 터치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테이블에 앉게 해준다. 하지만 일반 손님은 안내인이 순서대로 가게를 배정해 준다.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김초달 할매. 그는 자갈치아지매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자 이 골목을 찾는 시름 많은 남정네들에겐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김 할매의 가업을 혈족들이 잇는다. 셋째딸인 이구자, 그 큰딸 김시은은 이후 1호 사장, 작은딸 김예숙은 6호 사장, 1호 사장의 넷째아들 최정은은 현재 체인점인 '이구자양곱창'을 꾸려가고, 6호 사장 아들 김범직은 서울에서 태극음식 전문점 셰프를 하다가 귀향해 코너를 도와주고 있다. 자갈치가 알아주는 백화양곱창 패밀리인 셈. 바로 옆 대광곱창 등 주변 다른 가게도 40~50년은 족히 됐다. 오후 4시쯤 6호 가게에 첫 손님으로 앉았다. 양, 곱창, 대창, 염통이 4인 1조로 굽힌다. 불판에서 초벌, 석쇠로 옮겨져 재벌이 된다. 대구 뭉티기 양념장 같은 마늘에 참기름을 두른 소스가 맛의 중심을 잡아준다. 마늘 향과 곱창의 기름내는 환상의 복식조. 양의 가장 두꺼운 부위인 양깃머리는 관자보다 더 쫄깃했다. 대창의 곱은 참기름보다 더 구수하고…. ◆중독성 강한 디저트~ 볶음밥현장에 오기 전 기자는 백화가 단일 가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럿이 모여 있어 무척 놀랐다. 가게 전체가 기름 범벅이 된 듯하다. 몸에 나쁜 기름기라 하지만 여기 오면 다들 기름 맛에 환장한다. 그 맛을 위해 가스가 아니라 연탄불을 사용한다. 양과 곱창, 그리고 염통이 세트로 움직인다. 양은 씹히는 맛, 곱창은 기름 맛, 그리고 염통은 기름 범벅된 혓바닥을 맑게 중화시켜준다. 곱창은 시각적 효과와 풍미를 위해 장만하는 과정에 뒤집힌다. 일반인들은 그걸 알 리 없다. 원래 꽈리처럼 곱창에 매달린 지방 부위가 곱창의 겉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업자들이 최강의 맛을 위해 안팎을 바꿔놓은 것이다.여긴 정해진 거리가 없다. 손님끼리 엉덩이가 맞닿는 걸 당연시한다. 환풍기가 쉴 새 없이 돌지만 자욱한 연기는 빠질 줄 모른다.수십 년 기름기가 식탁과 테이블, 천장 등에 가득 엉겨 붙어 있다. 깔끔 떠는 사람들은 기름기 줄줄 흘러내리는 실내 공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뭐랄까, 경상도 사람이 처음 마주하는 삭힌 홍어 맛과 비슷한 '난감함'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 길들여지면 기름 부위를 밥처럼 마구 퍼먹을 것이다. 연탄불에 달궈진 기름 덩어리는 그래서 더 '치명적 유혹'이다.소금구이는 마늘양념 소스에 버무려 석쇠에 굽고, 양념구이는 고추장 양념을 해 돌판에 굽는다. 양곱창과 밥, 양파 등을 넣고 볶아주면 볶음밥이 된다. 먹고 남은 양곱창은 일본 요리 타다키처럼 잘게 다져 볶음밥으로 먹었다. 소금구이의 고기가 남으면 볶음밥으로 먹고, 양념구이는 국물에 우동사리를 넣어 비벼 먹었다. 지금은 남은 양곱창을 그대로 볶아 김에 싸 먹는 것을 별미로 친다.내가 최 시인을 바라 보며 '양곱창 엄지척~' 하니 그는 '대구 뭉티기 최고' 라고 화답한다. 밤의 그 골목이 곱창 같았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도움말=음식칼럼니스트 최원준 시인자갈치시장 뒷골목에 자리한 양곱창 골목의 터줏대감인 백화양곱창, 그 6호집의 식탁 정경. 초벌(사진 오른쪽)과 재벌을 통해 먹도록 해준다. 소양·곱창·염통이 한 세트로 불판에 올라간다.자갈치 뒷골목은 한때 '마도로스 골목'으로 유명하다. 원양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공간이었다. 맥줏집과 작부 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만선의 배에서 내릴 때 선원들의 씀씀이는 대기업 임원 못지 않았다.기름(지방)의 맛이 어떤 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불꽃 속 곱창.남은 양곱창을 그대로 볶아 김에 싸 먹는 것을 별미로 친다.
2022.03.11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2)
제사상이 그렇듯 나물 가짓수도 반드시 홀수여야 하고 한번 무치고 나면 절대로 다시 무치지 않았으며 간장·깨소금·참기름 외에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마른 찬으로는 민물고기나 조기 등을 약간 말려서 쪄냈다. 탕국은 생선 대가리 남은 것을 전유어(부침개)와 함께 끓여서 냈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은 내놓지 않는 데 비해 헛제삿밥에는 배추김치라든가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이 올려진다. 헛제삿밥은 차려 놓은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놋대접에 삼채 나물과 탕국,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비벼 조상과 자손이 함께하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의 의미가 있다.잔칫날·명절·제사때 돔배기 재료찜으로 만들거나 산적으로 요리모양 따라 '바대산적' '써래산적'조리법과 맛 차별화 돔배기탕국문어숙회·청어찜·닭찜·김치 세팅차세대 힐링푸드 전도사 김영은씨지역정서 맞는 대구 헛제삿밥 재현탕국·돔배기·간장이 맛 좌우 핵심 추가 메뉴 개발 일반에 공개키로 ◆복잡다단한 제상 차리기탕은 오늘날의 찌개라고 할 수 있다. 소고기·생선·닭고기 중 한 가지만을 택하여 조리한다. 양념에 파, 마늘, 고추 등을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탕의 수를 1, 3, 5의 홀수로 하였고 탕의 재료로 고기, 생선, 닭 등을 사용하였다. 3탕일 경우는 육탕·어탕·계탕을 준비하였는데 모두 건더기만 탕기에 담았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국물과 같이 올리는 일도 있으므로 편리한 대로 한다.헛제삿밥은 국물 그대로 올리는데, 육·어·소를 함께 넣어 한 그릇에 끓이기도 한다. 기름에 튀기거나 부친 것으로 육전, 어전, 소전(두부전) 등 세 종류를 준비한다. 옛날에는 적과 함께 계산하여 그릇 수를 홀수로 만들고자 전은 반드시 짝수로 만들었다. 전과 적을 합하여 홀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재료가 고기, 생선 등 '천산(天産)'이기 때문에 양수인 홀수에 맞춘 것이다. 육전은 소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둥글게 만들어 계란을 묻혀 기름에 부친다. 어전은 생선을 저며 계란에 담가 기름에 부친다. 소전은 두부를 직사각형으로 썰어 번철에 지진다.적은 구이로서 제수 중 특별식에 속한다. 옛날에는 육적·어적·계적, 이렇게 세 적을 세 번의 술잔을 올릴 때 바꾸어 구워서 올렸으나 오늘날에는 한 가지만 준비하도록 하고 올리는 것도 처음 진수 때 함께하고 잔을 올릴 때마다 따로 하지 않는다. 육적은 소고기를 2~3등분 하여 길게 썰어 소금구이하듯 익혀 사각 접시에 담는다. 어적은 생선 2~3마리를 고춧가루를 쓰지 않고 익혀서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이때 머리는 동쪽으로 하고 배는 신위 쪽으로 가게 담는다. 지방에 따라 반대로 하기도 한다. 계적은 닭의 머리·다리·내장을 제거하고 구운 것으로 등이 위로 가게 하여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적을 올릴 때는 '적염(炙鹽)'이라 하여 찍어 먹을 소금을 접시나 종지에 담아 한 그릇만 준비한다.숙채는 익은 채소. 한 접시에 고사리, 도라지, 배추 나물 등 3색 나물을 곁들여 담는다. 또는 각기 한 접시씩 담기도 한다. 추석 때는 배추·박·오이·호박도 푸른색 나물로 쓰는데 역시 마늘·고춧가루는 양념으로 쓰지 않는다. 김치(침채)는 희게 담은 나박김치를 보시기에 담아서 쓴다. 고춧가루는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간장(청장)은 맑은 간장을 놋 종지에 담는다. 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대추·밤·감·배였으므로 이것들을 꼭 준비하고 그밖에 계절에 따라 사과, 수박, 참외, 석류, 귤 등의 과일을 1~2종 준비하면 충분하다. 바나나, 파인애플, 키위 등 생소한 수입 과일은 일절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옛날에는 과일이 '지산(地産)'이라 하여 그릇 수를 음수인 짝수로 하였다. ◆대구 헛제삿밥의 차림헛제삿밥의 메뉴는 대구경북 지방의 제수 음식을 기본으로 한다. 기본적인 상차림으로 3적(육적, 어적, 소적(두부적)), 봉적(닭찜)과 3탕(명태, 건홍합, 피문어), 3색 나물(숙주, 고사리, 시금치), 문어숙회, 김치, 상어 돔배기, 밥, 국 등이 올라간다.구한말까지 대구 헛제삿밥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는 대구경북의 제례 음식문화를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구의 헛제삿밥에는 조기가 올라가고, 청어 철에는 청어가 올라가지만 반드시 올리는 게 '상어 돔배기'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나 잔칫날, 그리고 명절과 제사 때에는 꼭 돔배기를 상에 올린다. 특히 대구의 제사상에 올리는 돔배기를 만드는 상어는 '양지'라 해서 귀상어를 제일로 친다. 돔배기를 쪄 올리기도 하지만 보통 돔배기 산적으로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돔배기를 꼬치에 가지런히 꿰어 식용유를 두른 팬에 굽는다.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먹어온 익숙한 맛으로 타 지역에선 맛보기 어려운 '솔 푸드(soul food)'다.돔배기 산적도 모양에 따라 '바대산적'과 '써래산적'이 있다. 아이 손바닥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로 형편에 따라 썬 돔배기를 세 개에서 다섯 개씩 꼬챙이에 나란히 꿴 '바대산적'은 일반적인 제사상에 올린다. 산적으로 쓰기에 애매한 뱃살은 수육으로 하거나 전을 부치기도 한다. 써래산적은 조상의 묘를 찾아 가 지내는 묘제 때 올린다. 써래산적은 폭 5㎝, 길이 25㎝ 정도로 길게 썬 돔배기를 각각 하나씩 꼬챙이에 꿴 것이다. 골동반에는 이 써래산적을 반드시 올린다. 헛제삿밥이나 골동반 모두 음료로는 감주(甘酒), 즉 식혜를 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게 '돔배기탕국'이다. 이건 조리법과 맛이 타 지역과 차별화되어 있다. 돔배기탕국은 우선 돔배기 뼈를 푹 끓여 국물을 낸 다음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다가 깍둑 썰기한 무를 넣고 미리 준비한 국물을 부어 끓이다가 '두치(돔배기 껍질)'와 두부를 넣고 다시 끓여 낸다. 정리하자면 대구 헛제삿밥의 기본 상차림은 밥과 돔배기탕국, 돔배기찜, 문어숙회, 조기나 청어찜, 바대산적, 써래산적, 봉적(닭찜)·소적(두부적), 삼색나물, 김치 등으로 세팅하면 된다.◆대구 헛제삿밥 재현 아직 영남 지역은 유학의 후습이 두터워 고인을 기리는 기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상당하다. 제사 후 음복을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다들 엄지 척 하면서 일반 식당에 가선 이런 맛을 절대 접할 수 없다고 탄성을 자아낸다. 그런데 여느 한식당에서는 왜 헛제삿밥을 팔지 않을까? 제사음식이란 선입견 때문일까? 대구와 달리 안동에서는 여전히 헛제삿밥 전문점이 힘을 받는다. 안동국수·간고등어·안동식혜가 헛제삿밥과 함께 세트로 움직인다. 안동이 단연 헛제삿밥 총사령부 같다.대구에서도 제대로 된 헛제삿밥 시대를 열어보자.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있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 그로부터 대구 헛제삿밥 레시피를 전수 중인 차세대 힐링푸드 전도사인 김영은(37)씨다. 그녀는 성균관대 생활과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푸드블로거(양생수까락)로 활동 중이다. 한식·양식·중식·일식 조리·제과제빵기능사, 국제약선사, 한국차감정사 등 팔색조 셰프 같다. 그녀는 몸과 맘이 동시에 망가지는 코로나 시국을 딛고 자신만의 '힐링푸드촌'을 짓는 게 꿈이다. 둘은 몇 달에 걸쳐 지역 정서에 맞는 대구식 헛제삿밥을 재현했다. 지난달 21일 남구 이천동의 한 너와집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진 촬영 겸 시식을 위해 미리 요리해 온 음식을 법식에 맞게 상에 옮겨 담았다. 써래·바대 돔배기 산적, 조기, 삼색 나물(고사리, 시금치, 무), 두부전, 소고기 산적, 탕국, 백김치, 식혜, 그리고 복판에 지렁(집간장)을 담아 놓았다.김 소장이 김씨에게 수저 놓는 법을 가르쳐준다. "일반 식당처럼 수저를 놓으면 곤란해요. 앉은 사람의 오른쪽 귀퉁이에 가로 방향으로 그것도 가장자리에서 2.5인치 정도 밖으로 나오도록 세팅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자 김씨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탕국과 돔배기, 그리고 간장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밥을 비며 먹을 때도 '고추장, 그리고 계란 프라이는 맛을 망치니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안동은 간고등어이지만 대구 정서는 아직 조기라고 했다. 둘은 헛제삿밥 전문점 오픈을 위한 음식값, 추가 메뉴, 곁들임 반찬 등을 개발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더불어 대구시도 헛제삿밥에 관심을 많이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대구 헛제삿밥~대구 골동반. 산해진미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과연 진검 같은 이 힐링푸드가 얼마나 먹힐지 귀추가 자못 궁금해진다.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오른쪽)식생활문화연구소장과 요리연구가 김영은씨가 대구식 헛제삿밥 재현을 위해 남구 이천동 한 너와집에서 재현된 상을 앞에 두고 헛제삿밥의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진주시 금산면에 있는 진주 유일의 헛제삿밥 한 상 차림. 여긴 안동과 달리 돔배기·고등어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2022.03.04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1)
헛제삿밥(虛祭飯)? 이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제삿밥은 알겠는데, '헛'이라니! 헛제삿밥은 한식 중 아주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제사 때 먹는 음복용 음식이 시중 음식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상업화된 곳은 안동과 진주 두 곳뿐이다. 인프라로 본다면 안동이 단연 리더 격이다. 현재 까치구멍집, 맛 50년 헛제삿밥, 예미정(종가비빔밥), 하회식당, 이화식당, 청기와식당 등 7~8집이 있다. 가장 성공적인 곳은 까치구멍집이다. 대구의 경우 20여 년 전 팔공산 자락과 10여 년 전 대구수목원 근처 '제비원'이란 두 곳에서 헛제삿밥을 팔았지만 모두 문을 닫았다. 현재 옛 대구MBC 근처에 있는 한식당 대연정에서 파는 헛제삿밥은 원형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50여 년 역사의 개정식당도 언뜻 전주비빔밥과 헛제삿밥을 조금 융복합한 것 같다. 진주는 광복 이후 서너 곳이 영업을 했는데 60년대에 자취를 감춘다. 현재 금산면 갈전리 '진주헛제삿밥'이 유일하다. 초대 여사장 이명덕(75)씨는 합천 출신인 친정 어머니(이달순)가 음식을 팔 때 잠시 헛제삿밥(1982년 '강나루 헛제사밥' 오픈)을 취급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00년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의 권유로 헛제삿밥 전문점 시대를 연다. 이 무렵 안동시는 안동 헛제삿밥을 진주비빔밥처럼, 그리고 진주시청은 헛제삿밥과 냉면을 특화한다. 김 소장은 당시 부산방송(PBS)을 통해 진주 헛제삿밥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킨다. 이명덕은 이후 <사>대한명인협회로부터 '진주 헛제삿밥 명인'으로 선정된다. 현재 이명덕은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와 함께 일한다.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 헛제삿밥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비늘이 없는 돔배기와 간고등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여긴 조기, 민어, 돔 등이 메인 생선이다. 안동에서 즐겨 보이는 배추전과 명태전도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안동권에서는 나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지만 진주 헛제삿밥에선 나물에 칼질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보통 비빔밥은 젓가락을 사용해 비비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진주 헛제삿밥은 숟가락으로 비빌 것을 주문한다. 진주 헛제삿밥은 6가지 모둠전(육전, 어전, 버섯전, 부추전, 산적 등), 그리고 마지막엔 생선찌개 같은 일명 '진주식 거지탕'이 특식으로 나온다. 조기 등 말려 놓은 갖은 생선을 넣고 신선로처럼 푹 끓여낸 것이다. 헛제삿밥은 경상도 안동과 대구 그리고 경남 진주에만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영남 성리학(사림파)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태두로 한 영남 사림파의 기제사 문화 때문에 태어난다. 경상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산악이 많고 평지가 적어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중심이다. 지주 계급이 적었지만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인 1751년(영조 27)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쓴 조선 역사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에는 '조정의 인재 반이 영남인'이라고 적을 정도다. 영남 사림파는 16세기 이후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했다. 이들이 관직에서 떠나 낙향 후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 과정에서 탄생된 음식이 바로 헛제삿밥이다. 양반들이 춘궁기에 드러내놓고 쌀밥을 먹기가 미안스러워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가짜로 제사를 지낸 후 제사 음식을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천민들이 한이 맺혀 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삿밥을 만들어 먹은 데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제사 지낼 때 차려내는 음식을 '제수' 또는 '제찬'이라고도 한다. 기본 제수는 메(기제사 때는 밥,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 삼탕(소, 어, 육), 삼적(소, 어, 육), 숙채(시금치, 고사리, 도라지의 삼색 나물), 침채(동치미), 청장(간장), 포(북어, 건대구, 육포 등), 갱(국), 유과(약과, 흰색 산자, 검은깨 강정), 과실(대추, 밤, 감, 배), 제주(청주), 경수(숭늉) 등이다. 지체가 높거나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삼탕·삼적·삼채를 더해 오탕·오적·오채를 올리기도 하고 지방·학파·가문에 따라 제수가 달라지기도 한다.헛제삿밥도 위 제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차려내는데, 주재료는 나물·탕국·생선 자반 중심이다. 제사를 지낼 때 향불을 피워 향이 나물에 배어들게 해 제사 음식의 분위기를 더욱 돋운다. 그래서 낮에는 절대로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낮에 무친 나물은 손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식 헛제삿밥 같이 드실래요? (2)에서 계속됩니다.헛제삿밥은 안동·진주 등 경상도에만 몰려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영남 성리학(사림파)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태두로 한 영남 사림파의 기제사 문화 때문에 태어난다. 재현된 대구 헛제삿밥.탕국.갖은 헛제삿밥 재료로 비벼진 대구 골동반. 이번에는 특이하게 소고기를 대구 보푸라기처럼 가늘게 갈아 풍미 재료로 올려놓았다.삼색 나물(무, 시금치, 고사리).
[이춘호 전문기자의 푸드 블로그] 부산 자갈치시장 연탄 별미 (상)…자갈치 뒷골목 해안길 점포마다 내뿜는 꼼장어 구이 불내음
연탄꼼장어 골목오랜 세월 식문화가 반죽한 감성 풍광수족관서 꺼내 껍질 벗긴 후 석쇠 초벌화근내로 피어오르는 육즙, 침샘 자극양념과 로스구이 반반 불판으로 옮겨져소주 한잔 곁든 고소한 맛에 폭풍 흡입내게 부산은 '제2의 고향' 이다. 젊은 시절, 세상의 끝이 잘 보이지 않으면 훌쩍 대구역으로 가서 부산행 완행열차를 탔다.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과 같은 느릿한 템포로 부산역 근처 선창에 우두커니 앉아 종일 선창의 비린내의 지문을 화두처럼 품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는 부산의 식문화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0년이 지나자 조금씩 부산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임인년 봄기운이 스멀거렸던 지난 주말, 문득 부산 자갈치시장의 식문화를 탐구하고 싶어 동대구역으로 가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부산의 식문화는 대구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 '국수광'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돼지국밥의 메카, 또한 '연탄이 키워낸 별미'로 불리는 꼼장어와 양곱창 거리가 대구 칠성시장과 북성로 연탄석쇠돼지불고기와 안지랑시장 양념곱창거리와 비슷한 포스를 유지하고 있다. 부산경남권 음식연구가로 유명한 푸드칼럼니스트 최원준 시인을 불러내 밤이 이슥하도록 자갈치시장을 돌며 두 컷의 연탄불을 베이스로 한 별미기행을 챙겼다. 꼼장어와 양곱창.◆양파 속 같은 자갈치시장부산보다 더 유명한 건 자갈치시장. 그 시장보다 더 유명한 랜드마크는 '억척 인생'의 대명사로 불리는 '자갈치 아지매'. 대구 자갈마당처럼 유달리 자갈이 많았던 자갈치시장. 10개 이상의 존이 군웅할거하고 있다. 빌딩형 시장, 점포형 시장, 포장마차형 시장, 좌판 난전 등이 뒤엉켜 있다. 떼어내 분류할 수 없는 해묵은 실뭉치 같다. 보통 자갈치시장이라면 건물 내에 상인이 들어가 있는 빌딩형 시장을 지칭한다. 종합수산물센터 구실을 하는 신동아시장과 갈매기 비상을 형상화한 통유리창 건물에 들어선 수산시장이 센터라고 할수 있다. 이를 축으로 남항 좌우로 긴 구역이 도열한다. 영도다리 옆 점바치 골목과 맞물린 남포동 건어물종합상가, 온갖 회를 먹을 수 있는 빌딩형 신동아시장 인근 해산물 난전 구역, 그 옆 좁다란 수백미터 해안길 좌우로 200~300개 간이 점포가 도열한 곳이 바로 '연탄꼼장어골목'이다. 바로 옆 블록 신천지상가아파트 골목에 형성된 양곱창골목도 얼추 70여 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과 맞물려 해산물과 채소류·선어 등을 함께 파는 해안시장, 충무로 새벽시장, 그 마지막 지점에 국내에서 가장 많이 고등어를 위판하는 부산공동어시장이 연결돼 있다. 그 시장통로는 칙칙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오래 청소하지 않은 연통 내부 같다. 왕창 삭아 내린 기름 범벅의 중식당 환풍기 몰골이다. 그렇다고 그건 '흉터'가 아니다. 일종의 부산만의 추억이다. 물성이 아니라 '감성'인 탓이다. 시간이 키워낸 풍광이 아니라 부산만의 식문화가 반죽해낸 자갈치만의 '울림' 아닐까. 우중충하고 비위생적이고 북적대고 소란스러우니 더 반듯하고 현대풍으로 깔끔하게 정비한다면? 왠지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 같다. ◆송림식당에서 만난 꼼장어오전 11시30분쯤 1세대 자갈치아지매가 터전을 일군 '송림식당'을 찾았다. 건장한 청년 두 명만 앉아도 꽉 찰 것 같은 포장마차 스타일의 점포다. 남항 바로 옆에 몰려 있는 꼼장어집, 대다수 이 점포의 반은 중구청, 나머지는 항만청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1년에 30만원 정도 임차료를 낸다. 여기는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생계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점령(?)한 아지매의 생때 같은 공간이다. 무허가, 무면허 공간, 하지만 몰아내지 못한다. 천막 너머 남항 상공을 나는 갈매기, 정박 중인 배가 보인다. 투박한 목로의자의 발판은 뼈만 앙상한 것 같다. 숱한 발길이 부피의 반을 앗아가 버렸다. 벌겋게 달아 오른 연탄, 그 위에 놓인 불판. 너무 오래 사용해 구멍이 나버렸다. 연탄 불길을 다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올해 68세의 여주인. 그는 39년 경력의 2대 사장이다. 1대는 꼼장어에 일생을 바친 어머니다. 처음에는 '할매집'이란 상호를 가졌다. 현재 삼성프라자 자리에 있던 동명극장 골목에서 난전을 꾸려갔다. 무허가 점포라 늘 단속반을 피해 다녔다.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 순시 때 이 장터 상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준 것이다. 그때부터 쫓기지 않으며 장사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1인분 1천500원선. 그런데 이젠 꼼장어가 금장어. 4만원(소)·5만원(중)·6만원(대)으로 가격이 수십 배 폭등해 버렸다. 그 시절에는 소주 반 병, 잔술, 담배도 낱개로 팔렸다.최 시인이 부산 꼼장어 연대기를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부산 꼼장어의 1번지는 미역과 멸치 등으로 유명한 기장이었다. 기장으로 모인 꼼장어는 부산 도심 깊숙하게 스며든 동해남부선 열차가 없었다면 거대한 '부산꼼장어벨트'가 형성될 수 없었다. 거기서 잡힌 꼼장어는 동해남부선을 타고 해운대, 동래, 온천장, 부전역, 부산역전, 마지막 코스인 자갈치시장까지 번졌다. 역 주변 시장이 주요 유통경로였다. 한창 때는 부산진역~부산역~자갈치가 꼼장어루트였다. 지금은 자갈치에 집중돼 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꼼장어는 존재감이 없었다. 피혁제품을 만들기 위한 껍질만 부산물로 인기였다. 식용이 아니라 '산업용'이었다. 버린 몸통을 가져가 구이로 변주한 게 부산꼼장어 요리의 출발이다.장어는 크게 민물과 바다 스타일로 나뉜다. 그 명칭이 참 헷갈린다. 정리하자면 꼼장어는 '먹장어'로 불린다. 일본에선 민물장어를 '우나기', 갯장어는 '하모', 붕장어는 '아나고' 로 부른다.부산 꼼장어는 크게 자갈치시장과 기장을 축으로 한 '짚불스타일'이 있다. 자갈치는 양념이 주종을 이룬다. 기장 선창에서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꼼장어였다. 우연찮게 꼼장어가 짚불에 들어가면서 기장짚불꼼장어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음식은 기장지역의 보릿고개 때 즐기던 구황음식 중 하나였다.양념과 로스구이를 반반 시켜 먹었다. 반반으로 분리된 꼼장어가 저기압과 고기압으로 굽히고 있다. 일차적으로 가게 앞 화덕에서 석쇠로 초벌을 한다. 껍질을 벗겨놓았지만 꼼장어의 생명력은 놀랍다. 거의 10시간 정도 살아 있다고 한다. 연탄불과 한몸이 되면서 꼼장어의 육즙이 화근내로 피어오른다. 시장통을 오가는 행인의 침샘을 마구 강타하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폭풍흡입. 그리고 소주 한 잔. 탄력적이고 고소한 육질의 씹힘성! 엄지척! 대구에서 먹던 '냉동 꼼장어' 맛은 당분간 좀 반성을 해야만 했다. 수족관에서 바로 잡아 껍질 벗겨 불판에 올린 꼼장어 구이. 이래서 다들 '부산 꼼장어~'를 연호하는 모양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자갈치 뒷골목은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술로 목을 축이던 맥줏집과 작붓집으로 흥청대던 곳이었다. 많은 선원이 지금의 양곱창 골목에 있던 작붓집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전후 수산업 경기가 안 좋아지자 이 골목은 양곱창집으로 하나둘 업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른다. 90년대 들어 엔고(円高) 시대가 무르익자 일본인의 '기생관광' 때 빠지지 않고 들르던 곳이 양곱창집이었고 꼼장어골목은 기장에서 잡힌 꼼장어가 동해남부선 철로를 따라 도심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사진은 꼼장어골목 전경.초벌 구이 중인 꼼장어.불판에 옮겨져 굽히고 있는 양념꼼장어와 로스구이.
2022.02.18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간장(艮醬) 이야기…장맛의 '발효과학'(1)
한식의 원류를 찾아 올라가면 어김없이 만나는 게 '장(醬)'이다. 크게 된장과 간장으로 양분되고 거기서 고추장도 파생돼 나온다. 고래로 절정의 음식, 그 승부처는 '간'이다. 간장의 간, 그게 '간'을 의미할까?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무튼 '간'은 일차적으로는 소금 맛, 결국 '장맛'으로 귀결된다. 좋은 소금을 향한 선조들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궁궐에 진상해야 될 천일염은 최소 3년 이상 간수를 제거해야 된다. 간수는 뜨거운 콩물을 만나면 응고 현상을 빚어 모 두부를 만들지만 일반 음식에 스며들면 간을 망치게 된다. 그래서 음식에 유별난 애정을 가진 남도의 요리연구가는 자나 깨나 간수가 완전하게 제거된 천일염을 갈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의 염전에서 생산된 굵은 소금은 식품에 사용될 수 없는 '광물류'로 분류됐다. 그 소금이 사용될 수 있는 용처는 김장용 통배추를 숨죽일 때 뿐이었다. 그래서 식품공전상 온갖 식품 제조에는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재제염(일명 꽃소금)'만을 사용토록 했다. 일부 천일염을 왕대나무통 속에 넣고 아홉 번 구워 만들어낸 죽염의 기능성이 과대선전되고 있지만 '몸에 좋은 소금'이란 표현은 현행 식품의약품법상 위법이란 사실은 일부 관계자만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우리나라에만 발효식품이 있는건 아니다. 냉장기술이 발명되기 전 모든 민족은 실온에서 음식이 부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별별 발효 스킬을 다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스시도 한국의 가자미·명태 식해를 벤치마킹해서 탄생됐다는 게 유력한 학설이다. 유럽과 히말리야 고산족의 치즈, 돼지생육의 발효미학이 스며든 프로슈토와 하몽, 가다랑어를 베이스로 빚어낸 일본 가쓰오부시 등도 발효미학의 정점을 찍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 문화는 같은 두장(豆醬) 문화권에 있는 중국·일본과도 구별된다. 메주를 띄운 다음 된장과 간장이라는 두 종류 장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씨간장을 이용해 '겹장'의 형식을 거친다는 점이 다르다. 시중에는 조선식 간장(집간장)보다 달짝지근한 왜식 간장이 더 많이 유통된다. 이를 '양조간장'이라 하고 우리나라 간장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태호 부산대 명예교수는 "왜간장은 콩과 밀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개량식으로 메주를 만들고 철저하게 관리하여 숙성시킨다. 밀전분이 들어가기 때문에 포도당이 많이 생겨 단맛을 띤다. 이때는 고형분을 된장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메주를 우량 균주로 철저하게 분해하여 찌꺼기를 최소량으로 줄인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간장을 빼고 나머지 부분을 된장으로 먹는다. 왜식의 경우는 된장(미소 된장)과 간장을 따로 담는다. 왜식 된장은 콩과 밀가루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단맛이 난다. 일본에도 관서지방에 가면 밀을 전혀 넣지 않는 '타마리 간장'이라는 한국식 간장이 있다. 조선조 명문거유 종부의 삶은 거의 접빈객 봉제사에 집중된다. 그걸 위해 매년 제대로 된 장을 빚는데 올인했다.2017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청와대 국빈 만찬에는 '350년 된 씨간장'으로 만든 한우갈비구이가 제공됐다. 외신들은 '미국 역사보다 오래된 간장'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낯설은 이 '씨간장' 개념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장문화의 백미랄 수 있는 '겹장'의 스킬, 장의 발효과학을 우리 선조들이 멋지게 역이용했던 것이다.간장은 발효 기간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다. 2018년부터 청와대 관저의 전통 장을 담당하고 있는 고은정 한국간장협회 이사는 막 담근 새 간장은 '햇간장', 1~2년 정도 숙성시킨 간장은 '청간장', 3~4년 된 간장은 '중간장', 5년 이상 묵힌 간장은 '진간장'이라 명명한다. 진간장 중에서도 가장 맛이 좋은 것을 골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간장이 바로 '씨간장'이다. '하이브리드 펜티엄급 간장'인 셈이다. 이제 한식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간장인문학' 속으로 잠행해 보자.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간장(艮醬) 이야기…장맛의 '발효과학'(2)에서 계속됩니다.올해 18년 차 옻된장 전문가로 활동 중인 박기영 시인이 특화 중인 어육장.
[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동구 능성동 '블루마운틴'...빼곡한 송림 속 '글램핑 카페'…힐링랜드서 즐기는 문화예술은 '덤'
지난주 금요일 오후 팔공산 자락에서 처음으로 글램핑 카페의 신기원을 연 동구 능성동 '블루마운틴'을 찾았다. 글램핑은 '화려하다'는 뜻인 영단어 '글래머러스(Glamorous)'와 '캠핑(Camping)'을 혼합해 만든 신조어. 2015년부터 국내에서 붐을 일으킨다.서쪽엔 송림, 그 옆에 있는 유럽형 펜션 같은 카페가 시대를 초월해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림 안은 동굴처럼 어둑하다. 햇살이 빼곡한 송림 안으로 쉬 틈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송림 안으로 용암처럼 스며들어온 햇볕은 더욱 고혹해 보인다. 송림 곳곳에 포진한 8동의 글램핑 전용 대형 캠핑용 텐트는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너무 상업적인 글램핑장은 텐트 사이가 너무 촘촘해 답답한데 여긴 널찍한 게 너무 좋다.카페 진입로 초입에 간판이 놓여 있다. 블루 바탕에 흰색 고딕체 글씨로 꾸며진 아크릴 통이다. 꼭 '현대판 성황당'같다. 블루마운틴. 세계적 명성을 날리는 커피 브랜드 중에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있다. 그걸 염두에 둔 모양이다. ◆대구 첫 글램핑 카페 블루마운틴 '주인은 상록수'예순을 바라보는 윤갑용 대표와 인사를 나눴다. 닉네임은 '능성동의 상록수'. 허물어질 듯한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어르신을 위해 위안잔치를 벌여준다. 좁은 마을안길도 넓혔다. 능성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타향인과 안면트기를 '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그는 2년째 공산동 통장(46명) 협의회장을 맡으며 '팔공산문화역사포럼' 등을 돕고 있다.그의 지난 삶은 참 고단했다. 해태제과 하양공장 기술자에서 독립해 진량공단 근처에서 일식당을 연다. 하지만 주방장과의 갈등의 골은 깊고 신산스러웠다. 이후 수소보일러업체, 심지어 돼지농장을 위해 필리핀으로 가기도 했다. 중국에선 골프장 사업, 마지막엔 경산에서 고깃집까지. 이 와중에 모 국회의원 비서관 생활도 병행. '마당발 윤갑용 시절'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자기 것이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 우울증까지 덮친다. 700여그루 소나무향 가득한 문중 땅대구 첫 글램핑 카페로 '인생 제2막'詩낭송·국악·포크 뮤직·블루스 등 계절별 맞춤 공연·캠프파이어 축제어느 날 고개를 돌리니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고향(능성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손이었고 400년 전 파종된 파평윤씨 능성동 입향조의 피가 흐른 탓이리라. 그동안 카페 옆 송림은 동민들에겐 공동묘역으로만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는 역발상을 했다. 여기는 대구 첫 글램핑 카페, 그리고 새로운 힐링랜드!. 문중 땅은 1만3천200㎡(4천평). 거기에 조상의 묘소가 32기 흩어져 있었다. 문중회의를 통해 선영을 혁파한다. 봉제사 대상 묘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파묘. 8년 전 인생 2막의 시작을 '글램핑카페'로 결정한다. 문중 땅의 일부를 공유하게 됐다. 길이 150곒, 폭 70곒. 그 안에 7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1년간 직접 인테리어를 주도하면서 건물을 짓는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글램핑용 텐트 제작업체가 국내에는 없었다. 서울의 모 회사를 통해 주문제작을 했다. 데크도 만들고 전기패널도 깔고 TV까지 설치했다. 매일 캠프파이어 축제도 연출했다. 계절에 맞는 공연도 유치했다. 대구 로열오케스트라와도 손을 잡았고 서울 미사리 라이브 가수 박희수, 대구KBS 문화창고 녹화 때 장미여관이 공연도 했다. 지금까지 15번 정도 공연을 했다. 점차 송림은 시낭송, 국악, 포크뮤직, 블루스 등 여러 공연 장르가 넘나드는 힐링·문화·예술의 숲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최근에는 우천 시 고기를 편하게 구워 먹을 수 있게 그릴링룸, 쿠킹룸, 샤워실 등도 구비해놓았다. 그는 2016년 늦깎이로 경북대 농대를 졸업한다. '레저문화 활성화 방안'이란 학사논문도 작성한다. 내친김에 임업후계자 수업도 받았고 그 결과 대구에선 서식하기 힘든 울릉도 명물 명이나물을 송림 한 편에 식재하는 데 성공한다. 매년 3월 말 골수 단골과 명이파티도 벌인다. ◆여긴 가족경영그는 글램핑, 아내(권영수)는 브런치, 아들(원탁)은 커피, 며느리(고은미)는 커피와 빵, 딸(서경)은 베이커리에 올인한다. 원탁씨는 승부사 기질이 다분하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결정에 박수를 보내며 자신도 고향행을 결심한다. 일본 도요타 협력사에서 엔지니어로 일을 하다가 커피 로스터로 급선회. 2017년 2월 경남 양산에 '플랫컴퍼니'란 로스팅 공장을 오픈하기 전 그는 하루 서너 시간만 잠을 자며 커피의 모든 것을 독학했다. 머신을 직접 분해·결합하기도 했다. 직접 원두를 싣고 서울, 부산, 거제도, 양산, 울산 등의 카페 주인을 만나 직판 공세를 펼친다. 많을 때는 12개 카페를 찾아다녔다. 그 공력이 고스란히 지금 여기 블루마운틴에 녹아든다. 이곳 원두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종자를 갖고 파생시킨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종만 사용해 아메리카노를 빚는다. 브런치 메뉴 중 1만5천원짜리 베이컨 크림 파스타와 필라프의 맛이 인상적이다. 글램핑 이용 가격은 크기에 따라 10만(2인 기준)~15만원(6인 기준). 조식으로 모닝빵과 커피가 제공된다.글램핑 담당 주인장, 아내는 브런치 아들은 커피, 며느리·딸은 베이커리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원두만 사용베이컨 크림파스타·필라프 인기메뉴기자의 눈엔 여기가 비즈니스가 아니라 한 가족의 꿈이 자라는 드림랜드 같았다. 가족 모두 카페 옆 별채에서 산다. 손자가 태어나면 3대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살 거란다. 극도의 핵가족 시대, 많이 얻는 것 같은데 실은 많은 걸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블루마운틴에서 새로운 희망의 길을 잠시 생각해 봤다. 조만간 인근 대구와 경북의 경계에서 경계음악회를 벌여도 좋을 것 같다. 동구 팔공로 1505-1. 매주 수요일 휴무. 오전 10시 오픈. (053)853-8888 글·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그동안 15번 정도 각종 공연을 열었다. 블루마운틴은 송림을 문화와 예술이 있는 힐링숲으로 만드는 게 꿈이란다.화기애애한 캠프파이어 토크를 즐기는 가족단위 손님들.소나무 향기와 글램핑 문화가 공존하는 캠핑카페 블루마운틴 초입 전경. 소나무 700여 그루가 성성하게 캠핑장을 감싸주고 있다.설경을 품은 블루마운틴 글램핑 텐트.인기 브런치 메뉴인 베이컨크림파스타와 필라프.통유리창 너머로 겨울바람을 안은 글램핑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이곳 원두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종자를 갖고 파생시킨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종만 사용해 아메리카노를 빚는다.
2022.01.28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2)...대구 납작만두 3인방 버전→서문시장 삼각만두→송현동 잎새만두 진화
이북 지방과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역에서 많이 먹었던 만두는 지역에 따라 소와 모양이 다양하다. 평양만두가 가장 크고 개성만두가 그다음, 서울만두가 가장 작다. 서울 사람들은 원래 밀가루로 만두피를 빚는 것이 아니라 메밀가루로 만두피를 한 메밀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메밀 만두피는 밀가루 만두피와 달리 점성이 약해 조심해 다뤄야 할 정도로 솜씨가 능숙하지 않으면 만두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만둣국을 먹는데도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떠먹지 않으면 만두피가 터져 소가 밖으로 나와 국물에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는 서울 양반네들은 만두 먹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교양 정도를 알아봤다고 한다.규아상~동아만두여름철 궁중 수라상 오르는 '미만두'허균 팔도탐식기행 소개 '동아만두'대파 쪼개 소 넣는 전라도 '파만두'한편 궁중에서 여름에 즐겨 먹는 '규아상'이라는 만두가 있는데 이를 '미만두'라고도 한다.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이다. 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밀어 지름 8㎝ 크기로 둥글게 떠서 만두 껍질을 만들고 오이는 속을 남기고 껍질을 얇게 떠서 가늘게 채 썰고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꼭 짜서 살짝 볶는다. 소고기는 곱게 다져서 표고버섯 채 썬 것과 섞고 갖은 양념을 한 후 볶는다. 오이와 소고기 볶은 것을 섞고 잣은 몇 개로 쪼개 넣어 소를 만든다.만두 껍질에 소를 넣고 해삼 모양으로 주름을 많이 넣어 빚는다. 찜통에 담쟁이 잎을 깔아 만두를 넣어 쪄낸 다음 접시에 새 담쟁이 잎을 깔고 만두를 담아 초장을 곁들여낸다. 담쟁이 잎을 까는 이유는 향기가 좋으며 만두를 붙지 않게 해 한꺼번에 많이 찔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꿩만두는 서울과 충북의 향토음식으로 먼저 밀가루를 물로 반죽해 잘 치댄 후 밀대로 얇게 밀어 만두피를 만든다. 꿩의 가슴살·다리살 등은 잘게 다지고 무채, 숙주, 양파를 삶아 다져서 물기를 꼭 짠 다음 다진 고기와 섞어 파, 마늘, 소금, 후추로 간해 만두소를 만든다. 만두피에 소를 넣어 달걀을 발라가며 예쁘게 오므려 만두를 빚고 김이 오르는 찜통에 젖은 베를 깔고 20분간 쪄낸다. 찐 만두와 함께 초간장을 곁들인다. 충청도 지역에서 먹는 오색만두는 배추김치·두부·소고기·당면을 넣은 소를 각각 노란색-치자, 분홍색-지초, 갈색-도토리, 초록색-부추를 넣고 반죽한 만두피에 넣어 만든다. 만두피 색깔에 따라 다른 맛과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을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천하의 미식가인 허균의 팔도탐식 기행기랄 수 있는 '도문대작(屠門大嚼)'에 '동아만두'가 소개된다. 동아는 껍질을 벗기고 얇게 저며 썰어서 소금에 절였다가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숙주는 깨끗이 다듬어 끓는 물에 데쳐서 송송 썰고, 소고기를 곱게 채 썰어 진간장, 다진 파, 다진 마늘, 참기름, 깨소금, 후춧가루, 설탕 등을 넣고 양념해 볶는다. 달걀로 황백 지단을 부쳐 곱게 채 썰어 놓는다. 표고버섯과 석이버섯은 물에 불려서 손질한 후에 채 썰어 양념해 볶는다. 마른 행주로 동아의 물기를 닦고 한 조각씩 펴서 준비한 소를 넣고 마주 접어 송편처럼 만든 후에 녹두 녹말을 씌워 김이 오른 찜통에 찐 다음 초간장과 함께 곁들여낸다. 전라도의 '파만두'는 대파를 반으로 쪼개 가운데에 소를 넣고 밀가루를 묻힌 다음 달걀 푼 것을 입혀서 옥잠화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중국식 만두문화가 한국에 유입해 가장 독특한 형태로 자릴 잡은 게 대구 납작만두, 명동 교자, 그리고 부산 완당 등이 있다. 대구 납작만두 등장당면·부추로 간단하게 만드는 소가장 오래된 교동시장 묵자집 할매숙성 비법과 얇은피로 남다른 식감1963년 대구에서 한국만두사의 한 획을 긋는 새로운 버전의 만두가 탄생한다. 다른 지방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납작만두'다. 대구에서는 '납작만두'라고 하지 않고 '납딱만두'라 불러야 제맛이다. 납작만두는 '대구 분식의 해결사'다. 동물성 만두소 시대에서 식물성 만두소 시대를 연 기념비적 만두로 받아들여진다. 좀 더 작아지면 '대구판 라비올리'(만두처럼 생긴 이탈리아 파스타의 일종)로 홍보해도 좋을 듯 싶다. 대구발 납작만두는 둥그렇고 달걀만 한 만두를 밀쌈전병 같은 납작한 반달 모양으로 '편곡'했다. 대구 납작만두 3인방부터 찾아보자. 미성당파, 교동시장파, 남문시장파로 삼분된다. 이 셋은 한결같이 만두소에 돼지비계를 넣지 않고 당면·부추 등으로 소를 빚는다. 국내에서 가장 간단한 만두소다. 셋의 차이는 만두피의 두께. 가장 두꺼운 곳은 남문시장 안에 있는 남문 납작만두, 가장 얇은 곳은 교동시장 납작만두. 셋 중 미성당이 납작만두의 맏형격. 초창기에는 돼지기름을 사용해 지금보다 더 구수한 맛이었지만 돈지 파동을 겪으면서 지금은 식품위생법상 식용유만 사용하게 돼 있다. 납작만두도 진화했다. 서문시장 1지구 초입 계단 아래 포장마차 같은 '허둘순 삼각만두집'은 납작만두에 도전장을 내 푸드블로거 팬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반달형 대구식 납작만두를 또 한 번 '삼각형'으로 변주했다. 방송인 박철씨가 SBS 음식코너 전국 맛투어를 할 때 이 집을 전격 소개하면서 대박이 난다. 현재 근처에 삼각만두 거리가 생길 정도로 활성화됐다. 삼각만두는 달서구 송현동으로 넘어가 잎새만두로 태어난다. 서문시장에 그걸 파는 노점 주인이 있다.동아백화점이 폐점 되고 교동시장 골목도 새롭게 단장되었다. 골목 중앙을 점유하던 할매들도 점포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납작만두도 그 추억의 맛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오래 납작만두를 굽고 있는 할매는 '묵자집 할매'다. 현재 교동납작만두는 칠성시장 내 '경남식품'에서 만든 것이다. 피가 유난히 얇고 밀가루 숙성 비법 때문에 식감도 여느 곳과 다르다. 원래 서구 평리동의 한 할매가 손반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술이 칠성시장 쪽으로 건너갔다고 할매가 증언해 준다.북한 지역인 황해도와 개성에서는 보자기를 싸듯 네 귀퉁이를 접는 방식의 '편수만두'를 즐긴다. 1931년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 년기념지'에 의하면,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평안남도·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개성 사람들은 밀가루 피로 편수를 만들 수 있었다. 2008년 북한의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행한 '우리 민족료리'에서도 편수를 개성음식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편수라는 이름은 물에 삶아 건져낸 것이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밝혔다. 평안도 '굴림만두'는 평안도에서 많이 먹는데, 굴림만두는 모양이 둥글둥글해 굴림만두라고 부른다. 일반 만두소처럼 소를 만든 후 지름 2.5㎝ 정도의 완자로 만들어 달걀 물과 밀가루를 묻혀 완자처럼 먹는다. 함경도와 강원도 양강도에서 즐겨 먹는 '막가리 만두'. 막가리란 '막갈'이라고도 부르며, '감자를 거칠게 막 갈아서 만들었다'는 뜻에서 유래됐다.알쏭달쏭 만두소 빼고 밀가루 발효 시켜 만든 찐빵그믐날 밤 만들어 새해에 먹는 교자은덩이 화폐 모양 빚어 돈벌이 기원중국에 가서 만두를 달라면 찐빵을 먹게 된다. 이는 중국 용어가 잘못 전해진 탓이다. 중국에는 만두류로 만터우(饅頭)·지아오쯔(餃子)·빠오쯔(包子)·딤섬(点心)이 있다. 소가 들어가는 것과 소가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만터우는 소를 넣지 않고 밀가루만 발효시켜 만든 큰 찐빵. 빠오쯔는 고기와 채소가 들어 있는 수증기로 찐 것이다. 지아오쯔(교자)는 생만두피를 사용하고 물에 끓이거나 쪄 먹는다. 광둥성 쪽에는 지아오쯔가 다양한 딤섬 형태로 발전했다. 여기서 딤섬은 '점심'을 뜻하는 광둥어다.지아오쯔는 그믐날 밤부터 빚어 새해가 밝는 자정 12시에 먹어야 한다고 한다. 교자라는 명칭은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자시(子時)'가 된다 '교(交)'는 교자(交子)와 발음이 같은 데서 연유한다. 더 정확히는 '경세교자(更歲交子)'라고 하는데 '해가 바뀌고 자시가 된다'는 뜻이다.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하는 것을 '화면(和麵)'이라 하는데, 이것은 가족의 화목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아오쯔는 은덩이 화폐인 원보(元寶) 모양으로 빚어 길조 또는 돈벌이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교자의 모양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에는 종이돈, 설탕, 제비꽃 줄기, 땅콩, 대추와 밤 등 다양한 소를 넣는다. 일본의 만두 기원은 이렇다. 에도시대 초기 중국에 파병되었던 일본 군인 도쿠가와 미츠쿠니가 중국에서 먹던 만두가 먹고 싶어 고향에 돌아와 중국식 만두를 만든 게 일본 교자로 정착하게 된다. 정리·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충주에서 만난 감자만두.교동시장 납작만두 골목 전경. 이곳 만두피는 5대 납작만두 중 가장 얇다.서문시장 허둘순 할매표 삼각만두.서문시장 잎새만두 부부.남문시장 납작만두서문시장 삼각만두인천 중식당 거리에서 만난 탄두리(TANDOOR·북부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 걸친 지역에서 사용되는 원통형 점토 항아리 가마) 과자. 흡사 공갈빵, 월병을 연상시킨다.만두의 한 연장선상에 놓인 공갈빵.
2022.01.21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1)
만두(饅頭). 떡, 수제비, 국수, 때론 구절판 밀쌈 전병 같기도 하다. 중국에서 발흥한 만두가 일본과 한국에 상륙한 연대기는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이번 회는 한·중·일 만두 연대기의 속내를 알아본다.만두의 유래 하나. 제갈공명이 남만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수(濾水)에 이르자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사람 머리 49두를 수신(水神)에게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공명은 사람 대신 양의 고기로 소를 넣고 밀가루 반죽으로 머리 모양을 만들어 진설한다. 여기서 남만인의 머리란 의미의 '만두(蠻頭)'란 명칭이 생기고 훗날 지금의 만두로 바뀌게 된다.중국에는 만두 비슷한 게 많다. 손바닥만 한 큰 고기만두는 '교자(餃子)', 현재와 같이 조그만 것은 '천진교자'라고 한다. 철판에 올려놓고 뚜껑을 덮어 바닥은 구워지고 위는 훈제(燻製)가 된 군만두는 '전교자(煎餃子)', 기름에 튀긴 것은 군만두가 아니라 '튀김만두'다. 그리고 물만두는 '수교자(水餃子)', 찐만두는 '증교자(蒸餃子)'다. 中, 소가 있는 것은 '교자' 없는 것은 '만두'한편 교자를 우리나라에서는 '만두(饅頭)'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소가 있는 것은 교자, 만두 속이 없는 것은 만두로 구분해서 부른다. 역사상 최초의 만두 이름은 '교이(嬌耳)'다. 중국 동한 말기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이 300년간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양고기, 고추와 일부 한기를 몰아내는 약재를 솥에 넣고 잘 끓인 후에는 다시 이것들을 건져내서 잘게 자른 다음에 면으로 만든 피로 귀모양으로 싸며 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솥에 넣고 익힌 다음에 병자들에게 나눠줘 먹게 했다. 한 사람당 2개의 교이와 한 그릇의 탕을 나눠 주었는데 사람들은 이 '거한교이탕(去寒嬌耳湯)'을 먹고 나면 온몸에서 열이 나고, 혈액이 잘 순환되었으며 두 귀가 따뜻하게 바뀌었다. 동지 때부터 설날까지 먹었다. 이를 통해 장중경이 약을 나눠주고 병자를 치료해준 날을 기념한 것이다. 탕으로 먹다가 당나라 때 건져내서 먹어교자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미 1800년 전의 일이다. 그때 교자는 익힌 후에 건져내서 단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탕과 함께 그릇에 담아서 같이 먹었다. 당나라 때가 되어서야 현재의 교자와 거의 같아져 건져내서 접시에 담아 단독으로 먹었다. 당나라 때의 교자는 '뇌환(牢丸)', 수교(水餃·물만두)는 '탕중뇌환(湯中牢丸)', 증교(蒸餃·찐만두)는 '농상뇌환(籠上牢丸)'이라 했다. 그런데 송나라 이후 부르는 명칭이 어지러워진다. '분각(粉角)' '편식(扁食)' '수각(水角)' '교아(餃兒)' '수점심(水點心)'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음식을 통칭해 교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청나라 말기쯤이다.고려사 충혜왕 조에 '내주(內廚)에 들어가서 만두를 훔쳐먹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고려 때 이미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국어 발음과 뜻을 한글로 옮긴 어휘 사전 '역어유해(譯語類解)'에는 '만두는 우리 나라 풍속의 상화병(霜花餠)이다'고 하였다. 한자 뜻을 풀어보면 '상 위에 놓인 꽃, 하얀 서리꽃 같은 떡'. 음식디미방, 메밀 만두피에 꿩고기 넣고 빚어고려 때 유행한 '쌍화점(雙花店)'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렬왕 때 가요로 알려졌는데 노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쌍화점의 쌍화가 만두나 떡을 뜻하고, 회회아비는 서역 출신의 무슬림을 말한다.훈몽자회(訓蒙字會)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서는 만두를 '상화'라 했다. 가장 오래된 한글 음식 서적인 '음식디미방'(1670)에서는 메밀가루로 풀을 쑤어서 반죽하고 삶은 무와 다진 꿩고기를 볶아서 소를 넣고 빚었다고 한다. 1800년대의 '주찬(酒饌)'이란 책에는 소 내장인 양과 처녑 그리고 숭어 살을 얇게 저며 소를 넣은 만두가 나온다. 한국에서 만두란 말이 처음 기록된 것은 1643년 '영접도감(迎接都監)'.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은 김자고가 만두를 보내 오자 시(詩)로 사례한다.조선 후기 학자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無名子集)' 제3책 주(註)에 '변씨만두(卞氏饅頭)'가 등장한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서 만두소를 넣고 네 귀로 싸서 닭 국물에 삶은 만두를 말한다. 이 만두는 '편수'와 비슷하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정리·사진=이춘호 음식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국민 간식 "만두 예찬" (2)에서 계속됩니다.만두의 발원지는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만두 비슷한 게 많다. 손바닥만 한 큰 고기만두는 '교자(餃子)', 현재와 같이 조그만 것은 '천진교자'라고 한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2)...걸쭉한 고추기름 넣고 끓인 '육개장'. 사골 육수에 선지 넣고 끓인 '따로국밥'
◆보신탕과 육개장 사이1929년 12월1일 종합잡지 '별건곤(別乾坤)'. 필명을 달성인이라 불리는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대구탕반(大邱湯飯)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사람들의 통성(通性)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촌간(村間)에서는 사돈이 오면 개를 잡는다. 개장은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 기호성(嗜好性)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게 바로 육개장이다. 이는 소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대발전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즉 육개장은 개장국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태생된 음식으로 소고기를 뜻하는 '육(肉)'과 보신탕을 의미하는 '개장'이 합쳐진 말로 서민들이 먹었던 '개장국'에서 유래한 음식이다.예로부터 개장국이 꽤 인기가 있었던지 사찰의 스님들도 그 맛을 보기 위해 고기를 대신해 '고기나물'이라 불리는 눈개승마를 비롯해 마른나물과 버섯을 넣고 요리한 '채개장'을 만들었다. 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 만든 닭개장도 있다.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육개장 만드는 법과 함께 '영계국'이라는 닭요리가 나오는데 육개장인 듯 언급되어 닭개장 역시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전서에 나오는 육개장 만드는 법은 소고기의 여러 부위와 함께 특이하게 전복·해삼 등도 넣는다. 고기는 다지고 그 외 부분은 골패처럼 네모지게 썰어 넣는다. 식사로도 할 수 있지만 건육에 겨자를 쓰면 술안주로도 좋다고 첨언한다.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우리 조상은 입맛을 잃고 원기가 떨어졌을 때 개고기를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 한글로 된 최고의 고조리서 '음식디미방'(1670)에는 개장 고는 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에 '개찜'이라 명명된 개장국이 설명돼 있다. 여기에서는 고추장을 처음 넣은 조리법이 소개된다. 이걸 보면 김치보다 앞서 고추를 개장국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고춧가루가 널리 퍼지면서 뒤늦게 매콤한 육개장이 등장하게 된다.손정규의 '조선요리'(1940년)에는 고춧가루를 넣고 빨갛게 끓인 육개장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양지머리와 사태를 소· 양 등과 함께 푹 삶아 건져내고 국물을 식혀서 기름을 걷어 낸다. 건져낸 고기는 결대로 찢거나 칼로 썰고 양도 저민다. 이 고기나 양을 진간장, 다진 파와 마늘, 참기름, 깨소금,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한다. 한편 고춧가루에 참기름을 끓여 넣어서 잘 개어 놓고 대파를 데쳐 놓는다. 이들을 끓어오르는 장국에 넣어 한소끔 끓여낸다." 이것이 서울식 육개장이다.대구식 육개장의 별칭 '대구탕'고기결이 풀릴 만큼 큼지막하게 썰어 손으로 비틀어 자른 대파 넣고 끓여얼큰한 국물에 감칠맛·단맛 우러나와삶은 닭을 결대로 찢어서 만든 닭개장임란후 고춧가루 넣어 매콤한 육개장◆대구탕을 아시나요일제 강점기에는 대구탕으로도 불렸던 대구탕반,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따로국밥'이라는 국밥 형태의 음식이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음식학적으로 볼 때 대구탕은 생선 '대구탕(大口蕩)',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代狗蕩)', 그리고 대구식 육개장의 별칭인 '대구탕(大邱蕩)'이 있다.19세기 말엽 대구 우시장은 번창했다. 1910년 당시 통감부에서 출판한 '한일합방 기념 대일본제국 조선사진첩'에는 대구시장(서문시장)과 우시장이 소개돼 있다. 대구 우시장은 지금의 대구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시장'에서는 1년에 2만마리 이상을 취급하는 최대 규모의 9개 축산시장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구 우시장이다. 당시 2만마리 이상 거래되는 우시장 9개소 중 6개소는 북한에 있으며 남한은 대구 외 수원과 부산이었다고 한다. 2만 마리면 하루에 50마리 꼴이니 당시 소의 무게를 생각하면 대구에는 당시 하루 10t가량의 소고기가 풀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로 대구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소고기나 소의 내장을 사용한 음식들이 비교적 많을 수밖에 없었다.대구에는 육개장 형태인 대구탕이 있다. 거기다가 따로국밥이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어 식도락가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대구탕이라 불리는 육개장과 대구 명물 '따로국밥'은 재료나 조리학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른 음식이다.대구탕의 특징 중 하나는 붉고 걸쭉한 고추기름. 국이 끓을 때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녹인 소기름으로 고추기름을 만들어 양념으로 넣는다. 따로국밥은 육수를 사골로 만들고 거기에 선지까지 들어간다.일제강점기 초기 경부철도 건설로 대구에 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선다. 이때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덕분에 대구 명물 대구탕이 태어난다. 육개장은 '소고기+개장국'이다. 개장국 스타일로 끓인 쇠고깃국으로 시장통 등에서 팔던 주막 음식이었다. 육당 최남선도 '조선상식문답'에서 소설가 김동리도 대구가 한국 육개장의 명소란 점을 적시했다. 김동리는 직접 '대구탕'이란 표현을 사용했다.서울의 전동 대구탕 집은 대구탕으로 시작해서 연계탕(연계백숙)과 구운 갈비를 메뉴에 추가해서 장사를 했는데, 그 뒤로는 같은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여러 곳 생기게 된다. 1896년 발행된 연세대 소장 '규곤요람'에서 소개하는 육개장도 대구탕에 가깝다. 1930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 시내 음식점 조합이 음식값을 내렸다'는 기사를 보면 육개장은 없고 대구탕반(대구탕)만 등장한다. 육개장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경성에서 육개장보다 대구탕이라는 이름이 더 흔히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풍연도 '서울 잡학사전'에서 육개장이 대구탕의 영향으로 전국으로 퍼졌다는 설을 내놓고 있다. 육개장은 서울에서 지역 특성상 더운 날이 많은 대구로 건너가면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보는 것이다.대구탕은 소고기를 푹 끓여낸 얼큰한 국물로 다른 지역의 육개장과 달리 고기를 찢어서 넣는 게 아니라 고기의 결이 풀릴 정도로 큼지막하게 썰어 대파와 함께 걸쭉해질 때까지 끓여낸다. 특히 대파를 자를 때 칼을 대지 않고 손으로 비틀어 잘라 넣는다. 여기에 소량의 고구마 줄기나 무를 넣기도 하지만 소고기의 감칠맛과 대파에서 나오는 단맛이 맛의 핵심이다.6·25 전쟁 후 향토음식 따로국밥19C 전국 최대 규모 번창 대구우시장소고기·내장 재료 대구대표 음식 발전사골·양지머리 육수 쓰는 두가지 방식 경상도서 즐겨먹는 소고기국밥 스타일1946년에 오픈한 대구 국일식당 명성 ◆따로국밥대구를 따로국밥의 고장으로 만든 주인공은 1946년 오픈한 '국일식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따로국밥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음식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소고기 국밥에 더 가깝다. 따로국밥은 대구탕반과는 전혀 다른 해장국 스타일의 국밥에 가깝다.'전통 육개장 스타일'은 옛집·온천골·진골목·벙글벙글, 선지가 들어가는 해장국 방식의 따로국밥은 국일·교동·한우장·한일 등이 명맥을 잇고, 우거지와 선지가 들어간 대덕식당은 '선지국'으로 분류된다.육개장도 사골 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쪽과 그렇지 않고 일반 반가의 소고깃국처럼 양지머리 육수를 갖고 국을 끓이는 두 방식이 있다. 경상도 일반 민가의 소고깃국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내는 식당은 경산 영남대 기숙사 근처에 본점이 있는 '온천골'. 여기는 양지머리, 대파와 무, 그리고 마늘 양념장만으로 끓인다.◆팔도 별별 소고깃국 1920년대에 이미 대구탕이 유행했지만 지금도 팔도엔 이런저런 소고깃국이 남아있다. 대구권 가정식 소고깃국은 일명 '소고기무국'으로도 불린다. 경주에 가면 채 썬 묵이 들어가는 묵사발국 같은 '팔우정 해장국', 의령 종로식당의 육개장은 콩나물국 같다. 양평해장국은 소양을 베이스로 한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다.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는 고사리 등을 넣지 않고 많은 양의 파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기에 '파국'이라고도 한다. 같은 충청도 안이라도 지역에 따라 부추를 넣는 곳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소고기와 함께 대파와 달걀지단만 넣기도 하고 토란 대를 꼭 넣는 지역도 있다. 제주도는 '육=소고기' 하는 등식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고사리육개장'이다. 육개장 역시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가 들어간다. 또 고사리의 형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푹 끓이며, 걸쭉하게 하기 위해서 들깨·보릿가루를 넣는다. 재료들의 차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붉은색 육개장과 달리 황톳빛에 가깝다. 북한에도 육개장이 있는데 '소고깃국'이라고 말한다. 그 명칭만 다를 뿐 만드는 법은 육개장과 동일하다. 육개장은 기본적으로 밥과 함께 먹지만 면과 먹기도 한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메밀면이나 당면을 넣어 밥과 함께 나오기도 하며, '육개장 칼국수'라 하여 육개장에 칼국수를 넣어 '육칼'이라고도 한다. 대구의 경우 중구 종로 진골목식당에서는 육칼이라 하지 않고 '육국수'라 한다. 한국인이 자주 틀리는 맞춤법에 육개장이 꼭 들어간다. 실제로 식당에 가면 '육계장'이라 쓰여 있는 곳이 종종 보인다. 아마도 삼계탕(蔘鷄湯)의 '계'와 연관 지어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육개장이 소고기로 만든 개장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이상 '육개장'을 잘못 쓰는 일은 없도록 하자.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구한말 노점 식당 전경. 그 시절 민초들의 식탁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암시하는 길거리 한 편에 가마니를 둘러 벽을 삼고 송판을 테이블로 삼은 노변 주막형 장국밥집.일제강점기 시절의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음식점. 길에서 만난 식당은 주막 아니면 장터국밥 스타일이었고 고관대작은 훗날 요정으로 불리는 조선 갑종 요릿집·청요릿집(중화요릿집)을 애용했다.일제강점기 대구 성당못 근처에 있었던 우시장 전경.지금 개장국은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대구·경북은 한국 보신탕 문화특구로 불릴 정도로 즐겨 먹었다. 일제강점기 개장국집 전경.대구 따로국밥과 비슷하지만 레시피가 사뭇 다른 중구 시장북로 미싱골목 옆 50년대식 골목·움집 같은 식당에서 반세기 이상 대구 스타일의 육개장인 대구탕 외길을 걷고 있는 옛집 육개장 골목길. 이춘호기자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소고기 탕반문화를 가진 대구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국일 따로국밥. 1946년 옛 한일극장 서편 공터에서 좌판 형태로 오픈했는데 6·25전쟁 때 숱한 피란민들의 추억이 스며든 곳이기도 하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타지방의 육개장, 해장국, 장터국밥, 설렁탕, 곰탕 스타일이 한데 혼재된 것 같다. 반드시 선지가 사용되고 육수를 빼기 위해 사골을 밤새 고아낸다. 그리고 보조재료는 대파와 무, 고기는 양지머리를 사용한다. 그리고 콩팥 기름에 고춧가루를 섞은 고추기름을 흥건하게 올려주며, 마늘 양념이 빠지지 않아야 된다. 이춘호기자
2021.12.24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1)
이번 회에는 개장국(보신탕)에서 비롯된 한국 고유의 탕 문화가 '탕반의 고장' 중 하나인 대구에 와서 어떻게 대구탕(대구식 육개장)과 따로국밥으로 분화했는지를 추적해 본다.구한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식문화는 아주 단출했다. 특히 장터나 주막의 주메뉴는 거의 '장국밥' 하나로 압축된다. 국밥은 한자어로 '탕반(蕩飯)'. 국과 밥이 한 세트로 묶인 거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뚝배기에 찬밥을 넣고 그걸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고 마지막에 미리 썰어놓은 고기를 고명으로 올려준다. 반찬이라 해봐야 간 맞추는 간장과 깍두기가 전부다. 지금처럼 밥 따로 국 따로 형태는 그 시절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외면당했다. 소고기 또한 너무 귀했기 때문에 소고기 국밥, 육개장 등은 서민이 먹기 힘들었고 대다수 시래기·우거지국에 만족했다.한국 탕반 문화의 원류 '보신탕'대구경북, 20년전 보신탕 특구 번창예로부터 삼복에 먹는 절식 개장국소고기 '肉'+보신탕 '개장' 육개장서민이 먹었던 개장국에서 유래한국 탕반문화의 원류는 보신탕이다. 지금은 동물보호단체 등 때문에 보신탕 문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경북은 한국 최강 보신탕 특구로 군림했다.우리는 역사적으로 개(犬)를 식용해 왔다. 그래서 그런지 개고기 식용 흔적보다 애완견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용주유고(蓉洲遺稿)'에 애완견 관련 한 구절이 있다. '宗太守下朴狗短歌(종태수하박구단가)'라는 재미있는 애완견에 대한 시다. 하박구(下朴狗)는 뼈대가 굵고 털이 북실북실한 개의 일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자그마한 품종을 '발바리'라 하는데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도 개고기를 상당히 좋아한 것 같다. 그는 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라고 했다. 다산 시문집 제20권에 보면 초정 박제가가 개 삶는 법을 소개한 대목이 있다.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는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장·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난다"고 했다.개고기를 주재료로 끓인 국을 '개장국'이라 한다. 이 개장국을 '백호전서(白湖全書)'에서는 '견갱(犬羹)', '무명자집(無名子集)'에는 '가장(家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장(狗醬)'이라 했다.흥부전에도 개장국이 나온다. 흥부는 워낙 가난한 탓에 자식들에게 옷을 다해 입힐 수 없다.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열구자탕에 국수 말아 먹었으면…" 하자, 또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벙거짓골 먹었으면…" 하고, 거기에 또 한 놈이 "애고 어머니, 우리 개장국에 흰밥 조금 먹었으면…" 한다.조선 정조 1년(1777) 이찬을 추대하려 역모를 꾀하던 정조 시해 미수사건 당시의 주모자 홍상범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정흥문이란 자의 자술서에 개장국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한양에 개장국을 상시적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개장국을 복날에만 먹은 게 아니다. 봄철에 선비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향음례'(鄕飮禮)에서도 개장국을 대접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철 따라 별미가 제공되었는데, 초복에는개장국 한 그릇, 중복에는 참외 2개, 말복에는 수박이었다. 충남 부여에 가면 상중(喪中)에 개장국을 끓여 손님을 접대한다. 그러나 통상 개장국은 삼복에 먹는 절식(節食)이다. 여기서 '복(伏)'이란 말은 '엎드려 숨는다'는 뜻이다. 하지(夏至) 후의 세 번째 경일(庚日)이 초복, 하지 후의 네 번째 경일이 중복, 입추 뒤의 첫 경일이 말복이 된다.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개고기를 파와 함께 푹 삶은 것을 개장이라고 한다. 여기에 닭고기와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장국을 만들어서 산초가루를 치고 흰밥을 말면 시절음식이 된다. 이것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물리치고 보신도 된다"라고 소개했다.조선 정조 15년(1791) 청나라 연경으로의 사행단을 따라간 김정중이 쓴 '연행록(燕行錄)'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오리·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중국 베이징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대구 육개장~따로국밥 연대기(2)에서 계속됩니다.육개장에 국수를 단 육국수.육개장이 절정기를 맞을 때도 승려 등 일부는 고기 대신 갖은 채소류에 된장·고추장·고추기름 등을 넣어 '채개장'을 해먹었다. 사진 속 음식은 김영복 원장이 직접 조리한 채개장.
[이춘호기자의 카페로드] 온 더 레일(On the rail)..."칙칙폭폭~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사람 대신 기차가 서빙
대구 달성군 가창면은 최정산이 있어 단위면적당 상당히 깊숙한 계곡을 품을 수 있게 됐다. 대구텍 정문 앞 삼거리에서 팔조령으로 뻗는 국도. 용계동을 지나 냉천, 그리고 대일리 방면으로 가면 좌우는 의외로 산세가 우뚝하다. 대일리에서 좌회전해 상원리로 접어들면 단산지 언저리 들판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사방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숨겨진 비경의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기자는 봄철 그 언저리에서 봄나물 무침을 위해 소루쟁이를 채취하거나 잠시 캠핑 의자에 앉아 멍 때리기를 즐긴다. 이 비경을 무척 좋아한 5명의 화가가 있다. 불이 들지 않는다는 깊고 깊은 상원리 계곡에 처음 입곡한 화가 김일환, 그는 대일리~단산리~상원리로 연결된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의 힘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그 다음은 우록리에 진을 친 박중식, 뒤에는 권기철(현재는 팔조령 옛길 초입으로 이전), 이태현, 남춘모 등이 가세한다. 가창면 명물 식당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 있다. 닭 요리가 지배적이다. 닭백숙의 양대 산맥은 단연 '큰나무집'과 '토담집'. 큰나무집은 한강 이남 최강 궁중닭백숙 전문점으로 자릴 잡았고, 토담집은 옻닭 하나로 미식가의 입을 사로잡았다.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파워풀한 닭백숙 촌으로 불렸던 냉천유원지 상가는 성주식당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전성기에는 쌍바위, 성주식당, 버들집, 찬샘집, 높은집, 청수장, 냉천장 등 7곳이 운집해 있었다. 스파밸리 상권과 맞물려 냉천 푸드타운이 형성되면서 닭백숙 촌은 지역민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밖에 '묵쳐 먹고 가는 집'의 별난 묵, 유자 먹인 장어, 지방도를 라이딩하는 자전거족에게 잊을 수 없는 맛을 선사해주는 '세명식당'의 묵은지 곁들인 돼지국밥. 용계리 '올드로드'는 LP 비어레스토랑스타일인데 '더치오븐치킨'으로 입소문이 났다. 블록·피규어·미니어처 좋아하던 남자백숙집을 전망 좋은 통유리 카페로 개조모형기차 직구…40초 서빙시스템 구축커피 직접 로스팅하고 빵도 구워내◆기차로 서빙하는 이색 카페언젠가부터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커피를 불러내야 직성이 풀린다. 가창면에도 3년 새 이런저런 핫플 카페가 피어났다. 최정산 주변 최강 핫플 카페는 단연 문 닫은 오리농원 가든을 베이커리카페로 리모델링 해서 초대박을 낸 '오퐁 드 부아'다. 그리고 근처 최정산 군부대 옆 목장 카페 같은 '대새목장'도 다크호스. 주리 계곡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산길을 올라간다. 군부대 가는 길, 주리 먹거리 타운 가는 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산길 초입 오른편에 '온 더 레일(On the rail)'이라 적힌 간판이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이 카페. 전희재(34). 계명대 식품가공학과를 나온 그는 2000년 그 언저리에 '시골농부'란 백숙과 불고기 전문 식당을 차린 부모를 위해 2019년 8월 신개념 카페를 오픈한다. 그는 어릴 때 블록, 피규어, 모형 장난감, 미니어처 등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다. 덕분에 각종 기계와 기구를 조작하는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부모를 도우면서 요리에 대한 감각, 신재료 갈무리 하는 법 등도 체득하게 된다.일반 식당 업무는 카페와 비교해 몇 배 노동강도를 갖고 있다. 부모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부모도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형태의 가게를 차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시절 외식업 전문 사업가의 꿈을 꾼다. 첫 아이템도 미리 구상한다. 기차가 직접 커피와 빵을 직접 서빙해주는 신개념 서비스다. 모형 기차를 국내에선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7년 전 1년 일정으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친해진 독일 친구한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유럽에선 꽤 많이 유통되는 모형 기차, 그걸 구동하는 법, 수리에 필요한 부품 등도 스스로 알아낸다. 일단 해외 직구를 통해 모두 10대의 모형 기차를 구입했다. 홀 중앙에 최연장 10곒 미니 레일을 가설하고 좌우에 테이블 8개를 놓았다. 기차 위에 주문한 메뉴를 탑재하고 버튼을 눌러준다. 기차는 로봇처럼 지정된 번호의 테이블에 도착한다. 메뉴를 내리면 자동으로 출발선으로 되돌아 온다. 걸리는 시간은 총 40초. 개업 초기에는 20초, 이어 30초, 급한 것 같아 결국 40초로 설정하게 된다. 모형 기차라 하지만 꽤 고가다. 기차 서빙은 우리와 달리 유럽과 일본에서는 이미 유행하고 있는데 그는 그걸 재빨리 사업으로 벤치마킹한 것이다. 기존 백숙집 면적은 99㎡(30평) 남짓, 이를 카페로 리모델링하면 그림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모두 부수고 신축한다. 사방이 최정산 자락, 그 동쪽에 늘 풍광이 변하는 주동지가 있다. 하절기 부레옥잠 머금은 돌확 같은 이미지다. 계곡 사이를 파고드는 근교 시골길의 호젓함도 실시간으로 만끽할 수 있게 하려면 층고는 꽤 높게 설정해야 된다. 3면 벽체는 모두 장방형 통유리창으로 장착했다.기차를 주제로 한 카페, 당연히 카페 입구에도 기존 레일과 같은 규모로 가설해야 된다. 하지만 철도청 재산이었다가 일반에 엄청나게 팔려나간 레일과 침목은 과수요 때문에 이젠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경남 모처에서 15곒 분량의 레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커피는 직접 로스팅룸에서 볶아 낸다. 볶은 콩은 보름 내 소진시키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메리카노(4천800원)는 브라질·과테말라·에티오피아를 혼합해 사용한다. 매대에 깔리는 빵 종류는 대왕크루와상(4천300원), 몽블랑(4천300원), 갈릭버터바게트(5천800원) 등 20여 종. 그는 빵 만드는 것도 혼자 감당한다. 한눈에도 용암 같은 열정을 가진 청년 같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미소는 커피향보다 더 진했다. 가창로 93길 52. 휴무는 수요일.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부모가 운영하던 기존 닭백숙집을 과감하게 부수고 모형 기차가 직접 서빙을 해주는 기차를 주제로 한 베이커리카페 '온더레일'. 기차는 주방을 출발해 주문한 테이블에 메뉴를 실어주고 본 역으로 되돌아온다. 걸리는 시간은 모두 40초.대왕 크루와상과 몽블랑, 아인슈페너.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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