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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9) 들안길 설렁탕 전문점 ‘동이옥’ 김동진 사장
탕(湯)과 국(羹). 그 사이에 한식의 모든 스펙트럼이 다 펼쳐진다. 특히 설렁탕과 곰탕은 식품 사학자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어원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작고한 칼럼니스트 이규태가 설렁탕 담론 공론화에 제일 적극적으로 나섰다. 설렁탕은 조선조 임금의 풍년 기원의식인 ‘선농제(先農祭)’에서 기원했다고 해석한다. 선농제는 후에 서울 동대문 밖 제기동과 전농동의 동명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봄엔 선농제, 입하 첫 해(亥)일엔 ‘중농제’, 입추 후 첫 해일엔 ‘후농제’를 지냈다. 동대문 밖에 전 서울대 사범대 구내에 ‘선농단’을 세우고 그곳에서 공식 의례를 봉행했다. 제사 때 희생될 소는 명륜동 전생서(典牲暑)의 백정이 잡았다. 성종실록엔 선농제 제례 절차까지 나와 있다. ‘임금님에게 술을 바치고 탕을 올린다. 희생된 소를 탕으로 빚어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쳐진다.’ ‘선농단에서 먹었던 탕’이란 의미로 설렁탕의 어원을 정리했다. 요즘 일반 식당에서도 이 대목을 인쇄해 많이 붙여놓는다. 푸드채널에선 언뜻 구별이 잘 안 되는 설렁탕과 곰탕을 비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곰탕과 설렁탕의 차이를 물어보면 얼른 답하기 쉽지 않다. 한국 음식문화사의 태두격인 고 이성우 교수는 18세기 외국어 학습서를 인용, 중국어나 몽골어에서 고기 삶은 국물을 의미하는 말 ‘공탕(空湯)’을 곰탕의 어원으로 봤다. 또 공탕의 몽골어 말소리인 ‘슈루’가 설렁탕의 어원일 것으로 추정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설이나 잡지, 조리서에는 설렁탕에 대한 언급이 많다. 1924년에 나온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도 나온다. 곰국(탕)과 설렁탕을 구별해 따로 언급한 조리서는 40년에 나온 손정규의 ‘조선요리’가 처음이다. 곰국은 ‘사태, 쇠꼬리, 허파, 양, 곱창을 덩이째로 삶아 반숙되었을 때, 무와 파를 넣고 간장을 조금 넣어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를 꺼내어 잘게 썰어 열즙(熱汁)에 넣고 호초(胡椒)와 파를 넣는다’고 하였다. 설렁탕은 ‘우육(牛肉)의 잡육, 내장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殘部)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 경성지방의 일품요리로서 값싸고 자양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쉽게 구별하면 사골 등 각종 뼈를 갖고 국물을 만들면 설렁탕, 소와 양 등 살점을 축으로 국물을 내면 곰탕으로 보면 된다. 설렁탕은 곰탕보다 더 뽀얗다. 서울경기권에서는 설렁탕이 강세지만 대구권은 따로국밥 등 대구식 육개장이 더 강세다. 대구의 설렁탕 명가로는 종로초등학교 뒷문 근처에 있는 부산설렁탕, 경상감영공원 곁에 있는 마산설렁탕 등이 거론된다. 곰탕은 현풍의 박소선 원조 곰탕과 달성공원 근처에 있는 한우곰탕 등이 선두 그룹이다. 그런데 갈수록 곰탕과 설렁탕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소머리곰탕이 이 두 스타일을 합친 것 같은데 의성의 ‘남선옥’, 청도 풍각시장의 ‘수구레국밥’ 등이 유명하다. 경산시 하양읍 하양시장 문패 없는 할매 소머리국밥집을 지키고 있는 욕쟁이 김순남 할매를 본 지도 거의 8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계신지 조만간 나들이를 해봐야겠다. ‘음식값은 내리지 않으며 대신 음식맛은 올리겠다’ 식당 캐치프레이즈 눈길 고기와 국물 밀당하듯 농밀하고도 심플한 맛 식자재 실명제도 신뢰감 ◆ 30대 설렁탕집 주인 등장 최근 들안길에 다크호스 설렁탕집이 하나 태어났다. 설렁탕 전문점 ‘동이옥’이다. 김동진 사장(31)은 영남대 언론정보학과를 나오고 ROTC46기로 임관했다. 한때 보광훼미리마트(현 CU)에서 직장생활도 했다. 하지만 모두 자기 길이 아니었다. 부친은 대구에선 이름을 대면 다 아는 삼계탕집 사장이다. 그 집의 맛을 간직한 할머니가 너무 연로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탕이 뭔지를 4년간 배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숱한 음식이 들끓는다는 들안길, 눈을 닦고 찾아봐도 설렁탕 전문점은 없었다. ‘그래, 내가 설렁탕집을 차려보자’고 결심한다. 그는 동이옥을 띄우기 위해선 맛과 마케팅을 동시에 성공시켜야 된다고 믿었다. 메인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었다. 100% 한우, 식자재 실명제, 그리고 감동적인 헤드카피를 만들었다. ‘이만한 보약이 없다’와 ‘음식값은 내리지 않습니다. 음식맛을 올리겠습니다.’ 분위기에 맞게 매머드 간판을 제작했다. 세로 6m, 가로 15m 크기였다. 내부 인테리어와 홍보물 제작 등은 김시훈씨와 맥디자인의 류언주씨가 맡았다. 좋은 한우를 잡아라. 수소문 끝에 고령의 고령축산 8번 경매인인 23년 경력의 황상훈씨, 와우축산의 김영창씨와 의기투합했다. 설렁탕용 깍두기에 들어갈 고추는 경찰특공대 출신으로 2002년 영양 수비로 들어가 고추농사를 짓는 아버지 후배를 잡았다. 쌀은 서문시장에서 35년째 경북상회를 꾸려가는 권오종 사장의 현풍 이방쌀, 전복은 완도산만 파는 전복마을의 서준수 사장, 이 밖에 냉동상사의 허한식 사장, LG 에어콘의 안용생 사장, 극동주방스텐의 권순삼 사장, 식기세척제는 한국주방기기의 심상성 사장이 책임진다. 식자재 공급 업체 사장의 실명을 고서처럼 생긴 84쪽 한지 메뉴판에 붓글씨로 전부 공개했다. ◆ 나만의 뼈 우려내기 상당수 업소는 가격 때문에 뼈를 한우로 사용하면 고기는 수입품, 고기를 한우로 사용하면 뼈는 수입품으로 변칙 운용했다. 망하더라도 정말 100% 한우만 사용하자고 다짐한다. 김 사장의 좌우명은 ‘기왕이면 정직하자. 노력은 절대 배반 안 한다’이다. 오후 2시에 고기와 뼈가 들어온다. 주방 옆에 250인분 곰용 가마솥 4대가 구비돼 있다. 뼈도 사골만 사용해선 맛이 나지 않는다. 사골과 우족, 잡뼈를 2대 1대 1 비율로 섞는다. 일단 핏물을 잡아야 하는데 끓는 물에 15~20분 데쳐 낸다. 이어 물을 90%가량 채운다. “뼈를 고아내는 방법을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뼈에도 등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흰색, 그러면서도 골분이 살아 있어야 제대로 된 국물을 만들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온갖 비법이 다 나와 있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교과서적으로는 5~7시간 초·재탕한 국물을 섞어 사용하는데 실제 해보니 국물이 싱겁고 겉돌았다. 레드와인으로 말하자면 보디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선 제값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단 초·재탕 시스템을 버리고 초탕 한 번으로 끝내고 싶었다. 7시간, 7시간30분, 8시간…. 30분 틈을 두면서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설정했다. 어느 날 12시간이 가장 적당하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는 강불에 끓여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1시간마다 긴 나무주걱으로 긁어주듯 밑바닥에 가라앉은 뼈를 뒤집어줘야 화근내가 나지 않는다. 모두 12번 그 작업을 해야 된다. 죽을 지경이다.” 이 집은 하루에 두 번(오전 11시와 밤 11시) 완전하게 고아낸 국물을 퍼내 식간통으로 이동시킨다. 배달용은 영하 40℃로 급랭시켜 보관한다. 한쪽 벽면에 육수 체크리스트가 부착돼 있다. “처음에는 가장 완벽한 국물맛이 어떤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적당한 점성이다. 저급한 설렁탕 국물에는 점성이 없다. 국물을 입술에 묻혀도 잘 들러붙지 않는다. 그럼 제대로 고아내지 않았다는 증거다. 여기 걸 먹어보면 입에 쩍쩍 들러붙는다.” 요즘도 그는 하루 한 그릇은 테스트 삼아 시식한다. 너무 진해도 너무 연해도, 너무 가벼워도 너무 무거워도 안 된다. 또한 한우 특유의 향미를 위해 잡내를 잡는 소주를 제외하곤 파뿌리, 생강 등을 일절 넣지 않는다. 뼈를 고아내는 건 어쩌면 쉬울지 모른다. 설렁탕용 고기를 잘 삶는 건 정말 힘들었다. “설렁탕용 고기는 사태보다는 양지머리가 좋다. 사태는 힘줄이 있고 질기고 잘못 삶기면 푸석푸석 살점이 부서진다. 사태살은 육개장과 수육용으로 사용해야 된다. 10㎏ 양지를 잘 삶아 모양 좋게 썰어내려면 일단 삶기 전에 잘 해체해야 된다. ㎏당 2만5천원선.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편수는 나무의 결을 정복해야 하듯 설렁탕 주인도 고기 특유의 결을 잘 역이용해야 성공한다. 주방에서 3개월 용맹정진하듯 고기 납품업자와 경매인에게 매달려 고기 삶는 법을 배웠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TIP 사전취재를 위해 몇몇 미식가에게 국물맛을 보게 했다. 다들 ‘원더풀’을 외쳤다. 기자도 최근에 먹어본 설렁탕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농밀하면서도 심플했다. 서울 최고의 설렁탕집인 이문설렁탕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100% 한우 설렁탕을 9천원에 주면 사실 남는 게 거의 없다. 1만7천원짜리 도가니탕은 ‘한약’ 같았다. 고기와 국물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향긋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당수 식당은 국물과 고기가 따로 논다. 여긴 일심동체다. 30대 주인이 이런 국물맛을 내고 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혹시 ‘작전세력’이 투입된 게 아닐까 살펴봤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약 이 국물맛을 유지하지 못하면 추천 오너셰프 식당을 취소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고 취재에 들어갔다. 동이옥은 화학조미료통을 식탁 한편에 자신있게 비치했다. 용감한 결단이다. 요리할 때 절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입구에 휴대폰 충전기 12대를 비치했다. 화장실도 장애인 혼자 사용할 수 있게 자동문을 달아주었다. 식탁 아래에 별도의 수저보관 서랍도 만들었다. 20주 이상 된 임신부는 1천500원, 장애인은 전 메뉴 1천500원, 3명 이상 경차를 타고 오면 3천원을 할인해주고, 65세 어르신 3명 이상 차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전 메뉴 20% 할인. 설렁탕 한 그릇 9천원. 24시간 영업. (053)762-7722
2014.05.0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수성구 들안길 ‘금산삼계탕’ 김창민 사장
최근 기자 앞으로 의미심장한 책 한 권이 배달돼 왔다. 1990년대 초 대구 최초로 ‘프랜차이즈 삼계탕 시대’를 연 수성구 들안길 금산삼계탕 김창민 사장(54)이 펴낸 ‘식당, 이렇게 하면 빨리 망한다’(다음생각 刊)였다. ‘꼬꼬 아저씨’, 그도 한창때는 금산 체인점이 50개에 달했다. 지금은 4개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 지점도 망했다. 잠잠해질 만해지면 도지는 악몽 같은 조류독감 파동. 상당한 덩치를 가진 금산도 그 파동에 그로기 상태다. 현재 우울증 치료제를 먹고 있다. 어린 시절 경찰서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설상가상 미국 뉴저지 지점 오픈 때 교포한테 사기를 당해 그 충격 때문에 몇 번 자살시도를 했다. 이런 내용이 들어있는 걸 아는 가족은 그의 책 출간을 결사반대했다. 그는 전투·탐험적이다. 현재까지 200회 이상 해외에 다녀왔다. 아이디어 헌팅 때문이다. 해외투자에 너무 많은 좌절을 겪어 이젠 그 방면 전문가가 됐다. “다들 인도인은 모두 쇠고기를 안 먹는 줄 안다. 아니다. 힌두교 믿는 80.5%만 먹지 않는다. 프로라면 이 정도 지식은 가져야 한다. 12억명 중 13.4% 무슬림은 쇠고기를 먹는다. 우리보다 쇠고기 소비층이 더 두텁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해외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식당을 하면 70~80%가 망한다. 중국에선 중국인, 미국에선 미국인을 상대로 장사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물론 해외에서 나도 망했다. 망했기 때문에 더 공부할 수 있었다.” ◆ 돈 버는 일이 가장 숭고하다 10대 때부터 아이스케키·찹쌀떡·껌팔이로 입에 풀칠을 해야 했다. 중국집 ‘배달의 기수’, 구두닦이, 구두가게 점원, 가짜휘발유·가짜왁스·부동액 장사꾼으로 허덕였다. 80년대 중반 대신동 동산의료원 근처에서 고디집을 열었다. 생애 첫 자기 식당이었다. 거기서 조금 기반을 잡아 당시 황량하기 이를 데 없던 수성구 들안길 벌판에서 금산삼계탕을 연다. 91년 2월이었다. 다들 망한다고 했다. 기우였다. 이어 그의 첫 무모한 기질이 분출한다. ‘왜 삼계탕집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후줄근한가. 고급 레스토랑 같으면 왜 안 되지?’란 의문을 던졌다. 지역 최초로 대리석궁전 같은 디럭스 레스토랑 버전으로 증축한다. 20억원 이상 투자했다. 삼계탕 하나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한 그릇에 1만2천원 하는 고가 짬뽕도 팔았다. ‘한일미’란 숯불갈비집도 병행했다. 때론 식당 위층에서 8개월간 금산예식장, 94년부터는 1년가량 상조회사도 운영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였다. 최근에는 대구 따로국밥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 위해 서울경기에서 유행하는 설렁탕 전문점 ‘동이옥’을 오픈했다. 그의 광고기법은 기발하다 못해 무모하다. 지역의 유명 테너 4명을 불러 무려 여섯 번 스튜디오 촬영 끝에 광고용 CM송을 만들었다. 이영돈 PD에 공개토론 제안 ‘조미료 無害’ 이미 국내외서 판명 사용유무로 식당우열 가려선 안돼 과학 위에 ‘아집’ 군림해선 곤란 식당 이렇게 하면 망해 ‘식당이나 해볼까’ 안일한 자세 체인 브랜드 맹신 결국 禍 불러 유행 메뉴만 쫓다간 오래 못가 망하지 않으려면 가게 열기 전 90% 이상 파악해야 한·중·일·양식당 두루 체험하고 서빙까지 경험하면 망할 일 없어 인테리어 집착 말고 상권 분석을 ◆ 김창민 왈…이렇게 하면 망한다 그는 ‘하다 안 되면 식당이나 하지’라는 안일한 자세의 예비창업자를 보면 ‘맞아 죽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신도 체인 사업을 하면서, 체인점만 맹신하는 자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고맙긴 해도 남이 다 이뤄놓은 브랜드를 앞세워 돈 벌려는 체인 마인드는 사실 위험하다”고 꼬집는다. 그는 ‘비법’의 맹점도 지적한다. “식당마다 비법이라 공개 못한다고 하는데 그 비법이 식당을 유지시켜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법에 대한 맹신이 실패를 불러오기도 한다. 조리과정에서 결코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되는 요소들이 비법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감춰질 수도 있다. 난 비법을 공개하자는 주의다. 실제 홈페이지에 금산삼계탕 레시피를 다 공개했다.” 유행의 덫도 강조한다. “유행 메뉴에 혹하지 마라. ‘지금까지 사람들이 맛보지 못했던 뭐 새롭고 기가 막힌 음식이 없을까’를 찾는데 그것은 경쟁을 최소화하고 보다 쉽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것과 새것, 또는 전혀 다른 영역의 음식이 만나 새로운 뭔가를 이뤄내려면 양쪽 모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시작해야 한다. 전통이 빠진 단순한 결합이나 변형은 결국 유행음식으로 반짝 지고 만다.” 그가 가장 중요한 대목을 언급한다. “망하지 않으려면 시작하기 전에 100%는 아닐지라도 관련된 모든 것의 90%는 파악해야 한다. 식당하기 전 내 인생에서 4년은 없다고 생각하라. 1년은 한식당, 또 1년은 중식당, 또 1년은 일식당, 마지막 1년은 양식당에서 일을 해보라. 그럼 망할 확률이 확 낮아진다. 만약 홀서빙하며 1년 더 고생하면 확률상 거의 망할 일이 없을 것이다. 특이한 인테리어는 좋은 목과 상권보다는 덜 중요하다고 본다. 악덕 건물주를 만나면 다 잡은 성공을 놓칠 수 있다. 시작할 때 5년 안에 그 가게를 사버리겠다는 당찬 각오를 해야 된다.” ◆ 대한민국 언론을 고발하다 그는 조류독감 등 각종 음식파동 관련 국내 언론의 보도 형태에 치를 떤다. “국내는 언론이 종결자이다. 정부는 안 믿어도 언론은 믿는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75℃ 이상에서 5분 이상 가열해 먹으면 감염의 위험이 없다는 게 과학적 결론이다. 그런데 언론은 시청률 때문인지 조류독감을 재앙처럼 보도했다. 전 세계에서 헬리콥터까지 띄워 살처분 장면을 방송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선정적이다. 그 순간 숱한 식당도 동시에 살처분된다는 사실을 절감해야 된다. 만약 모든 신문방송국이 오리·닭 관련 식당을 소유하고 있다면 과연 지금처럼 보도할지 모르겠다.” ‘착한식당 신드롬’을 일으킨 종합채널 채널 A의 인기 다큐 프로그램인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도 고발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이영돈씨! 나랑 한판 붙읍시다’란 제목을 앞세우고 관련 방송 내용을 40쪽에 걸쳐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MSG(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으면 착한식당’이란 기준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먹거리X파일은 화학조미료(이하 조미료)와 관련 국내외 학자의 긍정적 평가를 무시한다. 자기가 나쁘다고 하면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조미료 불신풍조까지 조장하고 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식당을 찾아 착한식당 꼬리표를 달아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전 세계 조미료가 한국 것과 동일한 성분인지 분석했으면 좋겠다. 그 프로그램이 주장하듯 조미료가 인체에 정말 나쁘다면 그 사실을 추적해 정부와 식품학회 등으로부터 검증받는 그런 프로그램에 더 치중했으면 더 좋겠다. 과학은 이미 ‘조미료가 인체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결론냈다. 그런데 그들은 혼자 그렇지 않다고 고집한다. 과학의 위에 군림하려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도 제주도의 한 맛집 식당 할머니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아마 전국의 식당주가 다 공감할 것이다. 제주도 토박이 할머니에게 조리과정을 보여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다 보여주었다. 중간에 조미료를 팍팍 집어넣었다. ‘할머니, 조미료를 막 써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할머니 말씀이 걸작이었다. ‘이걸 빼면 이 맛을 못 내! 그리고 이게 들어가야지 싱거운 맛은 싱겁지 않게 짠 맛은 짜지 않게 되는 거야!’ 결론부터 말하면 조미료는 몸에 해로운 것이 아니다. 김치나 젓갈을 발효시키듯 사탕수수를 발효시켜 만든다. 조미료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중요한 재료다. 넣고 안 넣고는 주인의 취향이다. 사용 유무를 갖고 우열을 판단해선 안 된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가 조미료에 대한 국민적 오해를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조미료의 주성분인 글루탐산은 우리 몸을 조절하는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쇠고기, 멸치, 버섯 등 천연물질에 포함되어 있다. 식품과 조미료를 통해 섭취하는 글루탐산은 똑같다.” 김 사장은 현재 이영돈 PD에게 공개 토론을 공개제안 해놓은 상태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4.25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8) 팔공산 음식공방 ‘노고추’ 배명자 대표
사찰 음식 전문가 선재스님에 전통장류·신토불이 음식 배워 식품회사 설립, 발효음식 제조 2005년 식당 차려 요리에 접목 해초물김치…톳배추김치… 발상의 전환, 이색김치 개발 팔공산의 지맥인 명마산 자락에 앉은 만선암(萬善庵)의 초봄 두릅의 안부가 궁금했다. 명마산은 김유신의 삼국통일 열망이 스며 있는 암산(岩山)이다. 근처 불굴사 토굴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고 앞을 바라볼 때 백마가 울면서 승천했다고 해서 붙여진 산 이름. 그렇다고 만선암이 무슨 암자 이름은 아니다. 사찰음식과 제철음식, 그리고 약선음식을 하나로 묶는 실험적 한식연구 공간인 음식공방 ‘노고추(老古錐)’의 본부다. 대구시 동구 능성동과 경산시 와촌면 경계에 있는 노고추. ‘오래 된 송곳’이란 상호인데 제법 운치가 있다. 갈수록 자연이 담긴 ‘제철음식 1번지’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여기는 대구 도심보다 보름 정도 늦게 봄이 도착한다. 이즈음 두릅의 싹에는 겨울과 봄의 기운이 혼재한다. 주차장 주변은 두릅과 엄나무가 휘감고 있다. 초입의 25개 돌계단이 미학적 곡선을 품어낸다. 져버린 동백 한 그루가 애처롭게 가는 겨울을 추억해준다. 돌계단 옆은 자그마한 계곡. 그 곁에 조성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두릅밭이 있다. 그 옆에 조릿대와 비슷하게 생긴 시누대가 집채만 한 군락을 이룬다. 이를 어쩌나! 잔디 마당은 민들레와 제비꽃 군단에 점령돼 가고 있다. 그런데 배명자 대표(61)는 뽑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Let it be’ 정신으로 일관한다. ‘힐링캠프에 농약이 웬말이냐’란 표정이다. 잔디 반 잡초 반 형국. 드문드문 흰 민들레가 교태로운 자태를 보여준다. 노고추 외형은 별장, 내부는 한옥 스타일. 대청 한편에 현악기 소리를 잘 뿜어내는 탄노이 스피커가 보인다. 마당엔 200여개의 옹기가 장관을 연출한다. 옹기마다 장과 메주 담근 날짜가 적혀있다. 그녀의 치밀함이다. ◆ 원래 조신한 다도 사범이었다 원래 식당 주인이 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를 일. 남편 하던 일이 잘못되면서 자신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형편이 좋았을 때는 다도에 심취했다. 20년 이상 명정차회를 통해 지역 차문화를 선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폼을 잡지 말고 일을 잡자고 결심한다. 원래 차공부를 하려면 자연스럽게 다식에 간여하고, 그런 과정에서 한식에 대한 나름의 안목이 형성된다. 팔공산 일대에 널리 깔린 풀들을 활용할 방안을 생각한 건 10여 년 전. 당시 팔공산 중턱의 시야가 넓게 트인 산 한 자락에 별장을 두고 있었다. 지천에 나고 있는 풀들을 음식에 접목해야겠다 생각하고는 재료별 효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효, 효소의 중요성에 대한 정보를 얻은 그는 2003년에 발효식품회사 ‘와촌식품’을 설립, 발효식품을 손수 만들어 선보이기 시작한다. 노고추는 2005년 4월, 와촌식품의 홍보와 겸해 그 식품을 음식에 접목시키고 응용하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운영하게 된 것. 1999년 사찰음식 전문가 선재 스님과의 인연을 다음 해 ‘차와 사찰음식’이란 행사로 그려낸다. 자기 몸속에 음식본능이 있다는 걸 자각한다. 그녀는 자기 음식에 네 가지 힘이 들어가 있다고 고백한다. “친정어머니가 몸소 보여주신 베풀고 배려하는 마음가짐, 시부모가 가르쳐주신 요리법, 선재 스님이 알려주신 전통장류와 신토불이 음식의 중요성, 그리고 마지막엔 다도생활을 통해 배운 중용(中庸)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처음부터 요리를 잘한 것으로 착각한다. “시어머니는 역시 고수입니다. ‘빈대떡은 식용유가 아니고 꼭 돼지기름에 부쳐야 맛있다’ ‘고기를 삶을 때는 항상 고기에 간이 배야 맛있다’고 귀띔해주었어요. 이런 안목은 절대 요리책과 학원에선 못 배우죠.” 한식연구가답게 효소와 장아찌, 그리고 된장·고추장·간장·김치는 물론 심지어 액젓까지 직접 만들어 팔고 있다. 만선암 바로 북측 뒤란 돌틈에 실험적으로 심어 본 차나무가 이젠 잘 자란다. 이제 녹차는 물론 뽕잎, 쑥, 민들레 등도 뜯어 차를 직접 만든다. ◆ 노고추 요리팁 원래 바쁜 나날. 그런데 몇 년 전 어떤 인연 때문에 난데없이 요리책 펴내는 데 진을 다 빼버렸다. 2011년 12월에 요리연구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문성실씨가 지인을 데리고 노고추에 놀러왔다. 그녀가 자기만 알고 있는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국을 이 잡듯 뒤지면서 한국푸드스토리를 추적하고 있는 조경자·박인경·황승희씨가 배 대표를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음식정보가 들어 있는 ‘시골 엄마밥’(상상출판 간)이 지난해 5월에 출간된다. 그 책을 정독했다. ‘열두 달 열두 가지 나물 이야기’ 대목에 요긴한 정보가 듬뿍 담겨 있었다. 거론된 나물은 시래기, 아주까리, 세발나물, 토란대, 톳나물, 다래순, 가지, 달래, 취나물, 뽕잎, 엄나무, 냉이 등이다. 나물은 어떻게 삶아야 할까. 말린 나물은 육안으로는 부드러운 것과 뻣뻣하고 거친 것을 구별하기 힘들다. 말린 나물은 찬물에 담가 삶는데, 이때 나물의 상태를 보아가며 시간을 조절한다. 억센 나물은 40~50분, 부드러운 건 10~20분이면 충분하다. 줄기를 손톱으로 눌러 손톱이 들어가면 충분히 익은 것이다. 냄비에 나물을 삶을 때는 불을 끄고 물이 식을 때까지 그대로 둬야 나물이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톳의 경우 마른 것과 생톳이 있는데 생톳은 살짝 데쳐 사용하면 되지만 마른 건 찬물에 30분 이상 불려 삶아 조리하고, 짠맛이 있어 간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맛국물의 비법도 알려준다. 육수는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 그녀의 육수 비법은 채소를 넣지 않는 것. 멸치, 다시마, 마른 표고버섯만으로 끓인다. 보통 무, 대파, 양파 등의 채소를 넣어 끓이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집에서 한 번 육수를 끓이면 때에 따라 며칠씩 두고 먹는 경우가 많은데 채소가 들어가면 쉽게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나 양파의 단맛이 어울리지 않는 음식에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소는 요리에 따라 즉석에서 넣어 먹는 게 더 맛있다. 맛국물은 모든 국물 요리의 기본이다. 재료를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해야 쓴맛이나 잡맛이 없다. 곰솥에 물 600㎖를 넣고 젖은 면포로 깨끗이 닦은 다시마를 넣어 1시간 정도 불려 불에 올려 끓인다. 다시마는 오래 끓이면 쓴맛이 나니 끓기 시작하면 조금 후에 건져내야 한다. 마른 팬에 볶아 수분을 없앤 멸치와 표고버섯을 넣고 다시 끓여 끓기 시작하면 중간 불로 줄여 30분 정도 더 끓인다. 포고는 생것보다 마른 것이 향과 맛이 더 진하다. 만들어 사용하는 효소 종류만 40여 가지. 근처에서 자연적으로 난 매실, 산초, 가죽, 두릅, 냉이, 쑥, 초피, 대나무 죽순, 오미자, 도라지, 돌배 등을 활용해 효소나 장아찌 등을 만든다. 청은 설탕과 청 재료를 1대 1 비율로 담그면 된다. 일반적으로 담근 후 100일이 지나 건더기를 건져내고 액만 발효시켜 먹는다. 초피액젓은 꽤 마니아가 많다. 초피액젓은 일명 ‘멸치액젓’. 초피는 경상도에선 ‘재피’라고 불리며, 추어탕이나 어탕 등의 비린 맛을 없애고 매운맛을 돋우는 힘을 갖고 있다. 남해에서 잡아올린 신선한 멸치와 간수를 뺀 천일염과 초피를 장독에 넣고 1년 이상 숙성시키면 비린 향이나 비린 맛이 나지 않는 액젓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생선소스’와도 비슷하다. 이 액젓은 감칠맛이 뛰어나 봄철 나물 요리에는 필수로 사용하고 미역국이나 북엇국의 간에도 도움을 준다. 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 취재 후기 그녀가 금세 밥상을 차려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근과 무를 갈아 만든 부침개였다. 또한 묵은 김치국물을 베이스로 채 썬 배와 파래를 갖고 오이냉채국 같은 물김치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민들레는 물론 달래, 냉이, 씀바귀 등 봄풀을 갖고 샐러드·겉절이 같은 이색김치를 잘 만든다. 곧 김치 관련 책이 한 권 더 나온다. 그녀가 지난해 펴낸 책 속의 이색적인 메뉴를 적어본다. 가지냉국, 마된장국, 마른오징어뭇국, 원추리된장국, 채계장, 초교탕, 토마토탕, 청둥호박 넣은 배추김치, 우엉김치, 톳배추김치…. 문리가 트이면 응용은 무한정이다. 아들이 그녀의 음식비법을 이어받고 있다. 호주에서 유학하던 한 대학생이 그녀한테 한식을 배우려고 요즘 별채에 머물고 있다. 부디 사계절 버전의 ‘노고추 비빔밥’까지 개발했으면 좋겠다.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940. (053)853-7722
2014.04.1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사찰음식 연구가’ 전남 장성군 백양사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이 소개하는 전라도 절밥의 진수호
항상 가고 싶었던 고즈넉하면서도 운치있는 전라도 사찰이 하나 있었다.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있는 고불총림 백양사다. 다들 가을이면 벌겋게 대취를 하는 아기단풍의 자태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지난 1일 ‘호남5매(湖南五梅)’ 중 하나로 불리는 백양사 고불매(古佛梅·천연기념물 제486호)가 만개했다. 1947년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백양사에 고불총림이 결성되면서 고불매라 칭해졌다. 참고로 호남 5매는 전남 승주군 선암사 무우전(無憂殿) 돌담길의 ‘선암매’, 광주 전남대 본관 앞의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수양매’ 등이다. 백양사 쌍계루 아래 연지는 전국적 포토존으로 각광을 받는다. 대구의 벚꽃은 이미 지고 있었지만 이날 백양사 초입의 해묵은 벚꽃은 이제 만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야 그 위용을 볼 수 있는 비자나무 군락지도 백양사에서 친견할 수 있었다. 천진암으로 가는 길 양편의 풍광은 전북 선암사, 전남 해남 대흥사 주변과 흡사했다. 팔공산과 비슬산권에 익순한 경상도 사람에겐 색다른 분위기와 풍경을 보여준다. 백양사 주변에는 8~10m급 비자나무 5천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기자는 지난 7일 꽃놀이 인파를 피해 월요일 오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사에서 불과 400m 떨어진 천진암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곳 주지인 정관 스님이 달성군 사찰육성위원을 위해 수선화 향기가 번지는 봄나물 한상차림을 마련했다. 정관 스님은 팔공산 동화사 시절 양진암 주지로 색다른 사찰음식을 선보여 많은 팬을 확보했고 조계종 사찰음식 전문가인 선재, 대안, 우관, 정문 스님 등과 한국 사찰음식 족보를 만들고 있다. 현재 전주대 국제조리학과에서 사찰음식을 가르치고 있다. 비구니 사찰인 천진암은 6·25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된다. 하지만 정안 스님 주도로 89년부터 불사를 개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절 뒤로는 정상 백학봉에서 내려오는 암벽이 우뚝하고 맞은편 계곡은 상록수인 비자나무와 활엽수가 뒤엉켜 깊으면서도 단아하고 그러면서도 옹골찬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천진암 올라가는 돌계단은 봄햇살을 붙들고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여태껏 본 절집 돌계단 중에 가장 친환경적이었다. 현호색, 벌꿀꽃, 제비꽃, 개불알꽃, 흰민들레 등 족히 50종이 넘는 야생화와 풀이 막돌 틈에서 형형색색의 꽃잎과 여린 순을 내밀고 있다. 대웅전 앞엔 수선화가 한 달째 꽃을 달고 있다. 바로 옆 언덕에 머위가 수북하게 돋아나 있다. 오후 1시 무렵 도착했다. 정관 스님은 생강나무의 노란꽃 같은 웃음을 내뱉으면서 돌계단 한 편에 앉아 꽃이름을 일일이 가르쳐주고 어떻게 요리를 해먹는지를 설명해주었다. 허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배가 고프다면서 공양간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절집 사람이 사하촌 사정에 너무 밝아도 추해보여. 가능한 한 절 주변에서 캐온 각종 식재료를 가장 간단한 양념만 갖고 즉석에서 요리해 먹는 게 미덕이지.” ◆천진암 사찰음식 대해부 시장을 보지 않아도 이 시절엔 도처에 먹을거리라서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하면 금세 멋진 밥상이 차려진다. 절 주변이 대형 ‘식재료 공급소’인 탓이다. 이날 밥은 차조밥이다. 일반 쌀밥은 절집 밥상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스님은 순창군 복흥면의 5일장을 잘 기웃거린다. 솔직히 요즘 절집에서 벼농사를 짓기는 어렵다. 쌀은 신도들이 갖고 오는 것으로 굴린다. 차조밥 옆엔 애쑥과 산취나물로 끓인 된장들깨국이 나온다. 지금 쑥과 취나물이 본격적으로 움을 내밀기 시작한다. 통상 부처님오신날 이전에 넉넉하게 채취해 말려두고 틈틈이 요리해 먹는다. “애쑥은 절 뒤편 계곡과 비자나무 주변에 산재해 있어. 정월 보름이 지나면 채취할 수 있는데 평지의 것보다 훨씬 자그마하면서도 향이 진한게 특징이지.” 5년 묵힌 된장이 나온다. 물이 끓을 때 애쑥을 넣는데 이때 산취나물은 한 번 데친 뒤 넣어야 부드러워진다. 취나물을 무칠 때도 요령이 있다. 연할 때는 집간장과 깨소금, 그리고 참기름을 섞어 무치면 되고 조금 질기면 된장에 무쳐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나물도 여러 종류를 큰 접시에 함께 담아내면 훨씬 모양도 좋고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접시 하나에 한 나물씩 담아내면 함께 낼 때보다 덜 맛있어 보인다는 걸 절감한다. 이날 큰 접시에는 취나물, 불미나리숙주무침, 봄동배추 대궁무침, 묵나물, 뽕잎나물, 아주까리(피마자) 잎 나물이 합창했다. 우엉잎 된장조림도 특이했다. 쪄낸 우엉잎도 쌈싸 먹도록 하지 않고 경상도 특유의 깻잎김치처럼 잎마다 견과류 가루가 묻은 양념장을 묻혀놓았다. 부침개와 튀김류도 길쭉한 도자기에 함께 냈다. 훨씬 모양이 좋았다. 두릅전, 흑임자 소스가 올라간 마, 우엉튀김, 다시마찹쌀부각이 파삭하게 웃는다. 절집에선 부각을 즐긴다. 찻잎은 물론 산야초, 각종 나뭇잎까지 다 해먹을 수 있다. 부각 만들기 중에 찹쌀풀 쑤기 과정이 있다. ◆하루장의 묘미를 만나다 김치도 이색적이었다. 돌나물과 불미나리가 들어간 물김치를 비롯해 갓김치, 뽕잎이 들어간 꼭 예전 백김치 같은 뽕잎김치, 고들빼기김치 등이다. 장아찌는 자소 매실장아찌, 제부도 함초 장아찌, 무말랭이, 방풍나물 장아찌 등이다. 마지막엔 오이·키위 드레싱이 가미된 과일샐러드가 나왔다. 이날 동원된 소스의 주재료는 흥미롭게도 된장이었다. 청양초 들기름 빡빡장과 된장 견과류 양념장이다. 미나리 대궁의 씹히는 맛과 숙주의 아삭한 맛이 어우러져 식감을 돋우는 불미나리숙주무침은 된장과 고추장이 들어가면 맛을 버리게 된다. 소금과 깨소금으로 살살 무쳐야 된다. 봄동 대궁무침도 스님한테는 만만한 요리다. 겨우내 눈밭에서 자란 대궁의 새순이 올라오면 손으로 뚝뚝 끊어 대궁이 무르도록 데쳐내는데 집간장, 고춧가루, 다진 청양고추, 깨소금, 청양초 효소, 블루베리 등을 넣어 매콤하게 무친다. 뽕잎나물은 어린 뽕잎을 가을에 채취해 삶아 말렸다가 묵나물로 무쳐낸 것이다. 말린 뽕잎을 무르게 푹 삶아서 집간장, 된장, 들기름 등으로 조물조물 무친 다음 팬에 덖듯이 볶는다. 한 김 식으면 깨소금으로 맛을낸다. 고추부각처럼 보였던 우엉튀김도 요리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엉은 찌지 않고 생것을 필러로 밀어 튀긴 다음 소금으로 간한다. 돌나물과 불미나리가 들어간 물김치의 경우도 풀을 쑤어 넣어야 한다. 돌나물과 불미나리는 깨끗이 다듬어 씻은 다음 우리밀을 되직하게 쑤어 식힌다. 오미자청·청양초청·소금간을 하여 국물을 만든 다음 돌나물, 불미나리에 붓는다. 스님이 하루장이 뭔지 질문을 한다. 다들 대답을 못하자 슬그머니 레시피를 알려준다. “일단 메주를 표고담인물에 소금을 넣고 2일간 불린다. 불어난 메주에 묵은지 국물을 자박하게 부어 보름 정도 숙성시키면 아주 시큼한 하루장이 되지. 이건 된장국 등에는 사용하지 않고 그 자체로 양념장을 겸한 반찬이지. 하루장 맛을 보다가 일반 식당의 공장된장을 맛보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내려온 느낌이랄까?” 이곳은 맑은 바람과 계곡물이 최고의 반찬이다. 간식으로 내오는 풍경소리도 물론 압권. 천진암을 떠날 때 나는 얼마나 정체불명의 가공식품에 갇혀 있는 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갑자기 사찰음식이 잘 갈아놓은‘조선낫’처럼 섬뜩하면서도 엄정해 보였다. 그런데 자꾸 한식의 연장에서 사찰요리를 논의한다. 덜어내고 빼는 게 사찰요리인데 그렇게 푸짐하고 맛있고 단백질 가득한 한식과 약선요리의 산해진미는 반사찰 음식적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Tip: 천진암 사찰음식스테이 올해 천진암이 큰 결심을 했다.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유명했던 백암선원을 일반에 공개했다. 동시에‘풋내’란 이름의 사찰음식스테이란 프로그램을 오픈해 호평을 받고 있다. 기존 템플스테이의 단점을 사찰음식적으로 보완한 것이다. 10명 정도 단체로 예약을 해야 되고 1박2일간 세 끼 제철절밥을 먹을 수 있다. 숙소는 천진암 계곡 위에 지어진 백암선방. 하절기엔 폭포소리를 들으면서 좌선할 수 있다. 5일전에 예약. 1인에 12만원. (061)392-0533
2014.04.1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달성군 사찰음식 이야기-‘비슬 발우비빔밥’ ‘비슬 백년밥상’
올해 개청 100주년을 맞은 달성군. 다들 달성공단만 운운한다. 아니다. ‘절의(節義)’의 고장이다. 일연 선사의 얼이 묻은 유가사와 비슬산 정상부에 조성된 대견사 등을 보듯 유교와 불교 문화가 잘 양립하고 있다. 특히 출중한 유학자가 다수 포진해 있다. 동방오현(東方五賢·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명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도동서원은 고종 2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은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 하나. 2011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다. 신라 흥덕왕 2년(827)에 도성국사가 창건한 사찰인 현풍 유가사.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위해 유가사 일원에서 35년간 머물렀다. 현풍면 지리 현풍곽씨 12정려각도 자랑거리. 한 문중에 12정려가 내려진 일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할 만하다. 하빈면 묘리 육신사(六臣祠)도 ‘지절(志節)’의 공간.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숨진 박팽년을 비롯해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셨다.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는 한말 전국 최고의 장서를 자랑하는 민간서고였다. 1900년 3월,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 피아노가 들어온 곳은 화원유원지(화원동산) 옆 사문진 나루터이다.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 유치곤 장군도 유가 출신이다. 정관 스님 도움 받아 레시피 개발 상표권 출원중…전국 마케팅 추진 발우비빔밥 집간장·집된장으로만 간 하고 마늘·파 등 오신채 사용 안해 주재료에 해초 첨가한 게 특징 백년밥상 모둠쌈밥·두부구이·버섯 팔보채 현대인 입맛 고려한 퓨전스타일 참기름 대신 들기름으로 맛 살려 설탕·물엿 대신 각종 자연 淸 활용 어릴 적 먹었던 시골밥상 떠올라 ◆숨겨진 명물 먹거리도 적잖다. 전국 3대 곰탕으로 등극한 박소선 현풍할매곰탕을 비롯해 하향주, 다사읍 부곡리 논메기매운탕, 가창 찐빵 등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달성군 농특산물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유가찹쌀’. 유가 지역 240여 농가에서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순도가 100%에 달해 청와대 등에서 매년 명절 선물용으로 대량 매입해가고 있다. 유가면 금리 유가찹쌀영농법인에서 직접 방앗간에서 도정을 하고 찹쌀떡, 한과, 산자 등을 제조해 판매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용‘옥포 참외’는 성주참외에 앞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출하된다. 다사의 멜론도 전국적 지명도를 갖고 있고 부추는 포항 영일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다. 다사와 화원이 부추 특산지. 연중 출하되는 게 특징. 정대 미나리는 청도 한재 미나리와 달리 연중 무휴로 생산되는 게 특징이고, 연 5~7회 출하된다. 청도 한재 미나리는 생채용으로 애용되지만 정대 미나리는 무침용으로 애용된다. 화원 명곡지구에서는 25가구, 화원 용문사 아랫마을에서도 5~8년 전부터 세 가구가 용문사 미나리를 생산한다. 달성군은 기능성 채소의 특산지로 거듭나고 있다. 하빈 지역에서 어성초, 삼백초, 개똥쑥을 3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2012년 택배건수가 2천여건에서 지난해 무려 2만3천여건으로 폭증했다. 전남 해남 강진 영광 등에서 하절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화과도 지난해 달성군에서 첫 출하됐다. 하빈 지역 8개 가구에서 생산을 하고 있다. 출하 시기는 매년 9월에서 11월 사이. ◆달성발 사찰음식…비슬 발우비빔밥과 백년밥상 지난 3월1일 비슬산 정상에 있는 대견사를 중창한 달성군은 사찰음식 보급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 달성군을 ‘사찰음식 1번지’로 만들기 위해 3년째 각종 사업을 전개 중이다. 2011년 사찰음식육성위원회를 발족한 뒤 사찰요리 연구가이자 경남 거창군 금수암 주지인 대안 스님 등을 초청해서 사찰음식 관련 요리사 양성 및 교육을 실시했다. 이어 사찰음식 전문점이 지정됐고, 민간인 주도로 달성사찰음식연구회까지 발족됐다. 이 과정에 팔공산 동화사 양진암 주지를 거쳐 전남 백양사 천진암 주지로 있는 정관 스님의 도움을 받아 ‘비슬 발우비빔밥’과 ‘비슬 백년밥상’을 개발한다. 군은 현재 두 음식에 대한 상표권을 서비스 출원 중이다. 전국적 인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브랜드마케팅도 할 계획이다. 달성군 사찰음식연구회(회장 전주연) 소속 10개 이상의 업소 주인이 의기투합을 했다. 레시피 확정을 위해 2년여간 무려 7차례 수정작업을 거쳤다. 연초에 백년밥상 레시피를 공개하기 위해 가창면 우록리 큰나무집에서 시식행사를 가졌다. ◆비슬 발우비빔밥이란 화학조미료는 절대 사양. 사찰음식이니 고기도 사용하지 않고 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 등 자극적인 ‘오신채(五辛菜)’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스님이 발우공양 때 사용하는 목기와 비슷한 발우그릇 혹은 유기를 사용하고 있다. 가급적 불가의 식기 스타일을 적용한다. 전국에선 드물게 해초와 채소를 한 그릇에 모셨다. 다시 말해 제주도의 대표적 잔치음식인 ‘몸국’의 주재료인 모자반(마재기)을 기존 비빔밥 주식재료에 섞었다. 고추장이 들어가면 기존 식재료 본연의 맛을 가리기 때문에 대신 집간장과 된장만으로 간을 했다. 각종 식재료(시래기, 콩잎, 모자반, 숙주나물, 미역과 다시마가루)를 프라이팬에서 집간장과 된장, 콩가루 등을 넣어 일차 볶은 뒤 그릇에 담아 향기도 그대로 보존한다. 달성군의 특산물이기도 한 시래기는 1시간 이상 불려 채 썰어 프라이팬에서 간장과 된장만으로 간해서 볶아낸다. 고명으로는 튀긴 미역과 김가루를 혼합해 밥 위에 뿌리는데, 미역과 김가루를 3대 7 비율로 섞는다. 나물을 볶을 때는 생콩가루와 들기름을 조금 사용한다. ◆비슬 백년밥상 덧칠을 거의 안 한 밥상이다. 최저의 양념으로 최고의 풍미를 만들고 있다. 조금은 퓨전스타일인 코스한정식 버전의 사찰음식이다. 최소의 제철 식재료, 짧은 요리시간, 그러면서도 식재료의 영양소·질감·향기를 극대화시켰다. 사찰음식의 주메뉴를 액면 그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입맛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입맛도 고려했다. 한과 조리법도 응용해서 버섯강정과 우엉강정을 만들어내거나 탕수육 버전을 활용해 모둠버섯 팔보채를 만들었다. 초밥(스시)과 비슷한 모둠쌈밥, 산초를 이용한 두부구이도 이색적인 맛이다. 특히 물미역 옆에 연근과 마를 곁들여 ‘기존 사찰음식은 너무 평범하고 너무 싱겁고 너무 채식류 일변도’란 지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수차례 레시피 수정 작업을 거쳤다. 사실 기존 지자체의 각종 밥상은 너무 화려하고 푸짐하고 컬러풀하다. 그게 옥에 티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맘, 삼베보자기 같은 맛을 유지하려고 했다. 수행 중인 스님이 먹는 밥상을 간접 체험하도록 배려했다. 가능한한 식재료를 적게 넣으면서도 식재료 본연의 맛의 스펙트럼은 최대한 팽창시켰다. 집간장과 집된장, 그리고 참기름 대신에 음식 본연의 색깔을 더욱 돋워주는 들기름에 중점을 두었다. 단맛을 낼 때도 기존 설탕과 물엿을 멀리했다. 산과 들에서 채취한 자연 재료를 갖고 각종 청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백년밥상 5대 청(오미자청, 복분자청, 청양초청, 매실청, 함초청)’이 태어난다. 연잎밥도 매우 단순해 오히려 깊이가 느껴진다. 기존 연잎밥은 메이크업이 과하다. 백년밥상의 식사용으로 나오는 연잎밥은 전국에서 순도가 가장 높은 현풍 유가찹쌀만 갖고 조리했다. 팥은 물론 견과류도 일절 넣지 않았다. 대신 된장에 들기름이 첨가된 ‘청양초 빡빡장’을 곁들여 먹도록 했다. 뭐랄까, 하절기 우엉잎에 강된장으로 쌈을 싸먹는 풍미다. 부족한 식물성 단백질을 보충하고 담백한 토장국의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모자반과 시래기, 그리고 콩가루와 무, 콩나물이 들어간 국을 낸다. 추억의 시골밥상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찰음식 상에서 거의 보기 힘든 메뉴도 있다. 바로 팔공산 동화사 양진암에서 태어난 ‘도토리묵구이’. 보통 도토리묵은 묵사발, 묵채 용으로 즐겨 사용되는데 이때 주로 양념간장을 많이 사용하지만 여기선 양념간장 대신에 장아찌로 맛을 낸 게 인상적이다. 이 밖에 백년밥상에서만 볼 수 있는 인기 메뉴로는 버섯초회, 가지떡꼬치, 물미역 연근 마 삼합 등이 있다. 1인분 1만5천원과 2만원 두 종류가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TIP=정관 스님이 지난달 28일부터 달성문화센터에서 업주 35명을 대상으로 레시피를 전수하고 있다. 논공읍의 일월정, 가창면 우록리의 큰나무집, 죽곡리의 정강희두부마을, 박곡리의 시목약선한정식, 다사읍의 디미방 등에서 이 음식을 취급하고 있다.
2014.04.0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7) 달서구 도원동 ‘참한우소갈비집’ 박순곤·신동애 부부
촘촘히 칼집낸 갈빗살 고루고루 스며든 양념 참숯불 위 ‘30초 예술’ 열무·물김치 입맛 돋워 쇠고깃국도 인기 메뉴 웅숭깊은 부부의 금실. 이것도 좋은 식재료가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구 달서구 도원동 청룡산 자락에 자리한 ‘참한우소갈비집’의 오너셰프 박순곤(57)·신동애(55) 부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부부는 항상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닌다. 입지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대구 도심 근처에 이런 풍광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식당 주변 산세가 빼어나다. 이끼 묻은 돌담,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지척에서 이 식당을 지켜보고 있다. 식당 메인홀 한 벽면도 감각적으로 처리했다. 예전 돌담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살려두었다. 코뚜레, 워낭 등 농기구도 인테리어로 활용했다. 육중한 무쇠 난로가 홀 전면에 당산나무처럼 서 있다. 박씨의 첫인상은 왠지 오너셰프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미국 영화배우 게리 쿠퍼 같은 핸섬한 눈매, 중년의 몸매임에도 군살 하나 붙지 않은 체격은 평소 그가 몸 관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잘하는가를 말해준다. 소갈비집치곤 꽤나 문화적이다. 이 집 소갈비는 마니아 사이에서 꽤 영향력을 행사한다. 소갈비란 식재료는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사람 손을 너무 잘 탄다. 갈비는 씨앗을 뿌려 농작물처럼 텃밭에서 수확할 수 없다. 믿을 만한 업자에게 부탁해 재료를 갖고 올 수밖에 없다. 도축과정과 유통과정에 주인이 직접 간여하기 어렵다. 그래서 좋은 고기를 확보하는 것이 잘 숙성시켜 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좋은 고기를 양심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관계자 확보가 이 업의 승부처. 하지만 사람 맘은 조석으로 변한다. 납품업자의 맘은 좋은 조건에 휘둘리기 마련. 평생 거래처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올해 오픈 10년을 맞으면서도 꾸준한 고기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 업자관리에 성공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절벽 앞으로 떼밀린 부부 남편의 초반기 인생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소갈비집 주인이 되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일을 벌였다. 1985년 대구 서부시장에서 의류사업을 했다. 결국 접고 만다. 이어 경북대 북문 앞에 ‘커피커피’란 커피숍도 차려 시내에 4개의 체인점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이 슬슬 줄어들었다. 이후 더욱 팍팍한 행로로 이어진다. 대구를 벗어나 쥐포와 황태 유통업에도 손을 댔다. 급상승 중이던 대구KBS방송총국 근처에 있던 안동갈비의 주인 김희곤씨(작고)로부터 마늘이 들어가는 안동식 소갈비구이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앞산순환도로변에 있던 카페 ‘후피스’도 그와 동업자가 함께 운영했던 업소이다. 그들과 함께 달서구 상인동에서 일정 매장 규모를 가진 갈비집 ‘느티나무’까지 꾸려봤다. 하지만 될 듯하다가 이것도 역시 운이 따라주지 않아 6개월 만에 문을 닫는다. 다시 축산물 유통업에 뛰어든다. 안동갈비 김 사장한테 갈비를 납품하기로 하고 경남 밀양과 창녕 등지의 한우를 대구로 유통시켰다. 노력하는 만큼 부가가치가 따라주지 않았다. 그럴 즈음 현재 업소의 부지에 대한 매매 정보를 입수하곤 은행 대출을 받아 매입에 나선다. 서울에 있던 둘째 형의 도움을 받아 땅을 사들인다. 당시 이 언저리엔 라이브 전원카페 ‘황토와 초가’가 있었다. ◆ 역시 식당할 팔자 신축을 하면서 세상 공부를 많이 한다. 하지만 입지가 문제였다. 당시 그곳은 장사하기에 너무 한적했다. 어두워지면 인적이 뚝 끊겼다. 남편이 한사코 거기를 고수했지만 아내는 내심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공사 기간만 10개월. 건물 신축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목수가 되고 배관공도 되고 벽돌공도 됐다. 웬만한 건 직접 다 만들었다. 자기 집이었기에 가능했다. 2004년 1월 대망의 개업을 하려고 하는데 날벼락이 떨어진다. 광우병 파동이었다. 갈비집은 줄초상이었다. 그도 할 수 없이 어탕국수로 작전상 후퇴를 했다. 지금은 거세한우이지만 개업초기 4년쯤 황소를 팔았다. 돌판에 고기를 올려 가스불로 구웠다. 맛이 아니었다. 고심한 끝에 참숯에 석쇠를 선택했다. 참숯직화구이가 정답이었다. ◆ 갈비요리의 어려움 갈비는 전국 어디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갈비는 품 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납품업자에 따라, 또 지역별로 갈비의 상태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안동갈비에 마늘이 등장하는 것도 지역색이다. 초창기는 경험을 믿고 직접 산지를 돌며 갈비를 구입해 왔다. 지금은 33㎏에 70여만원인 최고급 팔공상강한우를 사용한다. 오후 2시쯤 갈비 세 짝이 오면 발골도를 갖고 살점을 적출해내야 한다. 불판에 올릴 수 없는 잡부위 고기가 무려 40%에 육박한다. 1인분에 130g, 갈비 한 쪽 반 분량이다. 한 점에 2천원 안팎. 좋은 고기 확보도 어렵지만 그 고기를 손님이 먹기 좋게 잘 펴주는 전문기술자 확보도 쉽지는 않다. 일반인은 그냥 식칼로 대충 썰면 되는 줄 알지만, 고도의 숙련이 필요한 것이 갈비 장만술이다. 3시간 공임료가 10여만원. 좋은 갈비는 일단 지방이 적고 살코기가 많고 지방의 색도 눈처럼 하얗고 두께도 20㎝ 이상 두툼해야 된다. 암소는 지방이 많고 살이 적은 특징을 갖고 있다. 초창기엔 토종닭처럼 조금 쫄깃해 씹힘성이 있는 걸 냈는데 세상은 한없이 부드러운 걸 찾아 부부도 거세우로 라인을 변경한다. 안동갈비의 특징은 간장 양념을 베이스로 한 양념갈비가 아니라 극소량의 참기름과 대충 빻은 마늘을 소스로 갈비 특유의 느끼한 맛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참기름이 많아도, 마늘이 많아도 맛이 추락해 버린다. 주문과 동시에 마늘을 손으로 살짝 버무린다. 타이밍을 놓치면 맛도 사라진다. 더욱 어려운 대목은 고온의 참숯 위에 석쇠를 올려 30초 남짓한 짧은 시간에 굽기를 마쳐야 된다. 잠시 한눈을 팔면 금세 고기가 타버린다. 고급갈비 앞에서 잡담을 나누는 건 정말 생산성이 없는 처사. 오직 고기에만 집중을 해야 된다. 그게 미식가의 행동준칙 1호. 갈빗살에 일반 양념은 별로라고 생각했다. 안동식으로 굵직한 입자의 으깬 마늘에 적당한 참기름을 혼합했다. 하지만 양념 혼합률 찾아내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마늘도 고민거리. 의성과 창녕산을 놓고 저울질한다. 의성은 매운맛, 창녕은 즙맛이 진했다. 의성을 버렸다. 갈빗살에 양념을 무작정 입히면 맛이 겉돈다. 살 속으로 침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집 넣기의 대가를 모셨다. 적당한 깊이, 적당한 각도에 적당한 개수의 칼집이 갈빗살을 빗살무늬처럼 수놓는다. 도살한 뒤 3~4일 만에 고기가 나가고, 주문이 들어오면 큼지막한 쿠킹볼에 양념과 갈빗살을 넣고 예술적 감각으로 버무린다. 고수는 양념이 고루고루 스며드는 감을 안다. ◆ 사이드 메뉴의 중요성 곁반찬. 이것은 본메뉴보다 더 중요하다. 이게 무너지면 본메뉴도 불신을 받는다. 일단 식전 동치미에 최선을 다했다. 보릿가루로 담근 열무김치, 찹쌀가루가 들어간 물김치는 단맛을 최소화하고 새콤함을 돋운다. 텁텁한 입안에 그런 국물 한 숟가락이 식욕을 돋우는 건 당연지사. 특이하게 이 집에선 겉절이 미나리를 낸다. 양파소스에 찍어 먹도록 한다. 매운 고추가 들어간 부추전 위에 갈빗살을 올려 먹어보라고 권한다. 불고기 간장에 다시마, 배, 무, 대파 등 20종에 육박하는 갖은 식재료를 넣고 달여 만든 양파 소스도 팬이 많다. 상당수 단골은 이 집의 쇠고깃국에 한 표를 던진다. 갈비를 손질하면서 생긴 잡육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심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갈빗살을 이용한 쇠고깃국. 소갈비와 무, 대파, 토란 등이 주재료이다. 다시마를 기본육수로 한다. 초창기엔 20인분만 끓였다. 근처 직장인이 많이 찾자 양을 늘렸다. 이젠 매일 300인분을 끓인다. 점심 때가 되면 쇠고깃국 손님이 들끓는다. 그런데 국 옆에 앉은 밥맛이 절정이다. 알아보니 20㎏에 5만원에 육박하는 상주의 풍년정미소 작품이다. 쌀에 수분이 풍부해 차지기가 꼭 찹쌀 같다. 이런 밥맛은 여느 식당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든든한 건 상당수 직원이 장기근속자란 점. 부부는 직원도 혈육처럼 대한다. 직원이 매일 자기가 할 일이 뭔가를 스스로 알아서 챙기도록 최대한의 권한을 준다. 특히 고기 손질에서부터 숯불관리까지 온갖 잡무를 바느질처럼 챙겨주는 김 부장과 우 과장은 백만 원군. 젊은 시절 연극판에 몸담았고 클래식 애호가이기도 한 아내는 참으로 깊은 인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단골이 됐다. 벚꽃이 만개하면 이 집 갈빗살 지방은 더욱 고혹해진다. 갈빗살 1인분 1만7천원, 국밥 7천원, 육국수는 4천원. 영업은 오전 10시~오후 10시. 휴업은 명절연휴 사흘간. 달서구 도원동 1023번지. (053)632-4936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3.2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6) 수성구 ‘새재묵조밥’ 장성우 셰프
그 사내는 방금 일을 끝낸 ‘도공’ 같다. 푸짐한 몸집, 선한 미소, 자연스럽게 틀어올린 상투. 흙빛 한복과 잘 어울린다. 대구시교육청 정문 근처에 있는 청포묵 전문점인 ‘새재묵조밥’. 부부가 ‘집밥’처럼 상을 차린다. 장성우 오너셰프는 전국적 인지도가 있는 식초 연구가이다. 식당은 실험정신과 열정이 서려있다. 2층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는 간이 장독대에는 숙성 중인 각종 식초 항아리가 수북하다. ◆문경 촌놈… 대구로 입성하다 그의 양친(장창복·박남복)은 문경새재 초입에서 45년째 ‘소문난식당’이란 묵조밥 전문점을 운영한다. 조령산 등산객에게 먼저 사랑을 받으면서 전국적 명성을 갖게 됐다.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장 셰프는 2000년 대구로 온다. 부모가 워낙 묵조밥 때문에 고생하는 걸 봤기 때문에 절대 식당업에는 손을 안 대겠다고 작심한 상태. 처음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온라인 사업을 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음식 쪽으로 가고 있었다. 사무실 한 편에 묵을 널어놓고 묵말랭이를 만들고 있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묵 일이 정말 싫었다. 그러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식당을 차리기 전에 식자재 유통점부터 시작했다. 각종 좋은 식재료와 문경의 로컬푸드 등을 팔 작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진짜 좋은 음식과 식재료라면 소비자들이 매우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나의 단견이고 착각이었다. 일반 식당에서는 그 가치를 잘 몰랐다. 이미 그들은 저가 수입 식재료에 최면이 걸려 있었다.” 아침 일찍 북부버스정류장에서 부모가 보내준 식재료를 받아 와도 소비가 잘 안 되었다. 여기서 물러서야 되는가.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럼 나 혼자 음식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새재묵조밥이란 식당을 개업한다. ◆초창기 아주 단순했던 식단 처음에는 식단이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사계절 별로 메뉴가 달랐다. 봄에는 봄나물, 여름에는 장아찌, 가을에는 버섯류, 겨울에는 말린 부각류가 축을 이뤘다. 된장찌개도 아주 독특했다. “보통 정월장을 선호하는데 우리는 이월장을 담는다.” 청장, 중장, 진장 등 세 종류의 장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진장을 선택했다. 된장을 5년간 숙성시킨다. 간장의 경우 된장을 가르고 난 뒤 7년이 지난 걸 갖고 조리를 하고 찌개도 끓인다. “햇장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느 것보다 훨씬 진하고 깊은 맛이 난다.” 장아찌(취나물, 가죽나물, 냉이, 황태, 꿩)도 한 내공이 있었다. 많을 경우 30가지가 넘어갔다. 장아찌 담그는 법도 좀 다르다. “우리는 장아찌를 양념으로 이해한다. 고추장 반찬을 할 경우 고추장에 황태장아찌를 곱게 다져 넣어 양념을 만들면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감칠 맛이 더해진다.” 부추콩가루찜도 문경의 기운이 물씬 풍겨난다. “경북 북부권은 콩가루를 이용한 다양한 메뉴가 유행하는데 고향에선 연한 콩잎을 갖고 콩가루찜도 해먹는다.” 부각류(들깻잎, 방아잎, 가죽나무잎 등)도 특화 메뉴이다. 깻잎류의 경우 고향에서 직접 만들어 온다. 찹쌀풀을 묻혀 건조하는데 자칫 마르면서 대나무발에 달라붙는다. 이걸 뒤집으면 잘 부서진다. 그래서 달라붙기 전에 계속해 뒤집어 건조시켜야 한다. ◆퓨전 묵조밥으로 급선회 예상과 달리 장사가 안 됐다. 무조건 잘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좋은 음식과 돈이 되는 음식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과연 돈도 되는 착한 음식은 불가능할까. 속으로 퓨전이 절실하다고 판단한다. 그 첫 단추는 상차림의 구색 바꾸기였다. 처음에는 묵조밥을 위한 상차림에만 주력했다. 묵조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12가지 반찬, 솔잎식초가 전부였다. 그런데 고객 입장에서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함께 올렸다. 성공적이었다. 그가 식초에 매진하는 이유는 뭘까. 묵조밥을 하기 위해 통과의례처럼 해야되는 작업이 있었다. 간장·된장·고추장·장아찌·식초·조청 만들기였다. 이게 완비되어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식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식초는 참 매력적이다. 특히 숙성되는 과정에 변화가 매우 큰 발효음식이다. 된장은 발효된 콩의 찌꺼기이고 식초는 출발이 곡물(전분)이다. 발효되면서 전분과 전혀 다른 당분이 되고 그게 알코올이 되고 그게 식초가 되는 변화가 무쌍하다.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선 식초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그런데 식초를 잘 활용하니 음식이 훨씬 더 깊이 있고 풍성해졌다.” 한식에 들어가는 식초는 단순히 신맛만 염두에 둔다. 그러나 신맛과 단맛과 쓴맛과 독특한 부패향이 어우러진 것이 식초이다. 발효된 발효향이 독특하다. 신맛을 내지 않는 요리에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그는 기본적으로 샐러드, 겉절이류 등은 물론 신맛이 전혀 필요하지 않는 볶음·탕류에도 사용한다. 처음에 고객은 식초맛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에 다들 한 표를 주었다. 이후 그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발효 전문가 등을 찾으면서 미생물 발효공학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를 한다.진주, 미역, 차조기, 우엉, 연근 등을 갖고도 식초를 만들어 봤다. 문경과 대구에 60여개의 식초 옹기가 있다. 양친 문경새재 초입서 45년째 묵조밥집 운영 “피는 못속여” 진장으로 만든 된장찌개 일품 오이물김치 ‘외창국’도 개발 음식에 식초 활용, 깊이 더해 ◆퓨전묵조밥 식단을 보니 이후 식단은 조촐한 백반상에서 풀코스 한정식으로 변한다. 전통요리에 자연요리를 접목시켰다. 일종의 ‘힐링약선식’이었다. 그는 ‘오복탕’을 재현했다. 1920년대 기방에서 가장 인기있던 요리 중의 하나였는데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개고기 등 다섯 가지 고기류, 다섯 가지 버섯류, 다섯 가지 채소류, 다섯 가지 곡물을 넣고 국물이 자작하도록 볶은 요리다. 일명 ‘탕평채’로 불리는 청포채도 먹음직스럽다. 청포묵, 숙주나물, 표고버섯, 목이버섯, 당근채·오이·계란·김·묵은지 채 등에 마늘소스를 곁들인다. 하절기에는 닭고기 삶은 물에 검은 깨를 곱게 갈아서 탕처럼 먹는 임자수탕과 오이물김치의 일종인 외창국 등도 개발한다. 독특하면서 대중적이고 푸짐하고 서민적으로 세팅되는 것에 모두 좋아했다. 여느 한정식당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메뉴의 출현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물론 제 것이 정답도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부모도 역시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웰빙에서 힐링시대로 가고 있다. 시대에 맞게 식단을 바꾼 것이다.” ◆이젠 발효전도사로 변신 그런 와중에 발효전문가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다. 대구MBC에서 발효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이 과정에 전국에 부는 식초 돌풍의 허상을 목격한다. -최근 식초전문가의 폐단은 뭐라고 보는가.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고 맹목적으로 덤벼든다. ‘묻지마 산야초 효소 신드롬’이 왜곡적으로 확산되고, 식초라면 무조건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지면 이건 좀 곤란한 것 같다. 우리는 발효음식을 만드는 장인이지 의사·약사가 아니다. 우리는 좋은 발효음식을 만드는 선에서 끝이 나야 된다. 식초도 약품이 아니고 식품일 뿐이다.” -숙성과 발효의 차이는. “발효가 된 맛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라면 숙성은 그걸 동그라미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발효의 기술과 숙성의 기술은 환경이 다르다. 대부분 오래 되면 무조건 숙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발효가 오래된 것과 숙성을 시켜서 오래 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설탕 조절이 중요하다. 매실청은 매실 전체양의 120~130%, 효소는 65~68%, 식초는 15~18%의 설탕만 넣어야 한다. 그런데 다들 설탕을 1대 1 비율로 넣으면 되는 줄로 안다. 설탕이 너무 많으면 잔당이 포도당·과당으로 변하지 않고 체내로 흡수돼 당뇨병의 한 원인제공을 할 수 있다고 분석된다.” ▶대구시 수성구 수성2가동. (053)753-6969. 영업시간 오전 10시~밤 10시. 묵조밥정식 1만2천원. 청포채 1만7천원. 오복탕 2만원. ◆취재후기 그는 양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발효토피아’를 구축하고 싶단다. 발효의 모든 걸 보여주고 시식도 하고 연구도 하고 교육도 할 수 있는 복합 식문화공간을 고향에 만드는 게 꿈이다. 물론 현재 업소는 그대로 대구에 두고서 말이다. 고향에 과수원도 마련했다. 조선소나무, 배나무, 감나무, 매화, 야생머루, 블루베리 등 40여종의 과수목을 심었다. 2주에 한번 내려가서 손을 보고 온다. 취나물, 다래순, 망초, 고사리, 홋잎, 나락냉이, 씀바귀 등은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조령산 일원에서 채집해서 묵나물로 만든다. 이런 버전의 청포묵 전문점은 전라도에 가도 보기 힘들다. 혈기방장한 한 사내가 발효음식에 올인했다는 것, 그가 음식의 불모지라 오해받는 대구에 터를 잡았다는 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3.2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5) 대구 달서구 두류동 ‘조선육개장’ 부부셰프
지난해 4월1일 대구 육개장 업계에 도전장을 낸 업소가 있다. 대구시 달서구 두류동에 있는 육개장 전문점인 ‘조선육개장’을 찾았다. 상호가 자못 진지하고 도발적이다. 한반도 바탕에 깔아놓은 ‘조선 38 육개장’이란 빨간색 상호가 금세 침샘을 자극한다. 예전 같았으면 ‘조선’이란 단어 때문에 모르긴 해도 정보기관의 사찰을 받았을 것이다. 오너셰프 부부의 첫인상이 조금은 애처러워 보인다. 하지만 ‘악발이 정신’으로 진군한다. 가게는 북향. 그래서 점심 무렵인데도 어둑하다. 하지만 가게 안은 다른 세상이다. 정남향 분위기다.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이마에 돋아난 구슬땀을 연신 훔쳐내며 내국인보다 더 맛있게 먹고 있다. 국제적 맛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희한하게 나이 든 손님보다 젊은 층이 더 강세를 보인다. 쇠고깃국이 기성세대의 전유물이란 통념이 여기선 적용되지 않는다.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각. 홀 한편에선 새색시처럼 생긴 박혜진 사장이 방금 푹 삶겨 나와 김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사태살을 결대로 찢어내고 있다. 여느 국집에선 자주 목격하기 힘든 광경이다. 한사코 지면에 소개되길 거북해하는 남편.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비장했다. 뭐랄까,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한테서나 느껴지는 그런 비장감이다. 그는 육개장을 만나기 전 지인한테 큰 ‘봉변’을 당했다.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자살 직전까지 갔다. 벼랑 끝에서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를 보는 순간 ‘살아남아야 된다’고 자기를 혹독하게 채찍질했다. 팔도의 유명 육개장 섭렵 고진감래끝 명품육수 창조 사태살 결대로 찢어 끓여 곰탕·쇠고기국·육개장 섞어놓은 듯한 감칠맛 자랑 ◆ 조선육개장 맛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조선 육개장 만들기 프로젝트의 1단계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림 육개장 레시피를 전수받는 것. 일단 국일따로, 진골목식당, 옛집육개장, 벙글벙글, 온천골 등 대구의 육개장 관련 명가를 모두 방문해 맛과 식재료 분석에 들어간다. 그런데 자신들이 생각하던 그 맛이 아니었다. 다들 쇠고기국밥 스타일에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이 찾는 그 육개장 맛을 위해 시식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렇게 해서 문배동 육칼국수(서울), 소담골(인천), 조선의 육개장(서울) 등을 비롯해 부산, 전라도 순천, 경남 울산시 등 전국의 내로라하는 업소를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정확한 레시피를 전수할 식당주는 없었다. 그냥 방문 업소의 인테리어, 메뉴구성, 레시피와 맛의 상관관계 등을 육안으로 체크한다. 거의 1년간 혀가 얼얼할 정도로 팔도의 명품 육개장을 체험했다. 뭔가 감이 왔다. 2단계는 사골로 육수 추출하기. 사골 육수 빼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실제 끓여 보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불관리를 잘못해서 뼈와 고기가 탔다. 물이 너무 많아 맹탕으로 추락하기 일쑤였다. 사골에 포함된 골수 성분을 효율적으로 뽑기 위해선 가열 방식을 새롭게 조정해야만 했다. 일단 초벌로 5시간 정도 끓였다. 초탕용 사골에 물을 붓고 다시 3~4시간 중탕해서 육수를 뽑는다. 그 뼈에 다시 물을 붓고 3시간 끓여 3차 육수를 낸다. 농도가 각기 다른 육수를 같은 비율로 혼합한다. “초탕 육수는 너무 진해 먹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두세 번째 육수는 초탕에 비해 맛이 옅어 초탕과 섞어야 제맛이 납니다. 그런데 혼합비율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육수 혼합비율의 정답을 알아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산고(産苦)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끓기 전까지는 강불로 가고,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간다. 최소 2시간 이상 끓여야 비로소 육수가 진회색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10인분 솥을 갖고 실험을 했다. 자신들이 생각한 그 맛에 도달하지 않으면 계속 실험을 한다. 사골만 뺀다고 일이 다 되는 게 아니다. 그 육수를 갖고 국을 끓여야 하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은 전쟁이다. 파, 토란 등 각종 식재료를 알맞게 삶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왜 육개장 제대로 끓이기가 어려운지를 알 것 같았다. 한우 사골값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잡뼈를 섞어 끓여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맛이 형편없었다. “통상 곰탕 육수는 누른색이고, 설렁탕은 뼈를 위주로 끓여서 하얀색이고, 사골만 갖고 끓이면 절대 우유처럼 뽀얀 빛이 될 수 없습니다. 회백색에서 멈추고 맙니다.” ◆ 시행착오 거듭한 국 끓이기 천신만고 끝에 사골육수가 태어났다. 그 육수에 어떤 재료를 넣어 국을 끓일 것인가가 난관이었다. 메인 부재료는 대파·토란줄기·고사리. 거기에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대령했다. “대구식 육개장에는 무가 인기 재료인데 저희집에선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렁한 무의 식감이 고밀도 육수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분석했습니다.” 고춧가루도 정말 중요하다. 중국산을 사용하면 금세 가루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마늘도 한꺼번에 많이 구입해 냉동실에 보관해 사용하면 마늘 특유의 향이 거의 소멸된다. 비싼 국내산 마늘을 당일 국을 끓일 때 전격적으로 투입한다. 대파는 역시 동절기용이 제격. 손님이 뜸한 오후에 대구시 북구 매천시장으로 가서 40~50단 사 갖고 온다. 파뿌리는 육수 뺄 때 넣는다. 그럼 기름기의 텁텁함과 느끼함이 상당히 상쇄된다. 처음에는 안 넣다가 나중에 시행착오 끝에 넣게 됐다. 토란대 갈무리도 난관 중의 난관. 씹는 느낌이 좋지만 너무 많이 삶으면 물컹해지고 덜 삶으면 질겨진다. 이 감각이 하루 아침에 터득된 게 아니다. 1시간 정도 끓여 찬물에 헹구고, 적당량 썰어둔다. 특히 중국산 토란대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 여느 식당에서 선호하는데, 껍질을 제대로 벗겨 독성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을 먹으면 너무 아려 식도가 마비될 수도 있다. 사태살은 고령에서 들어온다. 삶은 뒤 매일 오후 2시쯤 아내가 일일이 찢어놓는다. “지역의 육개장은 식칼로 고기를 썰어 끓이는데, 역시 전통 육개장은 개장처럼 고기를 결대로 찢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저희는 다른 메뉴가 별로 없고 육개장 하나에 매달리니 일일이 수작업으로 고기를 장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대구의 가정식 쇠고기국밥에 애용되는 숙주나물도 식감이 고사리만 못해 뺐다. 서울에서 많이 사용하는 당면과 계란 등은 국물을 텁텁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양념도 진국처럼 뺐다. 10여 가지 약재에 고춧가루 등을 넣고 빚었는데 개업 후 4~5개월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손님들은 덜 짜게, 덜 맵게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 기준이 제각각 달라 망연자실했다. “주인은 남의 지적에 민감하면서도 부화뇌동하면 안됩니다. 줏대를 가져야 합니다.” 국은 백철솥에서 매일 200인분 끓인다. 육수에 마늘만 빼고 부재료를 한꺼번에 넣는다. 물, 불, 사골, 식재료, 양념 등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이었다. 염도는 9%로 정했다. 매운맛도 두 종류(보통맛과 매운맛)로 차별화했다. 손님의 스타일에 맞도록 배려한 것. 손님이 많을 때에 대비해 한꺼번에 400인분도 끓였는데 맛이 급감했다. 그래서 한때 단골을 많이 잃기도 했다. 초심과 기본을 지키는 게 맛의 원천이란 걸 알았다. 이 집 육개장 표면엔 벌건 기름이 강하게 형성된다. “기름 맛도 좋아야 되죠. 사골기름과 고춧가루가 연출한 붉은 기운이니 몸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상당수 식당에서는 단가만 생각해 공장에서 나온 저렴한 짝퉁 고추기름을 사용한다. 기름이 육개장 진미를 가릴 수밖에 없다. ◆ 고진감래 육개장 일단 부부의 열정에 한 표 던진다. 곰탕과 쇠고깃국과 육개장을 섞어 놓은 듯한 아주 육중한 육개장. 자기만의 조선육개장 레시피 매뉴얼이 완성되던 밤. 부부는 부둥켜 안았단다. ‘고진감래(苦盡甘來)’였을 것이다. 이들은 지인에게 오픈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승부는 불특정다수를 향해야 빨리 난다고 믿었다. 맞는 말이다. 특별한 맛 때문에 이런저런 데서 체인점을 내달라고 하지만 부부는 거부했다. 현재는 이 집 하나만 지키자고 다짐했다. ‘주인이 먹지 않는 육개장, 결국 남도 등을 돌린다’고 생각해 하루 한 끼는 반드시 자기 육개장을 먹는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 여기 단골층은 10~70대. 나이 제한이 없다. 한 그릇 6천500원. 연중무휴.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다. 부디, 초심(初心)이 영원하길…. 대구 달서구 두류동 470-16. (053)295-3312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3.1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4) 북구 고성동 진국닭개장 이동수·이기주 부부셰프
먹기는 쉽지만 국은 뭐든지 간에 참 끓이기 어렵다. 국에 들어가는 식재료의 여물기가 서로 다르다. 그걸 무시하고 한꺼번에 끓이면 재료가 너무 물러버린다. 식감이 급감할 수밖에 없다. 국은 한 번 먹고 끝이 아니라 남은 걸 잘 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하루에 100명 이상이 몰리는 대중식당에선 한꺼번에 수백 명분을 끓여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데워 내 줄 수밖에 없다. 자칫 하절기 재고관리를 잘 못하면 변질돼 다 버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도 야기된다. 예전에 경상도 대표적 복날 음식으로 유행했지만 이젠 식당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메뉴가 있다. 바로 닭개장이다. 최근 한 독자로부터 북구 고성동에 상당한 내공을 가진 닭개장 전문점이 있다고 제보를 받았다. 확인해 본 결과 그 집은 닭개장 단품만 팔고 있었다. 그 메뉴에 나름 확신과 경쟁력이 없고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라인이 아니다. 진국닭개장이 기존 대구 육개장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 진국닭개장까지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이동수·이기주 부부셰프. 특히 남편 이동수씨의 표정은 전장으로 나가기 직전의 군인처럼 당당한 기백 같은 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경주 양동마을의 기틀을 마련한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식당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에 직장생활을 했고 1993년부터 건축자재 대리점을 꾸려나갔다. 순조로운 나날이었는데 어느 날 직원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한다. 설상가상 IMF외환위기 여파로 인한 부도까지 발생, 한 가정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2004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멀티플레이어 생활을 시작한다. 사무실 문을 닫으면 밤에도 쉬지 않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숯불 바비큐 체인점을 꾸려갔다. “멀리서 보이는 숲도 가까이 가보면 달라 보이듯 새로운 사업도 그랬습니다. 평소 집에서도 음식하는 게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장사는 취미생활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절감했습니다. 평소 대충대충 움직이면 돈이 손쉽게 벌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2005년 경험부족으로 백기를 들고 식당을 접는다. 하지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뭔가 조금만 보강하면 식당이 본궤도에 오를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남구 대명동 영대네거리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다시 값비싼 교훈을 얻는다. 음식에 별다른 기술이 없어 일단 체인점으로 갔는데 체인사업부의 무성의와 운영미숙, 믿었던 주방장의 횡포 등으로 또다시 고배를 마신다. 사는 게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별난버섯집과 주원산오리는 부부에게 멍에가 되었다. 체인가입비와 시설비, 인건비 등의 투자비, 가게 세도 못 낼 정도의 형편없는 수입으로 인해 6년간 죽을 고생을 한다. “궁리 끝에 이 자리에서는 재기 불능이고, 다른 장소에서 우리만의 메뉴를 개발해서 주방장 없이 아내와 제가 직접 운영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역시 두 마리 토끼는 무리였다. 건축자재 사업도 접는다. IMF 환란 때 생활苦 체인점 운영 실패연속 “우리만의 메뉴가 살길” 작고한 모친 해주시던 닭개장·빈대떡에 승부 4년간 시행착오 끝 화학조미료 사용 않고 변함없는 국물 맛 유지 ◆닭개장에 가족의 모든 걸 걸다 뭘 할까. 가족회의 끝에 자식의 건의로 부부가 자주 해 먹던 닭개장과 빈대떡으로 신 메뉴를 결정한다. 두 음식 모두 반가 종부의 손맛을 갖고 있었던 작고한 모친이 자주 해주시던 집안음식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일단 쇠고기국은 흔하지만 닭으로 만든 육개장은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저희만 열심히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올인 할 메뉴는 정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어떻게(HOW)였다. 메뉴 선정보다 그 메뉴를 어떻게 절정의 수준으로 도약시키는가가 더 난제였다. 지금의 맛을 내기까지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구는 물론 ‘우리나라 최고의 닭개장’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했으나 정말 어려웠다. 이왕 하는 거라면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의 착한식당에 선정될 정도로 몰고가자고 다짐한다. 문제는 화학조미료. 살펴보니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소량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미료가 특별한 재주가 없는 조리사에게 일정한 맛을 내게 해주는 식품계의 수호천사였지만 이런 식으로 가업으로 이어갈 식당을 만든다는 건 천부당만부당 할 것 같았다. 그래선 절대 소문날 닭개장이 될 수 없었다. ◆닭뼈 육수가 묘수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문득, ‘삼계탕의 육수는 닭발과 닭뼈에서 추출한 육수를 사용하던데’란 생각에 그 육수를 닭개장에 접목시켜 봤습니다. 닭뼈를 10시간 가까이 진액으로 고아 내니 아주 좋은 맛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육수의 혼합비율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었다. 밍밍했다가 느끼해졌다가 신맛이 나다가 너무 뻑뻑해졌다가. 정말 맛이 들쭉날쭉했다. 더 큰 문제는 들어가야 될 채소의 구성 비율, 양념의 구성비율에 따라 또 맛이 달라졌다. 또한 끓이는 시간에 따라도 달라졌다. 그렇게 4년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 조미료 맛을 안 손님은 갑자기 조미료 맛이 안 느껴지자 그때부터 맛이 변했다면서 발길을 끓었다. 음식의 맛이 결국 ‘혀 끝의 예술’이었다. 한 번 끓이면 100인분, 잠시 방심하면 금방 맛이 가버려 다 버려야만 했다. 맛이 없어 버리고 잘못 보관해서 버리고. “왜 국 끓이는 게 이다지도 어려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국솥으로 뛰어들고 싶더군요.” 닭개장 앞에 진국이란 말을 붙인 건 그만큼 부모를 위해 약을 달이듯 육수를 뺐기 때문이다. 닭개장에는 유별나게 기름이 많이 엉긴다. 그는 육수를 추출하는 순간 위로 떠오르는 기름을 모두 걷어냈다. 2011년 5월에 오픈했을 때 아는 사람을 불러오기 위한 형식적 오픈행사를 하지 않았다.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지인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맘을 먹는다. 그런 비장한 각오가 먹혔던지 4년 만에 거의 일정한 국물맛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며칠 계속 비슷한 맛이 나오자 남편은 주방 한편에서 혼자 울컥한 가슴을 몇번이나 쓸어내려야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처음 양념을 만들 때는 모친이 닭개장 만들 때 하던 양념을 떠올리며 배합비율을 조절하였으나 실패였다. 어떨 때는 시중의 닭개장 집들을 수소문해서 시식해 봤지만 조미료 맛이 너무 강해 내용물을 참고할 수가 없었다. 줄 선다는 어떤 집은 맵고, 조미료탕이어서 몇 숟갈 못 먹고 곧바로 설사가 났다. 부부는 다짐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자고. 부부는 매일 점심때 닭개장을 먹는다. 미세한 맛의 변화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객지에 있는 아이들한테도 보내주고 있다. 현재로는 현상유지 하기가 급급하나 조금 더 분발해서 형편이 호전되면 무료급식소도 같이 하고 싶단다. 사업실패로 없어보니 없는사람 사정도 잘 알게 되었다. 식당하기 전에는 목욕봉사도 다녔고, 성당의 성가대도 했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모든 걸 접고 오직 식당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닭개장은 왜 육개장보다 끓이기가 더 힘들까 육개장은 쇠고기를 잘라서 넣으면 끝인데 닭개장은 닭을 삶아서 찢고, 찢는 시간이 2시간 정도 걸린다. 뼈와 살과 기름을 분리시키는 과정도 있다. 일반 쇠고기국보다 더 기후에 민감하다. 하절기에는 100% 냉장고에 들어가야 한다. 손님 올 때만 다른 냄비에 덜어내 끓여야 한다. 100인분을 끓이고 즉시 모두 얼음물에 식힌다. 그래야 채소가 물러지지 않는다. 여름철에는 1시간 이상 밖에 두면 벌써 냄새가 난다. 잠시 한숨을 돌릴 수가 없다. 이 집에선 육계를 사용한다. 원래 닭개장은 폐계를 이용해서 끓이는데 3~4시간 끓여야 한다. 토종닭은 솔직히 가격이 워낙 비싸서 단가가 맞지 않았다. 닭개장은 고기보다 국물맛이다. 그러기 위해선 채소 비율을 잘 갈무리해야 된다. 초창기에는 우거지, 대파, 콩나물, 고사리, 부추,토란 등을 넣고 끓였는데 토란은 즉시 먹을 때는 좋은데 며칠 지나면 급격하게 물러져서 제 식감을 못 내서 없앤다. 무도 넣었다가 별로라서 뺀다. 콩나물도 시원함을 위해 머리를 딴다. ◆비법 레시피(100인분) 100인분 만들기 위해선 국산 고춧가루 600g, 베트남 땡초 110g, 천일염 410g 안팎, 마늘 1㎏, 닭 10마리, 우거지 5㎏ 안팎, 대파 8㎏, 두절콩나물 5㎏, 고사리 1㎏, 부추 3단, 밀가루 200g, 월계수잎 적당량, 생강 60g, 닭뼈 진액 1.4㎏, 이밖에 후추, 액젓, 집간장, 국간장 적당량이 필요하다. ①데친 각종 채소를 양념으로 버무려 1시간 이상 둔다. ②닭을 삶을 때 모양이 부서지지 않도록 40~45분 삶는다. ③닭살을 발라내고 남은 뼈, 껍질, 파 뿌리는 별도로 삶아 우려낸다. 닭 삶은 육수에 ①의 채소를 넣고 다음으로 고기 넣고 ③의 우려낸 육수를 넣고 40분 정도 끓여 준다. 채소는 질긴 정도, 푸른색이 많은 계절, 흰대가 많을 때 등 상황에 따라 양을 조절해 주고 있다. 음식에 더 중요한 게 실력보다 정성과 진심 아닐까. 북구 고성동 3가 57번지. (053)353-5213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3.0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3) 대구 달성군 가창면 ‘돈마을’ 조동범·윤영숙 부부호
이 집 여사장(윤영숙) 웃음소리는 정평이 나있다. 반면 남편은 항상 새색시처럼 발그레하게 미소짓는다. 정전이 되었을 때 촛불이 없더라도 부부의 미소로 홀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화려해 보이는 백조라도 수면 아래에선 쉴 틈 없이 물갈퀴질을 해야 하듯 그들이 지나온 삶은 녹록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팍팍했지만 부부애로 밀고 나갔다. IMF 외환위기 때 직격탄을 맞아 사업을 접은 남편 조동범씨(59). 사업지였던 부산에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었다. 1998년 사업을 접고 가족과 함께 청도로 놀러왔다. 만추였다. 부부는 팔조령 아랫마을 남지장사 가는 길 양 옆 은행나무의 자태에 매료된다. 아내는 이렇게 예쁜 은행잎이 있는 동네에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렇게 덜컥 남지장사 근처 최정산 해발 550m 고지 계곡 자락에 눌러앉아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식당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전원에서 재기의 날만 키워나갔다. 어느 날 남편이 새벽에 벌떡 일어나 아내에게 “우리 식당하자”라고 말했다. 평소 미식가였던 남편. 집에서 즐겨 해먹던 돼지고기 메뉴가 몇 가지 있었다. 그 메뉴로 가보자고 했다. 결국 말이 씨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때 직격탄 우연히 가족과 놀러 온 남지장사 부근 마을 매료 “우리 식당이나 해볼까” 남편 제안으로 덜컥 시작 약용으로 먹던 솔잎식초 특별한 소스 곁들여 돼지갈비요리에 접목 솔잎향의 밥도 입맛 자극 그런데 고기는 누가 굽지? 남편이 자기가 굽는다고 했다. 자연스레 아내는 나머지를 책임졌다. 그날로 작전에 돌입했다. 상호는 ‘돈마을’로 했다. ‘돌고 도는 돼지 같은 돈 인생, 고기 먹고 행복하자 잘살자’란 의미다. 둘은 정말 왕초보였다. 식당의 ‘식’자도 몰랐다. 테이블 20여개, 그럼 방석이 80개, 한꺼번에 다 씻으려면 여벌로 80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모두 160개를 구매할 정도로 요령이 없었다. 미래는 극도로 불투명했다. 항상 1년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업종으로 갈 요량이었다. 1년 하니 조금 더 견디면 될 것도 같아 3년을 더 했다. 완전 백지에 그림을 그려나간 꼴이다. 하지만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지치지 않는 아내의 옹달샘표 미소와 수더분함이었다. 그녀에겐 천적이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손님도 다 살갑게 대했다. 돼지갈비가 덜 굽혀 핏물이 돌아도 여 사장의 애교에 모두 다 쓰러졌다. 처음 있던 백록 마을은 6개월은 봄·여름이고, 나머지는 거의 겨울이다. 식당 장소로는 상당히 열악했다. 힘이 들 때면 남편이 기운을 돋운다. “무슨 일이라도 적어도 10년은 해야 뭔가가 이루어진다.” ◆ 히든카드 메뉴는 솔잎돼지갈비 수호천사 메뉴는 역시 솔잎돼지갈비였다. 솔잎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는 늘 혈압이 좋지 않았다. 남편은 항상 자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미안했다. 그래서 혈압에 좋다는 솔잎효소식초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다. 다행히 근처에 조선솔이 널려 있었다. 아는 손님이 소개를 해줘서 봉화 청량사에서 솔바람차 담그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걸 응용해서 솔잎식초를 약으로 먹다가 음식과 접목시켰다. 처음에는 솔잎이 등장하지 않았다. 참숯통돼지갈비를 냈다. 그러다가 솔잎돼지갈비로 갈아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닭도 등장시키고 잉어찜에도 도전했다. 잉어는 근처 연못에서 키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촌극이 있다. 개업을 하니 지인들이 꽤 모였다. 다음날 손님 100여명이 밀어닥칠 줄 알았다. 세상 물정에 달통한 이웃이 와서 “당신들 내일 할 일 없을 거니까 우리 집에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속으로 무슨 소금 뿌리는 소린가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이웃의 예상이 적중했다. 정말 한 명도 안 왔다. 아차 싶어 동동주와 ‘찌짐’을 가지고 이웃을 방문했다. 그 이웃이 지금까지 부부를 도와주고 있다. 부부의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을 넘겼다. 나름의 메뉴라인도 형성되었다. 단골이 찾아오기에 너무 먼 곳에 있어 현재 자리로 이사를 한다. 2010년이었다. 잉어찜 대신 솔잎조림닭이 들어왔다. ◆ 방 안에 우물이 들어온 사연 돈마을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되어도 좋을 우물이 있다. 그것도 홀 안에 있다. 설계 과정에서 우물을 살린 것이다. 지금 이 물은 육수를 끓일 때나 허드렛일에 사용할 물 등으로 두루 활용한다. 남편은 서각에 일가견이 있다. 그래서 집 안팎에 10여점을 걸어두었다. 돈마을은 각종 효소통이 한가득이다. 집 안팎에 100여개가 놓여 있다. 모두 솔잎과 매실 효소를 담갔다. 채소는 웬만한 건 근처 텃밭에서 키워서 쓴다. 배추도 일부는 재배한다. 현재 부부가 전체 일의 90%를 직접 해결한다. 그래서 사생활은 모두 반납했다고 보면 된다. 1년 중 명절 포함 나흘 논다. 식당하려는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 “모든 걸 걸어야 한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하면 망한다. 처음부터 잘되는 일은 없다. 한 번은 절벽에 직면한다. 이때가 기회인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면 평소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코피도 나고 목 디스크도 오고 앉으면 잠이 쏟아진다. 이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근육도 다 길들여져 편해진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은 냉장고 체크리스트부터 식재료 재고 상황 및 김장하는 날과 장 담는 날까지 일기처럼 적어둔다. 그게 돈마을의 사초(史草)다. 정말 부부애가 중요하단다. 마치면 반주도 한 잔 하고 덕담도 한다. 남편은 15년간 영화를 단 한 편도 못 봤는데 최근 아내와 ‘변호인’을 봤단다. 집에 오니 새벽 두 시. 지난 26일부터 홀 분위기와 메뉴가 겨울을 벗고 봄으로 갈아입었다. 남편은 염도계를 갖고 모든 메뉴의 염도를 살핀다. ◆‘돈마을’ 메뉴분석 솔잎이 곳곳에 포진한다. 솔잎돼지갈비는 출시 당시 삼겹살이 득세하는 대구에서는 절대 성공 못한다고 했는데 특제 소스와 냄새 제거 노하우 때문인지 성공했다. 차돌도 쇠불판 위에 깔아 식탁에 낼 때 먹기 좋게 낸다. 솔잎조림닭은 전통 간장조림닭의 변형인 것 같다. 매일 밤에 다음날 사용할 닭을 주문한다. 오전 5시에 물건이 온다. 토종닭 육질은 다 비슷하지만 여기 소스는 남다르다. 너무 달지도 않고 적당하게 청양고추의 기운이 들어 있다. 마늘, 양파, 생강, 열두 가지 한약재 등을 넣고 4시간 우려내고 거기에 특제간장소스와 솔잎식초를 적당량 넣고 이틀간 숙성한다. 이 레시피를 완성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부부의 입맛에 맞추었다. 아니다 싶어졌을 때 아직 원형의 입맛을 가지고 있던 자식 혀의 도움을 받았다. 식재료는 물론 재료 간 비율도 수십 번 바뀌었다. 아이는 부모 때문에 하루 세 끼를 돼지갈비로 해결할 때가 많았다. 처음에 들어갔던 키위와 파인애플, 너무 강한 향을 가진 청궁과 당귀는 미량으로 조정됐다. 이 집 김치는 반가의 백김치 같다. 젓갈도 뺐다. 김치를 쉬 무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약 2천포기를 담갔다. 해물파전도 여느 집과 구별된다. 보통은 밀가루 냄새가 나고 식용유 냄새가 입맛을 흐리게 만든다. 중력분을 한번 볶아 밀가루 풋내를 날린 후 사용한다. 반죽할 때 표고버섯 꼭지가 들어간 천연 육수를 넣어 깊은 맛을 더했다. 무척 많은 장아찌를 만들어봤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깻잎·우엉·고추·무장아찌뿐이다. 장아찌는 매력 있어 보이지만 어떤 메뉴와 만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깻잎장아찌의 경우 생것으로 만들면 향은 진한데 식감이 별로다. 고민한 끝에 3개월 정도 삭혔다. 끓인 장물도 원래 식혀 붓는데, 처음엔 막바로 붓고 다음부터 식혀 부었다. 밥도 인상적이다. 솔잎향이 감돈다. 여느 밥보다 훨씬 쫀득하고 점착력이 남달랐다. 비법이 있는 건 아니다. 항상 햅쌀만 구입하고 밥도 한꺼번에 많이 짓지 않고 자주 한다. 그래야 누룽지가 풍부해지고 구수한 숭늉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휴무는 명절 전날과 당일. 오픈은 오전 11시30분, 닫는 시각은 밤 9시. (053)767-1889.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915번지.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2.28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양식 레스토랑 에티켓 A to Z
돈을 좀 벌면 다들 ‘폼’을 잘 삭힐 줄 안다. 폼을 액면 그대로 드러내면 ‘모난 돌 정 맞기’ 때문이다. 변두리에서 주유소 등으로 큰 돈을 거머쥐면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있는 자들 사이에 끼려고 이런저런 기관단체에 가입한다. 그럴듯하게 행세하기 위해서는 돈만 있다는 지적을 덜 받아야 한다. 돈은 쉽게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문학적 안목과 고담준론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없다. 돈은 도(道·인품)의 호위를 받지 않으면 금세 ‘방약무인(傍若無人)’해진다. 女 원피스·男 재킷 차림 무난 진하게 뿌린 향수 식사에 방해 애피타이저 빵은 적당량 먹고 수프는 남기는 듯 먹는 게 좋아 포크 등은 맨 바깥쪽부터 사용 사용 후엔 가지런히 접시위에 냅킨으로 얼굴 땀 닦으면 곤란 영국 런던의 특급 호텔 사보이의 총지배인의 눈매는 거의 영국 왕실풍이다. 인자하고 그윽하면서도 절도가 있다. 수많은 사람에 시달려 ‘몽돌’처럼 가슴이 단련됐다. 하지만 아직 대구의 식당가는 음식과 인테리어만 득세하지 주인은 물론 홀 서버의 자태가 너무 일상적이다. 일상적이란 ‘일상의 습성을 못 벗겨냈다’는 말이다. 스튜어디스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 미소를 보낼 수 있기까지 수많은 날 사적 웃음을 지워내야만 했다. 잘 살펴보라. 수천억대를 주무르는 특급 CEO의 표정은 조선조 사대부의 기품을 뺨칠 정도다. 세상을 꿰뚫는 매너·교양·에티켓이 있다. 어떤 내방객이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품새를 보면 그가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 거의 파악된다. 예전 대감(大監·조선 시대 정이품 이상의 관원에 대한 존칭)집 청지기는 솟을대문 앞 과객의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그를 융숭하게 영접해야 될지 그냥 국밥 한 그릇만 먹여 보내야 할지 대충 감을 잡는다. ◆ 사각지대 교양 정보를 챙겨라 가령 영국 왕실 식기는 덴마크 ‘로열 코펜하겐’이라는 사실, 전 세계 대다수 대사관 식기는 미국의 명품 도자기 브랜드 ‘레녹스’라는 것, 중식당 원형 테이블의 정식 명칭이 ‘수잔 테이블’이란 걸 상대에게 알려주면 이목이 집중된다. 수잔 테이블에 놓인 자기 숟가락이 ‘렝게’라는 것도 덧붙이면 더욱 화제를 자기 쪽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파스타의 경우 ‘알 덴테(Al dente)’를 놓치면 낭패. 알 덴테는 약간 덜 삶아 스파게티 면의 속심이 가늘게 박힌 상태다. 파스타 마니아 고객과 식사를 할 때 이탈리아 나폴리 피자 전문가들이 1984년 회의를 통해 피자 화덕 바닥 온도를 486℃로 정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띄우면 불이익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식문화라는 게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굳이 알아주면 상대가 더 챙겨줄 것이다. 한글이 있는데도 굳이 시간 할애해서 영어 공부하는 이유와 다를 바가 없다. ◆ 양식당에 들어가면 서양에서 파티는 대부분 부부 동반이다. 남자끼리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자리에 가면 다들 서먹서먹하다. 여기선 정치와 종교 얘기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히 미식가들 모임에서는 특정 식당 음식 평가는 절대 하지 않는다. 스포츠와 날씨는 어느 곳에서나 통하는 ‘아이스 브레이커(Ice breaker·처음 만났을 때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고 하는 말)’다. 모든 테이블 매너의 기본은 적절한 복장을 갖추는 것이다. 양식당도 마찬가지. 특히 여성의 경우 부피가 큰 모피 코트나 과한 보석을 착용하고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삼가야 할 태도. 짙은 향수도 음식 향기를 짓누르기 때문에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액세서리를 가능한 한 절제한 원피스 차림이면 무난. 만약 무거운 코트나 큰 가방을 가지고 왔을 때는 입구의 클로크룸에 맡긴다. 대개 이용은 무료이고, 부피가 큰 물건이라면 팁을 주는 것도 좋다. 남성은 재킷 차림이 기본. 먼저 식당에 들어가면 반드시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아야 한다. 물론 항상 여성이 먼저다. 남성이 먼저 털썩 앉으면 그건 엄청난 반칙이다. 손님이 왕이라고 자기 맘대로 앉으면 ‘막돼먹은 자’로 찍힌다. 자리에 앉고 얼마간 있으면 보통 가슴에 열쇠가 그려져 있거나 포도마크가 그려진 웨이터가 식탁으로 다가온다. 와인이나 술을 관리하는 소믈리에다. 소믈리에가 오면 음식보다 와인을 먼저 주문하라는 뜻이다. 적절히 와인을 시키거나 거절한 후에 애피타이저, 메인 코스, 디저트 등 코스별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식사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린다. 이탈리아의 경우 거의 3시간까지 가기도 한다. 식사 전 나오는 애피타이저 빵은 입을 가신다는 의미로 나온 것이므로 너무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수프를 먹을 때 숟가락을 빨면서 떠먹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숟가락 위의 수프가 3분의 1 정도 남도록 먹는 것이 좋다. 빵을 수프에 찍어 먹는 것도 괜찮지만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는 금물. 기물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잊지 말자. 다음으로는 식기(Silverware)의 사용이다. 통상 포크와 나이프류는 통칭해서 ‘커트러리(Cutlery)’라고 한다. 식탁을 보면 다양한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 있을 것이다. 맨 바깥쪽에 놓인 것부터 차례로 사용하면 된다. 사용이 끝나면 가지런히 접시 위에 올려놓는 것이 예의다. 식사할 때 포크와 나이프 위치는 8시20분, 그러니까 팔자 수염 모양으로 벌려 놓으면 되고 다 먹었으면 4시20분 위치에 포크와 나이프를 한데 모은다. 이때 칼날은 안쪽으로 향하도록 하면 된다. 테이블에 물잔과 빵이 수북하게 놓여 있으면 어느 것이 내 것인지 헷갈리기 쉽다. 이땐 ‘좌빵우물’ 원칙을 지키면 된다. 빵은 왼쪽, 물은 오른쪽에 놓인 것이 자기 거라는 것. ◆ 냅킨 에티켓 냅킨은 영국 기사들이 결투 신청을 할 때 던졌던 항전의 상징, ‘손수건’에서 유래했다. 그렇지만 손수건처럼 마구 던져놓으면 안 된다. 처음과 비슷하게 접어서 자기 오른쪽에 두면 웨이터는 속으로 ‘아, 이분들은 우리를 존중하는구나’라고 여길 것이다. 국내 관광객은 외국 호텔에 투숙하고 나올 때 습관적으로 그냥 나오는데, 이러면 국가 망신시킨다. 1달러 지폐 한 장을 반드시 시트 위에 올려놓고 나와야 한다. 냅킨을 잘 접어두는 것도 그와 비슷한 배려다. 냅킨은 음식물이 옷에 튀지 않게 하는 방어의 천도 되고, 입가에 묻은 음식물을 닦는 티슈 역할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냅킨을 시보리(물수건)로 치부하는데 절대 아니다. 하절기에 일부 손님은 냅킨으로 목과 얼굴에 묻은 땀을 훔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예의가 아니다. 요즘 구청에서 위생을 위해 레스토랑 입구에 세면대를 설치할 것을 종용하는데, 이건 서구에선 상당히 무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당연히 손은 화장실에 가서 씻도록 유도했으면 좋겠다. 비행기, 선박 등 식탁이 흔들리는 곳에서는 와이셔츠 안으로 한쪽을 집어넣어 앞가리개처럼 늘어뜨려도 좋다. 특히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여성은 냅킨을 잘 사용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냅킨으로 립스틱을 닦는데, 그래선 안 된다. 이때는 티슈에 양쪽 입술을 눌러 자국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호감을 받는 처사이다. 식사 중 냅킨은 여러 개를 사용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타인의 손이 자기 몸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소금통이 필요하면 팔을 뻗어 가져오기보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소금통을 전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것이 제대로 된 모양새다. 쓰레기통을 찾는 이도 있는데 고급 양식당에서는 식탁 옆에 쓰레기통을 두지 않는다. 양식당 구조상 쓰레기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웨이터를 부를 때는 절대 ‘헤이~’라고 소리내면 안 되고 가만히 손만 올리면 신기하게 옆으로 다가온다. 홀 매니저는 모든 테이블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선을 먹을 때 절대 뒤집어서 살을 발라서는 안 되고, 손으로 집어 살을 발라 먹는 것도 예의를 벗어난 행위다. 간혹 생선 요리의 경우 핑거 볼(Finger bowl)에 슬라이스 레몬 등이 띄워져 있는데, 무경험자들은 디저트인 줄 알고 마시는 실수도 범한다. 핑거볼의 물은 손 씻는 용도이니 착오 없으시길. 혹시라도 포크나 나이프를 땅바닥에 떨어뜨릴 경우, 몰래 주워서 사용하지 말고 조용히 손을 들어 새것으로 교환해 사용하면 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2.21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2)대구 동구 중대동 레스토랑 ‘나무@906’의 박윤옥
“음식으로 세상과 소통” 안정적인 藥師 길 접고 전원생활→오너 셰프 가장 정직한 식재료로 소박한 엄마 손길 같은 떡갈비·스테이크·와플 차별화된 메뉴 ‘입소문’ 매년 4월 하순쯤. 그 레스토랑은 벚꽃바다를 항해하는 ‘화선(花船)’ 같다. 그 레스토랑은 ‘작명 마케팅’이 남달랐다. ‘나무@906’. ‘내가 살고 있는 번지(906번지)에는 내(나)가 없다(무)’란 뜻, 그래서 ‘우리 공화국’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오너셰프 닉네임도 아주 트렌디했다. ‘푸드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Food Communication Designer)’. 표정의 4분의 3이 웃음과 미소인 50대의 이 여성 오너셰프는 음식을 갖고 세상과 소통해보겠다는 심산이다. 대구 동구 중대동 906번지가 그의 꿈터. 첫눈에 포스가 느껴지는 남편 임승엽씨와 밤송이처럼 부둥켜안고 알콩달콩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인연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린다. 천성적으로 얘기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팔공산 파계사 가는 길 초입에 보일듯 말듯 숨어있는 이 레스토랑은 멀리서 보면 꼭 ‘담배창고’ 같다. 형식은 시골풍이지만 내면의 실내는 맨해튼풍이다. 한동안 지역 실내인테리어 업자의 벤치마킹 1순위 공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가장 단순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집을 짓는 건축가 박재봉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박윤옥 셰프. 그녀가 저어가는 나무 레스토랑의 뒤안길을 따라 걷고 왔다. ◆고생 모르던 계집애가 고생의 길로 걸어갔다 ‘서울 가시내’였다. 어머니가 요리본능을 키운 것 같다. 여느 집에서 만들어 먹기 어려운 메뉴를 골라 다 챙겨주셨다.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도 가르쳐준다. 숙명여대 약대생으로 고만고만한 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고교 때 아버지 사업이 완전 거덜났다. 아버지 곁에 모이고 흩어졌던 인생군상의 생리를 목격한다. 어려워져야 인간성이 드러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돈에 우선가치를 주지 않는 길을 간다. 1984년 약사가 된다. 남편 사업 때문에 대구 반야월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거기서 수도약국을 연다.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약국을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덜 행복하다는 걸 깨닫는다. “정말 제 청춘이 쇼윈도 안에서 끝날 것 같았습니다.” 약사가 싫었다. 아는 사람들을 집으로 마구 불러들여 음식을 해먹였다. 요리의 완성도보다 사람들을 불러 먹인다는 게 더 큰 즐거움이었다. 90년대 초 서울로 다시 올라간다. 90년대 후반까지 서울 분당에 살았다. 부부는 전원의 꿈을 꾼다. 적당한 땅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유람한다. 경주에 있는 설치미술가인 김영진씨에게 좀 신세를 진다. 식재료는 주변에서 구해와 외식 없이 세 끼를 직접 해 먹었다. 천상 ‘밥 퍼주는 여자’였다. 하지만 경주도 시골스럽지 않았다. 좀 더 깊은 시골을 찾았다. 어느 날 합천 해인사 근처 대밭골(죽전)이란 곳에 황토집을 지었다. 해발 690m고지였다. 농사는 정말 ‘젬병’이었다. 모종을 사다 심어도 재료값이 안 나왔다. 무농약, 유기농 운운하면서도 결국 ‘방치농’이었다. 4년 정도 그렇게 흙빛으로 살았다. 거기에 문화사랑방 같은 공간을 만들려고 하자 친구들이 제발 가까운 곳에 아지트를 지으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공부방이 필요했다 꿈 같은 집을 짓고 싶었다. 옛 흙담집 같게 보이도록 ‘담틀공법’으로 벽을 치장했다. 돌담도 비뚤비뚤 직접 쌓았다. 친환경 도료를 사용했다. 남의 손을 빌렸지만 결국 자신들이 지은 ‘홈메이드 하우스’였다. 계단 앞 흙받이 매트도 작은 자갈로 만들었다. 계단 아래 빈 공간에는 촛농이 석순처럼 자라고 있다. 이 집을 유지하려면 약간의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음식을 팔자고 했다. 영업이 뭔지를 알아야 했다. 주변의 고수한테 한 수를 배우러 다녔다. 장사 모토는 ‘건강하게 돈을 벌자’였다. 한 고수가 그녀에게 귀중한 정보를 알려줬다. ‘은퇴자들의 전원 레스토랑이 대다수 망한 이유는 풍광이 좋은 2층은 자기가 소유하고 1층을 영업공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님에게 가장 좋은 전망과 시설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꿈만 믿고 2007년 1월 대망의 오픈을 한다. ◆나무의 메뉴 구성은 사실 그녀는 요리를 배우면서 메뉴를 짰다.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남들과 같은 양식을 내지 말자. 그리고 정말 착한 밥상, 소박하지만 엄마의 손길 같은 메뉴를 만들자고 다짐한다. 물론 화학조미료도 버렸다. 가장 정직하고 양심적인 게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머리굴리는 스태프도 멀리했다. 다들 그녀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로 조리팀을 짰다. 맨 처음 친정에서 해먹었던 떡갈비를 양식풍으로 편집했다. 설탕 대신 꿀과 매실청 등만 넣고 양파 등 채소도 넣지 않고 오직 등심만으로 만든 햄버거스테이크 같은 ‘떡갈비’를 론칭했다. “제가 음식을 판 것이 아니라 우리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고, 손님은 우리한테 대접을 받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진정성이 단골에게 각인됐다. 어떻게 보면 가장 엉성한 조리팀이었지만 문 열고 6개월 정도 지나면서 싸이월드와 블로그를 통해 널리 알려진다. 광고를 일절 안했는 데도 온라인 상에서 먼저 어필된다. 이윽고 나무 3인방 메뉴가 태어난다. 떡갈비·스테이크·와플이다. 처음에는 스테이크가 메뉴에 없었다. 워낙 요구하는 사람이 많아서 배우기 시작한다. 서울을 거쳐 이탈리아 파르마 지방에 있는 요리학교 아르마(ALMA)에 입학한다. 적잖은 시간 손때가 묻은 음식책이 300여권. 그게 홀 주변에 돌담처럼 놓여 있다. “역시 스테이크의 승부처는 굽기 테크닉이라고 봅니다. 이탈리아 속담에 ‘요리는 배워서 하는 것이고 굽기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녀가 굽기정도를 쉽게 판별하는 법을 알려준다. “엄지와 검지를 마주 붙인 뒤 엄지 아래 근육을 눌러보세요. 좀 말랑 하죠. 그게 ‘레어(Rare)’입니다. 다시 중간지와 엄지를 세게 맞붙인뒤 엄지 아래 근육을 눌러보면 더 딱딱해지는데 그게 ‘미디엄(Medium)’, 마지막 무명지와 맞붙인 뒤 엄지 근육을 누르면 더더욱 딱딱해지는데 그게 경상도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웰던(Well done)’입니다.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아 말로도, 책으로도 굽기 정도를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어요. 오직 많이 구워보고 감을 익히는 수밖에 없어요. 똑같은 미디엄도 오븐에서 몇 개의 스테이크를 굽느냐에 따라 맛도 엄청 달라집니다.” 저급한 조리사는 바쁠 때 일을 ‘대충 쳐낸다’고 한다. 그녀는 ‘쳐낸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날 기자의 스테이크에는 여느 집과 달리 저며낸 가지가 멜빵처럼 둘러져 있었다. 또한 빵과 감자 대신에 무말랭이와 해바라기 씨앗이 토핑된 주먹밥이 나왔다. 동절기 포항 지역 시금치인 포항초에 버섯과 크랜베리를 치즈와 섞은 그라탱도 계절감이 특출났다. 어디 가도 비슷한 메뉴라인이 아니었다. 특히 와플 마니아는 그녀가 ‘모유’처럼 반죽해 만든, 아이스크림과 각종 과일·메이플시럽이 호위하는 와플세트(1만3천원)를 맛보기 바란다. 와플 책을 6권 정도 보고 고민고민해서 만든 거란다. 조만간 2층 나무 테라스에 자작할 수 있는 허브 전용 텃밭도 만들고 싶단다. 가게를 나온 뒤에도 박 셰프의 웃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오는 것 같았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나무@906’의 ‘One table’ 시스템 돈을 덜 벌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녀는 월~목요일 딱 한 팀만 예약받는 ‘원 테이블(One table)’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녀가 알아서 작품 같은 테이블을 만들겠단다. 오직 한 팀만을 위해서다. 그녀는 셰프의 몸이 편해야 음식도 평화로워진다고 믿는다. 이때 2층 홀은 세미나실·토론장·영화관·전시실·공연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금~일요일은 낮 12시부터 밤 11시까지 정상 영업이다. 풀코스 안심스테이크는 3만7천원인데 8천원을 더 내면 빵과 안심, 애피타이저, 핸드메이드 디저트가 더해진다. 와플세트는 1만3천원. 떡갈비는 2만원. ▨예약= (053)981-9066
2014.02.1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1)대구 동구 중대동 궁중요리 전문 ‘다우산방’의 이종찬·권현숙 부부
아내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남편은 미식가 ‘바늘과 실’ 함께 재료 찾고 음식 연구 연근요리만 20여가지 개발 맷적 등 특별한 궁중요리도 대구 동구 중대동 팔공산 파계사 아랫동네에 부부셰프가 살아간다. 아내는 전통음식전문가인 권현숙씨(55), 남편은 미식가 이종찬씨(61). 아내는 ‘현대판 효부’다. 시아버지는 대구 북구 칠성동 홈플러스 근처에서 1995년까지 45년간 미화제과를 꾸려갔다. 유과 등을 지역 유명 전통시장에 공급했다. 89년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직후부터 권씨에게 버티기 힘든 시집살이가 찾아온다. 4대가 한 집에서 살았다. 2년간 운신 못하는 시할아버지 대소변을 받아냈다. 살림살이와 요리에 나름 안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96년 현재 자리로 이사를 온다. 2006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댁 어른의 영양식을 위해 식이요법, 당뇨식 등에 관한 책을 구해 탐독했다. 그러다가 2007년엔 덜컥 본인이 유방암에 걸린다. 그게 되레 ‘전화위복’이 된다. 시댁의 힐링 음식을 책임지고, 또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선 약보다 음식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점차 요리연구가로 변신한다. 서울에 있는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 밑으로 들어가서 궁중요리, 사찰요리, 약선요리 등 한국 전통요리를 단계별로 습득해 나갔다. 2008년부터는 매주 2일간 서울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이에 앞서 2005년 봄부터 전통차 전문 다우산방을 오픈했고, 2007년부터 풀코스 궁중요리 전문 한정식당으로 업종을 변경한다. 남편은 남다른 미식가다. 한때 정치가가 되고 싶어 했다. 80년대 대한불교청소년 교화연합회 대구시 사무국장 자격으로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며 유명맛집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엔 대구 칠성동에서 대원기획이란 광고기획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너무 험하게 몸을 굴렸다. 그 때문에 망막에 이상이 온다. 한창 때 모임이 20개가 넘었다. 건강이 최고란 믿음을 갖고 술과 담배도 끊고 그동안 맘고생을 시킨 아내와 함께 전통요리 연구에 매진한다. “아내가 요리를 하고, 저는 그 요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해줍니다. 손님을 맞고, 배웅하고, 아침 일찍 식재료를 마련해 오고, 그렇게 하다보니 24시간 아내와 실과 바늘처럼 붙어다닐 수밖에 없죠. 새로운 음식, 새로운 버전의 식당 정보를 얻으면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아갑니다.” 부부가 오너셰프이다 보니 밥상이 정갈하고 힐링푸드의 본색을 보여주고 있다. ◆부부는 향토 힐링푸드 전도사 집에 들어섰을 때 동북쪽 언저리는 모두 대숲이 었다. 병풍처럼 집을 보듬어주고 있다. 마당에는 대나무, 자두, 대추, 매실, 오디, 감, 죽순, 두릅 등이 자란다. 푸드스타일리스트인 아내의 안목이 화장실 인테리어에 그대로 묻어 있다. 앙증맞게 작은 고무신을 화분으로 변장시켜 놓았다. 남편의 몇몇 지인이 산방을 위해 동양화는 물론 작품성 있는 나무를 깎아 만든 남근석까지 선물로 보냈다. 방마다 괴목 식탁이 놓여 있다. 이 집은 최근 연근요리 전문점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 동구 반야월은 전국적 연근 메카다. 전국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자연히 동구에서 제대로 된 연근 식당이 생겨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연근죽, 연근샐러드, 연근전, 연근묵, 연근장아찌, 연근떡갈비, 연근 물김치, 연근차, 연근정과, 연근찜, 연근차 등 20여가지 연근요리를 개발했다. 부부는 다우산방만의 색깔이 묻은 발효식품 리스트를 알려준다. 이를 반영해주듯 집 안팎에 이런저런 옹기가 50여개 있다. 고추장·된장·간장도 모두 수제품이다. 10년 넘은 씨간장도 있다. 조만간 고조리에 입각해 공장간장을 극복한 맛간장을 쿠킹클래스를 통해 전수할 작정이다. 효소류가 정말 푸짐하다. 수세미, 비트, 질경이, 쇠비름, 맨드라미, 민들레, 오디, 복분자, 살구, 자두, 복숭아, 호두, 매실, 오미자, 감, 솔잎 등 30여 종이 갈무리되고 있다. 바나나, 수박, 오렌지, 막걸리, 자두, 비트, 복숭아 등 20여가지 재료로 식초도 만들었다. 이 집의 대표 디저트인 양갱류도 품새가 남다르다. 백년초, 단호박, 자색고구마, 완두앙금, 오디, 오미자, 복분자, 인삼, 수박 등 20여가지로 양갱도 만든다. 무, 가지, 우엉, 호박, 고추, 애호박, 고춧잎, 깻잎부각, 표고버섯, 배추, 감, 무청 등을 갖고 말랭이도 만든다. 물론 주방엔 화학조미료는 물론, 인스턴트 양념도 접근 금지. 천일염의 경우 96년 신안군에 가서 한 트럭을 싣고 왔는데 아직 10포대가 남았다. 여기 오면 좀 특별한 궁중음식을 맛볼 수 있다. 닭가슴살에 인삼을 다져 둥글게 말아서 찹쌀을 묻혀 찐 음식인 진주공을 비롯해 예전 임금이 즐겼던 에피타이저 타락죽, 누룽지 오미자탕수, 맷적(돼지고기에 된장을 묻혀 구워낸 것), 삼합장과(홍합과 전복, 불린 해삼, 쇠고기를 양념해서 조림해 낸 것), 패주전(조개관자가 주재료), 신선로(사태살을 고아낸 뒤 새우, 홍합, 전복, 소라 종류, 미나리전, 흰지단, 노란지단, 표고버섯 등을 고명으로 얹음) 등이 나온다. 구절판도 여느 집과 달리 찬합에 내지 않고 먹기 좋게 밀전병으로 말아서 낸다. ◆팔상체질 음식에 도전하다 지난해 11월 영주전통 칠향계 삼계탕 산업육성사업단(단장 경북대 강미영 식품영양학과 교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팔상체질식 전문가인 강미영 단장이 부부에게 닭을 베이스로 한 ‘팔상체질별 삼계반 제조법 개발 용역’을 의뢰했다. 기자도 지난달 24일 시식행사에 참석했다. 8종류의 닭·장아찌·피클·소스가 완성됐다. 그동안 힐링푸드와 약선요리에 대한 일반론적 흐름은 있었지만 직접 사람의 체질을 8가지로 나누고 그것에 맞는 체질영양식을 개발한 건 이례적이다. 당초 예상과 달리 체질별 음식을 만든다는 건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기본자료는 경북대 식품영약학과 강 단장한테 전해받았다. 박사과정 공부하듯이 공부했다. ‘나의 체질은 무엇인가’(씨앗을 뿌리는 사람), ‘체질에 약이 되는 음식 222가지’(중앙생활사) 등 30여권을 공부했다. 태양은 금양과 금음, 태음은 목양과 목음, 소양은 토양과 토음, 소음은 수양과 수음으로 나누었다. 체질별 약재를 찾기 위해 지역 한의사를 찾았다. 한의사마다 말도 달랐다. 일은 진척이 안 됐고 용역도 회의적이었다. 책을 봐도 확실하게 입증되는 게 없었다. 숱한 책과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중구난방이었다. 심지어 주역하는 스님도 찾아가서 주역상의 음식오행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황제내경 전문가도 찾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보편적 사실을 알게 됐다. 수십 번 반복해서 손맛을 익혀야 제대로 된 음식이 나왔다. 체질별 기본 약재 5가지를 각각 1시간30분씩 달였다. 그걸 체질별로 달인 약물과 혼합해서 닭을 30분간 두꺼운 5중냄비에 삶았다. 약재는 포도근, 오갈피, 모과, 교맥, 노근, 송절, 감잎, 구기자, 영지, 치자, 육종, 복분자, 산수유, 적복룡, 숙지황, 상백피, 의인, 갈근, 길경, 질경이, 칡, 맥문동, 마, 오미자, 국화, 황기, 당귀, 정향, 목향, 청궁, 두충, 진피, 계피, 생강, 감초, 대추, 홍삼, 인삼 등 50여가지. 전부 국산이다. 어떤 건 수입품보다 5~10배 비싸기도 했다. 200여마리의 닭을 투입했다. 약 같은 음식이 되면 입맛을 버리기 때문에 궁합맞는 약재를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정향은 향이 너무 강했다. 복분자를 했을 때는 닭이 검게 변해서 양을 줄이기도 했다. 치자는 색깔이 너무 고와서 양을 줄였다. 국화를 넣었을 때는 잎이 너무 흐트러져서 불편함도 있었다. 모두 40가지 한약재가 대표선수로 차출됐다. 전국에서 유례가 없다. 일반 업소에서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어렵사리 완성한 음식을 오늘 영주 농업기술센터에서 발표한다. 덕분에 힐링푸드의 본질을 더 깊게 익힐 수 있었다. 부부는 대구국제음식관광박람회에서 2010년 연근요리, 2011년 한과·떡·장아찌·팔도술, 작년 10월에는 다우산방에서 힐링푸드전시회를 가졌다. 지난해 1월 오픈한 쿠킹클래스를 개설해 궁중요리를 비롯해 100여가지 밑반찬, 사찰음식, 손님맞이밥상, 양갱 및 디저트 메뉴를 가르치고 있다. 연잎밥 정식은 2만·3만·4만원 3종류. 코스 궁중요리는 전복죽 샐러드 무쌈 두부선 진주공 신선로 회 삼색전 생선구이 생선찜 갈비 인삼한방수육 해물냉채 연잎밥 육전 오이선 등이 엮이는데, 1인분 10만원이다. 회복 중인 환자의 별식으로 인기가 좋다. 연중무휴. 영업은 낮 12시~밤 10시 (053)983-1999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2.0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30)대구 중구 전동에 새롭게 둥지 튼 ‘대구회관’ 김종은·김수연 부녀 셰프
가장 대구의 맛을 가진 음식은 뭘까. 상당수 어르신은 대구 중구 동아백화점 바로 동쪽에 있었던 대구회관의 인기 메뉴 ‘칭기즈칸’을 꼽는다. 그런데 그 누구도 칭기즈칸 음식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영웅이었기에 몽골 전통음식인 것 같기도 하고, 샤브샤브와 철판요리와 비슷해 일본 음식 같기도 하고, 국수가 들어가니 중국과 연관이 되는 것도 같고. ◆알쏭달쏭 칭기즈칸 요리 한국은 일본과 달리 몽골 전통음식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몽골이 고려 원종 15년(1274~75) 일본 원정을 준비할 때 경남 마산시 추산동에 ‘몽고정’을 파고 베이스 캠프를 잡는다. 한국형 육식문화가 본격적으로 힘을 받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몽골 전투식은 몽골 전통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몽골엔 칭기즈칸이란 요리 이름이 없다. 고작 양고기 끓인 물에 국수를 넣은 ‘고릴태슐’, 양·감자·당근·통마늘·양파·소금에다 달군 돌을 함께 넣고 만든 ‘허러헉’, 양 내장 안에다 불에 달군 돌을 집어 넣고 요리한 ‘설루’, 양고기 육수에 빵을 찍어먹는 ‘너거태슐’ 등이 ‘유사 칭기즈칸군’에 속한다. 향토 출신 한국 최고 음식문화사가 고(故) 이성우 교수에 따르면 몽골인은 불의 신이 노한다고 해서 고기를 직접 굽지 않았다고 한다. 불에 굽는 요리는 만주식인데, 만주사변 때 그곳에 진주했던 일본 군인들이 몽골계 요리로 착각해 ‘칭기즈칸’이라 명명한다. 다시 말해 칭기즈칸은 특정 요리명이 아니라 ‘중원 음식의 통칭’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중국에도 칭기즈칸 요리는 없다. 단지 19세기쯤 생겨난 베이징·쓰촨·허베이 등지에 ‘훠궈즈(火鍋子)’란 우리의 신선로와 비슷한 용기가 있는데, 이 용기로 해먹는 요리가 현재 일본의 샤브샤브 스타일이다. 한국 전통요리로 분류되고 있는 신선로(일명 悅口資湯)도 1827년 ‘진작의궤(進爵儀軌)’란 요리서에 처음 등장한다. 이 요리는 한국 전통음식은 아니다. 중국 원나라~명나라 사신에 의해 국내로 유입돼 궁중 수라상에 오르고 일제 때는 갑종 요정의 메인 안주로도 각광받는다. 그럼 칭기즈칸과 샤브샤브의 연관성은 뭘까. 일본 교토, 오사카, 오키나와 등지로 간 화교들이 훠궈즈를 퍼뜨렸고, 그것을 토대로 일본 조리사들이 샤브샤브를 개발했던 것이다. 샤브샤브란 일본말로 쟈부쟈부로, ‘철벅철벅’이란 뜻의 의성어.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둬야 될 흐름이 있다. 샤브샤브는 일본, 칭기즈칸은 한국에서 각각 개발됐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칭기즈칸 요리를 선보인 서울 논현동 ‘한우리’, 명동 ‘신정’의 요리사들에 따르면 샤브샤브는 일본에서 온 것이지만 칭기즈칸 요리는 일본보다 먼저 한국에서 개발됐다는 것이다. 90년 대구 첫 샤브샤브 전문점 ‘한국시대’ 측도 그런 주장을 했다. 칭기즈칸은 샤브샤브와 조리법이 다르다. 두부, 만두, 채소, 쇠고기, 사골, 양지머리로 만든 육수, 각종 버섯, 땅콩가루, 땅콩버터에 우동용 국수를 함께 넣고 전골처럼 부글부글 끓여 먹었다. 이때 소스는 샤브샤브만큼 다양하지 못하고 채소 소스 하나만 있었다. 서울에서 대히트를 친 칭기즈칸은 한강 이남으로도 번져간다. 국내의 경우 칭기즈칸이 가장 히트친 곳은 대구다. 칭기즈칸은 일명 ‘소고기 등심 전골’이다. 전골은 국과 찜 사이에 있는 찌개의 일종. 전골류는 조선조에 들어 양반의 술 안주로 사랑을 받게 된다. 실제로 안동권씨 가문엔 신선로의 발전된 형태인 전골냄비가 가보로 내려온다. 또 온양민속박물관에도 조선후기 곱돌로 만든 ‘벙거지골’이란 전골 냄비가 소장돼 있다. ◆대구의 첫 칭기즈칸 전문점 많은 사람은 대구 칭기즈칸 요리 전문점인 대구회관이 사라진 줄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중구 문화동 동아백화점 옆에 있다가 97년 4월 지하철 공사 때문에 차량진입이 어려워 동아백화점 근처를 버리고 수성구 아리아나호텔 맞은편 세진컴퓨터랜드 바로 옆에서 재오픈한다. 대구회관의 이전 역사는 다음과 같다. 99년 12월31일 폐업을 하고 그랜드호텔 옆으로 이전 개업을 한 건 2007년 9월. 그후 2012년 6월13일 중구 전동 옛 아시아극장 옆 골목 중간으로 이전한다. 옛 대구회관 근처로 돌아온 것이다. 우여곡절의 나날이었다. 어둑해서 거길 찾았다. 그런데 상호는 대구회관이 아니라 ‘미래(味來)’였다. ‘옛 칭기즈칸 맛이 찾아오다’라는 의미다. 김종은 사장의 딸이 그 상호를 원했다. 그런데 단골이 대구회관에 너무 집착해서 이젠 미래와 대구회관을 병기한다. 김수연씨(44)는 기질이 다부지고 야물다.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온 후 영국 남서부 엑서터대에서 치료요법을 배우고 97년 대구에 와 이것 저것 자격증 따는 걸 좋아하다가 결국 가업에 매진한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반가운 액자가 보인다. 왼쪽 벽에 붓글씨로 적어놓은 빛바랜 대구회관 액자였다. 옛 대구회관 정문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던 걸 지금까지 보관했다. ‘아, 저 액자 아직까지 붙어 있네…’ 어르신 단골은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예전 대구회관 로고가 찍힌 1~4인용 접시와 전골냄비도 진열돼 있다. 예전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 ‘철수와 영희’ 편 그림을 그린 권일순의 미인도, 이강소의 80년 작품, 정치환, 문곤, 신지식, 박기태 등 향토화백의 명작도 방마다 걸려 있다. 이 집만의 전통이다. 대구회관은 대구예식장과 연관이 많다. 대구회관은 김 사장의 장인인 권두현씨가 운영했다. 대구회관 자리는 OB맥주 대구·경북대리점 사장이던 권두현씨 소유의 맥주 창고. 대구회관은 1952년 오픈한 대구예식장(후에 호텔로 변했다가 현재는 카리스 조명)의 피로연 장소로도 어필됐다. 권씨는 맥주 소비 다양화를 위해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2층에는 비어홀, 1층에 전골·샤브샤브·로스구이·함박스테이크를 파는 한식형 레스토랑(회관)을 운영했다. 몇몇 관계자들이 관여하다가 70년 사위 김종은 사장이 본격적으로 칭기즈칸 명가 대구회관 시대를 개막한다. 김종은 사장은 대구회관을 맡기 전에 대구역전에는 코끼리표 시멘트 대리점, 나중엔 북구 팔달시장에서 OB식품을 운영한 바 있다. ◆칭기즈칸 맛의 해부 대구회관 칭기즈칸은 대구 스타일에 맞게 개조됐다. 물론 서울보다 더 얼큰했다. 참맛을 내려고 기술을 가진 조리사를 서울에서 데려오기 위해 70년대 초 당시 쌀 50가마를 주었다. 육수가 특히 진했다. 대구라서 그랬다. 육수를 뽑기 위해 사태고기 국물을 뽑고, 사골을 고아 내고, 고추장 육수를 풀 때 한꺼번에 1대 1 정도로 배합한다. 고기를 삶으면 평균 38%가량 양이 줄어든다. 전골 냄비에 육수를 붓고, 거기에 파·양배추·양파·당근·피망·깨·물엿·소금·설탕은 물론 땅콩버터까지 넣었다. 육수로 고추장을 빚고, 숙성된 고추장을 육수에 배합해 얼큰하게 만든다. 등심·양지머리는 물론 소양·곱창까지 넣었다. 이렇게 해서 얼큰하면서도 감칠맛나는 대구형 칭기즈칸이 태어나게 된다. 굵은 우동사리(대구 중앙우동)도 맛의 원천. 이게 육수를 많이 흡수한다. 그래서 오래 끓일수록 국물은 더 걸쭉하다. 본식을 다 먹은 뒤 김, 김치, 파 등을 넣고 밥을 볶아 먹거나 국물에 밥을 비벼먹기도 한다. 대구회관 명맥은 중부경찰서 옆 ‘세운’, 봉산파출소 근처 ‘한일’, 대구백화점 남문 근처 ‘신일’, 들안길 ‘고래성’ 등이 이어받는다. 하지만 모두 사라졌다. 예전에는 전골냄비에서 각자 떠먹었는데 이젠 위생을 생각해 1인용 내열 뚝배기를 사용한다. 매일 아침 디저트용 아이스크림도 직접 만든다. 다른 곳과 달리 계란과 크림파우더만 사용한다. 초창기 스타일 그대로다. 100년 뒤에도 이 메뉴를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053)753-5292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2014.01.24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레스토랑 인테리어 디자인 독보적 영역 개척 이병재씨 어번디자인연구소장
맛있는 건물(Delicious building)? 음식은 맛있는 것에서 ‘멋있는 것’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반면 건물의 경우 되레 멋있는 것에서 맛있는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역발상적 미학’은 분명 시대의 요청이다. 두 맛의 접점에서 맛있는 건물이 탄생할 것 같다. 가끔 식당 건물도 음식이란 생각이다. 곰탕집도 곱창집도 분식집에도 디자인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음식, 따지고 보면 모두 엇비슷하다. 성공한 식당은 음식 말고 ‘플러스 알파’가 있다. 예전에는 음식 하나로 승부가 가능했는데 이젠 아니다. 음식 간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이젠 음식 외적 경쟁요소가 승부처. 그래서 디자인 마케팅과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란 개념이 도출됐다. 손맛 이전에 주인의 ‘가슴 맛’에 밑줄을 긋고 싶다. 성실함, 그리고 친절함, 다음은 깨끗함, 마지막엔 신비로움까지 덧칠할 줄 알아야 된다. 그냥 영수증 같은 표정으로 커피만 극장 매표소 직원처럼 내주는 로드카페와 체 게바라 캐릭터에 라틴 댄스뮤직에 몸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손님을 맞는 로드카페, 당신은 어느 곳의 커피를 선택할 건가. 맛있는 건물은 모르긴 해도 거기에 스토리텔링적 요소가 묻어 있고, 또 재밌어야 한다. 조금은 환상적인 구석, 그리고 놀라움이 건물 곳곳에 박혀 있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한 명의 건축 디자이너를 불러내보자. 이병재 어번디자인연구소장(57). 두툼한 뿔테, 조금은 대리석 같은 차가움, 거기에 햇살이 조금 얼비친다. 냉정함과 살가움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 것이다. 대구시 남구 봉덕동 주택가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주차 공간 확보하기가 너무 힘든 주택가에 숨어 있었다. 입구는 평범하고 무뚝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설정’이었다. 사무실 내부는 미국 맨해튼 소호 지역 뮤지션의 작업실 같다. 낡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가 촛불을 들국화 톤으로 피워낸다. 낡은 LP음반 위에 카트리지를 살포시 올린다. 이 우중충하고 푸석한 골목에서 만난 느닷없는 낯섦, ‘객수감(客愁感)’이 밀려온다. 책장에는 메이저급 인테리어 디자인 관련 잡지가 빼곡하게 꽂혀 있다. 묽은 아메리카노를 드립해 왔다. 아날로그 사운드의 향기와 커피향이 진하게 원무를 춘다. 금세 아프리카 사파리에 혼자 서 있는 나무가 된 기분이다. 그가 클래식·재즈·블루스 곡을 번갈아 들려준다. ‘월면(月面)’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기분이랄까. 그는 섬뜩한 감각을 가진 건축가 겸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대구 수성구 두산오거리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벨라쿠치나’, TBC 옆 프렌치 레스토랑 ‘더 파리스’, 팔공산 파계사 초입 커피숍인 커피명가 ‘휴(休)’, 들안길 일식집 ‘센도리’, 대구와 경산 경계인 경산시 대평동 국내 첫 피규어 전문 박물관인 ‘CW 갤러리’ 등 100여 채의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의 디자인 모토는 자연 같은 인공, 인공 같은 자연이다. 자연의 기운을 가장 심도있게 노출콘트리트 벽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면서도 미학적 내구성은 빼어나다. 20년이 지나도 처음 지은 느낌이 들도록 야물게 짓고 아름다움도 동시에 추구한다. 그는 ‘붕어빵 디자인’은 딱 질색이다. 유행하는 시공방식을 철저히 배격한다는 뜻이다. 2006년 당시 국내 레스토랑 인테리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라벨라쿠치나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기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모르긴 해도 서울에 가도 그렇게 극단적 색채감과 놀라운 소재선택 안목이 돋보이는 레스토랑은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덕분에 그는 그해 4월 디자인 잡지 ‘인테리어’ 커버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반으로 자른 통바위 카운터, 특수제작한 중세풍 빨간 철문, 벨벳 소파, 화산석, 고벽돌, 광섬유 조명, 블랙과 레드가 육감적 균형을 이룬 와인바, 갤러리 같은 오각형 화장실의 전실(前室), LED 장식벽, 반오픈원형룸 소파, 빨간 세면대, 하늘이 보이는 실내 테라스…. 대다수 소재는 지역에서 처음 선보인 것. 손님 스스로 ‘난 영화제 리셉션에 초대받은 명사’란 기분이 들도록 섹시하면서도 모던한 친환경 소재를 매칭시켰다. 상당수 디자이너가 이 스타일을 베껴갔다. 더 파리스에서는 라벨라쿠치나에 고품격 절조를 삽입했다. 하절기 해질녘 서쪽 통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낙조는 그 자체가 완벽한 레드 와인이다. 음식이 맛이 아니라 멋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디자인이 ‘발효제’ 구실을 했다. 파계사 휴를 훑어봤다. 홀은 너무 평화롭고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다. 그러면서 디럭스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여타 소재는 거의 배제시켰다. 눈높이 초장방형 통유리창을 통해 통제된 자연을 사진처럼 감상토록 배려했다. 압권은 홀 중심부를 태극 문양처럼 가로지른 25m S자 스틸 코일커튼. 커튼을 통해 보이는 다른 좌석의 실루엣, 그리고 드문드문 놓여 있는 격자형 원색 소파가 갓 돋아난 죽순 같다. CW갤러리 2층은 레스토랑인데, 근처 남천의 강줄기만 강조하기 위해 3면은 모두 차단하고 한쪽 면만 강쪽으로 틔워놨다. 건물을 둘러싼 자연의 특징, 건물주의 캐릭터, 공간의 사용목적에 대한 교집합을 모르고선 저런 색과 소재의 배치가 어려울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두 차례 초저녁에 시작해서 밥도 건너뛰면서 자정 어름까지 지속됐다. 그는 “평론가는 밑줄에 목숨을 걸지만 진정한 작가는 밑줄이 하나도 없다. 그냥 느낀다. 지식이 나타나면 평론가”라고 말했다. 그에게 무뚝뚝한 경상도 기질을 22세기 버전으로 리모델링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053)473-4200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라벨라쿠치나 중세풍 철문·벨벳 소파 영화제 리셉션장 온 듯 더 파리스 해질녘 서쪽 통유리창 낙조의 운치 완벽 감상 휴 평화롭고 목가적인 내부 S자 스틸 코일커튼 압권 CW 갤러리 남천 강줄기 강조 위해 한쪽면만 강쪽으로 개방 ‘이병재標 건축’을 듣다 -10년 이상 음식 관련 기사를 적어왔는데 갈수록 맛있는 건물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것 같다. “푸드 코너에 건축 디자이너를 초대하는 것도 참 맛있는 발상인 것 같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건물이 재밌어진다. 돈만 퍼붓는다고 멋진 건물이 탄생하는 건 아니다.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감각과 안목이 합쳐졌을 때 최고의 작품이 태어난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난 디자이너, 좋은 디자이너를 만난 클라이언트도 축복이다. 내 돈 갖고 내 건물을 짓는 게 아니고 남의 돈을 갖고 그 집 주인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꿈의 건물을 만들어주는 것, 그게 건축 디자이너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럼 한 도시의 아우라가 변한다.” -자기가 무슨 집을 짓고 싶은지 모르고 무턱대고 최고의 집을 지어달라고 하면 참 답답하겠다. “내 경우는 운이 좋아서 그런지 자기 검열이 확실한 감각파 클라이언트가 찾아온다. 믿고 완전히 맡겨주고 심지어 잘해 달라고 응원까지 해준다. 처음에 어떤 집을 지어달라고 하는 대로 지어주지 않는다. 그대로 지어주면 반드시 나중에 싫어할 확률이 높다. 클라이언트도 정확하게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기분에 의해, 어떤 권유에 의해 휘둘린 상태일 수도 있다. 처음엔 이런 생각을 해도 나와 계속 치열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의 생각이 내 감각을 이해하는 쪽으로 건너오는 것 같다.”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를 압도한 것 같다.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갑이었고 지금은 클라이언트가 갑이다. 시장이 달라진 것이다. 가능하면 디자이너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요즘 뉴욕 맨해튼의 신감각 실내 인테리어를 보면 ‘이거 누가 디자인했지’란 생각이 안 나게 디자이너를 뒤로 빠지게 하는 게 트렌드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려면 엄청난 설득력을 갖고 있어야겠다. “정확하게 봤다. 기본기와 역량이 높을수록 상대가 가진 욕망과 욕심, 야심과 야망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그래야 그를 설득할 수 있다.” -건물이 완성되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도 끝이 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자기가 디자인한 건물이 망하면 내 디자인도 망한 거라고 본다. 이젠 집 따로 음식 따로가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 그럼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그냥 메뉴에 맞는 인테리어를 디자인해야 성공한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치열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디자이너는 자기가 지은 건물의 경영과 마케팅에도 개입할 수밖에 없다. 건물만 알아선 이 바닥에서 성공 못한다. 나중에는 심리학은 물론 경영학까지, 궁극적으로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져야 제대로 된 디자인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무슨 답이 있겠는가.”
20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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